[연중 제1주간 수요일] 열병 (마르 1,29-39)
주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찾아와 부르시자,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1사무 3,1-10.19-20)
그 무렵 1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
2 어느 날 엘리는 잠자리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는 이미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
3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4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5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7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8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20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신다. (마르 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사무3,1-10.19-20)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3~4ㄱ)
사무엘서 상권 3장 3절은 사무엘이 소명받은 시점과 장소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는 본격적으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무엘을 '하느님의 등불', '하느님의 궤', '주님의 성전'이라는 하느님과 연관된 대상물과 더불어 등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무엘서 저자가 타락한 엘리 가문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있지만,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는 사무엘에게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셔서 당신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성소의 등잔대의 불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즉 해가 져서 해가 다시 뜨기 직전까지 켜도록 되어 있었다(탈출25,31-37; 27,31) 따라서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라는 말은 사무엘이 날이 밝아오기 전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무엘 상권 3장 3절은, 앞의 1절과 2절에서 주님의 말씀이 드물고 환시도 자주 없는 어두운 절망의 상황이 표현된 것에 반해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한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아직 포기하시지 않았다는 내면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특히 사무엘 상권 3장 3절의 '아직 ~(아니하니)'에 해당하는 부정 부사 '테렘' (terem)의 사용이 이런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부사는 사무엘 상권 3장 7절의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라는 문구에서 다시 등장하지만, 이 단어는 말씀도 드물고 환시도 자주 없는 암물한 시대의 상황에서 사무엘이 누워있는 장소에는 '아직'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또한 여기서 '하느님의 궤'에 해당하는 '아론 엘로힘'(aron ellohim; the ark of God)이 언급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당시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지성소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성소는 대사제만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한 장소였기에 사무엘이 지성소에서 잘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무엘이 잠잔 장소를 '하느님의 궤'와 관련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궤'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다.
'하느님의 궤'는 십계명의 돌판이 들어 있기 때문에 '계약 궤'(민수10,33) 혹은 '증언 궤'(탈출26,33)라고도 불리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궤에 하느님께서 임재하신다고 믿었으므로, 절기 축제 행진이나 전쟁 때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승리를 기원하면서 항상 '계약 궤'를 앞세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궤를 상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하느님 임재의 상징인 '계약 궤'가 있는 장소에 있었다고 저자가 굳이 밝히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사무엘의 신앙적인 태도를 나타냄과 동시에 앞으로 '하느님의 궤'를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빼앗기고 몰락하게 될 엘리 가문과 사무엘을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사무엘서 상권 3장 3절은 3장 4절부터 시작되는 사무엘의 소명 기사를 알리기 위한 일종의 서곡같은 역할을 한다.
점점 어두워지게 된 눈을 가지고 자기 처소에 누워있는 엘리 사제의 모습이 영적 무능함을 통한 하느님과의 관계 단절과 이스라엘의 몰락을 상징한다면,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고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 머물고 있는 사무엘의 무습은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과 만남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복음(마르1,29~39)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5)
'새벽 아직 캄캄할 때'에 해당하는 '프로이 엔뉘카 리안'(proi ennycha lian; very early in the morning)은 마르코 복음에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전형적인 이중 표현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르코 복음 1장 21절에서 38절까지에서 '낮'(21~31절), '해질녘'(32~34절), '새벽녘'(35~38절)에 이르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하루 일과 시간표를 통해서 예수님의 활동이 잠시도 쉴 틈도 없이 매우 바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새벽'으로 번역된 '프로이'(proi; in the morning)는 유대인의 시간 기준으로 계산하면, 네번째 밤인 새벽 3시부터 새벽 6시 사이의 시간을 말한다.
또한 '아직 캄캄할 때' 혹은 '미명(未明)에'로 번역될 수 있는 '엔뉘카'(ennycha; before day)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시간을 말한다.
이렇게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중적 표현을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편히 쉬는 시간에 깨어서 제일 먼저 기도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이곳을 포함해서 세 번 등장한다.
시간에 있어서 마르코 복음 1장 35절은 밤이 거의 끝나가는 새벽 무렵이고, 마르코 복음 6장 46절에서는 해가 진 이후인 저녁이었고, 마르코 복음 10장 32~42절에서는 한밤중이었다.
또한 모두 혼자 기도하셨거나,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어도 따로 떨어져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그리고 공생활 활동 초기의 갈릴래아 선교, 활동 중간시기, 또는 활동 말기의 수난 이전 등 큰 사건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기도한 것으로 묘사되며,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일수록 더욱 성부 하느님 대전에 열심으로 기도하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함이나 신심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루카18,11.12)나 교훈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성부 하느님과의 은밀한 친교를 통해 자신의 활동의 힘을 얻기 위해서 하는 기도였다(마태6,6).
그리고 '기도하셨다'에 해당하는 '프로세위케토'(proseycheto; prayed)는 원형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형은 과거 사실의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예수님의 기도가 장시간 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29-3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병을 잘 고치는 것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은 전문가로서 하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병을 지배하시는 것은 ‘주님’으로서 하시는 일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루카 4,39).
이 표현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을 더욱 생생하게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열을 일으키는 악령을 꾸짖으셨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 같은 자연도 복종시키는 분이기 때문에(마르 4,39)
주님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복종시켰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믿음은
어떤 백인대장이 처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마태 8,8-9).”
그 백인대장은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병이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런 주님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계시(가르침)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2-3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온갖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신 일이고, 그 자체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은총’으로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치유의 은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7).”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마귀들에게 명령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마귀들이 당신을 알고 있긴 하지만,
당신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이 말할 때에만 진실이 됩니다.
주님으로 믿고 섬기지도 않으면서 그 말을 하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존재이지만, 주님으로 믿고 섬기기는커녕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마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알아도 안 믿으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알아야 할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고 따라야 할 ‘신앙의 대상’입니다.
신학과 성서학 등에 대해서 아무리 잘 알아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잘 아는 것이 아니고, 아무 쓸모없는 공허한 지식일 뿐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은 더 널리, 더 많은 사람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복음은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속 카파르나움에서 머무르시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이미 널리 퍼졌고(마르 1,28),
그래서 사람들이 카파르나움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돌아다니시는 것보다 한곳에 그냥 계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의 성과만 따진다면 그런 생각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착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입니다(마태 18,12).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처럼 일하되,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 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제들과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기본 정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돌아다니셨다는 것과,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병은 몸이 제 역할을 못하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내 몸의 기능들을 방해하는 것은 몸에 있는 병균들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병이 하느님의 생명과 대항하는 악한 영, 곧 마귀의 힘 때문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병자들을 치유할 때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내쫓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열병은 일종의 ‘화병’이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악한 영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곧 치유의 과정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치유를 청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체의 병만이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십니다. 그들이 병으로 겪고 있는 소외감과 상처는 악한 영에 사로잡혀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관계의 상실에서 얻은 정신병과도 같은 것입니다.
현대인은 마음이 혼란하면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침잠하는 피정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의 욕구를 즐깁니다.
참된 쉼은 실컷 먹고, 마시고, 영상물이나 오락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외딴 곳에서’ 하느님과 만나 기도하며 참된 나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받는 칭송보다는, 하느님과 누리는 자유를 찾으셨습니다. 마귀를 내쫓을 수 있는 힘도 바로 이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사람들의 목소리와 우리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세 번째 듣고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지칭하고 위대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도대체 주님의 부르심을 몇 번이나 외면한 뒤 진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