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금요일] 화해 (마태 5,20ㄴ-26)

에제키엘 예언자는,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라고 한다. (에제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에제 18,21-28)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1-23)
에제키엘 18장 21절에서 32절까지는 일시적 선악을 불문하고, 궁극적 선악에 따라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한다. 즉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는 방도로서, 회개를 통한 구원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단락인 21-24절은, 사람의 과거가 현재나 미래를 지배할 수 없으며, 사람은 언제든지 새로운 운명으로 진보하거나 퇴보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의인은 더욱 의롭게 살고, 악인은 악에서 돌이켜 회개할 것에 대한 기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악한 죄를 저지른 악인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회개하고 주님 대전에 의를 행할 경우, 심판을 모면하고 생명을 얻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 악한 삶에 빠져들 경우, 과거에 행한 의로운 일은 주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기할 수 있는 공로가 전혀되지 못한다.
자신의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는 주님 대전에 판단을 받는 당시의 영적 상태이며, 이는 인간 자신이 과거에 행한 죄악의 족쇄를 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이와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으며,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 그만큼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 회개를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돌아서서'에 해당하는 '아슈브'(yashub)는 원래 가던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돌이켜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슈브'(shub)의 미완료형으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가정적 진술이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가 어떤 것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곧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과거에 자기 죄악된 본성을 쫓아 행하던 그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향하여 걸어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 대전에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 말씀대로 살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 이며,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고 하니, 그 얼마나 기쁜 소식이며 복된 소식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실천한 정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조금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지금 현재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만약 과거의 죄악을 따진다면, 현재 아무리 정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과거에 죄악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서 정의를 행한다면,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결국, 이러한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자 지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돌이켜서 하느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보며 회개하여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4)
앞에서 밝힌 대로, 악인이 만약 과거의 죄악을 철저히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하고 살 수 있다면, 이와 동일한 원리로, 의인이 과거의 의로운 행위를 버리고 죄악의 길에 들어서 죄악을 행한다면, 그는 과거의 의로운 행위의 공로로 구원받지 못하고, 현재의 악한 삶으로 심판을 받아 죽게 될 것임이 분명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과거의 공로는 현재의 심판에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함을 잘 드러낸다. 하느님의 심판 기준은 현재의 삶이지, 결코 과거의 삶이 아니다.
유다 왕 우찌야의 경우 선견자 즈가르야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 대전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후에 왕권이 강화되자 교만한 마음이 들어, 마침내 패악한 짓을 저지른 사건을, 오늘 성경 본문을 이해하게 하는 실제적 사례로 들 수 있겠다. 그는 사제들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행하려다가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는 벌을 받는다. (2역대 26,1-21)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10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함으로써, 본문의 교훈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적 능력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겸손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주님이 제시하는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겠다.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 (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 (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해하여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ㄴ-22).”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그들보다 더’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 위선이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2).”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고,
즉 살의(殺意)를 품고 있는 것도 살인이고,
십계명을 어기는 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성을 내는 자”는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입니다.
즉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면서 화를 내는 자입니다.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와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분노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형제를 모욕하는 자입니다.
모욕은 상대방을 죽이려고 칼로 찌르는 일과 같습니다.
(실제로 모욕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일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깊은 상처를 입히는 일이 많습니다.
어떤 형제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되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든 그의 잘못은 잘못대로 따로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화를 내고, 그를 모욕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은 그 사람에게 있다. 나는 억울하다.” 라고
심판관이신 예수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앙갚음하지 마라. 원수도 사랑하여라. 형제를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를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입니다.
즉 내가 어떤 잘못을 해서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경우에,
그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래서 그 형제와 화해를 하는 일이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고, 즉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그에게 잘못한 일은, 즉 내가 그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일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릴 때가 많은데, 그것도 위선자의 모습입니다.
(피해자에게 사과하지도 않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으면서,
하느님께만 용서를 청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고해성사를 본다고 해도, ‘모고해’가 될 뿐입니다.
참으로 회개한다면 피해자에게 먼저 사과하고, 그에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둘 다 잘못한 경우에 “내 잘못도 있지만, 그쪽 잘못이 더 크다.” 라고
그 형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안 됩니다.
어떤 일에서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는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일이고,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는,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가 오해하고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내가 먼저’ 그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왜 잘못한 일이 없는 내가 먼저 그래야 하나?” 라고 항의하면 안 됩니다.
사랑 실천은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나는 몰랐다.” 라고 변명하면 안 됩니다.
‘무관심’은 사랑의 반대쪽에 있는, 즉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내가 먼저 사과하고, 내가 먼저 용서를 청했는데도
상대방이 나를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래도 내 마음대로 포기하거나 중단하면 안 됩니다.
회개와 보속은 내 마음대로 판단해서 중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회개와 보속을 미루지 말고 즉시 실행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말씀의 상황은, 내가 형제에게 어떤 잘못을 해서
형제가 나를 하느님께 고소하는 상황입니다.
(피해자가 하느님께 하소연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만일에 지상에서 회개와 보속이 제대로 완결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연옥으로 가야 할 것이고,
보속이 완료될 때까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죽어서 간 곳이 지옥이라면 보속을 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다면, 먼저 형제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을 먼저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독하는 일까지 금지하십니다. 분노와 모욕이 모든 분쟁의 발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음 안에 깃든 모든 악한 요소들을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어 형제와 불화 중인 사람은 그와 먼저 화해한 다음에 하느님 대전에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더욱이 용서를 청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계속하여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과연 그를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아직도 자신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어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고는 그 아픔을 느낄수록 용서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용서한다고 해서 아픔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픔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아픔은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미움과 같은 가시를 빼내고 진정 내 안에 평화가 넘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나아가 불의한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온갖 상처투성이인 인간관계, 병든 사회 구조를 치유해 나갈 수 있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