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그물 (요한 21,1-14)

2018. 4. 6. 오전 6: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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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그물 (요한 21,1-14)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이 사도들을 붙잡고는 누구의 이름으로 가르치느냐고 하자, 사도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며,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고 한다. (사도 4,1-12)
그 무렵 불구자가 치유받은 뒤, 1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가이들이 다가왔다.
2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내세워 죽은 이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불쾌히 여기고 있었다.
3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미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게 되어,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5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7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신다. (요한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산헤드린 법정에 선 베드로와 요한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독서 (사도4,1-12)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1-12)


베드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 앞에서 예수를 지칭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신 마태오 복음 21장 42절 말씀을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 전서 2장 7절에서도 예수님에 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하고 언급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에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모퉁이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장 22절 인용이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집을 짓는데 긴요한 모퉁이 돌 즉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사명의 성격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요한2,20-22) 교회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에서 '주어진'으로 번역된 '데도메논'(dedomenon)'주다'(give)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의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서 그 주체가 유일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에서 '없습니다' 에 해당하는 '우크 에스틴'(uk estin)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치 않는 진리(truth)와 사실(fact)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 이외에는 다른 이름을 통한 구원이 없다는 이 사실은 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오늘날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소테리아'(soteria)'치유'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치유' 육체적 구원이라는 의미 갖는다(히브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사도3,6-8). 

두번째, 영적인 구원의 의미이다(2코린7,10).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관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밝힌 셈이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통해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관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 고 촉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다.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현세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복음(요한21,1~14)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밴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1)


사도 요한 복음사가는 당시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도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리는데 힘을 합했을텐데도 불구하고, 마치 시몬 베드로 혼자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힌 그물을 끌어올린 것처럼 기록했다.

이것은 고기를 끌어올리는 행위가 상징하는 앞으로의 제자들이 수행하는 선교 사업에 있어서,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제로 시몬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사도9,32~34). 그리고 요한 복음 21장 11절에서 이 사건의 목격자인 사도 요한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잡은 고기가 매우 풍성했음을 세 단어를 사용해서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가득'에 해당하는 '메스톤'(meston; fulls), '그토록 많은데도'에 해당하는 '토수톤'(tosouton; so many), '큰'에 해당하는 '메갈론'(megalon; great; large)이 세 단어인데, '메스톤'(meston)밀도의 정도를, '메갈론'(megalon)크기나 부피의 정도를, '토수톤'(tosouton)분량이나 수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가득찬 큰 (고기가) ~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같은 삼중적 표현을 통해 단순히 고기가 양적으로 많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놀라운 결과로서의 풍요함을 독자들이 생생하게 느끼도록 했다.

또한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 사건이 주는 놀라움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하게 잡힌 고기의 수를 세어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이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100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수이며, 50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수이다. 그리고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장차 유대인과 이방인의 복음화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는 견해이다(성 치릴로).

둘째, 자연수 1부터 17까지를 모두 합할 경우에 그 합이 153이다. 17에서 10은 율법의 수요, 7은 은총의 수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이 이른다는 견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셋째,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인 '시몬', '바르요나', '게파'알파벳이 나타내는 수가 가리키는 합이 153이므로, 이것은 시몬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튀빙겐 학파).

넷째,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나 되므로, 이것은 세상 모든 종족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견해이다(성 예로니모).

이러한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해석들은 앞으로 제자들이 담당해야 할 세계 선교의 결과가 매우 풍요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잡는 어부로 부르신 것처럼, 이제 부활 이후에 다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통해 사람 낚는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관련해서 요한 복음 21장 11절상황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된 루카 복음 5장 6절을 보면, 고기를 많이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루카 복음사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사람들이 매우 많음에 초점을 맞추었고, 요한 복음사가 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의 포용성, 즉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12. 04. 13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 요한 21, 1-1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섰으나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으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15년 4월 1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복음(요한21,1~14)

“주님이십니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요한이 곧바로 알아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반가운 나머지 배를 젓기 전에 먼저 물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지만, 여전히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부였던 그들에게 고기 잡는 일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이 예전처럼 고기잡이에 열중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고 이르십니다. 무심코 던진 그물에 걸린 많은 물고기를 보면서, 제자들은 다시 깨달았습니다. 처음 자신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의 그 놀라움과 감격을 말입니다.
부활은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잡은 고기를 굽고 빵을 떼어 주시며, 일상의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십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경이로움을 일상의 삶으로 되돌리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했다고 오로지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부활의 경이로움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한 증언입니다. 부활은 일상의 삶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어둠을 빛으로, 거짓을 진실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의를 정의로 바꾸는 삶이, 부활을 믿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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