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봉헌 축일] 봉헌 (루카 2,22-40)

2018. 2. 2. 오전 5:3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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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2.




[주님 봉헌 축일] 봉헌 (루카 2,22-40)





말라키 예언자는, 너희가 찾던 주님께서 홀연히 성전으로 오시리라고 한다. (말라 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치자, 시메온은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루카 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목요일 주님 봉헌 축일제1독서(말라3,1-4)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1ㄷ,ㄹ)


하느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고대하던 주님이 홀연히 그의 성전에 올 것을 예고하신다. 여기서 '주님'과 '계약의 사자'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 '계약의 사자'가 동의어로 됨으로써, 계약의 사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주 하느님은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이 성립된다. 이같은 사실은 요한 복음 1장 1절필리피서간 2장 6절에서도  유사하게 제시되지만, 삼위일체의 진리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계약의 사자'에 해당하는 '우말르아크 합베리트'(umallak habberith;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로 표현된 것은 그가 성부 하느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자, 곧 하느님의 계약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약이란 옛 시나이산 계약(옛 계약; 구약; 舊約)과 대비되는 '새 계약'(the new covenant)이다. 새 계약(신약; 新約)에 대해서는 과거 이사야 예언자(이사55,3; 61,8), 예레미야 예언자(예레31,31-34), 에제키엘 예언자(에제16,62; 37,26)등에 의해 이미 예언된 적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 자신이 흘리신 피가 바로 새 계약을 이루시는 피임을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선언하셨다(마태26,28).


그런 점에서 말라기 예언서 1장 1절ㄷ하느님께서 자신의 무죄한 피를 흘려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를 새 계약으로 일치시킬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예언한 것임에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너희가 찾던'에 해당하는 '앗템 메바크쉼'(athem mebaqshim)히브리어에서 사용을 안해도 의미가 통하는 2인칭 복수 대명사'구하다', '추구하다', '찾다' 등의 의미를 지닌 '빠케쉬'(bakesh) 동사의 강조 분사형이 사용되어, 직역하면 '바로 너희들이 간절히 구하고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너희가 좋아하는'에 해당하는 '앗템 하페침'(athem hapetsim)'바로 너희가 몹시 기뻐하는'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사실 동의적 대구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메시야를 갈망한 것은 메시야가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영광을 누리는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 하느님께서 계약의 사자, 메시야가 '홀연히'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실 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준비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피트옴'(pithom)'갑자가', '놀랍게', '예기치 않은 때에'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누구도 알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온다는 의미,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시야가 오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나태하여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장차 메시야의 재림 때의 상황과도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하느님께서는 그 계약의 사자'자기 성전'에 오실 것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당하는 '헤칼로'(hekallo)'그의 성전'(his temple)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의 궁전'(his palace)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머무는 처소인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전이 바로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탄생하신 지 여드레 만에 성전을 방문한 사건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지 40일 만에 성전에서 봉헌되었고(루카2,22-39), 마지막 수난 주간이 시작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던(마태21,12-17)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헀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메시야가 오시는 성전을 '그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해서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자리, 곧 메시야께서 당신 스스로 자원하여 이루실 구원사업으로 말미암아 세우실 당신의 몸인 교회,  당신의 인류구원사업이 계승되는 성사적인 인간 집단인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공동체 한 가운데 영신적 임금으로 좌정하셔서 통치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3)

'깨끗하게 하고' 해당하는 '웨티하르'(yethihar)의 원형 '타헤르'(thaher)어원상 육체적, 도덕적으로 불결하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상태를 나타낸다 (창세35,2; 레위12,7; 민수8,21; 에례33.8). 이 단어는 구약에서 78회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정결례 의식주로 다루는 레위기에서 무려 35회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제사와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합당한 백성들로 세우기 위해서 그 선택한 백성들을 영적,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거룩하게 한다는 의미, 성화(聖化)의  의미 사용되었다.


그런데 말라기는 이러한 사실을 보다 힘주어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마치 금과 은을 정련하듯이 그들을 정련하신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정련하여'(단련,연단)에 해당하는 '웨직자크'(yeziqaq)의 원형 '자카크'(zaqaq)광석을 정련할 때에 불순물을 용해시켜 버리고 순수한 금속만을 추출해 얻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다(욥28,1).

여기서 이 단어는 메시아께서 레위 자손으로 표현된 신약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거룩한 고난, 시련과 환난 등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불로 그들의 죄악을 사를 때에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들의 인격의 모난 부분을 깎아 내고 연마할 때 아픔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은 정금같은 순수한 면모를 갖춘 참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라 일컬음을 받기에 합당한 거룩한 신앙의 인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욥23,10; 야고 1,4)  


특별히 오늘 2월 2일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봉헌 생활의 날'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고 있기에,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봉사자들의 거룩한 정결, 봉헌된 정결, 성결(聖潔)에 대한 가르침이라 생각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묵상해 보았다.   









 주님 봉헌 축일 복음(루카2,22~40)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23~24)


루카 복음 2장 23절은 탈출기 13장 2절, 12절, 15절에 나타나는 내용인데, 복합적으로 인용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이 맏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규정 및 관습의 시작은 출애굽 때 마지막 재앙이었던 이집트의 맏아들 재앙때부터였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맏배 및 맏아들을 죽일 때 히브리인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상인방에 바름으로써 재앙을 면했고, 그 결과 히브리인들의 모든 처음 난 맏배 및 맏아들은 하느님의 것으로 여기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져야 했다. 그 가운데 동물의 처음 난 맏배는 다 희생 제물로 주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사람의 맏아들은 다른 것으로 대속하면 되었다(탈출13,13.15).


이것이 후에는 사람의 맏아들 대신에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민수3,41), 레위 지파는 개인적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오로지 주 하느님만을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여야 했다. 또한 인구 조사시 레위인의 숫자는 22,000명이었고, 다른 모든 지파의 맏아들의 숫자는 22,273명이어서 레위인으로 대속하지 못한 273명에 대해서는 5세겔의 성전세로 대신 속죄하게 하였다(민수3,43.46.47).


그러나 그 후 5세겔의 대속 값은 모든 맏아들에게 적용되었고, 이스라엘 맏아들들은 이것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된 자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의 구원을 베푸신 주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께 대한 봉헌과 헌신과 섬김을 다짐하는 율법적 관례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기를~주님께 바쳤다'(22)

이 구절은 한글 새 성경에서는 루카 복음 2장 22절과 23절을 중첩되게 번역했으나, 원문은 22절의 맨 끝에 나온다. '아기를 바치고'에 해당하는 '파라스테사이'(parastesai; to present him)의 원형 '파리스테미'(paristemi)'곁에 두다'(to place beside),'보이다'(to show), '성별하여 드리다'(to consecrate)의 뜻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 바치는 것'맏아들을 하느님께 드리고, 대신 속죄를 위해 대속 값을 치르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민수3,13; 18,15.16).


그러니까 무죄하신 예수님 개인으로는 속죄 값을 바칠 필요가 없었지만, 그 부모의 입장에서는 모든 맏아들에게 규정된 그 속죄 값의 규정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속죄 값은 예수님께서 장차 중재자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사무엘의 경우처럼(1사무1,11.22.28)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짐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자리에까지 나아감을 뜻하고 있다.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이것들은 출산 후 산모가 지켜야 할 정결례에 바쳐야 할 제물이다(레위12,6~8). 나자렛 성 가정은 가난하기 때문에 일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29)

루카 복음 2장 29절부터 32절까지는 일반적으로 '시메온의 고별 노래'라고 불린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데스포타'(despota; Sovereign Lord)기본형 '데스포테스'(despotes)의 호격이다.

'데스포테스'(despotes)'주인', '소유주'라는 뜻인데, 동일한 의미로 성경에서 749회나 사용된 '퀴리오스'(kyrios)와 달리 10회 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데스포테스'(despotes)자신이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분'에 대해서 사용하는 상대방을 매우 높이는 강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사도4,24; 묵시6,10).


시메온은 하느님을 '데스포테스'(despotes)라고 표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당신 종', 즉 '톤 둘론 수'(ton doulon sou; your servant)라고 분명히 말하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권을 인정하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라고 번역된 '뉜'(nyn; now)이 문장의 처음에 와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로운 차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인류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시메온 개인에게도 구원자를 기다리는 영적인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해방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뒤이어 나오는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번역된 '아폴뤼에이스'(apolyeis; depart; dismiss)'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하는 '아폴뤼오'(apolyo) 2인칭 단수이다. 이 단어는 완곡어법으로 쓰여 '죽을 수 있도록 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이제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아무런 미련없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이다.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표현은 시메온이 매우 늙었으며, 지금까지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사명과 희망으로 살아왔으나, 이제 그 사명과 희망이 완전히 성취되고 끝났음을 표현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평화로이'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 '레마'(rema; word)루카 복음 2장 26절나오는 '성령의 알려주심'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메온은 '레마'(rema) 앞에 '토'(to)라는 정관사를 붙였을 뿐 아니라, 뒤에 2인칭 단수 소유격 대명사 '수'(sou)를 덧붙여서 '성령의 알려주심'을 '성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시메온은 자신이 바라던 바가 성취됨으로 인해 참 평화를 얻었다. 이 평화는 시메온 개인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서도 구원자의 오심의 결과요 선물이 되었다.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네'(eirene; peace) 하느님의 아들이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셔서 주시는 평화인데, 이 평화는 죄와 불순종으로 하느님과 원수가 인간과 하느님과의 화해에서 오는 구원이며(로마5,1.10), 반목과 질시로 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간들 관계 속에서의 평화일 뿐만 아니라(로마12,19), 염려와 근심, 격심한 감정의 혼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평화이다(로마8,6).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원문의 서두에 나오는 '호티'(hoti; for)는 본문에서 이유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앞에서 말한 자신의 평화로이 떠나감의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시메온이 '구원'을 본 주체'나','에고'(ego)라고 하지 않고, '제 눈이' '호이 옵탈모이 무'(hoi ophthalmoi mou; my eyes)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을 분명히 보았음을 더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여기서 '구원'이라고 번역된 '소테리온'(soterion; salvation)형용사인데, 명사처럼 쓰여 '구원의 수단' 혹은 '구원 그 자체'를 의미한다(시편50,23; 이사56,1). 그리고 구원은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구체적인 영적을 말하기도 하지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구원 자체이심을 보여 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했던 시메온은 사도 요한이 표현했던 그 기쁨을 맛보았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요한1,1)




2017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봉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2-23).”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한 일을 겉으로만 보면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가 한 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신 일이라고 우리 교회는 해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신 것은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봉헌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신 일도 봉헌의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5-27)”


여기서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니”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신 것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어떤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즉 ‘하느님의 것’입니다.


좋은 예가 ‘노아의 봉헌’입니다.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창세 8,20).”


노아가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친 짐승과 새들은,


하느님께서 대홍수 전에 노아에게 보내 주신 것들입니다.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로 들어갔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창세 7,7-9).”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할 때 바쳤던 기도도 좋은 예가 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7-29).”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봉헌한 것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집을 마련해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즉 하느님께서 집도 없이 계시는 것이 딱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집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쉬운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면서 생색내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고,


대가를 바라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봉헌의 나쁜 예는 ‘사울의 봉헌’입니다.


사울이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전리품을 챙긴 것을 사무엘이 꾸짖자,


사울은 주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그랬다고 변명을 했습니다(1사무 15,21).


그때 사무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은,


우선 먼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바치는’ 행위 자체보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 뜻 가운데 첫 번째 뜻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다는 점을 칭찬하신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가난한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친 것을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그 과부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라는 계명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 과부가 생활비 가운데에서 일부만 바쳤더라도 ‘온 마음을’ 다 바쳤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헌금함에 큰돈을 넣긴 했지만 마음의 일부만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모릅니다.


그러니 함부로 다른 사람의 봉헌에 대해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봉헌에 대해서만 반성해야 하고, 온 마음을 다 바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 봉헌 축일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한 이를 만납니다.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저마다 꿈을 실현하고자 일생을 바칩니다. 그런데 시메온에게 꿈은 오직 한 가지, 주님께서 구원하러 오시는 것을 보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전 생애를 주님께 봉헌하며 끝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오늘 복음에서처럼 아기 예수님을 통해 주님을 체험하지요. 신앙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봉헌이란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침으로써 내가 근본적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봉헌 중에 가장 뜻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메온처럼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일생을 봉헌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국 평생 자신을 주님께 얼마나 봉헌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에 시메온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시메온처럼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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