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화요일]선생님 (마태 23,1-12)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라고 한다. (이사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라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이사1,10.16~20)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8)
이사야서 1장 16~17절은 악의 제거와 선행을 명령하는 개혁을 촉구하는 부분으로서 간접적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리고 이사야서 1장 18~20절은 사죄(赦罪)의 약속 및 순종의 결과와 불순종의 결과를 말씀하심으로써 직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직접화법을 사용했다.
이사야 1장 18절은 사유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비하심(시편86,5)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님, 당신은 어지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크십니다.' (시편86,5)
그런데 사죄(赦罪)의 제의를 범죄자 편에서 먼저 하지 않고, 사죄의 은혜를 베푸시는 시혜자(施惠者)편에서 먼저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범죄한 자가 형벌이 두려워 사죄의 은총을 먼저 부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죄의 부탁을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지도 않았는데, 주님께서 먼저 일방적으로 제의하고 있다. 이것은 더없이 큰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의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오너라'에 해당하는 '레쿠'(leku)는 문자적으로 '걸어서 오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변론의 자리에로의 초청에 즉각적으로 나아오며, 그것에 적합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보여야 함을 간곡하게 촉구하기 위한 표현이다.
이러한 간곡함은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이 단어 바로 뒤에 '원컨대', '제발', '지금'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불변사 '나'(na)가 나온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또한 바로 뒤이어 나오는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에 해당하는 '웨니우와케하'(weniuakeha)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은 접속사 '와우'(wau)에 시시비비를 꼼꼼하게 따져 보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야카흐'(yakah)의 1인칭 복수 연장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연장형은 반드시 변론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시비비를 따져보며 변론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따져 가려보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용서해 줄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를 따져 가려보자는 의미다. 이런 표현속에는 이스라엘이 비록 치명적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용서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는 의미이다.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이 구절안에는 '만일'이란 의미의 불변사 '임'(im)이 2회 사용된 가정문이며, 직유법이 사용된 같은 의미의 대구 구문이다. 여기서 '진홍'과 '다홍'은 서로 대구를 이루며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눈'과 '양털' 역시 상호 대구를 이루며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
'진홍'과 '다홍'은 둘 다 붉은 색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반면에, '눈'과 '양털'은 둘 다 백옥처럼 하얀 색조를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붉은 색의 이미지는 흉악한 죄를 너무나 많이 지어 그 죄의 흔적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반면, 흰 색의 이미지는 죄의 흔적이 하나의 티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러한 색조의 대조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다 용서하실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다 불의에서 떠나 거룩하게 살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거듭 남(새로 남)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는 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한 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에 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그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다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은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의 핵심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입니다.
뜻에
따라서 이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그들은 신앙인이 실행하고 지켜야 할 것들을 말하면서도,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 즉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예 그의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 (루카 11,1-2)”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당신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고,
예수님을 본받아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라는 명령 때문에 억지로 기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기도하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기도하면 됩니다.
만일에 부모 자신들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에게만 기도하라고 ‘명령’하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마음에도 없는 억지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억지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연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가르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들에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이라는 말씀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신학 공부가 아닙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신학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잘 설명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이름 석 자도 못 쓰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처럼만 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경우를 보면,
사실 그들은 기도를 대단히 많이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기도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위선’이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이 말씀과 앞의 말씀을 합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평소에 성실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기도하면 안 된다.
그들의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위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 기도와 진짜 기도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니까
위선자들의 기도가 거짓 기도라는 것을 아시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을 모릅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남의 기도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양심적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만 기도하고,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기도하지 않고...
그런 모습을 남들은 몰라도 하느님께서 아시고, 자기 자신의 양심이 압니다.
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당시 율법에 따라
자선 실천을 잘했고,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자선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
이 말씀과 앞의 말씀을 합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평소에 늘 자선과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해야 한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행하는 자선은 본받지 마라.
그들의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위선이기 때문이다.”
자선과 이웃 사랑 실천의 경우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만 양심적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어서 하는 일인가?
아니면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인가?
사회적인 체면과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많이 내지만,
속으로는 아까워하고, 자기가 한 일을 생색내고, 과시하고...
그런 속을 남들은 몰라도 하느님께서 아시고, 자신의 양심이 압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는 예수님 말씀은
사실상 모든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또는 우리는, 또는 나는, 위선자인가? 아닌가?
옛날 이천여 년 전의 유대교의 잘못에 대해서만 말하면서
“지금의 우리는(나는) 그렇지 않다.” 라고 자만심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