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제 십자가 (루카 9,22-25)

2018. 2. 15. 오전 8: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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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제 십자가 (루카 9,22-25)



 모세는 백성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으니, 너희와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명 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며,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 (루카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1독서(신명 30,15~20)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5-16)


본문에서 '보아라'(레에; reeh)라는 말이 쓰인 것은 이제 최종적인 선택이 각 개인에게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생각하라는 의미 담겨있다. '너희 앞에'(레파네카; lepaneka;'네 얼굴 앞에'라는 뜻)'오늘'(하욤;hajom)이 전하는 뉘앙스는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의 두 길에 대한 제시가 매우 도전적이며 현재적이란 사실이다.

즉 결코 비밀속에 감추인 신비스러운 그 무엇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 앞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제시하는 것이다.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15)

여기서 '행복'(복)으로 번역된 '토브'(tob) '좋은'(good)이라는 의미이며, 정관사 '하'(ha)와 결합하여 '좋은 것' 또는 '선'(善)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행'(화)으로 번역된 '라'(la)'악'(惡; evil)을 의미한다.  

여기서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을 말하는데,'선과 악' 어떤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각 율법에 순종하는 삶 약속하는 '축복'(번영; 신명4,40; 5,29.33; 6,3.18.24; 10,13)과 그와 반대되는 '저주'(신명4,26; 8,19)를 말하는 것이다(신명11,26).  


'축복'을 의미하는 '선''저주'를 의미하는 '악'현세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에 '생명' '죽음'내세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예레미야 21장 8절에도 "이제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놓아 둔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두 길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주어진 부가물이 아니라 우리 삶의 생명 자체이기에, 비록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 선택 사항인 양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그 말씀을 지키는 것만이 생명을 위한 유일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16) 

15절에 명사로 소개된 생명과 행복을 동사를 사용하여 한층 더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너희가 살고' 번역된 '하이타'(haitha)'살다'는 뜻을 가진 '하야'(haja)동사의 2인칭형이다. '하야'동사가 풍기는 뉘앙스는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다' 혹은 '생명을 소유하다' 이다.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존재를 지켜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또한 '번성할 것이다' 번역된 '라비타'(rabitha)'많아지다'란 뜻을 가진 '라바'(rabah)동사의 2인칭형이다. '라바'동사는 특별히 수적인 증가 나타내는 말로서,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후손의 축복이(창세15,5) 성취되는 것 의미한다. 이것을 볼 때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누리게 되는 궁극적인 축복은 생명과 계약 공동체의 백성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율법이 지향하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단순히 물리적이고 육적인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을 거쳐 새 예루살렘까지 향해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 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7-18)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17) 

'돌아서서'로 번역된 '이프네'(ipne)'얼굴을 ~로 향하다','돌아서다' 뜻을 가진 '파나'(pana)동사의 미완료형으로서, '돌아서서 뒤를 바라보는'이란 뉘앙스를 가진다.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ipne lebobka ; 이프네 레보브카)를 살펴보면, 마음의 고민을 가지고 생각하다가 결정하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굳힌 생각이 그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모든 죄악과 불순종이 사람이 결정한 의지적인 생각에서 비롯됨 암시해 준다.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7) 

'유혹에 끌려'로 번역된 '닛다흐타'(nidahtha) '추진하다','몰아내다' 뜻을 가진 '나다흐'(nadah)의 수동형 2인칭으로 '내몰리다','이끌리다' 뜻이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욕심에 이끌리어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경배하고'로 번역된 '히쉣타하위타'(hishethahaita) '굽히다','구푸리다'는  뜻을 가진 '샤하'(shaha)의 재귀형으로서,'스스로 몸을 구푸려서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경배하는 몸짓을 묘사하는 말 뿐 아니라 절대적인 순종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더욱이 '그들을 섬기면'으로 번역된 '아바드탐'(abadtham)'노예'라는 뜻의 '에베드'(ebed)명사와 동일한 어근(아바드; abad)을 가지는 말이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결과 말해주고 있다. 즉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얻게 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죄와 죽음의 종노릇 하는 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필연적 멸망과 땅의 상실 즉 축복과 영화와 생명의 단절을 초래하게 된다.


이 말씀이 모세를 통해 b.c.1406년 경에 주어졌는데, 이 말씀이 실제로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의 멸망(b.c.722), 바빌로니아에 의해 남부 유다의 멸망(b.c.586), 바빌론에서의 포로귀환(1차 b.c.537; 2차 b.c.458; 3차 b.c.444), a.d.70년 로마에 의한 멸망 후,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까지 계속되며 그대로 이루어졌다.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루카 9,22~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4~25)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하여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9,20)라는 위대한 신앙을 고백했지만, 그가 가진 메시아관은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만을 받는 메시아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임할 수난에 대해 처음으로 예언하셨을 때 (루카9,22) 강력히 반발하였다(마태16,2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자는 누구나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9,23). 


루카 복음 9장 23절에는 '날마다'에 해당하는 '카트 헤메란'(kath' hemeran)이라는 부사가 나오는데, 날마다 자신의 죄스런 본성과 결별하고 죽는 훈련을 거듭해야 함암시하고 있다. 


이제 루카 복음 9장 24절에는 '나때문에'라는 표현을 통해(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는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에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시고 '당신과 복음'더 우선적 가치를 두셨다.

한편, 이러한 역설적 진리는 역사 가운데 그대로 실현되었는데, 가리옷 사람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 사도 요한만이 장수를 누렸을 뿐,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품었기 때문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 복음이 쓰여지고 읽혀지던 초대 교회 당시의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와 순교의 갈림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순교의 길을 선택하게 한 감동적인 생명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잃거나'에 해당하는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 lose; forfeit)는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잃을','잃는'해당하는 '아폴레세이'(apolesei; will lose)와 다르다. '제미오테나이'(zemiothenai)의 원형 '제미오오'(zemioo)는 신약 성경에서 여섯 번 나오는데 모두가 수동태로 쓰였으며, '손상을 당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부정사 수동태로 쓰여 '손상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루카 복음 9장 25절에서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친다'는 표현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제3자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목숨을 상실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루카 복음 9장 24절의 '아폴레세이'(apolesei)스스로의 의지와 적극성으로 상실하는 것과 비교가 된다.


말하자면, 루카 복음 9장 25절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으려 하다가, 또는 이미 얻어 누리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목숨과 생명을 박탈당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는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목숨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할 영적 생명'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목숨'(생명)에 해당하는 '푸쉬케'(psyche; life)바로 '영혼 생명'(soul)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대로 모두 얻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부유하게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인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이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또 이 말씀을,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방식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허무한 것들을 얻는 방식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세상을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상에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렇게 둘 다 누릴 수는 없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이 말씀은, “지상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 일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중간 지점도 없고, 절충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영원한 생명만 추구해야 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유했던 사람들도 있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부유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맞지만, 끝까지 부유하게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성인 성녀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누구든지’는 예외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는 ‘나만 따라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언제나 항상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신앙생활이 정말로 그렇게 어렵고 힘들기만 한 생활일까? 고난과 시련만 있어서 항상 고통스럽고 고달프기만 한 생활일까?  만일에 실제로 그렇다면 누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성모님께서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이렇게 찬미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기쁨’은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만일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참을 이유가 없는, 삭막한 고역(苦役)이 됩니다. 


이 기쁨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옵니다.  예수님 뒤를 끝까지 잘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믿음, 그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희망, 그리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랑, 옆에서 함께 가면서 우리를 도와주는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의 사랑.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어쩔 수 없어서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는 일이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기쁨의 공동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 (루카 10,17).”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4-18).”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의 ‘기쁨’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주는 만족감이나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하고 참된 기쁨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기쁨으로.”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하느님의 뜻과 자기 뜻을 식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과 사람의 뜻은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의 뜻은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느님의 뜻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합니다. 달콤한 유혹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지요. 달콤한 유혹은 무엇입니까? 편안한 신앙생활입니다. 희생 없이 축복만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대를 하지요.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고, 기왕이면 사업도 잘되고, 건강도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바람입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을 보는 것이지요. 별은 과거부터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인도한 것도 별이 아니었습니까?
별을 보려면 어둠이 있어야 합니다. 어둠은 고통과 절망, 시련, 나아가 죽음을 뜻하지요. 이러한 어둠을 극복함으로써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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