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4주간 월요일]양들의 문 (요한10,1-10)
베드로는 할례 받지 않은 신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고 따지는 할례 받은 신자들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환시를 야포 시에서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사도 11,1-18)
그 무렵 1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2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3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4 그러자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5 “내가 야포 시에서 기도하다가 무아경 속에서 환시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내려앉는데 내가 있는 곳까지 오는 것이었습니다.
6 내가 그 안을 유심히 바라보며 살피니, 이 세상의 네발 달린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보였습니다.
7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8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9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10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것들은 모두 하늘로 다시 끌려 올라갔습니다.
11 바로 그때에 세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다가와 섰습니다. 카이사리아에서 나에게 심부름 온 이들이었습니다.
12 성령께서는 나에게 주저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 집에 들어가자,
13 그는 천사가 자기 집 안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
14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5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6 그때에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7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18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양들의 문이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다. (요한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1,1-18)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4~15)
사도행전 1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할례받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함께 식사했다는 데 대한,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 및 베드로의 변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의 계기가 된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까지 복음이 증거되며 교회가 확장되는 역동적인 역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안에서도, 이방인 선교의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루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회심 사건과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유대적인 전통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이방안의 선교의 물꼬를 터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코르넬리우스의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의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시 한번 베드로의 변론을 통해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도 이방인의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이방인의 선교의 길이 더 환하게 열렸음을 보여 주려는, 역사가인 동시에 그 자신이 선교사이기도 한 사도행전 저자의 의도적인 기술이다.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14)
본절은 병행 구절인 사도행전 10장 30~33절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에게 전한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코르넬리우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말을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한 말인 것이다.
여기서 '너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파스 호 오이코스 수'; pas ho oikos su)는 '집의 거주자들', '한 집안 식구'라는 뜻이다.
즉 구원의 범위가 코르넬리우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살고 있는 가족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를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그 온 집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의 코르넬리우스의 이 진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할례를 받은 후에야 구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러한 절차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15)
본문을 직역하면, '성령이 떨어졌다'(epepesen to pneuma to hagion; 에페페센 토 프뉴마 토 하기온; the holy spirit fell)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무거운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나 덮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본문의 '에페페센'(epepesen)은 성령의 주도적 역사를 더 강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성령께서 임하신 시기를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라고 언급했는데, 사도행전 10장 44절을 보면,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사도10,34) 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결과는 신령한 언어(방언)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 나타났는데, 이 표징은 베드로가 설교를 다 마치는 때에 맞추어 일어났을 것이다(사도10,46).
그러니까 본절인 사도행전 11장 15절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의 심령과 영혼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도행전 10장 44절은 베드로의 설교 말미에 신령한 언어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써 성령받은 사실이 외적 표징으로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서 성령께서 유대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 부어진 것처럼, 이제 이방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즉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카이사리아에서 있었던(사도10,1)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성령 강림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이란 표현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성령께서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에게 말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전혀 비난받을 것이 아님을 힘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7ㄷ~8ㄱ)
요한 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예수님의 '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양식의 독특한 진술이 여기에서도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의 문'으로 나타내신다. 양들이 안심하고 출입할 수 있는 양들을 위한 유일한 문이라는 것이다.
'문'으로 번역된 '튀라'(thyra; door)는 '문'(door), 혹은 '입구'(entrance)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하늘 나라의 문'(루카13,24)이나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뜻을 나타내어 쓰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양들의 문'이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요한14,6). 모든 사람은 이 문을 통해서만 거룩하신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영원히 하느님의 약속들에서 제외되고 만다.
이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있게 되며, 이 문을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요한1,12.13).
한편, 여기에 나오는 '문'에 해당하는 '헤 튀라'(he thyra; the door)가 어떤 사본에서는 '목자'에 해당하는 '호 포이멘'(ho poimen)으로 나온다.
이것은 번역가들이 '양들의 문'과 '양들의 목자'를 동일하게 생각했음을 암시한다.
실제 고대 근동의 규모가 작은 양들의 우리에 있어서는 목자가 문 입구에 누워 밤을 지새웠으므로, 양의 문과 목자를 동일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요한10,7.9.11.14).
요한 복음 10장 1절에서 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로 들어가는 자들은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을 도둑이며 강도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에 해당하는 '프로 에무'(pro emou; before me)는 '내 앞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진리를 거부하였던 유대 종교 지도자 무리들을 지칭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사람들은 백성들 앞에서 하늘 문을 닫아 걸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훼방하였고(마태23,13), 유대교 신자 하나를 얻기 위해 육지와 바다를 다니지만, 한 신자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배나 더 나쁜 지옥의 자식이 되게 만들었다(마태23,15).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악마에게서 난 자라고 까지 하셨다(요한8,41).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영적 상태 등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이 중시한 것은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과 본질없이 형식만 남은 율법의 자구적 해석뿐이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도외시하고, 자신들 스스로 굴레를 씌운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잃고 멸망으로 가도록 만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도둑이며 강도라고 질책하셨던 것이다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으로 가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요한 복음은 목축업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 친근한 ‘목자’와 ‘양 떼’라는 표현을 통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과 착한 목자에게 속한 적이 없어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묘사합니다.
목자에게 속한 양 떼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가 인도해 주는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아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양 떼도 있고, 양 떼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훔치고 죽이려는 이들도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언제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유다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에 공감하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이단시하며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아가던 군중과 유다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위선자이자 거짓 예언자로 몰던 자들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이는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을 만나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음식을 먹었다며 논쟁에 휘말렸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은 유다 민족에 국한된 율법 전통에 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의 거룩함과 선함, 아름다움을 깨달은 모든 이에게 열린 것임을 환시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는 말씀처럼, 자기 편견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내린 성령 세례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표징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