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요한 6,16-21)

2018. 4. 14. 오전 5:30:25

글자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요한 6,16-21)


열두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려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긴다. (사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에게 호수 위를 걸어 가까이 오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는다. (요한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부제로 임명되고 양식을 나눠주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6,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대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 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 유지가 힘든 과부들(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번역된 '엔 테 다이코니아 테 카테메리네'(en te diakonia te kathemerine)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젠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 (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으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 구제 봉사 직무의 성격에 차이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9-20)


요한 복음 6장 19절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 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기노메논' <ton Iesoun~ginomenon ; Jesus ~drawing(approaching)>은 '보고'에 해당하는 '테오루신'(theorousin; they saw) 동사의 목적절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 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 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6장 20절'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 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10. 4 .17.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요한 6,16-21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5).”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입니다(루카 24,13). ‘길에서 겪은 일’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설명해 주신 일입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즉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사도들에게 자기들이 겪은 일을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의 믿음은 모두의 믿음으로 확산됩니다.

(사실 두 사람이 겪은 일은 두 사람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증인도 없고, 물증도 없습니다. 만일에 확신이 없었다면 증언하지 못했거나,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5-48)”

여기서 ‘그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던 것처럼 사도들에게도 성경을 설명해 주십니다.

아마도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이,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쩌다가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작용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여기서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이고,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증언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나를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받는다고) 선포하여라.”이고,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여라.”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셨을까? 다윗 왕이 왕국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한 이후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는 말 외에는 따로 할 말이 없습니다.)


‘믿음’은 고백하고 증언해야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기쁜 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비로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만일에 믿으면서도 고백하지 않고 증언하지 않는다면, 또 기쁜 소식을 듣고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불을 가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고백하고 증언하지 않는 믿음은, 또 전파하지 않는 기쁜 소식은, 차츰 희미해지다가 결국 사라져버립니다.

(만일에 증언하지 않는다면, 믿어도 믿는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전파하지 않는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닌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3-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나 사도들이나 모두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그들만의 체험입니다. (다른 신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어두운 골방에서 이루어진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인들은 그 일을 ‘밝은 지붕 위에서’, 즉 공개적으로 널리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다가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선교활동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활동이지만,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활동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이 말씀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은, 신앙인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을 뜻하고, “사람의 아들도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그를 구원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 라는 말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는 자들과 자신의 신앙을 감추는 자들, 또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신앙과 복음을 감춘 것처럼 되어버린 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신앙고백과 증언은, 그리고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깨띠 두르고 길거리로 나가지 않더라도, ‘삶’을 통해서 믿음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6. 4. 9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요한 6,16-21)/<물 위를 걸으시다.>


사도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희망에 차 있던 신앙인들의 공동체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유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삶의 방식이 아닌,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채워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더 큰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정신에는 언제나 욕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적통을 주장하는 히브리계 유다인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순수한 공산(共産)의 삶을 누리려던 사도 교회의 이상은 무너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일곱 부제를 뽑아 세속적인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다고 결단한 것은, 자신들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외적인 형태의 공동체로 인간적인 결함을 피할 수는 없지만, 사도들은 교회를 이끄는 힘이 인간의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라 성령이심을 확신했기에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과 함께 다니셨지만, 기도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호수에 큰 바람이 불어 배가 예수님께서 머무신 곳과 떨어졌다는 표현은, 늘 기도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하는 제자들이 지닌 인간적인 약점을 비유로 말해 주는 듯합니다.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감히 가까이할 수 없는 스승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없애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풍랑 속에서 겪는 신앙의 위기, 나태함, 절망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힘임에 틀림없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2017년 4월 29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 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