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간 화요일]교리 (마르 7,1-13)

2018. 2. 6. 오전 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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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간 화요일]교리 (마르 7,1-13)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성전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달라고 기도한다. (1열왕 8,22-23.27-30)
그 무렵 22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23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7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30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나무라신다. (마르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1열왕 8,22-23.27-30)


성전 건축은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의 결과이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의 결과였음을 강조하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사가 기록된 열왕기 상권 8장 12-21절에 이어, 22절에서 53절까지는 성전 봉헌에 즈음한 솔로몬의 기도 기록된다.

솔로몬의 기도 내용이 기록된 23-53절은 내용상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23-30절은 서론적 기도이며, 31-53절은 성전과 관련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처한 일곱가지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로 한 본격적인 기도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 (22)

솔로몬이 기도한 위치가 백성들과 제단 사이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솔로몬이 회중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성전에 등을 돌린 채 서서 기도한 것인지, 단순히 회중들 앞에 대표로 서서 성전을 향해 기도를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솔로몬이 시종일관 계속 서서 기도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54절에서 솔로몬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병행 구절인 역대기 하권 6장 12-13절에도, 처음에는 서 있었으나 곧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솔로몬이 서서 기도한 것처럼 표현한 것은,  언제나 옥좌(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되는 주 하느님 대전에,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임금 앞에 앉지 않고 늘 서 있는  신하와 같은 겸손한 자세로 기도했음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솔로몬의 기도의 위치를 단순히 '주님의 제단 앞에' 로 표현하고 있지만, 역대기 병행 구절을 보면, 솔로몬이 주님의 제단 앞에 특별한 대(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기도했다는 사실이 나오고, 그 대(단)의 크기도 나온다. 이에 따르면, 솔로몬이 기도한 자리는 특별히 (번)제단 앞에 설치한, 길이 다섯 암마(2.28m),넓이 다섯 암마, 높이 세 암마(1.368m)가 되는 청동으로 만든 일종의 연단 위였다.(2역대6,12-13)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 (22)

성경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펴는 행동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나타낸다.(54 : 이사1,15) '손'에 해당하는 '캅파이우' (kaphaiu)의 원형 '카프' (kaph)는 '손바닥' 을 뜻하며, '펴다'로 번역된 '와이프로스' (waiphros)의 원형 '파라스' (pharas)는 '겸손한 간청' 을 표현한다.

이런 표현을 볼 때, 솔로몬이 하느님께 드린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탄원의 기도였다. 과거에 모세가 "제가 성읍을 나서는 대로 주님께 제 손을 펼치겠습니다" 하면서 하늘의 우레와 우박을 멈추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 세상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파라오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그가 취했던 기도의 모습이 바로 본문과 같은 것이다.(탈출9,29)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3)

이제, 솔로몬의 기도가 시작된다. "there is no god like thee, in heaven above or on earth beneath."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이는 비교급 표현이 아니라 최상급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주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많은 신들보다 더 힘이 세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며,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2사무 7,22 : 22,32)

또한 하느님의 무소부재(無所否在)함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유일무이하며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찬양한 이유가 바로 주님께서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이방의 신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그분이 계약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이 '계약'은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에게 허락하신 다윗 계약으로서(2사무 7,8-16), 다윗의 몸에서 난 후손이 성전을 건축할 것과 다윗의 왕좌(위)를 영원히 보존할 거라는  두 가지 내용으로 집약된다.

이 가운데 첫번째 내용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게 됨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고, 두번째 내용은 앞으로 성취되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두번째 내용에는 '헤쎄드' (hesed), '자애'의 개념이 강하게 들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과거 다윗에게 그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 즉 솔로몬이 범죄를 저지르면 징계를 내릴지언정, 사울에게서처럼 '자애'(은총)를 거두어 가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2사무7,15) 바로 여기에서 다윗과 다윗의 몸에서 태어날 자식을 향한 하느님의 '헤쎄드'가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원문에는 '계약과 자애' 가 한 묶음으로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약과 자애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을 이루시는 주체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23)

'마음'을 뜻하는 명사 '레브' (lev)는 지,정,의를 포함한 인간의 전인격 지칭한다. 또한 '걷는'에 해당하는 '하홀레킴' (hholekim)의 원형 '할라크' (halak)일차적으로 '걷다'(에페10,23), '가다'(1사무6,8)의 뜻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준행하다'(에페44,10), '행하다'(신명19,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하느님의 법과 율법을 사랑하며, 이를 마음에 담아 둘 뿐만 아니라, 삶의 실천적 영역에서도 삶의 기준으로 삼아, 의지적으로 행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이러한 자에게 계약과 자애를 베푸신다는 것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솔로몬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솔로몬의 불행한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에 따라(1열왕2,4)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김으로, 지혜를 얻어 성전 건축의 대과업을 이루었지만, 결국 인생 말년에는 그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돌이켜 우상들에게 향함으로, 왕국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게된다.(1열왕11,4)

왕국 분열과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에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속에서, 온 마음으로 주님 대전에 성실히 걷지 못하고 한결같지 못함으로 인해서 야기된, 솔로몬의 암울한 미래를 일종의 복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 (27-28)

27절은 주님의 광대 무변하심에 대한 찬양이고, 28-30절은 이러한 광대 무변하신 속성에 근거하여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하늘 위의 하늘'은 하늘의 최상급적 표현으로(2코린12,2), 본문에서는 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드넓은 우주 공간을 의미한다. 이는 우주 전체로도 담아낼 수 없을 하느님의 무한성과 편재성(遍在性), 그리고 지존성(至尊性)등과 같은 하느님만이 가지신 절대적 속성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느님께 대한 솔로몬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지역神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고대 근동의 보편적 산관(神觀)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이제, 광활한 땅뿐 아니라 무한한 우주 조차도 하느님의 처소로서는 부족한데, 하물여 인간이 지은 조그마한 성전이 감히 하느님의 처소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겸손한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주님께서 성전에 임하심은 성전 자체에 어떠한 가치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성전을 당신과 당신 백성이 통교하는 공식적 장소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 곳을 살피시어" (29)

이 본문과 유사한 표현이 만남의 천막 관련해서 등장한다.(신명15,5.11 : 14,23 : 15,20) 과거 하느님께서 만남의 천막이 불완전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로 스스로 작정하셨었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볼 때, 솔로몬의 성전 역시 이러한 모세의 천막과 별로 다르지 않다.

즉, 솔로몬의 성전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할지라도, 광대하신 하느님의 처소가 되기에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두실 처소로 선택하셨다는 점에서,만남의 천막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솔로몬의 성전이 하느님이 거하실 유일하고도 영원한 장소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성전을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거룩한 처소로 선택해 주실 것을 바라는 일종의 기원문에 해당한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그의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두시며, 당신의 눈과 마음을 항상 머물게 할 처소로 삼으실 것을 약속하셨다.(1열왕9,3)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29)

'눈'을 뜻하는 '아인'(ain)은 신체의 일부로서 '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식, 성격, 태도, 성향, 견해, 열정 및 반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특별히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속성과 성품을 인간에 빗대어 설명한 것으로, 선악을 살피시며(잠언15,13), 의인을 지키시고(2역대16,9), 은총을 주시며(창세6,8), 인간을 살피시고 구원해 주시는 신적 속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시편33,12 : 34,15)

따라서 하느님의 눈이 성전을 향해 밤낮으로 열려 있기를 간구하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 성전을 항상 주목하사, 누구든지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관심을 가지고 응답해 달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신의 눈 뿐 아니라 마음까지 성전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 (9,3)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복음(마르7,1~13)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겼다." (7)

마르코 복음 7장 7절은 이사야서 29장 13절의 마소라(mt)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70인역(lxx)에만 나타나는 표현이다.

'헛되이'로 번역된  부사 '마텐'(maten; in vain)'열매가 없이', '유익이나 생각없이'라는 뜻으로 철저히 생각하지 않고 행한 수고가 아무런 이익이나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지킨 조상들의 전통들신학적인 성찰없이 행해진 행동이며, 하느님 대전에 아무런 열매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무익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 무익한 이 규정들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멍에를 지우고 단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섬긴다'에 해당하는 '세본타이'(sebontai; they worship) 기본형 '세보마이'(sebomai)신약에서 10회 사용된 동사로서, 오로지 신적 존재만을 경배하고 경외하는 행위를 뜻한다 (사도16,14; 18,7.13; 19,27).

 

여기서 '세본타이'(sebontai)직설법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당시 그렇게 행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에 그치지 않고 이 현재 시제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행위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과거 시점의 상황을 다룬 예언서를 인용하시면서 실제로는 현재의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불변의 규정으로 여기며 엄격하게 지켜오고 가르치던 정결례와 같은 규정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이 백성들을 통제하며, 자신들이 이것을 철저히 지키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심을 이끌어 내던 수단이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노력들이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 아무런 열매가 없는 헛된 일에 불과하다고 하심으로써,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리셨던 것이다.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1-5)”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온 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키는지 조사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고발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손으로’ 라는 말은,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서” 라는 뜻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은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실천 지침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방법들입니다.)


‘모든 유다인’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지킨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바리사이들의 정결 예식 규정을 무시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그 지역에서는 그런 규정을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대립 관계에 있던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그 규정을 안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여기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둘째는 사람의 전통만 중시하고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 않는 것.


1) 겉으로만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은

대단히 철저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 들어 있지 않은 ‘위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사랑’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모습은 철저하고 엄격했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으니 그들의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2)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대단히 까다로운 정결 예식 규정을 만들어 놓고선

그 규정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으로, 또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정결 예식 규정들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일인 것 같아도,

사실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 즉 계명의 반대쪽에 있는 일이었고,

죄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39-41).”

이 말씀들은 “껍데기만 깨끗이 하지 말고, 마음속부터 먼저 깨끗이 하여라.”,

즉 “위선을 버리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세부적인 실천 지침 자체가 나쁜 것인가?

실제 생활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상황들에 대한 지침은 필요 없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실천 지침들은 신앙생활에 도움을 줍니다.

좋은 예가 예루살렘 사도 회의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할례 문제와 구약 율법 문제로 논쟁이 생겼을 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출신 신자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또 유대교의 관습들을 그리스도교에서도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에 관한 문제...)


사도들은 오랫동안 회의를 했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사도 15,28-29).”


사도들의 결정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할례가 공식 폐지되었고,

유대인들만의 관습들과 전통들도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세부적인 실천 지침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례 지침’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침들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만,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방법일 때에만 유효합니다.

아무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지침이나 규칙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제대로 실천하기 위한 의도로

구체적인 세부 지침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형식적인 실천으로 변질되었고,

결국에는 위선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지침들은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코르반은 하느님께 봉헌한 예물이기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코르반 제도가 악용됩니다. 복음에서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싶지 않으면, 자기 재산을 코르반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재산은 하느님께 바친 것이기에, 이제는 부모를 위해 재산을 쓸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상 부모 공경을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는 결국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악용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의무를 교묘하게 피해 가는 것이지요.
또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않으면 채권자는 그에게 “네가 빌린 돈이 바로 코르반이다.”라고 다그칩니다. 이는 하느님께 봉헌한 돈을 빌려주었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채무자는 하느님께 빚진 셈이 되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받아 낸 것을 실제로 하느님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코르반 제도처럼 하느님 계명의 본질을 왜곡하고, 자신이 편리한 대로 악용하는 경향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 계명의 참된 정신을 파악하고, 그 실천적 방법을 찾고자 한층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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