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화요일]누룩 ( 마르 8,14-21)
야고보 사도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이니 행복하다고 한다. (야고 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며,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신다. ( 마르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일곱입니다.”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1,12~18)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3~15)
야고보는 1장 2-12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 13-18절에서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면의 욕심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사와 선물에 대하여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온갖 좋은 선물들만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2절과 12절에서는 '시험'이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13절에서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페이라스모스'(pheirasmos)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페이라조'(pheirazo)는 인간의 욕심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창세22,1 ; 탈출15,25 ; 신명8,2 ; 13,3 ;33,8 ; 2사무24,1 ; 시편26,2).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테스트하는 성격의 시험일 뿐,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마태4,1-11),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의 성향을 가진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서 발생한 죄의 유혹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창세3,12-13 ; 잠언19,3).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죄의 유혹들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3)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 누구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가 쓰였다는 것은 이 사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마치 죄를 부추겨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탈출4,21 ; 7,3 ; 10,1.20 ; 2사무24,1; 1열왕22,19-23). 여기에 대해 우리는 로마서 1장 28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오히려 온 천하에 주 하느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셨다(탈출10,1.2).
또한 하느님께서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교만에 빠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부추기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1역대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이미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합 왕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마음을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꾀어 죽게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열왕22,19-23).
이러한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14)
'사람은 저마다'라고 번역된 '헤카스토스'(hekastos)는 '각 사람'이라 말할 수 있고, 인간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시험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스'(ephithimias)의 원형 '에피튀미아'(ephithimia)는 '~을 향하여'란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hi)와 그 자체로 이미 '열망' 혹은 '뜨거운 감정'이란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고, 죄악된 자아만을 충족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욕망에'에서 '~에'로 번역된 전치사 '휘포'(hypo)는 '~아래에'라는 문자적 의미와 더불어 '~의 영향력 하에서' 라는 비유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욕심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로잡혀'(끌려)로 번역된 '엑셀코메노스'(ekselkomenos)는 사냥감이 덤불에서 끌려 나오듯이 사람이 자기의 욕심에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 수동태로서 그 무력한 태도가 강조된다.
'꼬임에 넘어가는'으로 번역된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는 낚시나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유혹에 걸리도록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 역시 수동태로서,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꼬임에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사냥이나 낚시에서 사용되는 두 단어의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유혹을 받는 그 원인이 다른 제3자나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를 짓고 싶어하는 각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있다. 이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의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므로 죄에 빠진 그 원인을 하느님께 결코 돌릴 수 없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5)
이 구절은 욕망(욕심)이 갖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악의 진행과정을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잉태와 출산, 성장과 죽음의 모습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쉴라부사'(shillabusa)의 원형 '쉴람바노'(shillambano)동사는 마치 여자가 은밀하게 아이를 가지듯이 마음에 욕심의 씨가 뿌려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욕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 '욕심'에 눈이 멀어 유혹된 인간의 내면에서 '욕심'은 그를 사로잡아 '죄'(하마르티아 ; hamartia)를 낳는다. 즉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그 '죄'를 낳는 것이다. (잠언7,15-23) 여기서 죄는 태아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죄는 갓난 아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죄를 방치하면 성장한다.
여기서 '다 자라면'(성장한 후)로 번역된 '아포텔레스데이사'(aphotelestheisa)의 원형 '아포텔레오'(aphoteleo)는 '완성하다', '다끝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성취될 때'(when is accomplished), 또는 '완전히 자랄 때'(when is full-grown)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자란 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죽음'이다(로마5,12 ; 6,20-21 ; 7,11).
여기서 '죽음'(다나토스; thanatos)은 바로 영적인 죽음, 즉 최후 심판때의 두 번째 죽음(묵시20,14)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최종 결과인 '죽음'은 12절의 '생명의 화관'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전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7-18)
이제 야고보는 17-18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심을 밝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선물'로 번역된 '도시스'(dosis)와 '은사'로 번역된 '도레마'(dorema)는 동의어이다. '도시스'는 주로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도레마'는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일 뿐이고, 둘 다 영역으로는 'gift'이다.
'위에서'라는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어지는 '빛의 아버지에게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빛의 아버지'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이다. 좋고 완전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내려옴을 강조한다.
'뜻을 정하시고'로 번역된 '블레테이스'(buletheis)의 원형 '블로마이'(bulomai)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나오는 사악한 욕망(욕심)의 반대 개념을 지니기도 한 동사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이는 외부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써 인생에 대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낳으시어'로 번역된 '아페퀴에센'(aphekiesen)의 원형 '아포퀴에오'(aphokieo)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 동사가 부정 과거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즉 거듭남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첫 열매', 즉 '아파르케'(apharche)는 원래 구약의 전문적인 제사 용어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과 동식물의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말론적 새 창조(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첫 열매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이다.(1베드1,23 ; 2코린6,7 ; 에페1,18 ;콜로1,5 ; 2티모2,15 ; 로마10,13-17).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마르8,14~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5)
마르코 복음 8장 15절의 두 동사는 모두 현재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명령임을 드러낸다.
'너희는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 be careful)의 원형 '호라오'(horao)는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실체를 알고서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블레페테'(blepete; beware; watch out)의 원형 '블레포'(blepo) 역시 사물이나 현상을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통찰하는 것과 어떤 것에 유의하고 조심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한 문장에서 동일하게 비슷한 뜻의 동사가 함께 연속해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할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누룩'에 해당하는 '쥐메스'(zymes; leaven)의 원형 '쥐메'(zyme)는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침투성과 영향력이 강한 악(惡)의 상징적, 비유적 매개체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타인에게 강하게 미칠 수 있는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징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불신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형식주의에서 비롯한 그들의 독선과 위선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는 그를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향에서 비롯되는 불경건과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6장 11절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 으로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사이에 '사두가이들'과 '헤로데'라는 차이가 있다.
사두가이들은 천사, 영적 존재와 영적 세계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는 등 비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며,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헤로데 당원들도 역시 정치적이며 불경건하고 비신앙적인 삶을 사는 세속주의자, 현세주의자들이므로, 두 집단이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바리사이, 사두가이, 헤로데 모두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강조하여 기록했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헤로데를 강조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5-21).”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이었고,
세속의 재물과 권력을 탐하면서, 그런 것들을 얻어 누리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1) 재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가르치셨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그들은 ‘부유함’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3-27)”
‘부유함’을 하느님 축복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제자들의 말은,
“하느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세속의 재물만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하느님만 추구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먹을 빵이 없는 것은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는 표시다.” 라는 사고방식.)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여기서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의식주를 걱정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걱정을 한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유함 자체에 대해서 하느님의 복을 받았다는 표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함은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빈부 차이는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신앙인은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가 함께 먹을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사람입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의식주를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고,
세속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만 먹으려고 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2) 권력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즉 세속에서의 출세를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그때 다른 제자들이 두 사도의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겼는데(마르 10,41),
그것은 그들도 마음속으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이 말씀은,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으면 안 됩니다.
세속에서의 출세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그 직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세도를 부리면서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는 남들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는 자리인 셈입니다.
세속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간에 높은 자리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누룩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누룩은 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런 누룩에 비유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하늘 나라와 같은 좋은 누룩이 나에게 작용한다면 내가 지닌 선한 요소들을 더욱 부풀어 오르게 할 것입니다. 선함과 이타심이 악습과 이기심을 누르게 될 것입니다. 반면 좋지 않은 누룩이 나에게 작용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지닌 형식적이거나 세속적인 누룩이 내 마음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의심과 불신, 이기심을 더 부풀어 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상하게 가르치시는데도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빵을 많게 해 주셨음을 상기시키지 않으십니까? 그런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걱정과 불안이 없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수군대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누룩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도 좋은 누룩이 발효하여 의심과 불안, 이기심이 희망과 이타심으로 승화하도록 주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