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다 이루어졌다. (요한 18,1-19,42)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한다. (이사52,13―53,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시편 31(30),2와 6.12-13.15-16.17과 25(◎ 루카 23,46)
◎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
○ 모든 원수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웃들을 소스라치게 하나이다. 아는 이들도 저를 무서워하고, 길에서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 가나이다. 저는 죽은 사람처럼 마음에서 잊히고, 깨진 그릇처럼 되었나이다. ◎
○ 주님, 저는 당신만 믿고 아뢰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제 운명 당신 손에 달렸으니,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라, 마음을 굳게 가져라. ◎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 (히브4,14-16; 5,7-9)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요한18,1―19,4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5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요.”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아니오.”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24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나는 아니오.”
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30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그러자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34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빌라도가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40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바라빠는 강도였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 이 사람이오.”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7 그러자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목마르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제1독서(이사52,13~53,12)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었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3)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4)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의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6)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7)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었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53,3)
'그는 멸시받고'에 해당하는 '니브제'(nibze)의 원형 '빠자'(baza)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이 주님의 종이 그들에게 왔을 때, 메시야로 인정할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다고 판단하여 무시하고,그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멸시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배척당할'에 해당하는 '와하달'(wahadal)의 원형 '하델'(hadel)은 '거절된'이라는 의미로서 '멸시받고'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다. '고통'에 해당하는 '마크오보트'(makobot)의 원형 '마크오브'(makob)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이다(탈출3,7; 이사53,4).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진리를 배척하는 사람들로 인해 메시야가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당할 것을 암시한다(마태23,37~39). 또한 '병고'에 해당하는 '홀리'(holi)는 흔히 육체적 질병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신명7,15; 2역대21,15; 이사38,9).
이 두 표현은 함께 사용되어 인간이 죄로 인해 경험하는 세상의 각종 고통과 고난을 나타낸다.
이러한 분문은 주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신 동시에 순수한 인성을 지니신 분임을 잘 보여주며 더 나아가 인간의 모든 고통을 경험하셨으므로, 인간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는 모습을 회화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보통 이것을 두가지 의미로 해석하는데, 사람들이 메시야에게 자신들의 얼굴을 숨긴다는 의미와 메시야가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숨긴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메시야가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있을 수 없는 일, 즉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메시야가 환영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3,4)
여기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53장 9절까지는 주님의 종의 고난을 예언하며, 그 고난이 대속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전반부인 이사야서 53장 4~6절에서는 대속 고난을 위한 주님의 종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희생을 부각시킨다.
인간은 죄악을 범하여 하느님의 친교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메시야는 그 인간을 대신하여 매를 맞고, 찔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시게 되는 것이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며(창세2,17; 로마6,23),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는 것이(레위17,11; 히브9,22) 영원불멸의 원칙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구약 시대에는 양과 송아지를 희생하는 제사 제도를 주셨지만, 동물의 피가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씻을 수는 없다(히브10,4.11). 동물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사람의 죄를 생각하게 하는 기능일 뿐이다(히브10,3).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참된 것의 그림자로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동물 제사 제도를 허락하셨으며(히브8,5; 9,11), 때가 되어(갈라4,4) 온전한 희생 제물의 자격을 갖추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어 단 한번의 제사로써 완전한 속죄를 이루게 하셨다(히브9,12; 10,12.18).
그리스도가 단 한번 죽어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릴수 있는 것은 그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히브4,15).
이사야 53장 4~6절은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죽음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병고'(홀라예누; holayenu)와 '우리의 고통'(우마크오베누; umakobenu)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각각 이사야서 53장 3절의 '병고'와 '고통'에 해당하는 원어와 동일한 어근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메시야가 하느님의 백성이 겪는 그 병고와 고통을 '대신 메고 갔으며','대신 짊어졌다'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는 '나사'(nasa)와 '쎄발람'(sebalam)이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바빌론 우상의 무능과 하느님의 참 구원자되심을 밝히는 이사야 46장 1~7절에서 반복 사용되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곳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 바빌론의 우상 숭배자들이 그 우상을 어깨에 매고 들어 나르는 것과 그에 반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을 품에 안아 보호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문의 이 두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그의 독생성자이며 대속의 사명을 감당할 주님의 종에게 인류의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짊어져야 할 그 병고와 고통을 완전히 덜어 주심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이방의 종교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 지우는 것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 준다.
주님의 종 메시야는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병고와 고통을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를 통해 직접적인 혜택을 얻는 우리 인간은, 그를 보면서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징벌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53,5)
이 구절만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생하게 예언하는 구절도 없고, 이 구절만큼 인간이 하느님께 범한 죄악의 심각성을 현저하게 드러내주는 것도 없다.
'찔린 것'을 묘사하는 '메흘랄'(mehlal)의 원형 '할랄'(halal)은 문자적으로는 구멍을 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메시야가 당할 고난과 고통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데, 주님께서 가시관으로 머리에 찔림을 당하고, 대못으로 손과 발에 못박힘을 당하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는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야의 이러한 고난과 고통이 모두 우리의 '악행'때문이다.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에 해당하는 '밉페샤에누'(mippeshaenu)의 원형 '페샤으'(peshah)는 변절하고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2열왕1,1; 이사1,2; 43,27). 즉 사소한 실수나 연약함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으스러진 것은'에 해당하는 '메둑카'(medukka)의 원형 '따카'(daka)는 단순히 피부가 상하는 정도의 상태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 단어는 짓밟혀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다(욥4,19; 22,9; 이사3,15;19,10).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메아오노테누'(meaonotenu)의 원형 '아온'(aon)은 '페샤으'와 마찬가지로 주 하느님을 배반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등의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죄악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본문의 '징벌'에 해당하는 '무싸르'(musar)는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바로 잡기 위해 근실히 징계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잠언13,1.24; 15,5).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쉘로메누'(shelomenu)의 원형 '샬롬'(shalom)은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느 것 하나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행복의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써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직접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그 잘못된 것으로부터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그 징벌의 댓가는 죽음일 수 밖에 없기에 하느님의 징벌을 직접 받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돌이킬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느님과 온전한 관계의 회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상처로'(개신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에 해당하는 '우바하부라토'(ubahabrato)의 원형 '합부라'(habbura)는 매질과 큰 상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육체적 고난을 상기케 한다(마태27,26-30; 마르15,15.19; 요한19,1~3참조).
그러나 이 단어는 이러한 육체적 측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고난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았다'에 해당하는 '니르파'(nirpha)는 '라파'(rapha)의 수동형으로서 인간이 어떠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의 수혜자가 됨을 말한다. 이것 역시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회복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회복을 다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의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53,6)
원문상으로 본절은 '우리는 모두'로 시작하여 '우리 모두'로 끝나 단 한사람의 예외도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바로 앞의 탐욕만을 생각하면서 한치 앞의 위험도 보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 근시안과 줏대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함께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인간의 영적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양은 고개를 숙이고 풀을 뜯어 먹을 때 바로 앞에 있는 풀에만 신경 쓸 뿐,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아 길을 잃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양은 다른 양들이 놀라 허겁지겁 뛰어 달아날 때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달아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거룩한 삶으로 영원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목전의 탐욕에만 급급하여 범죄하기를 쉬지 않는 인간의 죄성과 자신이 가는 길이 멸망인지도 모르고 다수의 사람들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는 인간의 어리석음(마태7,13)이 양의 비유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길을 잃고'에 해당하는 '타이누'(tayinu)의 원형 '타아'(taa)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영적 의미로 진리의 길을 벗어나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떨어지게 하셨다'에 해당하는 '히프끼아으'(hiphgiah)의 원형 '파가으'(pagah)는 두 당사자가 서로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탈출23,4; 민수35,21).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자신의 단호한 의지로써 우리 모든 사람의 죄악을 주님의 종에게 떠넘기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예언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하느님의 경륜 가운데 작정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53,7)
주님의 종 메시야가 당한 수난이 그에게 합당하지 않는 수난이며 희생이란 사실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난을 자발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저항하지 않는 인내와 순종의 정신은 그를 구세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 모두가 삶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만물을 주도적으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의 뜻을 겸손히 따르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학대받고'에 해당하는 '닉가스'(niggas)의 원형 '나가스'(nagas)는 원래 강제권을 발동하여 억지로 무엇을 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탈출3,7; 5,6; 욥39,7).
'천대받았지만'에 해당하는 '나아네'(naane)는 '억지로 시키다', '괴롭히다', '천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아나'(ana)의 수동형이다. 이것은 주님의 종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어린 양'에 해당하는 '세'(se)는 주로 번제 희생으로 드려지는 어린 양(창세22,7; 탈출34,20; 레위5,7) 혹은 파스카(유월절; 과월절)때 잡았던 어린 양(탈출12,4)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것은 메시야가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 (요한1,29)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메시야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인 것을 알면서도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양이 입을 열어 울지 않는 것처럼,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희생적 이미지의 양으로 묘사된 것이다.
양은 자기 몸에서 털이 깎여 나갈 때에도 울지 않는다. 여기서는 털을 깎기에 아주 적합한 암양(어미양)을 의미하는 '라헬'(rahel)이라는 단어가 쓰여졌다.
그리고 '잠자코'에 해당하는 '네엘라마'(neelama)의 원형 '알람'(alam)은 원래 곡식단 같은 것을 동여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창세37,7). 주로 입을 단단히 묶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용법으로 메시야의 단호한 침묵의 의지를 드러낸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복음 (요한18,1-19,42)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18,37ㅁ)
요한 복음 18장 36절에서 하느님 나라를 당신의 나라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임금임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의로움과 사랑, 진리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와 '이 세상'에 해당하는 '투 코스무 투투'(tou kosmou toutou; this world), 즉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어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한 세상을 뚜렷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제 요한 복음 18장 37절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 명시적으로 '내가 임금이다'고 밝힐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임금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두 동사를 사용해서 거듭 밝히신다.
여기서 '태어났으며'에 해당하는 '게겐네마이'(gegennemai; was born)의 원형 '겐나오'(gennao)는 육신적인 탄생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여기와 동일한 형태인 수동태 완료 1인칭 단수형으로 사용된 유일한 용례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언급한 사도행전 22장 28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혈통적으로 임금으로 태어나셨음을 밝히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었던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났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왔다'라고 번역된 '엘렐뤼타'(elelytha; came)의 원형 '에르코마이' (erchomai)는 영적인 출생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서 임금으로서의 예수님의 사명이 정치적인 임금이 아니라 영적인 임금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요한 복음사가는 위의 두 단어들 가운데 하나만을 사용하지 않고 두 가지를 모두 사용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 인성(人性)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으로 오셨으므로 신성(神性; 천주성)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계 문헌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aletheia; truth)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유행했던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에 해당하는 '그노시스'(gnosis)가 모든 것의 기원이며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는 반면에, 요한 복음사가는 '지식'보다 더 우월한 '진리'의 유용함을 역설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근거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 '진리'라는 용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1장 14절의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이라는 표현에서 '은총과 진리'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리토스 카이 알레테이아스'(charitos kai aletheias)이다.
이것은 탈출기 34장 6절의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에서 '자애와 진실'로 번역된 '헤세드 웨에메트'(hesed weemeth)에 해당하는 70인역(LXX)의 '엘레오스 카이 알레티노'(eleos kai alethino)와 비슷한 표현이다.
후기 희랍어에서 '카리토스'(charitos)의 원형 '카리스'(charis)가 '엘리오스'(eleos)를 대신해 '헤쎄드'(hesed)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한 복음사가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위해 탈출기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 복음의 용례에서 볼 때, 진리는 곧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되심을 보여 주는 용어이며, 예배(요한4,23.24)와 구원(요한5,33.34; 14,6)과 자유(요한9,32.44)와 성령(요한16,13.14)과 거룩(요한17,17.19)과 관련된 용어이다.
따라서 요한 복음 18장 37절의 예수님의 선포는 위의 내용들이 당신 자신의 주요한 사명임을 보여 준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5).”
안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옛날 사형수의 시신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이신 분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3-14)”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히브 9,26-28).”
그런데 그렇게 해 달라고 우리가 요청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일은 전적으로 ‘자비’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고,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신 일도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감옥에 갇혀서, 어떻게 해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고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먼저 오셔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음’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생명과 구원을 봅니다.
십자가 사건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일이 아니라, 부활로 이어진 일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억울한 희생과 죽음이 될 뿐입니다.
또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패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생명과 구원,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시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 3,18-19).”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히브 10,19-20).”
안 믿는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부활도 안 믿고, 내세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죽음은 끝이 아니고, 하나의 관문일 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세도, 하느님 나라도, 영원한 생명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를 심는 일과 같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1코린 15,42-44).”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1코린 15,57).”
우리가 성금요일 수난 예식 때 십자가 경배를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총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믿고,
이 믿음을 십자가 경배를 통해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베풀어졌는지를,
또 우리가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안내해 주는 신호등이고, 등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묵상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벽에 걸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십자가와 함께 생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십자가’를 피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부활과 승리와 생명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해도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혼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이 길은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어 대수롭지 않은 죄인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는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우리의 악행과 죄악 때문에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의로운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뜻대로 고난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구세주께서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온 세상은 침묵과 어둠에 잠깁니다. 빛이 잠시 사라지고 죽음의 세계에 내려갑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지하 세계에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온 세상에 불멸의 생명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과 승리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임금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폭력과 억압으로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으시며,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인류를 죄의 억압과 사슬에서 풀어 주시려고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 무한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의 죽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며 찬미합니다. “연세 삼십 장성하여 예비하신 때가 되니, 인류 위해 수난 고통 자원하여 받으시고, 어린양이 희생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네. 귀한 나무 귀한 못에 귀한 짐이 달렸도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