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복음 선포 (마르 16,15-20ㄴ)

2018. 4. 25. 오전 6:57:09

글자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복음 선포 (마르 16,15-20ㄴ)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며, 그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한다고 전한다. (1베드5,5ㄴ-14)
사랑하는 여러분, 5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9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도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10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나면,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분께서 몸소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11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
12 나는 성실한 형제로 여기는 실바누스의 손을 빌려  여러분에게 간략히 이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격려하고, 또 하느님의 참된 은총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
13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14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전한다. (마르16,15-20ㄴ)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1베드5,5ㄴ-1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5ㄷ)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덕인 겸손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후 만찬 전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장면(요한13장)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겸손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의미의 권면(5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 해당하는 '휘페레파노이스'(hypereoanois)의 원형 '휘페레파노스'(hyperepanos)는 '~위에, 너머에' 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빛이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p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들 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데(창세3,5 ;이사14,13.14), 이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하느님은 그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여기서 '대적하시고'로 번역된 '안티탓세타이' '안티탓소마이'(antitass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것은 '~반대하여', '~에 대항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안티'(anti)와 '놓다', '두다'란 의미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대적하다'(사도18,6)뿐 아니라 '물리치다'(야고4,6)란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적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이나  그 결과를  나타내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라고 했다.

반면에 하느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섬기를 자를 높여 주시는 분이다.

본문에서는 '대적하시고'에 해당하는 '안티탓세타이'(antitassetai)와 더불어 '(은총을)베푸십니다'에 해당하는 '디도신'(didosin)역시 모두 현재 직설법인데, 이것은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화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 

여기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이라고 번역된 '케이라'(cheira)의 원형 '케이르'(cheir)는 일반 명사로서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권한, 소유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들어,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곧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권한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루카23,46)

또한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속한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표현에서도 '케이르'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요한10,29). 이 단어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의 권위에 복종시켰다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다.(요한3,35 ;13,3)

이상에서 '케이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는 소유, 권리, 권위, 능력, 주권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보게된다.  더구나 본절에서 '손'이란 명사앞에 '강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 혹은 통치 아래에서' 라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권고를 따를 때에 뒤따르는 보상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바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는 것이다. 

'여러분을'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휘마스'(hymas)는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즉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진 자만을 높이시는 것이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kairo)의 원형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결정적인 때, 또는 하느님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때'는 그리스도인이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아래에서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때가 이 세상의 어느 한 때인지, 아니면 재림 후 심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경의 흐름속에서 본문의 '때'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7)

본절에서 11절까지는 고난 중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권면이다. 그리고 12-14절까지는 본 서신의 결말 부분으로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이 담겨 있다. A.D.6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본서는, 기록된 지 얼마 후 로마 대화재 사건이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이를 그리스도인의 고의적 방화로 그 누명을 덮어씌움으로써, 정말 피비린내 나는 대박해가 있었다.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이제 스스로의 죽음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든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굳세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내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걱정'(염려)으로 번역된 '메리므난'(merimnan)의 원형 '메리므 '(merimna)본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메리죠'(mer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마음이 나누어 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걱정'(염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걱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긍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걱정의 자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마태오 복음 6장 25-33절에서 하셨고, 루카복음 10장 38-42절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면서 마음이 나누어진 마르타의 행동을 지적하며 꾸중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필리피 서간 4장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우리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맡기십시오'에 해당하는 '에피립산테스'(epiripsantes) '~의 위에' 혹은 '위를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던지다'(루카17,2)란 뜻의 동사 '립토'(r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에 던져버리다' 혹은 '위를 향하여 던져 버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립토'(epiripto)의 명령의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6절 상반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종합하면, 우리들 마음의 관심사들을 독점하는 것이 결국 걱정(염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주권적 경륜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심시오. 여러분이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8-9ㄱ) 

'정신을 차리다' 해당하는 '넵사테(nepsate)는 '근신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깨어 있으라' 번역된 '그레고레사테'(gregoresate)는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권고나 요청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적 경각심에 대한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완벽한 헌신이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영적 경각심을 갖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코린16,13)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도 베드로는 과거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마귀에게 삼키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호소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으로, 자신과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가슴 절절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적대자'에 해당하는'안티디코스'(antidikos)는 법정 용어로서, '소송의 상대' 지칭하는 단어이다.(잠언18,17) 이 단어가 마태오 복음 5장 25절과 루카복음 12장 58절에서는 '고소한 자'로 번역되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꼐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베드로 사도가 마귀(악마)를 '안티디코스'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특성(욥기1,6-2,7 ; 묵시록12,10)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에페4,27) 하느님께 참소한다.(묵시록12,10)

이러한 사실을 '마귀'(악마)에 해당하는 '디아블로스'(diablos)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아블로스'는 '디아'(dia)와 '블로스'(blos)의 합성어인데, '디아'는 '관통하는 (through)', '쪼개고 들어오는'의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블로스'는 '(낚아채서)반대 방향으로 던져 버리다' (throw down)라는 뜻을 가진 '발로'(ball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귀(악마)는 죄와 유혹을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인간을 하느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비방하다', '중상 모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발로'(diaba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방자', '참소자', ' 중상 모략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참소하는 자의 특성 및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자의 특성을 지닌 마귀 (악마 ; devil)라는 의미로 쓰였다. 

'으르렁거리는 사자' 번역된 '레온 오뤼오메노스'(leon oryomenos)'우는 사자'(a roarling lion)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배가 고파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모습이나 혹은 먹이를 잡아 두고서 승리의 환호의 표현으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구약의 에제키엘 22장 25절과 시편 22장 13절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볼 때, 우는 사자의 이미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두렵고 진인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이와같은 사상은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나온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피해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테이'(pistei)는 '신앙', '신뢰',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피스티스'(pistis)의 여격이다. 이 용어는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중심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라'고 베드로는 권고하는데, 여기서 '굳건히 하여' 번역된 '스테레오이'(stereoi)'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를 틈타 마귀가 행하는 위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14ㄴ)

여기서 '평화', '에이레네'(eirene)는 '광야'를 의미하는 '에레모스'(eremo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광야의 분위기와 같은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평온함은 외부에서 밀어 닥치는 소란과 위협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며 모든 근심과 염려(걱정)와 두려움을 초월한 평정한 마음이다. 

이런 '에이레네'는 그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요 열매이다.(갈라5,22).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마르16,15~20)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6~17)


마르코 복음 16장 16절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외적 표시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인 세례를 언급하셨다.

'세례를 받는'으로 번역된 '밥티스테이스'(baptistheis; is baptized)'밥티조'(baptizo)의 과거분사이다.

'밥티조'(baptizo)'반복하여 담그다', '담가서 물로 깨끗히 하다'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되었음을 (로마6,3) 공적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의 입문 성사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루카3,21~22; 마르1,9~11; 마태3,13~17).

이것은 단순히 겸손의 모범으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며, 자연수를 축복하기 위해서만 요르단 강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로 번역된 '카타크리테세타이'(katakrithesetai; will be condemned)'카타크리노' (katakrino)의 미래 수동태이다.

'카타크리노'는 보통 재판 때 사용되는 법적 용어로서 '판결을 받다', '죄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는 자들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됨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믿는 이들에게 맡길 때에 일방적으로 선교의 의무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먼저 복음을 능력껏 전파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주시면서 사명을 맡기셨다.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 signs) '세메이온'(semeion)의 복수 주격이므로 여러가지 다양한 표징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세메이온'(semeion)'표적', '징조'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보증하기 위해 행하시는 기적과 놀라운 사건을 뜻한다.

표징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내려오는 하느님의 능력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능력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이미 12제자의 파견(마태10,1; 마르3,15)때와 일흔 두제자의 파견(루카10,17) 때도 주어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사도들과 제자들을 대상으로 제한되었던 능력이 복음을 믿고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으로 구마와 신령한 언어있을 것이 예언된다.

구마'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에페2,2)들의 능력을 제어하신 하느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마귀에게 종되었던 이가 복음이 전파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어 자유롭게됨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


여기서 '쫓아내고'로 번역된 '에크발루신'(ekbalousin; they will cast out; they will drive out)'에크발로'(ekbalo)의 현재형이다.

'에크발로' 어떤 이가 행하는 권세를 빼앗고 다른 장소로 쫓아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세상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의 세력들을 쫓아내는 것을 뜻한다.

복음 전파시 이것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의 세력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칠 수 있음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현재형으로 기록된 이유는 이러한 표징이 오고가는 세대에 항상 현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들'에 해당하는 '글롯사이스~카이나이스' (glossais~kainais; new tongues)오순절날 이후에 내려질 이적에 대한 암시이다(사도2,4; 10,46; 19,6).

'새로운 언어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안되는 마르코 복음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새로운 언어들'에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외국어 방언(사도2,4)과 개인의 깊은 경건한 신심 생활을 돕고, 교회의 선익을 위해 잘 봉사하기 위한 하느님의 은사로서 천상의 방언이 있다(1코린12,10; 14,4).

아마도 여기서 나타난 '새로운 언어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던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언어들'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사도2,4).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예수님의 이러한 약속은 몰타(Molta) 섬에 있었던 바오로에게 일어났으며(사도28,3~6),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성경에는 없지만,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Eusebius, 교회사,Ⅲ, 39)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누리게 될 놀라운 권능과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이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개인의 공명심을 위해 이러한 시험을 해 보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에게 일어났던 것이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 정확하게 바오로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 주어서, 하느님의 약속의 엄정성과 더불어 바오로가 진실한 복음의 사도임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 중에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행하셨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마르6,5; 7,32; 루카4,40).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표징을 행했으며, 이러한 표징을 행한 대표적인 제자는 바오로이다(사도28,8).

여기서 '손을 얹으면'에 해당하는 원문은 '케이라스 에피테수신'(cheiras  thesousin; they will place their hands on; they will lay on by hands)이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온 세상’은 글자 그대로 온 세상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어떤 지역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일부 독재 국가의 경우에는 선교활동을 하려고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못 들어가는 것과 안 들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 국가의 경우에도 포기하면 안 되고, 그곳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생기면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선교활동 대상으로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라는 뜻이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기쁨’을 생각하면, 글자 그대로 '모든 피조물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1-23).”

만일에 인간들만 천당이나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래서 그곳에 인간들만 있고, 동물들과 식물들은 하나도 없다면, 그곳은 무척이나 삭막한 곳, 즉 모래밖에 없는 사막과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라면,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뛰어놀고,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왕국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6-9).”

(자연 보호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반대로 자연 파괴와 동물 학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해야 할 복음의 내용인데,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기쁜 소식’이 되고, 안 믿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무서운 소식’이 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안 믿는 자들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호소’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

이 말씀은, 믿는 이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고, 또 믿는 이들이 하는 일도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믿기만 하면 무조건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만 있으면 항상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기적은(표징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느님(예수님)께서 예외적으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따라서 바라는 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라고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도 안 되고, 자신의 믿음이 충분하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아무 때나 기적을 일으키려고 시도해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시험하는 태도이고,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의 영광 속에 계신다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이 말은, 사도들의 활동을 간단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믿음과 용기로 가득 찬 모습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온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기적들이(표징들이) 일어났었고, 그 기적들은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항상 기적들이(표징들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꼭 필요한 경우에 예외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첫 번째 힘은 ‘성령의 도움’이고, 두 번째 힘은 사도들 자신들의 ‘믿음’입니다. 사실 놀라운 기적들을 통한 확증이 언제나 항상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표징이 없어도 믿고, 안 믿는 사람은 표징이 있어도 안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왕실 관리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라고 꾸짖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먼저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기적들을 통한 확증만 바라는 것은, 또는 그런 체험을 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믿음에는 확증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 믿음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의 기쁨과 효과를 자신들이 먼저 체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내면의 나약한 인간성을 받아들이면서 회심과 쇄신을 통하여 외적으로도 놀라운 표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는 표징들이 따를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알려 주십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굳은 믿음을 갖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참된 신앙인들은 이런 표징들을 일으킵니다. 죄와 악행에 빠진 이들을 회개시키고, 악한 영들을 물리치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언어를 씁니다. 진실하고 선한 의지를 갖고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이의 손길은 어떠한 해악도 입지 않고, 오히려 악을 이기는 선의 능력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이런 표징들을 보이려면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를 대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적대자 악마에게 대항할 것을 당부합니다. 비록 그들이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악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셨기에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영광을 선사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
‘나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드로 사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마르코는, 바로 이런 신앙의 빛 속에 살았기에, 복음서를 쓰면서 참된 회개와 복음의 기쁨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말뿐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 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