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간 금요일] 살과 피 (요한 6,52-59)

2018. 4. 20. 오전 5: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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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3주간 금요일] 살과 피 (요한 6,52-59)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던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이 머는데,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세례를 받고는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선포한다.(사도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신다.(요한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9,1~20)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3~5)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건이다. 여기 사도행전 9장 3절에서는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사도행전 22장 6절에는 '정오쯤'이라고 시간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동족 유다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사도 바오로의 섬세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거기서 '정오쯤'으로 번역된 '페리 메셈브리안'(peri mesembrian; about noon)'가운데'를 뜻하는 '메소스'(mesos) '낮'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메셈브리아'(mesembria)가 시간(마태20,3; 마르6,48)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전치사 '페리'(peri; about)와 결합한 것이다. 

자신의 회심 사건의 회고 가운데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도 바오로의 상세한 보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는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되어 있지만, 사도행전 22장 6절에는 '큰 빛'이 번쩍였다고 나온다. 

하루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에 이 태양 빛보다 훨씬 강력한 '큰 빛'이 등장하였음을 말함으로써 초자연적 현상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사도22,6) 

사도행전 22장 6절에서는 그 빛이 단순한 빛이 아닌 '큰 빛' '포스 히카논'(phos hikanon)으로 되어 있다. 특히 '큰'(great)으로 번역된 '히카논'(hikanon)'충분한'이란 뜻으로 사용된다(사도11,24; 19,26). 

따라서 본절에서 언급된 '큰 빛' '많은 빛' 또는 '어마어마한 빛'(a great light)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 광선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신적인 빛 분명하다.

이 빛이 초월적이며 신적인 빛이라는 사실은 '갑자기'로 번역된 '엑사이프네스'(eksaiphnes)가 더욱 강조해 준다. 이 단어는 '갑자기'라는 뜻과 더불어 '뜻밖에', '홀연히'(suddenly)의 의미도 지닌다.


신약 성경에 사용된 5회의 용례 모두가 신적이며 초월적인 일들의 급격한 진입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사도9,3; 마르13,36; 루카2,13; 9.39). 

따라서 사도행전 22장 6절은 태양과는 또 다른, 신적이며 초월적인 어마어마한 빛이 '갑자기' 바오로를 비춘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빛이 사도 바오로를 둘러 비추고 있다. 

여기서 '둘레를 비추었다' 번역된 '페리아스트랍사이'(periastrapsai)'주위에', '둘레에' 뜻하는 전치사'페리'(peri)'붙들어매다', '고착시키다' 뜻하는 '합토'(hapto)가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합성 동사이다. 

따라서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 구절은 한낮의 태양보다 더 어마어마한 신적이며 초월적인 빛이 사도 바오로 주위를 빙 둘러싸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이 구절은 사도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기록한 사도행전 22장 7절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과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서 신적이며 초월적인 빛에 압도된 사도 바오로가 엎드러져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회고하는 장면이다. 

사도 바오로가 엎어진 이 사건이 바로 신적이며 초월적인 어마어마한 빛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엎어졌다'로 번역된 '에페사'(epesa)'떨어지다', '넘어지다','엎어지다' 뜻을 지닌 원형 '핍토'(pipto)부정 과거형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에게 비친 큰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힘을 가진 것이어서 그를 무력화시켰음을 시사한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사도9,4; 사도22,7)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26장 14절 보면, "그리고 나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히브리 말로' 표현은 사도 바오로가 들은 음성이 당시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대인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사용하던 아람어화된 히브리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식 이름 '사울'두 번 부르는 이중 호격 사용했다.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부르시는 경우몇 번 나타나는데, 이때마다 연민을 품은 애정이 가득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루카10,41; 22,31). 

'박해하느냐'로 번역된 '디오케이스'(diokeis)'집요하게 괴롭히다' 뜻하는 '디오코'(dioko)현재 능동태이다.


여기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사도 바오로가 산헤드린의 재가를 거치고 대사제의 수락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사도9,1~2; 22,5), 사실상 대사제나 온 원로단의 수락이나 동의가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동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는 자기 스스로 즉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동사가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일을 수행했었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외에도 실제로는 더 많은 박해와 핍박을 가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과 사도행전 22장의 같은 내용 중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사도행전 26장 14절에는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라고 번역된 '스클레론 소이 프로스 켄트라 락티제인'(sklleron soi pros kentra laktizein; 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pricks)라는 표현으로 더 나온다.


이것은 당시에 자주 사용되던 격언으로서 '가시채를 차서 심한 상처를 입은 소'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 아에스킬루스(Aeschylus)의 저서 <아가멤논>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가시채를 바로 차지 말라' 뜻하는 '프로스 켄트라 메 락티조'(pros kentra me laktizo)라고 기록되어 있다.


'뾰족한 막대기'(가시채)로 번역된 '켄트라'(kentra)'켄트론'(kentron)복수형으로서 쟁기질하는 사람의 손에 있는 소몰이 '꼬챙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막대기로서,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찌르기 위해 농부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그 소는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게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농경 문화의 배경에서 생겨난 격언인데, '신을 대적하는 행동은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 라는 교훈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열정으로 하느님께 대적하는 바오로를 예수님께서 직접 꾸짖으신 것이다.

사실 바오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오로를 예수님 당신 자신의 박해자로 지목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바오로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9,5; 22,8; 26,15)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던 (마태28,20)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만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늘 같이 계셨음을 보여준다.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복음(요한6,52~5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3)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6장 51절'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교훈을 더욱 확장해서, 생명을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살을 먹는 문제만으로도 그들 사이에 거친 논쟁이 벌어졌는데, 피도 마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모세의 율법이 피를 먹는 것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레위7,26.27),  하지만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 속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선포였다.

여기서 '얻지 못한다'에 해당하는 '우크 에케테'(euk echete; you have no)현제 시제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살을 뜻하는 빵(성체) 예수님의 피를 뜻하는 포도주(성혈)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요한 복음서를 쓴 시기인 1C 후반의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지향했던 성체성사의 궁극적인 의미성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살과 피'는 히브리적인 어법에 따르면, '전인'(全人)을 의미하는데, 살과 피를 먹는 행위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일치 혹은 합일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 제물을 영혼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천상의 빵을 올바로 모셔야 한다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살은 생명을 주는 행위이고,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영혼의 힘이 되는 양식을 기꺼이 내어 주시고 또한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대신 희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살게 되고 또 살찌게 됩니다. 영혼이 살찐 이들, 즉 사랑이 풍부한 이들이 비로소 다른 이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셨는데‘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나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빵을 올바로 받아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제대로 모셔야 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설명해 주시지 않고 더욱 강하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뒤의 60절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투덜거립니다.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 너무 거북한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듣기 거북한 말씀입니다.)

"나를 먹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를 믿어야 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믿는 일'을 '먹는 일'로 표현하셨을까?  '먹는 일'은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예수님을 먹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바꿔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다.' 라는 말은 단순히 표현만 바꾼 것이 아닙니다. 먹는다는 말은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뜻합니다.
단순히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온 몸으로(온 삶으로) 예수님과 결합해서 일치를 이루어야(하나가 되어야)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기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어머니와 태아는 두 몸이면서 사실상 한 몸입니다.
태중의 아기는 어머니와 결합되어서, 어머니 안에서 어머니의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결합되고 일치되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한다.'는 말은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되고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과 '먹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음식이 나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면 먹지 못합니다.
독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았던 왕들은 '기미 상궁'을 곁에 두고 그 상궁에게 먼저 음식을 먹게 했습니다.
(만일에 왕이 '기미 상궁'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먼저 음식을 먹은 상궁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해도, 그런 의심과 불안감 속에서 먹는 음식이 과연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음식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이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 음식을 먹는 일입니다. 믿기만 하고 먹지 않는다면 얻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면, 예수님을 '먹어야' 합니다.
즉 '온 마음과 온 몸과 온 삶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머리로 믿고 입으로 믿음을 고백한다고 해도 신앙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 외에는 다른 진리는 없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 외에는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라는 말씀도  예수님을 믿는(먹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면, 진리처럼 보이는 '말'도 많고, 구원을 얻는 길처럼 보이는 '길'도 많은데, 그런 것들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귀가 즐거워도 멸망을 초래하는 '말'이라면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아무리 맛이 있어도 죽음을 부르는 독이 들어 있다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의 즐거움에 현혹되어서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세속적인 쾌락들은 영원한 생명과는 상관없는 허무한 것들이고, 생명으로 가는 길을 방해하기만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먹는) 사람은 나와 하나가 된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을 "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내 안에 머물러서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을 믿는다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또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속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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