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금요일]五餠二魚 (요한6,1-15)

2018. 4. 13. 오전 7: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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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금요일]五餠二魚 (요한6,1-15)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사도들을 내버려 두자며, 그들의 계획이나 활동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을 없애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최고 의회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놓아 준다. (사도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들을 배불리 먹이신다. (요한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5,34-42)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38-39)


사도행전 5장 33절에서 42절까지는, 사도행전 5장 29-32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몹시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중재석방되는 내용과 사도들의 계속적인 복음 전파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율법 교사' 번역된 '노모디다스칼로스' '율법' 뜻하는 '노모스'(nomos)'선생', '교사'를 뜻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의 합성어이다. 실제 이 용어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율법에 관해 권위있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매우 탁월한 율법 박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느님의 상급'이란 이름의 뜻을 지니고 있는 '가말리엘'은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hillel)의 손자로서 당시 샴마이(shammai)학파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힐렐 학파의 수장이었다. 또한 그는 사도 바오로의 스승으로 언급되고 있다(사도22,3).

사도행전 5장 34-39절에 나오는 대로 그의 중재는 사도들의 목숨을  건져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원래 사도들이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중재안을 낸 것은 두 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첫번째는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성품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는 사도들에게서 특별히 그들을 죽일만큼 율법을 거스른 행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교리적인 측면인데,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사이파인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 의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사두가이파가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기에 사도들의 편에 선 것이었다. 

사두가이파 역시 법적 근거없이 사도들을 사형에 처할 경우 백성들의 반발이 우려되고 가말리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서 사도들은 사형이 결정되지 않았다.

결국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바리사이파 사람인 가말리엘을 사용하여 사도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 내신 것이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38) 에서 '관여하지 말고'라는 뜻의 '아포스테테'(apostete)'내버려 두십시오'라는 뜻의 '아페테'(apete)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들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아포스테테'는 '떠나다'는 뜻의 동사 '아피스테미'(apistemi)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며 '아페테'는 '버려두다'는 뜻의 동사 '아피에미'(apiemi)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상의 강조는 사도행전 5장 39절의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와 연관이 된다.  사도행전 5장 38절의 두 개의 명령은 사도행전 5장 39절의 '~하지 않도록'이라는 뜻으로서 강한 염려를 가리키는 '메포테'(mepote)로 시작되는 구절에 연결되고 있다. 

이처럼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내버려 둘 것을 강조한  이유는 설사 그들을 벌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오히려 일이 잘못되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주장에 비록 동조는 하지않지만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에 대하여는 분명한 신뢰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歷史)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역사에 대하여 인간은 철저히 순응해야 한다는 신관(神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39) 

'메포테' '~하지 않도록'이라는 뜻으로서 사도들을 그냥 보내  주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데오마코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테오마코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테오스'(theos)'싸우다'는 뜻의 '마코마이'(machomai)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하느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난 일을 가로막는 것은 곧 하느님을 대항해 싸우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메포테'는 '심지어 ~라도'(even)라는 뜻의 부사 '카이'(kai)의 수식을 받는 구조로 사용되어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 의원들에게 말한 내용의 강조점혹시라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 스스로 경계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의 엄정성을 신뢰하는 가말리엘의 현명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6,1-15)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1)


군중들이 식사를 할 준비가 끝내자, 이제 음식을 제공하실 예수님께서 준비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아이로부터 가지고 온 그 빵을 손에 드셨다. 

'손에 들고'에 해당하는 '엘라벤'(elaben)'람바노'(lamban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거리낌없이 즉시 취하신 행동을 나타낸다.

여기서 '빵을'에 해당하는 '투스 아르투스'(tous artous; the loaves)는 복수형으로서 안드레아가 가져온 보리 빵 다섯 개를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손에 들고 나서 감사를 드리셨다.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로 번역된 '유카리스테사스'(eucharisteras; when he had given thanks)'유카리스테오'(eucharisteo)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기본적인 뜻은 '감사한 마음을 가진 것' 혹은 '감사를 돌린 것'이다이것은 식사 전에 행하던 통상적인 감사 기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내용으로 감사 기도를 바쳤는지 알 수 없지만, 유다인의 모든 가정에서 사용되는 내용의 것이었다고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감사 기도를 바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수많은 군중 앞에서 행동하셨는데, 눈으로 보이게 차려진 음식은 다섯 개의 빵이었고, 식사를 기다리는 이들은 오천명의 몇 배가 되는 군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충분한 식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처럼, 통상적인 감사 기도를 바쳤다. 그 결과 그 날에 빵과 물고기가 부족하게 되기는 커녕, 도리어 남아서 열두 광주리나 되는 조각들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은 원하는 대로 배불리 음식을 먹었으며, 그 맛 역시 원래의 오병이어보다 훨씬 더 나았으리라는 것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있었던 경험으로 봐서 (요한2,10) 추측해본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원하는 대로 주셨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을 풍성하게 주시어 결코 주리지 않게 하실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요한6,35).

 

2014. 5. 2 부활 제2주간 금요일(요한 6,1-15)/이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한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 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똥은 쌓아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려지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 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으로 부터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 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15년 4월 17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요한6,1-15)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일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배가 고팠다는 말이 없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고(요한 6,2),
그 사람들은 '빵의 기적' 후에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고(요한 6,15)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요한복음의 '빵의 기적'을 읽고 묵상할 때에는
공관복음과는 다른 관점에서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한 끼 식사를 준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짜 빵을 주셨고,
그 기적 덕분에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인사를 할 때 흔히 "영육 간에 건강하기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표현입니다.
'행복'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몸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되고,
'생명'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몸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것만 중요하다."가 아니라,
"이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더 중요하다."입니다.)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몸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행복만 추구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먹은 빵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안 보고 빵만 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기적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고 섬겼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원래 왕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 것은
하느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세속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이스라엘 민족이 임금을 원한 것 자체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음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로마제국과 그 하수인들, 빌라도나 헤로데 같은 자들은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백성을 위해서 일하는 임금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임금이 앞장서서 싸워서
로마제국과 하수인들을 몰아내 주기를 희망했을 것입니다.

그런 희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희망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세속적인 소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경우가 있고,
영적인 행복보다 육적인 행복을 더 추구하기도 하고,
진정한 영적 성전을 세우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눈에 보이는 껍데기 성전을 짓는 일만 더 신경 쓰기도 합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세의 일과 영적인 일만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고통과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독재 정권을 물리치기 위해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만,
그러나 교회가 정당을 조직하거나 정치활동을 하면서
세속의 권력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신앙생활과 이웃 사랑 실천은 이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세상 속에서의 일만(세속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 궁극적인 것,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발밑에 있는 땅만 보다가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을 잊으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4월28일 [부활 제2주간 금요일] -요한 6장 1-15절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산술적인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실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런 기적 이야기라면 굳이 요한 복음이 이 사실을 장황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필립보와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먹일 빵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예상대로 필립보는 세상의 셈법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안드레아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가져온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 저자의 의도는 다릅니다. 진정한 기적은 빵을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돌처럼 굳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적입니다. 빵은 한순간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지만,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먹을 빵만 챙기고 남에게 관심도 없던 이기적인 사람을 변화시키면, 그가 일생 동안 수많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존경받는 율법 교사인 가말리엘은 유다의 지도층을 혼란스럽게 만든 제자들을 붙잡아 처벌하는 어리석음보다는, 하느님의 선택을 지켜보고 결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할 것을 옳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해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한 사도들은, 이런 확신을 실천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시편 저자의 노래가 더 감미롭게 들리는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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