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수요일] 몸값 (마태 20,17-28)

2018. 2. 28. 오전 7:43:09

글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몸값 (마태 20,17-28)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을 없앨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주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준 일을 기억해 달라고 주님께 하소연한다. (예레18,18-20)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며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마태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예레18,18~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20)


예레미야서 18장 1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문문을 이끄는 의문사'하'(ha)가 서두에 나와 본문을 수사 의문문으로 이끌고 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선민 이스라엘 공동체의 현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음예레미야는 주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멸망으로부터 동족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한편

주님께 이 백성을 위한 중재(중보)기도 올렸다(예레14,7~15,9). 그런데도 이 백성은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목숨을 해치려고 구덩이를 파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이 백성의 포악한 행태를 참다 못해 주님께 아뢰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심을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그에 대한 책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성경에서 '구덩이' 숨을 수 있는 '굴'(2사무17,9)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옥','저수 동굴'(예레38,1~13), '웅덩이','함정','구렁'(시편35,7), '올무','올가미','덫'(시편140,6)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일차적으로는 '함정'이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감옥' '매장지'라는 의미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남부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를 저수 동굴(구덩이로 된 감옥)에 가두었고 (예레38,1~13)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놓았습니다'란 표현은 그들이 단지 예레미야를 적대시하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그를 해치고 제거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제가 당신 앞에 서서'에서 '서다'라는 뜻의 동사 '아마드'(amad)는 일차적으로 '서다'육체적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구약 성경에서 본문처럼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중재(중보) 기도의 자세를 나타내는 문구이기 때문이다(창세18,22; 신명4,10). 예레미야는 '주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그들을 위해 복을' 주님께 고하며 중재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해 줄 것을 주님께 간청한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주님 앞에서 옳게 행했음을 변론하는 것 아니라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는 백성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판단하시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마태20,17~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 '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 '집사' (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풀다'(마태16,19), '벗다'(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7년 3월 15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으실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더욱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의 옆자리나 탐내지 않습니까?
이는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두 아들은 자신만만하지요.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하느님 능력에 의존할 때만 진정한 힘이 나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을 차근차근 설명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을 섬기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에 오로지 주님께만 의존하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 참된 가치만을 추구하기에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대속의 역할입니다. 오늘날에는 순교와 다른 모습으로 대속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사랑과 봉사, 희생을 기꺼이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역할을 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오늘의 복음 (마태18.18~20)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섬기며 오르는 하늘 나라  

우리네 삶을 보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남보다 튀려하고 드러내려 하고 높이 오르려 안달하는 '무한 상승 중독환자'가 적지 않다. 바벨탑처럼 높이 치솟는 빌딩과 더불어 욕망의 탑도 올라만 가는 것일까? 때로는 자신만 높이 올라가려고 주변 사람들을 짓밟아버리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진정 높은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준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순종하였음에도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통을 당했으며, 또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두둔하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백성에게 파멸을 선포해야 하는 소명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는 희망만을 예언하고 싶었지만 주로 ‘밟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는 것’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목숨까지 노리는 많은 적들이 생겼고 하느님 처사에 항의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혹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었다. 그는 하느님 때문에 고통의 저 밑바닥 심연으로 내려가 못나고 죄 많은 백성을 섬긴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께 다가올 십자가, 모욕,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까지 와서 치맛바람을 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께 뭔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0,21) 하고 말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명예와 지위, 권력을 얻으려고 욕망을 키우고 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도 경솔함이나 입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께서 체포되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마르 14,50). 다른 열 제자들은 이들의 말에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0,24). 자기들은 제쳐놓고 앞서 나가려는 그들에게 불평과 질투가 표출된 것이다. 세상은 사회적 지위와 부와 권력을 지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0,26)고 하신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비민주적 악제와 폭정을 일삼았다. 압제와 폭정의 정치 세계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단과 공동체에게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봉사자가 되고, 작아지고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높은 사람’이 되려면 생명을 바쳐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대조사회의 삶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남을 섬김의 삶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실제 살아내지 못하고, 섬기는 수고로움보다 섬김받고 대접받는 걸 훨씬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모든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뒤집으시며 인간을 섬기셨듯이 우리도 ‘밑바닥 심부름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 봉사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다(20,28). 하늘나라는 섬기며 오르는 산이요 사랑하며 함께 오르는 산이다.

이제부터라도 현세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능력을 앞세워 거드름을 피우는 악취 나는 교만한 행동을 멈추도록 하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 ‘높은 사람’ 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 누구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보자! 그렇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 되고 싶고 이루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남을 위하여 모든 것이 되고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때’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현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때문에’ ‘죽어야’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다. 사랑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려는 것이 바로 우리네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그것이 진정 높아지는 행복의 길이기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