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월요일]구원 (마르 6,53-56)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솔로몬 임금은 주님의 계약 궤를 다윗성에서 모시고 올라와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다. (1열왕 8,1-7.9-13)
그 무렵 1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으로 모였다.
3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가 도착하자 사제들이 궤를 메었다.
4 그들은 주님의 궤뿐 아니라 만남의 천막과 그 천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도 모두 가지고 올라갔는데, 사제와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5 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6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7 커룹들은 궤가 있는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 궤와 채를 덮었다.
9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12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3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가기만 하시면, 사람들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는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3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연중 제5주간월요일 제1독서 (1열왕8,1-7.9-13)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 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9)
이것은 계약궤 안에 오로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계약을 상징하는 두 돌판, 즉 십계명을 새긴 돌판들만이 들어 있었음을 뜻한다. 사실 계약궤라는 명칭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계약의 돌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차원에서 계약궤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영원한 증거, 즉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19,5.6)는 약속의 증거로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 앞에서의 계약 준수 책임을 깨닫도록 하는 증표가 되었다.
신약의 히브리서 9장 4절에는 온통 금으로 입힌 계약궤 안에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의 판들이 들어 있었습니다."라고 두 개의 돌판(계약의 판들)과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열왕기 상권 8장 9절과 히브리서 9장 4절의 상충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본래 계약궤안에 '만나가 든 금항이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 그리고 계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지만, 모세 시대 이후 엘리 사제 시절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전쟁에 져서 계약궤를 일시적으로 빼앗겼던 시절에(1사무4,3-11)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를 유실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또 다른 견해는 본래 계약궤에는 그것을 만든 목적과 부합하게 십계명 두 돌판만 들어 있었고(탈출25,16; 40,20; 신명10,5),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 앞에 두어'(탈출16,33) 즉 '증언판 앞에'(탈출16,34), '증언판 앞으로'(민수17,25) 있었을 뿐인데,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가 정확한 고고학적 검증없이 해석에 따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전자의 견해가 히브리서의 증거와 상충되지 않고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열왕기 상권 8장 9절의 '아무 것도 없었다'라는 표현 역시 그 전에는 그 무엇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표현으로 볼 수가 있어 우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것이다.'
이것은 계약궤안에 보관된 두 돌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시기를 나타낸다. '계약을 맺으신'에 해당하는 '카라트'(karath)는 일차적으로 '자르다'(1역대19,4), '잘리다', '끊다'(1사무5,4)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계약과 관계될 때에는 '계약을 맺다'(예레34,8)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이것은 고대의 계약 체결 의식에서 계약의 당사자들이 가운데를 자른 제물 사이를 통과했던 것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러한 계약 체결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계약을 어길 경우에 제물이 둘로 갈라진 것같이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는 계약 준수의 엄정한 결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계약은 단순한 약속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신뢰와 신의를 확인시키는 엄숙한 선언이었다(창세15,17~18; 예레34,18~22).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신 이후에 그들과 이렇게 엄정하고 엄숙한 계약을 체결하셨다(탈출24,1~8).
그리고 이러한 계약이 체결된 후에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 즉 계약의 산물이 열왕기 상권 8장 9절에서 강조되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다(탈출24,12).
따라서 솔로몬의 성전에 계약의 두 돌판을 넣어 두었던 계약궤가 안치되었다는 것은 과거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변함없이 실행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왕궁 건축 기사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열왕기 상권 5-9장이다. 그 중에서 성전 건축 기사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성전 봉헌식과 관련된 일련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오늘 독서에 해당되는 1-11절은 주님의 계약의 상징인 계약 궤가 솔로몬 성전에 안치되는 과정이 다루어지고 있다. 주님의 계약 궤가 다윗성에 있는 천막에서 옮겨져 솔로몬 성전에 안치되는 과정과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 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8,1)
솔로몬은 오랜 세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완공한 하느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이며, 자신들이 하느님 백성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성전을, 하느님께 바침에 있어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함으로써, 이동식 천막이 성전으로 대치되는 이 역사적 순간의 의미를 경축하고자 했다.
'시온' (tziyon : 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름 이름으로, 과거 이곳에 가나안 원주민이었던 여부스족의 성채가 있었고, 다윗이 이를 빼앗은 후, '다윗성'이라 명명했다. (2사무5,7) 다윗은 그 후 이곳에 만남의 천막을 설치하고, 주님의 계약 궤를 안치하였는데(2사무6,1-19)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지기까지 계약 궤는 계속 그 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시온' 은 '성전' 과 동일시 되어, 하느님께서 택하심으로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처소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시편2,6 : 48,3 : 132,13)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한 일차적 목적이 주님의 계약 궤의 안치이다.
'주님의 계약 궤'는 성경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운다. 하느님의 법이 기룩된 십계명 돌판을 담고 있다(탈출25,16,21 :신명10,1-5)고 하여 '(법)궤'(레위16,2)로, 그 십계명 돌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축적으로 증언하고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증언 궤'(탈출26,33)로, 혹은 그 모양만을 나타내어 단순히 '궤'로도 불리웠다. (탈출25,10 : 신명10,2)
특별히 '주님의 계약 궤'로 소개하는 것은, 성전 봉헌식의 한 단계로서 '계약 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바로 이 일이, 하느님의 계약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일차적으로 하느님께서 계약 궤 가운데 임하셔서, 모세와 만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말씀을 그에게 허락하신다는 약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 계약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다윗의 왕조를 지키고 견고케 하시겠다는 다윗과 맺었던 하느님의 약속을(2사무7,5-16)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약 궤를 성전에 안치하는 예식은, 하느님께서 솔로몬에 세운 성전에 거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시고, 인도하시며, 솔로몬 왕국을 견고하게 세우실 것이라는 주님의 계약의 성취에 대한 기대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궤를 성전에 안치시키는 형식적인 절차가, 이러한 주님의 계약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은 아니며, 오직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만이 주님의 계약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에 모였다" (8,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는 표현은, 실제로 성전 봉헌식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짐없이 모두 참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12지파에서 소집되어 나온 원로들과 족장들(이스라엘 전체를 대표)과 전국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무교절, 수확절(오순절, 추수감사절), 추수절(장막절, 초막절)과 같은 3대 절기에는 중앙 성소로 나아와, 이 절기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탈출23,14-17)
따라서, 성전 봉헌식이 열린 그 해 추수절(장막절)을 맞이하여,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성전 봉헌식이 정치, 종교 지도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국민적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전을 봉헌한 달이 해당 연도 없이 '7월' (일곱째달)로만 제시됨으로써,
봉헌식이 있던 7월이 성전 건축이 완성되던 그 해의 7월인지, 아니면 그 이듬해의 7월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이 지난 7월인지 명확히 모른다. 보통 성전이 완공된 해, 즉 솔로몬 즉위 11년 7월이라는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에타님' (ethanim)은 '(영원히)계속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탄' (yathan)에서 유래된 고유 명사로, '(물의)흐름' 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이 시기가 이른 비가 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즉 태양력 9,10월에 해당되는 유대력 7월은 건기가 끝나고 비가 내리는 시기였다.
그리고 '축제 때' (절기에)로 번역된 '뻬하그' (behag)에서 '하그'(hag)는 '춤을 추다'(탈출12,14) 라는 뜻을 지닌 '하가그' (hagag)에서 유래한 명사로, 이는 어떤 날을 정기적으로 기념하는 축제를 뜻한다.
특히 에타님 달에 있었던 이 '절기'는 나뭇가지들로 초막을 만들고, 그곳에 한동안 거함으로써, 과거 하느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 즉 '초막절'을 의미한다.(레위23,42-43) 이 절기는 7월 15일에서 22일까지 7일간 계속되었다.(레위23,33-36)
그런데 이 절기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무교절, 수확절(맥추절, 오순절, 추수감사절), 추수절(초막절, 장막절, 수장절 :탈출23,14-17)중, 제일 마지막에 지켰던 절기였다. 그 이름이 '수확절'이라고도 불리워졌던 것은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즐기는 축제로서 (레위23,40-42 :민수29,12) '수확의 절기' (탈출23,16)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솔로몬은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방랑생활을 기억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불러주심으로, 그들에게 안식을 주신 사실을 감사하는 초막절 기간에 계약 궤를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봉헌식을 드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정한 안식과 정착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간의 이동용 천막이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불안정한 생활이 성전건축으로 종결되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8,6)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계약 궤가 안치된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한다. '안쪽 성소'(내전)에 해당하는 '떼비르' (debir)는 '말하다' 라는 뜻의 동사 '따바르' (daba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이 곳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장소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하느님은 계약 궤 위에 있는 두 커룹(cherubim)사이에 임재하셔서 백성들을 위하여 모든 일을 모세에게 '이르리라'(dabar)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탈출25,22) 한편 '지성소'로 번역된 '코데쉬 학코다쉼' (qodesh hagodashim)은 '거룩'을 뜻하는 명사 '코데쉬' (qodesh)의 단수형과 복수형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가장 거룩한 장소' 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나타낸다.
성전의 모든 곳이 예외없이 거룩한 장소이지만, 특별히 지성소에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을 상징할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속적으로 계약 관계 속에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것을 상징하는 계약 궤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장 거룩한 장소로 여겨졌던 것이다.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 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것이다." (8,9)
"궤 안에는 두 개의 돌 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계약 궤라는 명칭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계약의 돌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약 궤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영원한 증거, 즉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탈출19,5-6)는 약속의 증거로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 앞에서의 계약 준수 책임을 깨닫도록 하는 증표가 되었다.
한편 히브리서는 계약 궤 안에 '만나가 든 금 항아리' 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의 판들' (히브9,4)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견해를 피력했는데,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본래 계약 궤 안에는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와 계약의 판들'이 들어 있었으나, 모세 시대 이후 엘리사제 시절 필리스티아인들에게 계약 궤를 탈취당하였던 시기에(1사무4,3-11)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를 유실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다른 한편, 본래 계약 궤에는 그 만든 목적과 부합하게 십계명 중 두 돌 판만 들어 있었으며 (탈출25,16 : 40,20 : 신명10,5),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는 '주님 앞에' (탈출16,33) 곧 '증언판 앞으로' (민수17,25)있었을 뿐이므로,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은 정확히 고고학적 검증없이, 유대 전승의 해석에 따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보통 전자의 견해가 히브리서 증거와 상충되지 않고,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아무것도 없었다' (1열왕8,9)라는 표현 역시, 그 전에는 그 무엇이 있었음을 전제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세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견해는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다.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8,10)
성경에서 구름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탈출19,9.16 : 24,15-16.18 : 신명4,11 : 5,22 : 시편97,2) 한편 다음 절에는(8,11) 주님의 영광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구름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다는 것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하느님이 충만한 영광의 모습으로 친히 임재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모세의 천막을 인정하신 것처럼(탈출40,34-35) 이제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현존과 임재의 상징적 처소로 인정하셨다는 의미를 전달한다.(2역대5,11-14) 따라서 이것은 성전 봉헌식이 성공적으로 거행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연중 제5주간 월요일 복음(마르6,53~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시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56)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으로 번역된 '에이세포류에토'(eiweporeueto; he entered; he went)는 원형 '에이스포류오마이'(eisporeuomai) 동사의 직설법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로서,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를 계속적으로 이동하여 들어가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표현이다.
마르코 복음 6장 56절에서 직설법 동사가 다섯 개 쓰였는데, 그 중에서 네 개가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여러 장소들을 계속해서 들어가고 계셨고, 사람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병자들을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끊임없이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계속해서 청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은 누구나 치유를 받았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이렇게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계속적 동작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 표현한 이유는, 마르코 복음 6장 56절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행하신 모든 반복적인 치유 행위들을 요약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병자들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제대로 믿은 사람도 일부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병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것만 믿었고,
병의 치유만을 원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9-10)).”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또 당신에게 손을 대지 않더라도
당신께 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손을 대려고만 합니다.
사도행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바오로 사도의 수건과 앞치마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은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의 수건과 앞치마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믿는다면, 그것도 미신입니다.
보라는 하느님(예수님)은 안 보고 물건만 보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로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좋은 예가 민수기에 나오는 ‘구리 뱀’입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민수 21,4-5).”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6-9).”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리 뱀 자체는 하느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구리 뱀이 우상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사람들이 그 구리 뱀을 섬기는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히즈키야는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아비인데 즈카르야의 딸이었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2-4).”
물건이 하느님(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물건도 믿거나 섬기면 안 됩니다.
지혜서 저자는 우상 숭배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재산이나 혼인이나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생명 없는 그것에 대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력한 것에 대고 건강을 위하여 간청하고
죽은 것에 대고 생명을 위하여 청원한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에 대고 도움을 탄원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대고
여행을 위하여 또 생계와 일과 생업의 성공을 위하여
손에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에 대고 힘이 되어 주기를 빈다(지혜 13,17-19).”
오늘날에도 지혜서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르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2코린 6,16)”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자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모시는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자기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믿음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성물들과 상징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도움을 주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 물건들 자체가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어떤 기적적인 현상이 그런 물건들에서 나타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솔로몬 임금이 마침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안에 계약 궤를 안치하고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통해 신앙 공동체로서 결속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지요.
우리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밀접하게 결합하여야 하겠습니다. 신앙 공동체를 떠나 홀로 신앙생활을 하면 잃는 것이 많으며, 때로 오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자들과 친교를 나누면 그만큼 하느님과의 친교 역시 커지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8,20 참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그들의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요.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확신이 있었기에 구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해결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데서 나오는 힘입니다. 체험 없이, 이론적인 신앙만으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하려면 무엇보다도 꾸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울러 이웃에게도 마음을 열고, 그들의 소리를 정성껏 듣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2월 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빨갛게 달군 쇠로>
아가타는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지방에서 순교한 성녀로 체칠리아, 루치아, 아녜스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네 동정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시칠리아 섬의 명망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다방면에 출중했던 아가타는 당시 총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아가타에 완전히 빠져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된 총독은 아가타가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청혼을 거듭합니다. 그럴 때 마다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하자 심기가 완전히 불편해진 총독은 아가타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법정으로 넘깁니다.
재판정에서 아가타는 갖은 잔혹한 형벌을 다 받지만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한 차례 끔찍한 고문을 잘 견뎌낸 아가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시 옥으로 돌아갈 때 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고문으로 인한 처절한 고통을 기도로써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나온 아가타의 태도는 더욱 의연했었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쇠로 아가타의 가슴을 도려내었지만 그 끔찍한 고통 중에서도 아가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내 구세주 하느님, 이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다음 날 베드로 사도가 치료약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세상의 약으로 제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가타의 의연한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 아가타를 뒹굴게 했다고 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을 거두어가던 아가타는 이윽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제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진정한 신앙인은 아가타처럼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가타처럼 세상이 아닌,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아가타처럼 하느님이 빚어낸 사람,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기에 진실로 자유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