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성야]되살아나셨다 (마르 16,1-7)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시며, 크나큰 자비로 부르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생명의 계명에서 예지를 배우라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고 하신다.(제3독서/ 탈출 14,15-15,1)
그 무렵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16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17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너희를 뒤따라 들어가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9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서서 나아가던 하느님의 천사가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갔다. 구름 기둥도 그들 앞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가 섰다.
20 그리하여 그것은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구름이 한쪽은 어둡게 하고, 다른 쪽은 밤을 밝혀 주었다. 그래서 밤새도록 아무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22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23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쫓아왔다.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24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
25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집트 병거들의 바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어, 병거를 몰기 어렵게 만드셨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이스라엘을 피해 달아나자. 주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집트와 싸우신다.”하고 말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여라.”
27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날이 새자 물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도망치던 이집트인들이 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 되었다.
31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15,1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이 노래를 불렀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가르친다. (로마 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보러 간 여자들에게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고 인사하시고,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가도록 전하라고 하신다. (마르16,1-7)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부활 성야 제3독서 (탈출기14,15-15,1ㄱ)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15)
'앞으로 나아가라고'에 해당하는 '웨잇싸우'(weissau)의 기본형 '나싸'(nassa)는 장막의 말뚝을 뽑아 내어 여행을 출발하거나 진행 중임을 뜻하는 단어이다. 즉 장막을 걷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하느님께서 출발 명령을 하시는 이러한 모습은 전쟁에서의 지휘관의 명령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군대로서, 하느님의 명령과 함께, 이제 하느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의 세력과의 전쟁을 수행하시는 총사령관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인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16)
'가르고서는'에 해당하는 '우베카에후'(ubeqaehu)는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것을 쪼개라'는 뜻이다. '베카에후'의 기본형인 '빠카'(baqa)는 '(하나로 된 것을)쪼개다', '(닫힌 것을)열다', '(알을)깨다'등의 의미가 있다. 본문은 홍해 바다를 둘로 완전하 갈라지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가 단순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모세가 단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을 가르는 행위까지 그에게 속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강한 바람을 사용하여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다.(14,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쪼개는'일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임무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모세에게 속한 것임을 이러한 표현을 시사하고 있다.
'빠얍바샤'(bayabbasha)는 '마른 땅'으로 번역되었다. '마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야베쉬'(yabesh)에서 유래한 명사 '얍바샤'(yabbasha)에, '~안에(안으로)'란 뜻의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런데 '야베쉬'나 '얍바샤'의 어근은 기본적으로 '수분을 지닌 물체가 수분이 없어서 마르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려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있다.
바다나 강에 물이 빠지고 나면, 원래 물에 깊이 잠겼던 부분은 갯벌이나 진흙 수렁과 같이 사람이 걷기에도 힘든 땅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지금 그것이 마른 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과 짐을 실은 수레들이 안전하고 쉽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느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役事)하실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다. 더군다나 '마른 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얍바샤'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창세기 1장 9절,10절에 창조사에 물과 분리된 '마른 땅'을 기리키는데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물 가운데서 땅을 분리하여 그곳엔 온갖 생명이 자라게 하셨다. 또한 노아의 홍수 후에 물이 걷히고 땅이 마른(창세8,14) 다음에, 그 땅위에서 생명체들이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사건 속에서도, 바다가 갈라지고 그곳에 드러나는 마른 땅은 또 다른, 하느님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당신의 자비로우신 의지가 개입된 특별한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바다 가운데 새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한 재창조의 역사(役事)가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이 드러나는 현상 가운데서도,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 이 일이 24절에 '새벽에'(habboqer)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예의 주시해야 한다.
부활성야 복음(마르16,1~7)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1~2)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였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시신이 썩기 전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일 정도는 시신을 돌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파스카절(유월절; 해방절; 과월절)과 안식일이 임박해 예수님의 시신을 충분하게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도 서둘러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기 위해 무덤을 찾은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동사의 과거형을 쓰고 있는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빈무덤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주기 위해 동사들의 시제를 모두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형).
요한 복음 20장 1절의 '가서'(에르케타이; erchetai), '보니'(블레페이; bllepei), 20장 2절의 '달려'(트레케이; trechei),'가서'(에르케타이)가 그렇다.
요한 복음 20장 1절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에서 '치워져 있었다'에 해당하는 '에르메논'(ermenon)은 분사의 완료 수동태로서 돌이 스스로 움직여진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옮겨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완료형으로 쓰여 돌이 이미 옮겨져 있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무덤 입구 전체를 막으려면, 아무리 작아도 일반 성인의 키보다는 더 큰 바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을 보면, 무덤을 막기 위해 입구에 세워 놓은 돌이 쉽게 움직이지 않도록 일반적으로 무덤 입구의 바닥에 홈을 파 놓았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서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무덤 입구에 세워 놓은 돌을 옮겨 놓았을리 만무하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6장 3절에는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러 간 여인들의 대화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마태오 28장 2절에는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사이래 인류 고금을 통해 이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들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무덤 뿐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성모님은 부르심을 입어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에 빈무덤 사화를 첫 복음으로 선포하는 것은, 주님께서 확실히 부활하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은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현존하시며, 모든 세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람들의 주님으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마르 16,1-3).”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는 여자들의 마음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는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바치려고 가지만, 희망도 없었고, 기쁨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라는 말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시간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여자들의 어두운 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해가 뜰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자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이 시작되려고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고 인간들이 절망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여자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어떻게 굴려 낼까 걱정하는 것도
그들의 답답하고 어두운 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절망과 슬픔은 커다란 바위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마르 16,4-5).”
여기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말인데,
여자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 같은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즉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얗고 긴 겉옷”이라는 말은 “눈부시게 빛나는 긴 겉옷”이라는 뜻이고,
이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가 하늘에서 온 존재라는 것을,
즉 천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여자들이 ‘눈부신 빛’을 보았다는 것도,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은 상서로운 쪽, 즉 ‘하느님 쪽’을 뜻하고,
이 일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자들이 깜짝 놀랐다는 말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고,
그들이 희망을 갖기 시작하게 된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로 얻게 된 희망과 기쁨은,
인간들이 노력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전 과정을 알고 있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제자들과 여자들에게는 꿈에서도 생각 못했던 대반전입니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6-7)”
이제 여자들의 마음은 절망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새로운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지 마라.” 라는 천사의 말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뜻일 수도 있고,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로 해석한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대로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전 인류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이라는 말은,
“지금 너희는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래서 시신은 없고, 무덤은 비어 있다.” 라는 뜻입니다.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마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라는 말은,
마르코복음 14장 27절-28절의 예수님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르 14,27-28)”
왜 갈릴래아인가? 갈릴래아는 예수님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래아에서 뵙게 될 것이라는 말은,
이제 새로운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부활 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에 사도들은 예수님 부활 소식이 추가된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의 어둠은 하느님의 생명의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느님의 생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죽음이 생명을 끝내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명이 죽음을 정복하고 끝장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죽음의 힘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
신앙인은 죽음의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파스카 성야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은총의 밤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늘 우리 곁에 두는 밤입니다.
교회는 이 밤을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용약하여라, 하늘 나라 천사들 무리. 환호하여라, 천상의 거룩한 영들아. 구원의 우렁찬 나팔 소리, 선포하여라, 위대한 임금의 승리.”
우리 마음에 주님의 영광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밤입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향기로운 제물을 주님께 바치는 밤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밝게 비추시는 샛별이 되십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생명과 승리의 빛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 참으로 복된 밤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제물’로 봉헌된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부활을 찬송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을 주님의 파스카를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홍해의 기적은 주님 파스카의 예표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건너갑니다. 죄에서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며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