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토요일]메시아 (요한7,40-53)

2018. 3. 17. 오전 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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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토요일]메시아 (요한7,40-53)


예레미야 예언자는, 악인들의 음모를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다고 고백한다. (예레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며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고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예레11,18~20)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19)


예레미야서 11장 19절에서 예레메야는 자신을 '순한 어린양'으로 비유한다. 11장 19절'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에 해당하는 '로 야다으티'(lo yadahthi)를 통해 '순한 어린양'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예레미야서 11장 18절에서 밝힌 것처럼 주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에 대한 살해 음모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순한 어린양'의 비유와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라는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순한 어린양'에 해당하는 '케베스 알루프'(kebes alluph) '길들여짐', '고분고분함' 이라는 의미의 명사 '알루프'(alluph)'어린양'(레위14,5; '어린 숫양')이라는 의미의 명사 '케베스'(kebes)로 이루어졌다. 

아마 사무엘 하권 12장 3절 나탄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케베스 알루프'집안에서 키우는 길들여진 어린양(작은 암양)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한 본절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자신이 도살당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순순히 도살장으로 끌려갈 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한편 이처럼 예레미야는 현실에 어두운 반면에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은 아주 용이주도 하였다. 이것은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없애려고'에 해당하는 '하셰부'(hashebu)'계산하다', '세어보다'(창세15,5), '짜다', '꼬다'(탈출28,15), '궁리하다', '고안하다' (탈출35,32)라는 의미의 동사 '하샤브'(hashab) 완료형이다.


이 동사는 바로 이 '하샤브'(hashab)동사에서 유래한 '마하샤보트'(mahashaboth) 목적어로 취하고 있다. 

'음모를 꾸미는 줄'에 해당하는  '마하샤보트'(mahashaboth)'꾀', '계획'(잠언15,16), '모략', '계략'(다니엘11,25), 모해', '흉계'(애가3,61), '계획'(잠언19,21), '생각'(이사55,7)이라는 명사 '마하샤바'(mahashaba) 복수형이다.


즉 본문에서는 실을 가지고 천을 짜듯이 매우 정교하고 철저하게 궁리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이 동사의 명사형 북수형을 목적으로 취하여 아나톳 사람들이 일시와 장소 그리고 전개 과정 등에서 철두철미한 살해 계획을 모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의 말씀 선포라는 예언직을 수행한 것에 대한 백성들의 응답이처럼 그 예언자를 죽이겠다는 치밀하고도 의도적인 살해 계획이라는 사실 주님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너무나 큰 절망과 낙심에 빠졌을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서 11장 19절 후반부아나톳 사람들이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하는 열매와 나무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면, '나무'는 분명 '예레미야'를 가리키기에 그의 '열매' 예레미야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17장 1절과 2절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독신 생활을 명받았고 그로 인해 자녀를 둘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후의 기록을 보아도 예레미야의 결혼나 자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본문의 '열매'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예레미야의 입에서 증거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본다. 

즉 당시 아나톳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거부하고 박해할 때 다른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 했던 것이다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요한7,40~53)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 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49~52)

 

예수님께 대해 약간의 호의적인 반응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질책하던(요한7,47) 바리사이들은 이제 그들을 율법도 모르는 자로 매도하며 저주까지 퍼붓고 있다. 

여기서 '저 군중'에 해당하는 '호 오클로스 후토스'(ho ochlos houtos; this people)랍비 문학에 나오는 '암 하아레츠'(am haarets), '땅의 백성'과 동일한 뜻이다.


랍비들의 규범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관련하여 6가지 사실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증거를 위임하거나 취하지 말 것, 그들에게 비밀을 말하지 말 것,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삼지 말 것, 그들에게 자선비의 관리를 맡기지 말 것, 일체의 매매 행위와 친교를 하지 말 것을 규정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주받은 무리로 여겼다. 이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우월감과 아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요한 복음 7장 50절'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에서 '말하였다'번역된 '레게이'(legei; asked) '레고'(lego)3인칭 단수 현재 시제로서 그의 등장이 극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 7장 45절'돌아오자', '물었다' 그리고 7장 46절'대답하자'가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나오는 반면에, 여기 '말하였다'현재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코데모의 말이 당국자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그 어조가 매우 적극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레고'(lego)라는 단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니코데모가 말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말의 내용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투스'(autous; them)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18,9)을 가리킨다.


니코데모는 무조건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기에, 용기를 내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니코데모는 불의를 보고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 득실을 따져서 가만히 침묵하는 그런 자는 아니었다.


한편 요한 복음 7장 51절에서 니코데모는 율법이 사람을 판결하는 원칙을 당국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니코데모가 여기서 변호하고 있는 대상인 '그 사람'에 해당하는 '톤 안트로폰' (ton anthropon; the man)'a man'이나 'the man'으로 영역된다. 

'a man'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반면에, 'the man'그 대상이 예수님께 국한된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이미 논의를 마친, 예수님을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the man'이 옳은 것 같다.

또한 '심판하게'에 해당하는 '크리네이'(krinei; judge; condemn)'판결하다', '단죄하다', '언도하다', '처벌하다' 등의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법적 술어로 쓰였다.


니코데모는 여기서 율법이 판결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말을 들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위(하는 일)을 알아보는 것이다.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먼저 당사자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는 일을 알아보고'그가 무엇을 행하였는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로 번역된 '그노'(gno; know)'기노스코'(ginosko)부정 과거 가정법인데, 이 동사는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찰이라는 확인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니코데모가 지적한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미 편견과 선입견 속에 사로잡혀 판단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그의 제안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끝으로, 요한 복음 7장 52절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라는 질문은 이미 니코데모가 갈릴래아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동시에 니코데모를 예수님을 지지하는 무리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비난하는 내용담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했던 니코데모를 무시해 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를 나타내는 '프로페테스'(prophetes; prophet)에는 정관사 '호'(ho; the)가 붙어 있지 않다. 

이것은 메시야와 동일시되는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나와(모세와) 같은 예언자'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자를 모두 통칭하는 것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예언자도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 요나, 호세아, 나훔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아모스와 엘리야 및 엘리사도 갈릴래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열왕14,25참조). 

그러나 당시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할 정도로 지독한 지역적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었기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아집과 편견과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심판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기 동족들의 미움을 산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처지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다.”(11,19)며 탄식합니다. 그는 그들의 살의에 가득 찬 태도 때문에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마저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몰랐다며 주님께 복수해 달라고 청합니다(11,20). 그는 고통스런 죽음을 맞지만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예레미야에게서 드러났던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해 더 뚜렷이 드러납니다. 군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참 예언자라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메시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 나올 리가 없다고 합니다(7,40-44). 그들 눈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만 들어왔던 것이지요. 

한편 성전 경비병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7,46)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잡으러갔으나 감히 그분을 잡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오만에 가득 차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7,49)라고 경멸합니다.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과 명예욕, 자신들의 사고의 틀에 묶여 참 하느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고정관념, 자신의 지식, 신념, 자신만의 잣대로 감히 하느님을 저울질 하고 세속화 한 질서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버리려 한 것입니다.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자기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부정하고 그에게 호의를 드러내는 군중을 저주합니다. 율법에 터 잡아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예수님의 권리를 옹호하려는 니코데모를 모욕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의 음모와 악의와 적대심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은 드러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곧 하느님을 나의 사고의 틀이나 이기적인 목적으로 가두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분의 정체성은 논쟁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드러나는 자애로우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나의 잣대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잣대로 하느님을 정의하고 판단하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아집과 편견, 사고의 틀로 보고 만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하느님을 도구화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사회 인습과 제도의 틀 안에 하느님을 가두려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악의와 악행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선의를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고 사랑에서 멀어져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일조차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악의와 음모, 거짓과 불의를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야 마심을 믿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아는 것이 힘이 되기를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래 전 도울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앟은 마음을 감춘 채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지식이 명예와 안락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알아보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에게는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헛된 바람을 지니지도 말며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래아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틀린 기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집트의 피난살이를 마치시고 나자렛 산골에서 자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성경의 예언을 생각하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맞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을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단죄합니다. 그들은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앞세워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아집과 인습의 사슬에 매여 있는 사람, 영적으로 눈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은 착각과 편견을 낳습니다. 권력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진리를 거짓으로, 메시아를 사기꾼으로 매도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니지 못하고 사람의 약점과 실수를 들추어내며 확대시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면서 실은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자랑하고 삽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틀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께 억울한 일, 잘못한 일을 아뢰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기도의 시간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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