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토요일]예언(요한11,45-56)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리라고 한다.(에제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카야파 대사제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실 것이다. (요한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눈엣가시>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가장 사명 가운데 가장 큰 사명은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이 쌍날칼처럼 날카로워서 섬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그 말씀이 당대 세도가들의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비수 같은 말씀이어서 늘 도망가고만 싶었습니다.
듣기 싫다고 귀를 막는 백성들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는 지도자들을 향해 예언자들은 죽기보다 싫었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눈물을 머금고 ‘쓴 소리’를 마구 퍼부어야 했습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시작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존경, 안정된 생활과도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늘 외톨이가 되어, 늘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고독하고 쓸쓸하게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어린 소년 시절부터 원치 않았던 예언자의 길에 접어든 예레미야가 한 평생 겪었던 고초는 정말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적대자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늘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한때 예레미야는 자신이 받은 예언 직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으면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 역시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받고 있는 예수님의 고독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의 행동거지에 ‘태클’을 겁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조목조목 옳은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바리사이들은 수석사제들에게 압력을 넣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의회석상에서 예수님의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며 고발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형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 자리에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도 직무상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여러 의견들이 개진된 다음 결론삼아 한 마디 던집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가 던진 이 말은 사실 민감하고 난처한 ‘예수 사건’ 앞에 자신을 다치지 않고 싶다는 자기변호용 발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 사건’으로 인해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백성들 앞에서 위신이 실추된 바리사이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고발해왔습니다. 백성들 역시 ‘예수 사건’에 대한 뭔가 뚜렷한 지침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당국이나 헤로데 왕권 역시 ‘예수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왜 하필 내가 대사제직을 맡은 기간에 이런 난감한 문제가 생겼을까, 고민이 않았습니다. 가장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무엇인가, 길을 찾기 위해 골똘히 연구했습니다. 가장 자신에게 바람직한 것은 더 이상 시끄러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대사제의 직분에까지 올라간 사람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조금이나마 감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수님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지켜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정체파악을 위해 더 기다려봐야 하나, 고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이 복잡하게 꼬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로마군대의 개입, 그로 인한 국론의 분열, 흉흉해질 민심, 이런 것들이 싫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도래보다 자신과 가족들의 안위가 더 급선무였습니다.
결국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한 사람을 처형하는 쪽으로. 이제 의회의 결의도 끝났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어떻게 체포하고, 언제 처형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을 거슬러 모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사랑 자체이신 분, 백성들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를 끝내 몰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무고한 그를 법정에 세워 흉악한 범법자처럼 다뤘으며, 끝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에제키엘 예언자는 다윗 가문에서 나올 ‘유일한 목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임금이신 그 목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영원히 지속되는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이며 ‘하느님의 성전’을 영원토록 백성 가운데 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에제키엘의 예언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루어짐을 알게 됩니다. ‘백성을 위한 한 사람의 죽음’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온갖 죄악에서 백성을 구원하실 죽음, 백성 가운데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져올 죽음을 말합니다.
카야파 대사제는 예수님의 기적들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으로 로마 군대가 개입할까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제 계급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대한 걱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은 정치적인 사안으로 해석되고 변질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해야 그들의 입지가 보존된다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형세 속에도 구원의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카야파의 정략적인 음모가 오히려 구세주의 구원 계획을 드러낸 예언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기로 예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맺으시는 ‘평화의 계약’과 ‘하느님의 현존을 이루는 성전’은 당신의 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하나로 일치된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구체적인 살과 피로 이루어지는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에 동참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