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간 토요일] 완전한 사람 (마태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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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시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신명 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신명26,16~19)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6)
모세는 주 하느님의 신적 명령에 의거하여 율법 준수 명령을 신명기 26장 16절에서 직설적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신명기 26장 17절과 18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느님 상호 간의 확인, 즉 율법을 매개로 한 명백한 상호 계약에 의거하여 율법 순종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물론 여기서 상호간의 확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것이며,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당신의 명령을 주어 즉 계속된 인도와 계시로 당신의 뜻을 가르쳐 지키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신명기 26장 19절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했을 때 실현될 결과적 축복을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뛰어난 민족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누릴 것이라는 축복 약속의 선포로, 순종 촉구 말씀의 대미를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제 신명기 26장 16절을 살펴보자. 신명기 4장 44절에서 26절 19절까지는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행한 제 2설교 모음집이다.
그중에서도 신명기 4장 44절에서 26장 15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지켜야 할 율법의 일반적인 원리들과 특별한 규정들을 다룬 계약 율법의 세부조항을 설명한 것이라면, 오늘 독서인 신명기 26장 16절에서 19절까지는 이미 언급한 율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제 2설교 모음집의 끝맺음 말이다.
여기서 모세는 계약의 중재자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여서는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을 선포하였고, 주님께 대해서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된 것을 선포하였다.
계약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그 계약의 두 당사자에게 각각 의무가 부여되는데,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을 이행할 것이 요구되며, 하느님 편에서는 이에 대하여 은총의 축복으로 반응할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계약 관계는 비단 고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하느님의 말씀의 현재성이 매우 부각되어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된다.
'오늘'로 번역된 '하욤 핫제'(hayom hazeh; this day)라는 두 단어에는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정관사 '하'(ha)가 각각 있어서 직역하면 '바로 이 날' 이다. 이 말이 가리키는 시기는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로 계약을 체결하는 그 순간에만 해당되지 않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율법이 모세 시대만이 아니라 그 이후 모든 세대를 위해서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이 과거 그 순간처럼 현재도 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재성은 '너희에게 명령하신다'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yeka)에서 엿볼 수 있다. 이는 '명령하다'는 의미인 '차와'(tsawa)동사의 강조형 분사형에 2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은 형태이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명령의 현재성을 드러내준다.
'이 규정들과 법규들을'
여기서 '규정'에 해당하는 '훅킴'(hukim)의 원형은 '호크'(hok)로서 '하카크'(hakak)동사에 파생했다. '하카크'는 일차적으로 바위에 묘비를 새기는 것처럼 돌을 쪼개거나 새기는 것을 의미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잊지 않도록 글을 쓰거나(이사49,16) 책에 기록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이사30,8). 따라서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 '호크'는 돌에 명확하게 새겨진 것처럼 변치않을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다음 '법규들'로 번역된 '함미쉬파팀'(hamishipatim)은 '재판하다', '심판하다'는 의미인 '샤파트'(shapat)동사에서 파생된 '미쉬파트'(mishipat)의 복수형에 정관사 '하'(ha)가 붙은 형태로서 '그 심판', '그 재판' 이란 뜻이다. 즉 이 단어는 한 조직의 모든 사법적인 기능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율법은 단지 죄를 재판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다스려 가기 위해 있기 때문에, '미쉬파트'는 인생을 옳은 길로 인도해 가는 올바른 판단 기준 혹은 정의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시편7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마음'으로 번역된 '레보브카'(lebobka)와 '목숨'으로 번역된 '나프쉐카'(napsheka)에는 각각 2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는 수단이 반드시 당사자로부터 나와야 함을 말해준다.
따라서 '마음'으로 번역된 '레보브카'는 '네 마음'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앙과 지식과 사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해야만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 할 수 있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는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이며,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습 가운데서 감추어진 것이 없는 전적으로 다 드러난 모습으로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숨'으로 번역된 '나프셰카'에서 나온 '네페쉬'(nepesh)는 '목구멍'이란 뜻인데, 일반적으로 '영혼'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본절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마음'과 '영혼'에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율법은 결코 비인격적인 법 조항이 아니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인격을 세워 가게 하는 인격적인 가치 체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태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43)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4)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겐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
마태오 복음 5장 43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문장은 '그리고'라는 접속사 '카이'(kai; and)를 사이에 두고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즉 '사랑해야 한다'의 '아가페세이스'(agapeseis)와 '미워해야 한다'의 '미세세이스'(miseseis)가 대칭을 이루고, '네 이웃을'에 해당하는 '톤 플레시온 수'(ton plesion sou)와 '네 원수는'에 해당하는 '톤 에크트론 수'(ton echthron sou)가 대칭을 이룬다.
그래서 문장 구조를 보아서는 '네 아웃을 사랑하는 것'만큼 '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동일하게 비중을 지니는 가르침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보편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있었으며, 이민족과 반민족자인 동족들이 압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공통의 적으로 생각하고 증오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당시의 시대상을 지적하시며 이웃 사랑의 새 기준을 제시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5장 44절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에서 '사랑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가파테'(agapate)는 앞절의 '사랑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아가페세이스'와 동일한 단어이며, 원형은 '아가파오'(agapao)이다. 이 '아가파오'(agapao)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 단어로서 자기 희생적인 순수한 사랑을 나타낸다.
사실 아담과 하와의 본성으로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대상이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그 원수에 대하여 본성과 계산을 뛰어넘어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베풀라고 요구하신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비우고, 그 비운 자리에 하느님께서 몸소 들어 오셔서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이 자신에게 임한 체험을 가진 자만이 확신을 가지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에서 '기도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스'(pros)와 '기도하다', '원하다'는 뜻의 '유코마이'(euchomai)의 합성어로서, '~을 위하여 간구하다'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지체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원수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인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인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이 수준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 5장 4절의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에서 순수한 영이신 하느님의 편재성(偏在性)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으로서 유한한 인간과는 다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녀'에 해당하는 '휘오이 푸 파트로스'(hyoi tou patros; the sons of father; the children of father)에서 '투 파트로스'(tou patros)는 '아버지의'라는 뜻을 지닌 소유격이다.
희랍어에서 소유격은 그 속성을 나타내어 '아버지를 닮은 아들', '아버지의 속성을 가진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 위해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45절은 믿는 이들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께서 악인과 불의한 이에게도 은혜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속성을 본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도 당연히 하느님과 같이 악인과 불의한 이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악인과 불의한 이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일반 은총이다.
일반적인 은총이란 악인과 의인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에게(사도14,16.17) 세상 보존 및 상선벌악(권선징악)을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로마13,1~4).

♣ 아무도 내치지 않고 품는 사랑 ♣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명심하여 실천함으로써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된다고 일러줍니다(26,16-19). 그러나 우리는 율법 규정을 지키는 데서 더 나아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26,16) 실천함으로써 온 존재가 그분을 닮음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 욕구를 좇아가기 쉬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려 하면서도, 율법 준수에 머물며 하느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소홀히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우리도 되풀이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고 하십니다. 그분은 동포는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전인적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 기준을 버리고 하느님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는 것은 내가 정한 목표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의 빗장을 풀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내가 기댔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을 마음을 다해 실천할 때 주님을 닮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5,45)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길이요 완전함의 길입니다. 따라서 ‘차별하지 않으며’ ‘한계를 두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다운 삶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사고의 틀과 경험과 좁은 신념, 종교, 혈연, 외모에 따라 습관적으로 가르고 차별합니다. 오해를 받거나 모욕과 무시를 당하면 꼴도 보기 싫어하며 관계를 단절해버리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종교적 확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겉모습만으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나 친지, 친밀감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잘하고 그들의 말은 무조건 받아들이면서도 나를 싫어하는 이들이나 별 친분이 없는 사람, 사회적 약자나 죄인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무관심한 경우도 많지요.
동족, 가족, 친구나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5,46-47).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랑이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바로 자신을 박해하고 중상하며, 증오하는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5,44).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원수를 포함해 아무도 내치지 않고 조건 없이, ‘먼저’ ‘다가가’ 품는 것이 우리의 도리임을 깊이 새겨야겠지요.
오늘도 배타적인 태도로 감정에 따라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선악을 가르며, 관계를 단절하는 좁디좁은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그 누구도 내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키우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악인마저도 구원되기를 바라시기에, 옳은 이에게나 옳지 않은 이에게나 골고루 햇빛을 비추십니다. 의로운 이나 불의한 이나 모두가 당신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란 어렵기만 합니다. 따라서 먼저 내가 부족한 존재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신앙생활을 통해 더 완전해지려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부족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이는 대가를 바라는 행위가 아닙니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은 원수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힘입어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악의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에서, 오히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랑을 넓혀 나갈 때, 오늘날 확산하고 있는 죽음과 파괴의 문화는 점차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원수를 '왜'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원수'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이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5-48).
사람들을 '이웃'과 '원수'로 편 가르기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른데, 더욱 잘 대해 줄 수도
있고, 타이를 수도 있고,
꾸짖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마태 18,17).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때,
사법 기관에 신고해서 법적으로 처리하도록 맡기는 것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원래 사법제도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교화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목적은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회개시키는 것은 잃은 양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로써 우상숭배자들을 원수로 규정짓고,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는
구약성경의 내용들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폐지된
셈입니다.)
원수를 '언제'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 실천은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지금' 해야 합니다.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면 그때 사랑을 주겠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심각한 범죄나 박해 때문에 큰 고통을 겪을 때,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증오심과 복수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증오심과 복수심이 더 큰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또 스스로 복수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대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속 편한 말만 하고
있다." 라고 불평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살해당하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모진
고난을 겪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속 편한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한때 박해자였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박해했던 신자들이 그에게 사랑을 주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입장에서는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원수인
자기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을 받음으로써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직접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라는 그의 말은
사실상 그 자신이 그렇게 굴복했던 일을 고백한 말과 같습니다.)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스테파노를 대신해서 복수하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해자 사울을 죽여버렸다면, 위대한 바오로 사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박해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스테파노의 기도도(사도 7,60) 헛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순교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복수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9-10)"
이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은
말이 베드로 2서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고, 동시에 한없이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비인데,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 자비를 거두시고, 정의를 집행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 때, '나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내가' 실천해야 하는
계명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원수 같은 나쁜 사람이고,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해야 할 좋은
사람이고..."
(자기가 받은 사랑은 잊어버리고, 자기가 실천한 사랑만 기억하고...)
'내가' 누군가의 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안 하는가?
어쩌면 "나는 누군가의
원수가 된 적이 없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남에게 원한 살 일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청할 일은 없다." 라는 말은 아무도 못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은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혹시 "하느님께는 용서를
청할 일이 많아도 이웃에게 청할 일은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런 말은 위선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