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간 수요일]구원 (요한 3,16-21)

감옥에 갇혔다가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사도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자,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몹시 당황하며 사도들을 데려 온다. (사도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 (요한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성 베드로의 구출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사도5,17-26)
"그 무렵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17-21)
본절부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도들에 대한 핍박과 투옥 및 천사들에 의한 구출, 사도들에 대한 대사제의 직접적인 문책 그리고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중재로 인한 석방 등과 같은 매우 긴박하고도 역동적인 이야기가 5장 끝절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핍박이 복음 전파를 절대 방해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을 적대시한 자가 바로 대사제이며 사도들이 당하는 박해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조직적인 박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두가이파들을 대사제와 함께 있는 동조자로 소개한다.
이것은 이들이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사제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였고, 대사제 측근에 있었던 귀족들이 특히 사두가이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 최고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 집단인 헤롯왕이나 로마인들과 연합하여 온갖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사두가이파들이 대사제를 도와 사도들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역동적인 복음의 역사가 많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감으로써 그들 특권층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위협을 받았고, 높아만 가는 인기에 시기가 났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앞장서서 죽인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교리와 상충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 그들이 범한 죄악상이 드러나며 더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민란까지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두가이파들은 누구보다 앞서 사도들을 잡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시기심('젤루'; zelu)이 가득 차(eplesthesan; 에플레스테산)'는 진실에 입각하거나 바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기에 의하여 박해가 발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득차'에 해당하는 '에플레스테산'의 원형 '플레도'(pledo)는 '충만하다'(사도4,8.31), '채우다'(루카5,7)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써 빈틈을 찾아볼 수 없으며 넘칠 정도로 가득 채우는 상태를 말한다. 당시 이들은 끓어오르는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상황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오직 사도들을 박해할 생각으로만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이성을 잃고 이기심에 따라 분별없이 행동하는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그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다.
'공영 감옥'(teresei demosia; 테레세이 데모시아)에서 '데모시오스'(demosios; 공적인)라는 형용사를 첨가하여 굳이 공영 감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들이 비록 단단히 잠긴 옥에 갇혀 공적 기관의 삼엄한 감시와 경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의 역사로 나오게 된 것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19)
'데리고 나와'로 번역된 '엑사가곤'(eksagagon)의 기본형 '엑사고'(eksago)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인도하다'는 뜻의 '아고'(ago)가 합성된 형태로서 '(밖으로)인도하여 내다'(요한10,3), '끌어내다', '데리고 나가다'(마르8,23)는 뜻이다.
이 단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 함축적인 사실이 들어있다. 첫째로 이 단어는 속박과 고통에서의 '구원'을 가리킨다(요한10,3; 사도7,36). 본문에서는 사도들이 감옥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둘째로 이 단어의 의미속에는 '강제성'의 개념이 들어 있다(마르15,20). 즉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끌어냄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이 동사가 이러한 두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들의 구출의 목적이 다음 절에 나오듯이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시급한 사명이 사도들에게 있음을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옥에 갇혀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던 사도들을 주님의 천사가 어떻게 쉽게 빼낼 수가 있었을까?
본절에서는 필리피 감옥의 경우처럼 감옥터가 움직이고 지진이 나는 기적(사도16,26)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주님의 천사는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으로 경비병들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사도들을 이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느님은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 어둡게 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이 (2열왕 6,18) 이를 뒷받침한다.
사도들을 옥에서 이끌어 낸 주님의 천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사명을 부여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zoe; 조에)이란 이 세상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마태18,19; 마르10,30; 요한3,15).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구원의 생명을 말한다.
본문의 '이 생명'에서 '이것'을 가리키는 '타우테스'(tautes)는 지금까지 사도들이 계속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타 레마타'(ta remata)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씀'을 가리키는 '토 레마'(to rema)의 복수형으로서 '설교', '연설'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조용히 사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 즉 '케뤼그마'(kerygma)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되 대담하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 말씀 앞에 '모두'로 번역된 '판타'(panta)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파되어야함을 분명히 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혹시라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구원의 말씀들을 단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구원의 말씀들이 모든 사람에게 들려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3,16-21)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19)
요한 복음 3장 19절은 요한 복음 3장 18절 후반부에서 나온데로,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자가 심판을 받는 이유를 다시 한번 더 밝혀 강조한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에서 '심판'에 해당하는 '크리시스'(krisis; condemnation; verdict)는 실질적 의미에 있어서 18절에 나오는 '심판하다'에 해당하는 '크리노'(krino)와 거의 동일하다.
불신자들이 심판받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는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자신의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에서 동사 '엔'(en; were)은 미완료형 이므로, 이 사람들의 과거 전력을 드러낸다.
즉 희랍어에서 미완료형은 과거에 계속 혹은 반복되는 동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행위가 변함없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형용사 '악한'에 해당하는 '포네라'(ponera; evil)가 서술적인 위치에 있어서 이 사람들의 행위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단어가 마귀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이 형용사는 '악한'뿐만 아니라 '못쓰게 된', '나쁜', '가치없는', '타락한' 등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복합적 의미로 쓰였다. 즉 이 단어는 그들이 마귀의 속성과 관련된 악행을 계속하여 저질러 왔으므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에서 '빛'에 해당하는 '포스'(phos; light)는 태양과 같은 발광체를 나타내며, '어둠'에 해당하는 '스코토스'(skotos; darkness)는 이 빛이 차단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는데, 성경은 메시야에 의해 선포된 복음이나 구원을 '빛'으로 표현하고(마태4,16; 사도26,18; 에페5,13), 죄와 불신앙의 상태를 '어둠'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마태4,19; 로마2,19; 1티모5,4; 1베드5,13).
요한 복음 3장 19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원조 아담이 범죄한 이후 타락한 본성의 소유자인 인간이 죄와 불신앙을 더 사랑함을 보여 주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더'로 번역된 '말론'(mallon; rather)은 '더'라는 뜻의 비교급 부사로도 쓰이지만(필리1,12; 마태10,48; 루카18,39), '~대신에 도리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태10,6; 마르5,26; 로마14,13).
그렇다면 요한 복음 3장 19절은 인간이 마땅히 빛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대신에 도리어 어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것은 인간이 그 행위가 악하므로 빛에 대해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어둠만을 수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대인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근본 이유이다.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어떤 성경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성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바로 이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했다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권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사랑입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한계와 못남을 인정하고 허물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사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방법으로’,‘이런 식으로’란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방법을 가리킵니다"(송봉모).
광야에서 하느님께 반항한 대가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반항하여 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가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을 생각할 수 있고, ‘너무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자 하시는 사랑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신 나머지’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었어도 이미 용서하시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외아들을 내주시어’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내 주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5,8). 외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면 ‘너무나’,‘사랑하신 나머지’,‘외아들을 내 주시어’모두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감사와 사랑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성경은 분명,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하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살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살게 하려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는데도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4-5에 보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을 깨닫지 못하고 또 거절하는 것은 어둠의 지배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어둠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악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된 것이 심판입니다. 하늘로부터 또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보다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심판하는 자는 하느님이나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자신입니다. 심판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에서부터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가야합니다.
세상에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별들처럼 빛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요한 복음 저자가 복음서 처음부터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때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면서 온통 빛으로 가득한 삶이란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어두운 인생만 있으란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회색 지대도 필요하고,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순간도 필요하다고 둘러대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의 빛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죽음을 물리쳐 이겼음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들과는 달리 복음서 시작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고백하고, 그분이 바로 인류의 빛으로 오시어 어두움과 죽음을 이겨 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이 두려워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사제와 사두가이파들의 어두움과 반대로, 감옥에 갇혔어도 천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빛의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씀처럼, 지금 내가 회색 지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내 안의 어두움을 이겨 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