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간 토요일]호수 (마르 4,35-41)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은 일을 두고 재앙을 예고하시자, 다윗은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 (2사무 12,1-7ㄷ.10-17)
그 무렵 1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2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3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4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5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6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7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겠다.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12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할 것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14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15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16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
17 그의 궁 원로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거센 돌풍을 만나 스승을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신다.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12,1-7ㄷ.10-17)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0)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 및 범죄의 내용을 지적하신 후, 사무엘서 하권 12장 10~12절에서는 이같은 흉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다윗에게 임할 엄중한 징계를 예언하신다.
그래서 주의를 환기시킬 뿐 아니라 과거와 대조되는 이 시점을 가리키는 '앗타'(atha; '이제'; now)라는 부사를 가지고 시작하면서 그 징계가 엄중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로 타쑤르'(lo thasur)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로'(lo) + 미완료 구문'으로서 다윗이 이 징계를 영원히 안고 살아야만 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음이 항상 그 가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생존 당시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밧 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들이 죽었으며(2사무12,16~23), 다윗의 딸 타마르가 다윗의 장자 암몬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으로(2사무13,1~22)인해서 타마르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였으며(2사무13,23~29), 압살롬은 부친 다윗에게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하는 등 죽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2사무15,1~18; 18,9~15).
그러나 '영원히'에 해당하는 '아드 올람'(ad ollam)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는 다윗 당대로만 그치지 않았다. 즉 다윗 사후 그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위 찬탈을 노리다가 동생 솔로몬에 의해 처형되었고(1열왕2,1-11),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그뿐 아니라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두 왕국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다가 결국 바빌론과 아시리아에 의해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에 보내신 징계의 칼부림은 다윗 자신이 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칼에 대한 보응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다윗은 자신이 심은 죄악의 열매를 거두어야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시는데 그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심으로써 악의 씨를 뿌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셨다(갈라6,7).
'네가 나를 무시하고 ~ 때문이다'
앞의 사무엘서 상권 12장 10절 전반절에 언급된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공의의 심판의 근거를 설명하는 후반절은, 이유의 접속사 '키'(ki)뿐만 아니라 사무엘서 하권 12장 6절에서 다윗이 부자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문장에도 등장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에케브'(eqeb)를 사용하여 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다윗은 그 비유 속의 부자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가혹한 일을 행했기 때문에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한다고 말했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자신의 입으로 부자에 대해서 엄중한 심판의 선고를 한 다윗은, 동일한 근거에서 내려지는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사무엘서 하권 12장 9절에서 이미 사용된 '무시하고'라는 표현을 여기서 다시 한번 사용하여('베지타니'; bezithani; because you dispised me),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근본 동기가 바로 당신을 무시하는데 있음을 강조하신다.
물론 다윗의 범죄는 인간의 윤리 기준에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범죄의 동기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경멸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했다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마르4,35~41)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9~41)
'꾸짖으시고'로 번역된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는 예수님을 주어로 하는 경우에 베드로를 향해서(마르8,33), 더러운 영을 향해서(마르1,25; 9,25), 열병에 대해서(루카4,39), 그리고 여기서는 바람을 향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우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 인간과 영계와 질병에 대해서까지 완전한 통제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사탄의 권세가 미치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원 사업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를 꾸짖으셨으며, 질병과 부마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악령들을 꾸짖으셨고,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막는 풍랑을 꾸짖으셨다.
이처럼 '꾸짖는 일'은 예수님의 개인적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습관적으로 표출된 감정 폭발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행하신, 권위있는 활동의 일종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희생 제사를 바치며 달래거나 겁을 주는 방법이 아닌, 권위있는 말씀으로 꾸짖는 방법을 이용하셨다.
한편, '바람'과 '호수'는 특별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람'과 '호수'가 동시에 등장하는 점이나 마르코 복음 4장 39절 후반절에서 호수더러 잠잠하라고 했는데,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점을 보면 그렇다.
구약 성경에서 '호수' 또는 '바다'는 욥기 38장 8~11절, 예레미야서 5장 22절에서 태고의 혼돈을 나타내며, 시편 69장 2절이하와 이사야서 43장 2절에서는 의인이 당하는 시련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이 타신 배를 삼키고 그들을 죽이려 하는 호수를 굴복시키신 것은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깨뜨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39절의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페피모소'(pephimoso; be still)의 원형 '피모오'(phimoo)는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 분사 '페피모소'(pephimoso)는 그리스 문학의 이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령 제압을 위한 문구로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루카가 기록하지 않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생생하게 기록하여 예수님 활동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부르짖음을 듣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는 역사는 오로지 주 하느님께 돌려지는 구약적 배경을 갖는다(시편107,29.30).
그리고 마르코 복음 4장 41절의 '복종하는가?'에 해당하는 '휘파쿠에이'(hypakouei; obey)의 원형은 '휘파쿠오'(hypakouo)인데, 여기서는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으로 쓰였고, 어떤 곳에서는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형인 '휘파쿠우신'(hypakouousin)이 쓰였다.
복수로 쓰인 것은 '바람과 호수'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풍랑의 원인을 여러가지 자연적인 요소들로 간주했기 때문이고, 단수로 쓰인 것은 풍랑의 원인을 한 위격 또는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자연은 본래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흉폭해져서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자연을 악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타락한 자연, 사탄의 세력에 의해 조종받는 자연도 이 모든 세상을 재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믿음의 힘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믿음이 없어 마음이 무너지면 이어 몸도 무너집니다. 어제 신문 건강 란에서 ‘감기 달고 사는 당신, '문제는 면역력’
이란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몸의 면역력에 앞서 마음의 면역력인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믿음과 마음의 면역력은 함께 갑니다. 마음의 면역력인 믿음이 좋아야 몸도 건강합니다. 불신불립(不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믿음은 영혼의 빛과 같아 믿음이 없어 마음이 어둬지면 곧 삶은 혼란하고 복잡해집니다.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믿음 없어 마음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어둡고 혼란해 질 때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자 보이지 않은 실체들의 확증이며 우리가 딛고 있는 삶의 발판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믿음입니다.
항구한 믿음의 표지는 나무들입니다. 늘 언제나 그 자리에 깊이 뿌리내린 정주의 나무들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나무처럼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나그네며 이방인으로 살았던 아브라함은 언제 어디서든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께 뿌리내린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늘 본향이신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정주의 삶일 때 비로소 허무와 무의미의 삶에서 벗어납니다. 언제 어디서든 안정과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을 때 비로소 복된 삶이며 복된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과 예수님의 충만한 믿음은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믿음의 사람들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인생 폭풍우 속에서도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주변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합니다. 믿음의 힘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 기적 같은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 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은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의 믿음 부족을 질책하는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 부족입니다. 믿음 부족에서 파생되는 온갖 안팎의 풍랑이요,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의 믿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할 때 언제 어디서나 안정과 평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약한 믿음을 튼튼히 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분이시네.”(애가3,2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야의 아내를 얻으려고 모략을 하고, 하느님 앞에 죄를 지은 다윗 임금이 나탄 예언자 앞에 섭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가족과도 같았던 암양을 잡아 자기 손님을 대접한 어떤 부자의 만행을 들은 다윗이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분노할 때,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는 덮고 정의의 위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들은 다윗은 주저앉아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다윗 임금의 모습 속에서 그가 왜 하느님의 축복과 징벌을 받는지 일깨워 주는 일화입니다. 임금으로서 가진 권력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다윗이 욕망과 교만의 늪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나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 임금조차도 하느님 앞에 죄인일 뿐이라는 인간 운명의 단면을 엿보게 해 줍니다.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도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태평하게 주무시는 예수님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빛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놀라며 두려움에 빠집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나 나탄 예언자 앞에서 죄로 발가벗긴 다윗 임금은 세상에서 수없이 만나는 풍파들 앞에 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죄의식과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질책을 듣고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 용서를 빌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