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수요일]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르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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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은 다윗에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며 주님의 환시를 전한다. (2사무 7,4-17)
그 무렵 4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6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7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니던 그 모든 곳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9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10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11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죄를 지으면 사람의 매와 인간의 채찍으로 그를 징벌하겠다.
15 그러나 일찍이 사울에게서 내 자애를 거둔 것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내 자애를 거두지 않겠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17 나탄은 이 모든 말씀과 환시를 다윗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고는, 둘레에 있던 제자들과 열두 제자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뜻을 알려 주신다. (마르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사무7,4-17)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과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6)
사무엘서 하권 7장 6절 이하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출애굽 이후부터 계속하여 천막과 성막에 머무르셨으므로 당장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기셨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현재 돌로 지어질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천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시기 이전부터 영원히 지어질 성전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무엘서 하권 7장 12절, 13절에 나오는 다윗의 몸에서 날 후손은 비단 솔로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서 하권 7장 12절, 13절에 나오는 성전은 '영원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의 몸에서 날 후손은 솔로몬의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 성전도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메시야 왕국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하느님께서 반대하신 것은 곧 이 땅 위에 성전을 지을 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또 한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그가 전쟁에 너무 매여 있었으며,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1역대22,8; 28,3).
이것을 볼 때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일차적으로 부정한 자가 깨끗한 나라를 세울 수 없다는 하느님의 정한 이치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에 세워질 그 성전을 염두에 두시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곳을 명령하실 때에 쉽게 거두어 없앨 수 있는 천막으로 된 성막을 만들도록 명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인간의 욕망은 보다 멋있는 가시적인 성전을 만들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져 가는 연약함을 아시고 하느님께서는 일단 가시적인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다윗과 달리 피로 물들지 않았던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결국 인간이 짓는 성전은 영원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을 사무엘서 하권 7장 12절,13절에서 영원한 성전을 언급하시면서 암시해 주신다.
'천막과 성막 안에서 있으면서 옮겨 다녔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지금 시점에서 성전 건축이 불필요함을 밝히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출애굽 이후 계속 천막에 머무시며 일하셨으므로 굳이 성전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옮겨 다녔다'로 번역된 '와에헤예 미트할레크'(waeheye mithhallek)에서 '와에헤예'(waeheye)는 접속사 '와우'(wau; and)와 '~이다'라는 뜻의 '하야'(haya) 동사의 미완료형 1인칭이 결합된 것이며, '미트할레크'(mithhallek)는 '걸어다니다'라는 뜻의 '할라크'(hallak)동사의 재귀형 분사로서 '이리저리 다니다', '옮겨 다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야'(haya) 동사는 분사의 진행 상황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쓰인 것이므로 '와에헤예 미트할레크'(waeheye mithhallek)는 '그리고 내가 지속적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돌아다녔다' 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레위기 26장 11절에서 "나는 너희 가운데에 나의 거처를 정하고"라고 하셨는데, 레위기 26장 12절에서 "나는 너희와 함께 살아가면서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어느 한 곳에 제한되어 임재해 계시는 분이 아니심을 분명히 하셨다.
한편 '천막과 성막 안에서만 있으면서'로 번역된 '뻬오헬 우베미쉬칸'(beohel ubemishikan)은 중언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뻬오헬'(beohel)은 '천막과'(in a tent)로, '우베미쉬칸'(ubemishikan)은 '성막 안에만 있으면서'(and in a tabernacle)로 번역되었다.
중언법으로 보면, '성막'으로 번역된 '거처'라는 뜻의 '미쉬칸'(mishikan)을 형용사적으로 번역할 수 있으므로 '뻬오헬 우베미쉬칸'(beohel ubemishikan)은 '머무시는 천막'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중언법으로 보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이스라엘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 천막에서 천막으로, 성막에서 성막으로 옮겨 다니며 지내왔다." (1역대 17,5)에 나오는 '천막에서 천막으로, 성막에서 성막으로'의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는 '옮겨다니며 지내왔다'는 뜻도 있으며, 시편 78장 60절을 볼 때에 인간이 세운 천막에 영속적으로 계시지 않고 그곳을 '버리셨다', '떠나셨다'는 뉘앙스도 가진다. 따라서 본문을 의역하면 '내가 천막과 성막(거처)을 옮기면서 두루 행하였다' 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낸 이후로 오늘까지 그들을 줄곧 인도해 왔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 여정에서 이스라엘 자신들이 하느님의 천막을 짊어지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천막 안이 아니라 이스라엘 위에 계셔서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고 오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사무엘서 하권 7장 5절의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본다면, 다윗이 지금 자신이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서 머무실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실상은 하느님께서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다윗의 집을 건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집이 견고하게 세워지는 솔로몬의 때까지 성전 짓는 것을 보류하신 것이다.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마르4,1~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20)
마르코 복음 4장 3~8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씨'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단어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코 복음 4장 3절에도 '씨 뿌리다'라는 동사만 나오며, '씨'라는 명사는 없다.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같은 자루에서 나온 '씨'의 '동질성'(homogeneity)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즉 '씨 뿌리는 사람'이 '예수님'을 상징하고, 뿌려진 '씨'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천국의 말씀'을 상징한다면(마르4,14; 마태13,19), 같은 선포자이신 예수님께서 전한 동일한 말씀들이 어떤 이에게는 열매를 맺고, 어떤 이에게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씨'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 농사법과 팔레스티나의 농사법이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이 비유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우리는 먼저 밭을 경작하고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려놓고 밭을 고른다. 그러니까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씨가 있는 것이다.
우선 새들이 씨를 먹어버린 일차적인 이유는 씨가 길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씨가 열매를 맺기는 커녕 바로 먹혀버린 일차적인 책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5절에서 '새들'이 상징하는 '사탄'에게 있다고 하기보다는, 길의 밭이 상징하는 굳어진 인간의 마음에 있다.
그리고 '흙이 많지 않은 돌밭'(마르4,5)에서 '있지 않은'에 해당하는 '우크 에이켄'(ouk eichen; it did not have)이 미완료 과거 시제이므로, 흙이 거의 없는 돌밭 같은 불모지의 상태가 이전부터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을 해설하는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는 '많은'을 의미하는 '폴렌'(polen; much)이라는 단어가 없이 '돌밭'에 해당하는 '페트로데스'(petrodes; stony ground; rocky place)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흙이 거의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죽은 이유가 나오는데, '뿌리가 없어서'이다. 돌과 바위투성이 땅에서 물은 금방 흘러 가버리거나 말라서 습기가 없었고, 아울러 돌과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어서 죽은 것이다. 한편, 마르코 복음 4장 7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마르코 복음 4장 4절에 기록된 '길에 떨어진 씨'는 발아도 못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고, 마르코 복음 4장 5절에 기록된 '돌밭에 떨어진 씨'는 겨우 뿌리만 내린 채 말라 죽은데 비해, 마르코 복음 4장 6절에 기록된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랐다.
그래서 길보다는 돌밭이, 돌밭보다는 가시덤불이 더 나은 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이 잘못된 판단임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좋은 밭이란 열매를 맺는 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7절의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라는 표현은 가시덤불로 둘러싸인 밭에 대한 결론이면서, 동시에 앞에 이미 언급된 두 밭에 대한 결론이다.
마르코 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당신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뿐만 아니라 이미 선포된 여러 가지 비유들의 뜻을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 4장 11~12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서 6장 9~10절의 말씀이
'저 바깥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저 바깥 사람들'은 오직 기적과 치유에만 목적을 두고 찾아왔다가, 정작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자 아무런 미련없이 돌아선 일종의 '불신과 배교의 무리'이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 4장 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길을 봉쇄하신다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목적으로 나아갔다가 사적인 만족을 얻지 못하면 쉽게 돌아서 버리는 '불신과 배교의 무리'를 그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구원의 길을 원천 봉쇄하실만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마태7,6; 히브6,5.6).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라는 문제도 아니고, 어느 정도까지 자랐는가도 아니며, 또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도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열매를 원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의 씨가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를 좋은 신앙인으로 여기시는 것이다(마르4,28; 마태7,20).
마르코 복음 4장 20절에서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의 '받아들여'에 해당하는 '파라데콘타이'(paradechontai; receive; accept)의 원형 '파라데코마이'(paradechomai)로서 '인정하다'(사도16,21; 1티모5,19), '환영하다'(사도15,4; 히브12,6)라는 뜻이다.
즉 복음을 듣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성을 인정하고 깊이 받아들여야함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받아들임은, 마르코 복음 4장 16절에 나오는 것처럼, 돌밭이 순간적인 기쁨에 도취되어 받는 것과는 달리, 생명을 잃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소유와 내주'로서의 받아들임을 말한다.
마르코 복음 4장 16절의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에서 사용된 '받는다'에 해당하는 '람바노'(lambano)는 일시적 소유물을 취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에, 마르코 복음 4장 20절의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환영하는'의 의미를 지닌 '파라데코마이'(paradechomai)와는 다른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우리 자신이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 쉽게 망각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명처럼 여기고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만이 '좋은 땅'이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 희망을 밝히는 마음 밭 ♣
서기 27년경부터 예수님의 활약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열 제자와 다른 제자들 그리고 일부 군중들은 메시아를 알아보고 그분의 가르침과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릅니다. 또한 영적인 것과 무관하게 기적과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는 어정쩡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들과 헤로데당 사람들은 예수님께 적대감을 느껴 그분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경 말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적대자들의 방해와 군중의 무관심으로 인기를 잃어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는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만이 그분 뒤를 따릅니다. 제자들마저도 실패한 듯 보이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시한 ‘저 바깥사람들’(4,11)에게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들어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십니다. 그분은 무지와 무관심, 반대와 박해를 무릅쓰고 끝까지 희망의 씨를 뿌릴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나와 이 사회, 신앙공동체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우리는 그 씨앗이 뿌려져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꽃피우는 마음 밭을 지니고 있습니까? 오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말씀의 씨앗은 어떤 땅이든 다 뿌려집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깊이 새기지 않고 자신을 탐욕의 대상으로 맡겨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4,15). 또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닥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마는 이들도 있습니다(4,16-17).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 때문에(1요한 2,16)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4,18-19).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말씀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환난 중에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 걱정과 유혹과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는 좋은 땅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말씀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주님의 영 안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적대자들이 지녔던 편견과 선택받은 자신들만 구원되리라 믿는 안일함과 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잘 준비되고 너그러우며 순수한가에 따라 풍부한 열매를 맺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고통을 겪고 탐욕에 사로잡히며 실패를 경험한다 하여도 그런 황폐한 내 마음 밭에도 어김없이 사랑의 씨앗, 생명의 씨앗을 뿌려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죄까지도 용서해주시는 하느님 눈에는 쓸모없는 것이나 의미없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희망의 하느님을 갈망하며 고통과 시련 중이나, 앞날이 막막할 때에도 주님께서 뿌려주시는 말씀의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마음 밭을 가꾸는 넉넉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마르 4,3-8).”
우리에게는
옛날 이스라엘의 농사법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좋은
땅’으로 변화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할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은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예외적으로
‘좋은 땅’이었던 사람이 몇 명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좋은 땅이 아닌 황무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마르 1,15).
이 세상은 ‘회개’를 해야 하는 세상, 즉 좋은 땅이 아닌 세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회개부터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8-79).”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세상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즉 싹이 날 수도 없고 자랄 수도 없는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황무지를 개간해서 좋은 땅으로 만드시고,
그 좋은 땅에 말씀의 씨를 뿌리신 일입니다.
(‘회개’는 황무지가 좋은 땅으로 변화되는 일이고,
‘복음을 믿는 것’은 말씀의 씨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황무지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말씀의 씨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다음과 같이 바꿔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셨는데, 어떤 사람은 길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돌밭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가시덤불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길,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길, 돌밭, 가시덤불인 줄 알면서도 씨를 뿌렸다면,
그렇다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씨를 뿌린 사람 쪽의 책임이지
길, 돌밭, 가시덤불 쪽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은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긴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마르 4,15).”
‘좋은 땅’이었는데 ‘길’로 바뀐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배반자 유다입니다.
그는 분명히 처음에 사도로 뽑힐 때에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좋은 땅이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뽑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사탄이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이스카리옷이라고 하는 유다에게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함께 의논하였다(루카 22,3-4).”
예수님께서는 ‘돌밭’은
환난과 박해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르 4,16-17).”
‘좋은 땅’에서 ‘돌밭’으로 바뀐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실 정도로(마태 16,18-19)
‘좋은 땅’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르 14,66-72).
그것은 환난과 박해가 두려워서 걸려 넘어진 일입니다.
(반석이었던 바위가 돌밭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덤불’은 세속적인 걱정, 유혹, 욕심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르 4,18-19).”
‘좋은 땅’에서 ‘가시덤불’로 바뀐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데마스’입니다.
데마스라는 사람은 루카와 함께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였고,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입니다(콜로 4,14; 필레 24).
‘좋은 땅’이었으니까 바오로 사도가 협력자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티모테오 2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 곁을 떠났다는 말이 나옵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2티모 4,10)”
그는 세속 생활을 더 좋아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바로 회개하고 좋은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좋은 땅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회개하면 좋은 땅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은 좋은 땅이더라도 나쁜 땅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좋은 땅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나쁜 땅에서 좋은 땅으로 변화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계속 좋은 땅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한 번에 완성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콜로 2,6-7).”
송영진 모세 신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농경 사회였던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이 익숙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뿌려진 씨앗들이 떨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익숙하게 본 농부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자라나는 환경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마음 밭은 하느님의 말씀인 씨앗이 자라나는 우리의 다양한 상황들과 비슷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아예 듣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 말씀을 들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사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좋은 땅에서 말씀의 힘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꼭 집어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내 안에서도 얄팍하게 네 가지 부류를 넘나드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편견에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약속하신 땅을 후손에게 주시며, 다윗 임금에게 축복을 내리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이 지닌 창조와 해방의 힘을 여전히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삶에 지쳐서,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고 살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씨앗을 우리에게 뿌려 주십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성경 읽기에서, 양심의 소리로, 때로는 훌륭한 그리스도인 동료들의 삶을 통해서도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마음만 열면 언제든지 우리를 품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