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금요일] 길진리생명 (요한 14,1-6)|

2018. 4. 27. 오전 7: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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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간 금요일] 길진리생명 (요한 14,1-6)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다고 말한다. (사도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시며,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 (요한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13,26-33)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히였습니다.(27)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29)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목소리'를  뜻하는 '포네'(phone)의 복수형 '포나스'(phona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해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그 입을 통해서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들려온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즉 사도 바오로가 '로고스'를 쓰지 않고 '포네'를 쓴 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현재 듣고 있는 것처럼 암송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안식일마다 봉독되는'에서 '봉독되는'으로 번역된 '아나기노스코메나스'(anaginoskomenas) '암기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큰소리로 읽다', '낭독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기노스코'(anaginosko; 루카4,16; 사도8,28)현재 수동태 분사형이다. 

따라서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살려서 '읽혀지고 있는'이라고 번역하는게 좋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큰소리로 낭독했다. 

'이루어지게 했습니다'로 번역된 '에플레로산'(eplerosan)'플레로오'(plero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3인칭 복수형이므로, '그들은 이루었다'(they have fulfilled)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의미상의 목적어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오히려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찌기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이사53,5.12).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인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 17절에서 그렇게 말하였고, 사도 바오로도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에 자신이 훼방자요, 핍박자요, 학대자였던 것을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1티모1,13).


이처럼 무지는 진리를 죽이고,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고 대항하는 죄악이다. 그러나 이 무지가 죄은 죄에 대한 면죄의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다 이행한 뒤'에서 '성경에 기록된'으로 번역된 '게그람메나'(gegrammena)'기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그라포'(grapho)의 완료 분사형으로서 '기록된'(was written)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죽음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시편22편; 이사53,3~12).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일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이 인간의 자발적인 사악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사악한 의지와 자발적인 동기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나무'에 해당하는 '크쉴루'(ksilu)는 뿌리와 잎이 있는 살아있는 수목이 아니라 잘려서 가공된 목재를 뜻한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달린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나무라고 한 것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떄문일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갈라3,13; 사도5,30; 10,39참조).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33) 

사도 바오로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메시아의 부활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하였다. 

시편 저자가 시편 2장 7절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육화(강생)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가 인용할 때는 문맥으로 보면,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원수 사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인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그의 부활은 그의 두번째  탄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에 해당하는 '에고 세메론 게겐네카 세'(ego semeron gegenneka se)에서 '낳았다'에 해당하는 '게겐네카'(gegenneka)란 동사에 이미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ego; 내가)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에고'가 쓰인 것은, 낳으신 주체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오늘'로 번역된 '세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구약 번역본인 70인역(lxx)에는 '오늘날'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문의 단어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부활하게 하신 때를 의미한다. 

이것을 굳이 '오늘'로 표현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있어서는 모든 시간이 '오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요한14,1~6)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2)


'거처할 곳'으로 번역된 '모나이'(monai; mansions; rooms)'모네'(mone)의 복수형이다.

'모네'(mone)는 목적격 단수로 여기와 요한 복음 14장 23절에서 쓰일 뿐,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 한번도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네'(mone)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것은 여행중에 잠시 들러서 휴식을 하는 임시적 공간의 의미라기보다는, 제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을 견고히 하는 항구적 거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기서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비록 헤어지더라도,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또한 있다가 없어질 이 땅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처소에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강림 이후 성령충만을 체험한 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이 세상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았으며,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순교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요한 복음 14장 2절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중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신다.

'내가 ~간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poreuomai; i go)'포류오'(poreuo)현재 시제 중간태로서 '내가 스스로 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래적 현재'라고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신적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예고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을 덧붙이셔서 그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신다.

당신 자신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그들 뿐만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지불하셔야 될 대가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이 영원히 거처할 처소를 마련하는 이 일은 오로지 십자가상 대속의 구속사업을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유보된 일인 것이다(사도4,12).



 


흔들리지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14,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견하신 지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마저 배신하는 끔직한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너희가 머물 곳을 아버지 집에 마련하러 가는 일시적인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고 나를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 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음의 산란함 속에 살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도 믿음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적인 이득을 따지게 되고 계산하면서 결국은 주님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가면서 방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다다르는 수단이십니다. 아버지와 만남을 이루는 방법은 예수님을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중개자이십니다. 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니 그분을 따라 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길이신 그분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셔서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께서 그 안에 사십니다. 그래서 누군가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생명을 추구하기에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생명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완전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구원을 알립니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내 삶을 주님의 삶으로 바꾸지 않는 한 그분은 그저 좋은 분으로 머물 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매사에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용기 있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힘들면 힘이 들수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1-4).”


이 말씀 앞에,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있었고(요한 13,21),

이별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있었고(요한 13,33),

베드로 사도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요한 13,38).

그 말씀들을 듣고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졌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갖고 침착해지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이 산란해진’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후회했다고,

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의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듣고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라고 말했고(요한 13,37),

거슬러 올라가면 토마스 사도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는

말을 했었고(요한 11,16),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요한 6,68-69).

(유다가 배반을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사도들이 흔들린 것은 믿음이 아니라 용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심정을 잘 나타낸 사람들이 바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입니다.

“......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두 제자에게,

당신이 고난을 겪으신 이유와 그 일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루카 24,25-27).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당신에 대한 믿음을 구분하신 말씀이 아니고,

두 믿음이 사실은 하나의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일부 사이비 종파처럼 하느님만 믿고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또는 예수님만 믿고 하느님을 안 믿는다면,

어느 쪽이든지 간에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든 이 말씀은, 지금 마음이 산란해진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강한 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당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이 약속은 믿음과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거처할 곳이 많은 넓은 집’은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집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몇몇 사람들만 엄격하게 선별해서 데리고 들어가는 집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의 자리를

마련하러 가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별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는 말씀을 언제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시 와서” 라는 말씀은, ‘재림’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활과 승천 후에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시는 ‘현존’을 뜻하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라는 말씀은,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방법’을 뜻하고,

그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인데,

특히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이고,

최후의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마태 25,34-40).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말씀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에 대해서 선언하신 다른 말씀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이 말씀들을 모두 종합한 말씀이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길이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되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

즉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은 본능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취향이나 가치관을 따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선택에 대한 후회는 우리 마음을 언제나 산란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선택에 따른 확신이 서지 않을 때마다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기적을 보면 확신이 서다가도,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거나 율법 전통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실 때마다, 정말 이분이 메시아가 맞을까 하는 고민도 생겼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분명하고, 그 길이 보편적인 진리이자 내게 생명을 주는 길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세상의 논리로 쉽게 따르기 힘든 길처럼 보입니다. 메시아라면 어떤 세속의 권력을 넘어서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데도 불의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며,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인간적인 고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이 불신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나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고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삶의 권위이자 확신이 아닐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오해와 편견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 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주님께 청해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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