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간 목요일]열두 제자 (마르 6,7-13)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1열왕 2,1-4.10-12)
1 다윗은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일렀다.
2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3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4 또한 주님께서 나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
10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
11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
12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앉자, 그의 왕권이 튼튼해졌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자,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 준다. (마르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연중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1열왕2,1-4.10-12)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3)
열왕기 상권 2장 3-4절까지는 솔로몬이 사나이답게 굳건한 기개를 가지고 신정(神政) 왕국의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대하여 행해야 할 일들을 밝히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명령을'로 번역된 '미쉬메레트'(mishimereth)는 '책임'(일)(민수1,53), '임무'(민수3,7)라는 뜻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본문처럼 '지키다'라는 뜻의 동사 '샤마르'(shamar)와 함께 쓰여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복무', '직무', '임무'나 '책임'을 수행하였음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레위8,35; 민수1,53; 3,7; 8,25.26).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네 주 하느님의 직무를 지켜라'이다. 이것은 임금의 직분이 사제나 레위인의 직분처럼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왕직이 하느님께 대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왕직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본질로 하는 다른 나라들의 왕직과는 다르게 하느님께 대한 책임 수행을 일차적 직무로 하여, 임금으로서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하느님께 대한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신정(神政) 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일이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본문에 나오는 유언을 앞세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다윗이 솔로몬에게 교훈한 이스라엘의 왕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비결은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모세 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에서 '지켜라'는 말은 '리쉬모르'(lishimor; to keep)인데, '파수꾼이 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본래 사제나 레위인들의 임무와 관련된 표현인데(레위8,35; 18,30), 다윗은 지금 주님을 대리하는 통치자로 세워지는 솔로몬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정(神政)왕국인 이스라엘의 임금이 지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임무이다. 여기서 '규정'(huqqa; 후크카; statute; decree)은 법의 세부 규정을,
'계명'(mitswah; 미츠와; command; commandment)은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사항들을, '법규'(mishipat; 미쉬파트; law; judgement)는 징벌이 내포되어 있는 객관적인 법의 판결들과 조례들을, 그리고 '증언'(eduth; 에두트; testimony; requirement)은 하느님의 신성한 선언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이 용어들은 각기 다른 대상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용어들은 유사한 어휘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의미를 강조하는 증언법적인 표현으로서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지칭한다(신명5,31; 8,11; 시편119).
그리고 원문에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3인칭 대명사가 붙어 있어서 '그분의 규정, 그분의 계명, 그분의 법규, 그분의 증언'으로 되어 있으며, 이 모두가 다 그분의 것 즉 하느님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이 하느님이 어떠하심을 가장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을 바로 섬기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리게 하며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그분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다윗이 말하는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바로 '모세 법'이다. '법', '율법'에 해당하는 '토라'(thorah)는 일차적으로 '교훈',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명령이었다.
이 '토라'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 모든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참으로 인생의 안전한 길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축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신명8장).
과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의 성공 여부는 하느님의 '토라'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결정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성공와 실패 여부도 솔로몬의 '토라'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모세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순종과 불순종의 길을 제시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했듯이(신명30,15-20) 다윗도 동일한 선택의 길을 솔로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네가 ~ 성공할 것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주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제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 솔로몬에게 내리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성공할 것이다'에 해당하는 '타스킬'(thaskil; you may prosper)은 '사칼'(sakal)의 사역형으로서 '번성하다', '형통하다', '성공하다'(2열왕18,7)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동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무조건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고난 혹은 시련 다음에 오는 궁극적 성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성공은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순종에 따른 축복이며(신명28,1-14; 여호1,7.8; 루카10,28), 모든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축복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고통을 감수한 아브라함(히브11,17), 정결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감옥에 가야 했던 요셉(창세39,7-20),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기름부음 받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1사무26,9-10)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며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던 다윗 등 모두가 고난을 통해 주어지는 이러한 궁극적 성공을 경험했던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원문은 '에트 콜 아셰르 타아세'(eth kol asher thaase; in all you do)인데, 직역하면 '네가 행하는 모든 것' 이다. 그리고 '하든지'에 해당하는 '타아세'(thaase)의 원형 '아사'(asa)는 '행하다', '실행하다'는 뜻 뿐만 아니라 '만들다', '(재산을)얻다', '(열매를)맺다'라는 뜻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재산을 얻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 삶의 전영역에서의 활동, 범죄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어디로 가든지'
원문은 '웨에트 콜 아셰르 티프네 샴'(weeth kol asher thipneh sham; and wherever you go)이다. 여기서 '가든지'에 해당하는 '티프네'(thipneh)는 '돌이키다', '떠나다', '나오다'는 뜻을 가진 '파나'(panah)의 미완료형이다. 그리고 부사 '샴'(sham)은 새성경에서 번역은 안되었지만 '거기서'(there)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 '티프네'(thipneh)와 '샴'(sham)이 본문처럼 함께 사용되면 '거기를 향해 돌이키다', '거기를 지향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고 네가 돌이켜서 지향하는 모든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 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네가 무엇을 하든지'와 더불어 삶의 모든 행위와 인생의 방향 등 삶 전체를 가리키는 증언적 표현으로써,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자가 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중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마르6,7-13)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7)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어 실제로 파견하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일하게 하신 마태오 복음 6장 7절부터 13절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기 활동이 끝나고 후기 갈릴래아 활동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신 이후에 복음 전파와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복음의 봉사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심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복음을 전하는 스승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6장 7-13절에 나오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어 복음 전파자에게 필요한 교훈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부르시어'에 해당되는 '프로스칼레이타이'(proskaleitai; he called to him)의 원형 '프로스칼레오마이'(proskaleomai)는 '~을 향하여', 혹은 '~을 위하여'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프로스'(pros)와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칼레오'(kaleo)의 합성어로서 '~로 초대하다' 혹은'~을 위하여 부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천국 복음의 봉사자로 파견하기 위하여 부르셨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로 번역된 '아포스텔레인'(apostellein; sent out)의 원형 '아포스텔로'(apostello)는 '~로부터'라는 뜻으로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분리되어 보내다'는 문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에는 '특별한 사명을 부여하여 파견한다'는 뜻을 지닌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따로 분리하여 복음 전파의 봉사자로 파견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그리스도의 사도를 의미한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에 해당하는 '뒤오 뒤오'(dyo dyo; two by two; '둘씩 둘씩')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호간에 도움을 주는 협력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복음을 듣는 자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한 벙법이기도 하다.
또한 6장 11절에서 등장하는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증인의 최소 인원을 확보하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둘'은 증인의 수였으며, '둘'의 증언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민수35,30; 신명17,6; 마태18,16). 이 둘씩 짝지어 파견되는 전통은 초대 교회 선교 여행에서도 계속하여 이어져 갔다(사도15,22).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문맥으로 보아 이 권한(권세)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령을 내쫓고 거룩함을 회복시키는 권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마귀(악령)의 특징을 더럽다고 규정하는데, '더러운'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톤'(akatharton; unclean)의 원형 '아카타르토스'(akathar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정결하게 하다', '속죄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타이로'(kathairo)의 합성어로서 '정결하지 않은', '속죄되지 않은', ' 불순한' 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성(神性)과 접할 수 없는, 즉 우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뜻한다(사도10,28; 1코린7,14).
특히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쫓아내야 할 '더러운 영들'은 단순히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는 악령(마귀)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악령의 활동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악하고 더러운 모든 영적 현상과 인간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디두'(edidou; gave)는 원형 '디도미'(didomi)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12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그러한 권한(권세)으르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요청해야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부여받아 사용해야 함을 드러낸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내리신 지시들을
산상 설교의 참 행복 선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명령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가난’은 사도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꼭 실천해야 할 필수 사항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려면 복음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세속적으로는(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러면서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좋은 예가 나옵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사도 3,3-8ㄱ).”
베드로 사도는 물질적으로는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가득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하늘나라는 ‘돈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말씀의 실천’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예수님)만 섬기는 사람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또는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인데, 이 명령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사심(私心) 없이 일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헛된 기복신앙에 빠지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1-13).”
여기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
라는 지시가 더 있습니다.
이 명령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선교활동은 예수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활동입니다.
평화는 평화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선교활동을 한다면서 분열과 갈등만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텐데,
이 말씀은 당신이 싸움을 일으키려고 오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 평화를 얻으려면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싸움을 걸어와도
신앙인은 사랑과 평화로만 대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역시 예수님의 평화를 증언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박해는 나의 신앙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 주는 일이 되고,
또 나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고
약속하셨는데,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고,
안 믿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먼지를 털어 버리는 행동은 심판과 멸망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확정된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충고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이런 선교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이기주의,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지요. 대신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며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방해, 무시 등도 감수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여도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점을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때로는 함께 활동하는 이들과 의견 차이가 생기고, 갈등마저 심해집니다. 그러니 선교 활동을 하는 이는 모든 이에게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하지요(1코린 9,22 참조).
이를 위해 자신을 꾸준히 단련시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만 하지요. 아울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끊임없이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만이, 우리가 하느님을 보는 눈이, 그리고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까지도 다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