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5주간 금요일]신성모독죄(요한10,31-42)

2018. 3. 23. 오전 7: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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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5주간 금요일]신성모독죄(요한10,31-42)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고 고백한다. (예레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하자, 그들의 손을 벗어나셔서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신다. (요한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제1독서 (예레20,10-13)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10) 

마고르 미싸빕(magor misabip)의 뜻을 알아야 한다. '마고르'(magor)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꾸르'(gur)에서 유래한 명사로 '공포', '두려움'을 뜻한다. '미싸빕'(misabip)은 '주변', '사방'을 뜻하는 명사 '싸비브'(sabib)에 전치사 '민'(min)이 결합된 형태로 '사방으로부터', '주변으로부터' 뜻이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사방으로부터의 공포' 뜻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시편 31장 14절을 빼놓고는, 모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 31장 14절에서 예레미야가 전용해서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녕 저는 많은 이들의 비방을 듣습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옵니다.(마고르 미싸빕 ; magor misabip).  저를 거슬러 그들이 함께 모의하여  제 목숨 빼앗을 계교를 꾸밉니다." (시편 31장 14절)

 

다윗의 애가인 시편 31장 14절에서 시작된 이 표현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면초가의 매우 곤란한 처지와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 말은 원래 예레미야 예언자를 박해했던 주님의 집(성전) 총감독인 파스후르 사제에게 예레미야가 한 말이었다.(예레20,1-6참조)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파스후르가 아니라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실 것이오." (예레20,3) 

'파스후르'(pashehur)는 '비옥한'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 '푸쉬'(push)의 분사형인 '파쉬'(pash)와 '주위를 둘러서', '주변에'란 뜻을 지닌 아람어 '쎄후르'(sehur)라는 단어의 유사음을 지니고 있다. 원래는 '파스후르'가 '찢다', '조각내다'란 의미를 지닌 '파솨흐'(pashah)에서 유래한 단어로 여겨지는데, '자유' 내지는 '자유롭게 하다'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마고르 미싸빕' 즉 '사방으로부터의 공포'란  바뀌어진 이름이 들려 졌을때, 즉각적으로 '주변의 비옥함'이란 뜻의 '파쉬 쎄후르'가, '파스후르'란 이름에서 연상된다. 이는 곧 그 이름의 개명이 주는 저주와 심판의 이미지 보다 생생하게 전달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 유희를 통해 예레미야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세속적 권세로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를 막으려는 '파스후르'가 '주변의 비옥함'을 누리는 삶의 자리에서 '사방의 공포'가 밀려오는 비참한 상황에 떨어지게 될 것임을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파스후르'가 '마고르 미싸빕'이라 불리어질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대적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마고르 미싸빕'이라 부르며 그를 조롱한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넘어뜨리고 해치려고 사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들었다고 하느님께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분, 자신이 처한 이러한 위기 가운데서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10)

자신들의 죄를 고발하는 예레미야에 대해 그의 허물을 찾아내어 맞고소하겠다는 적대자들의 위협이다. 지금 적대자들은 예레미야를 참 예언자가 아니라 거짓 예언자라고 단정하고 그를 참소하며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가까운 친구들마저'에 해당하는 '에노쉬 쉘로미'(enosh shelomi)는  '내 평화의 사람', '내게 평안을 기원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아주 가까운 친구' 가리킨다.(시편41,10) '제가 쓰러지기만' 해당하는 '찰르이'(tsali)는 '절뚝거림', '넘어짐'(시편38,18)을 뜻하는 '첼라으'(tsela)에 1인칭 대명사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평소에 자신의 평화를 빌어주던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자신의 넘어짐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다는 이 고백은 예레미야가 얼마나 고독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격려도 위로도 없이 예언직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친한 벗들도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를(실족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배신했다는 뉘앙스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41,10)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 

예레미야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는 그 적대자들이 그를 속여서 이기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20장 7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주 하느님께 완전히 졌음을 선언했기 때문이다.(예레20,9)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꾀셨고, 예레미야는 그 꾐에 넘어갔다.(예레20,7)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이기셨고,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완전한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리라.'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20,9)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그 적대자들은 결코 예레미야를 유혹할 수도, 이길수도 없게 된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다섯번째 고백의 전반부에서(예레20,7-10) 하느님께 불평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승리를 암시하는 복선을  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본절 이하부터 11-13절에서는 예레미야 자신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확신을 선언한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2)

앞에 11절에서 자신과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적대자(원수)가 패망하고 자신이 승리할 것이란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되었다. 이제 12절과 13절에서는 적대자에 대한 복수를 간구하고, 이것의 실현을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된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일에 따라, 제 행실에 결과에 따라 갚는다." 라고 소개하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의 행실대로 보상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특별히 '의인(의로운 이) 곧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그러한 주님의 보살피심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절과 병행 구절인 예레미야 11장 20절의 표현을 감안할 때, 실제로 그 적대자들의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꿰뚫고 계심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본절은 사실상 예레미야 11장 20절의 반복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꿰뚫어 보심의 대상을 '의인'인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제 곁에 계시니'(11절)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특별히 주 하느님과 예레미야 자신과의 관계성에 촛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심장(마음)과 속(폐부)를 보셨다. 다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견딜 수 없었던(9절참조) 예레미야의 마음을 보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실 것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 악인들의 속(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패망을 당하게 되는 주님의 복수를 겪게 될 것이다. '복수', '보복'을 뜻하는 '네카마'(neqamah)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복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종종 인간은 복수의 이차적 원인이고, 반면에 하느님께서 그 일차 원인자로 계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원수를 갚겠다.내 분노와 내 화에 따라 에돔에게 보복하겠다.그러면 그들이 나의 복수를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0,14) 

"내가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나의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되갚으리라."(신명32,41)

본문의 복수의 요청은 예레미야 개인의 원한에 찬 복수의 요청이 아니다. 이는 하느님께 범죄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신실한 예언자로서의 기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복수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신께서 ...복수하시는 것을'(주님께서 ...보복하심을)로 번역된 '니크마테카' (niqmatheka)는 '네카마'에 2인칭 남성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 '당신의 복수'란 뜻이다.  이처럼 '나의 복수'가 아니라 '당신의 복수'라고 예레미야는 언급함으로 하느님의 공의(정의)에 호소하고 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요한10,31~4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34)

본문은 시편 82장 6절을 70인역(LXX)에서 정확하게 인용한 말씀이기에 따옴표 역할을 하는 '호티'(hoti)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시편 82장 6절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인데, 여기서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I have said you are gods)이 인용되었는데, 시편 82장 6절의 문맥은 원래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판장들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들 및 재판장들은 하느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그들의 공적 업무에 신적(神的)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판장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진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임의성이 개입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준을 따라야 했다.

여기서 '신'으로 번역된 '테오이'(theoi)는 문자적으로 '신들'(gods)로 번역된다.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복수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이 '엘로아'(eloa)복수로 간주되는 '엘로힘'(elohim)인데, '엘로힘'(elohim)이 하느님의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쓰일 때에는 '재판관들'(judges), '천사들'(angels)과 같은 복수형의 의미로 번역된다. 

이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하느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중심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신'하느님 자신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 10장 35절, 36절과 더불어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대리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께서 몸소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시라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절대시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경직되고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2010년 3월 26일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내 방식이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 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 배척하다

예레미야는 고난과 박해를 받은 예언자입니다. 그가 모든 곤경을 이겨낼 수 있던 힘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예수님의 수난을 보여 주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따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 죄로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선한 업적과 말씀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눈으로 보아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하는 유다인들의 행동은 편견과 우월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집에 찬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을 지키려고 폭력을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태도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선한 일을 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심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신원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주님을 힘센 용사로 모시는 사람은 어려움을 이겨 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지거나 박해할 때, 우리는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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