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토요일]영은 생명을 준다 (요한 6,60ㄴ-69)

베드로는 리따로 내려가 중풍에 걸린 애네아스를 고쳐 주고, 야포로 가서는 병이 들어 죽은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살려 낸다. (사도9,31-42)
그 무렵 31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리따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가게 되었다.
33 거기에서 베드로는 애네아스라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 있었다.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가 일어났다.
35 리따와 사론의 모든 주민이 그를 보고 주님께 돌아섰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37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제자들은 베드로가 리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람 둘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저희에게 건너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9 그래서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를 옥상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러자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에게 다가가 울면서, 도르카스가 자기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다.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
41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운 다음,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다시 살아난 도르카스를 보여 주었다.
42 이 일이 온 야포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냐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냐며,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고 대답한다. (요한 6,60ㄴ-69)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9,31~42)
"야포에는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이 이름은 그리스말로 번역하면 도르카스라고 한다. 그는 선행과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이었는데, 그 무렵에 병이 들어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 방에 눕혀 놓았다." (36~37)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부터 42절까지는 베드로가 죽은 타비타(tabitha)를 살림으로써 야포(원문에는 '이옵페'; ioppe)지역에서도 이것을 계기로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일어난 야포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이다. 베드로는 팔레스티나 서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던 중에 리따를 거쳐 리따의 북서쪽에 있는 야포에도 이른 것이다.
'여제자'라고 번역된 '마테트리아'(mathetria)는 '마테테스' (mathetes; '제자')의 여성형으로서 '여성제자'이다.
사도행전에는 교회에 속한 모든 모두에게 '제자'(사도6,1.2.7; 9,10.19.26; 11,26.29; 13,52)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 명칭은 반드시 예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운 직속 제자와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타비타'라는 여제자도 주님께 대한 헌신적인 섬김을 통해 이렇게 불려지고 있었다.
특히 '도르카스'(dorkas)는 선행('에르곤 아가톤'; ergon agathon; doing good)과 자선('엘레에모쉬논'; elleemosynon; helping poor)하는 일을 맡아 주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모범적인 주님의 제자였다.
a.d.1세기경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상당수가 두 개의 이름 즉 아람어(예수님의 모국어)이름과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여제자도 '타비타'라는 아람어 이름과 '도르카스'라는 그리스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것을 보아 그녀는 그리스계 유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이름은 둘다 '영양'(羚羊; gazelle)을 뜻하는데, 영양은 빨리 달리고 품위가 있어 '은혜로움' 혹은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런 이름과 뜻과 같이 누구보다도 선행과 자선에 헌신적이었던 아름다운 심성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의 시신을 씻어 옥상방에 눕혀 놓았다.'
'씻어'라고 번역된 '루산테스'(lusantes; they had washed)는 '씻다'를 의미하는 '루오'(luo)의 부종(不定) 과거 분사이다.
이 '루오'동사는 신약 성경에 5회 등장하는데, 문자적인 '씻음'(사도9,37; 16,33; 2베드2,22)과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정결'(요한13,10; 히브10,22)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물론 장례 절차로서 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또한 타비타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옥상방'으로 번역된 '휘페로오'('hyperoo'; an upper chamber)의 기본형 '휘페로온'(hyperoon)은 '집의 가장 높은 부분','여인들이 물러가 거하는 위층'을 의미하며, 때때로 지붕 위 평평한 곳에 지어진다.
시신을 씻는 것은 장사를 위한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그것을 옥상방(다락)에 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아마도 장사되기 전까지 시신을 조용한 곳에 두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옥상방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의 일로 널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믿는 사람들이 헌신적이었던 그녀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가 내려질 것으로 믿고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열왕기 하권 4장 10절과 21절에 엘리사의 옥상방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넴 여자가 위로 올라가 하느님의 사람의 침상에 죽은 아이를 눕히고는 문을 닫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말하자면, 선행과 자선에 힘썼다가 죽은 타비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베드로에 대해서 구약의 엘리야나 엘리사 예언자처럼 생각하고, 예언자들의 옥상방에서 일어난 소생 사건이 타비타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사도행전 9장 38절에서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를 지체하지 말고 자신들에게 건너와 달라고 다급하고 간절하게 초청하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6,60ㄴ-69)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63)
여기서 '육'에 해당하는 '사륵스'(sarks; flesh)는 기본적으로 '살'이라는 뜻이며, 육체 및 혈육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데 종종 쓰인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하여 하느님을 찾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인간, 그리스도를 보고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육'은 언제든지 죄에 굴복하므로, 육체가 있는 곳에 언제나 죄가 있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기본 입장이었다.
'영'이 생명을 주는 것과 대조적으로 '육'(사륵스)은 영적인 측면에서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쓸모가 있다', '유익하다', '돕다', '소용이 되다'에 해당하는 '오펠레이'(ophelei; profits; counts for)는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데, 여기처럼 사물에 대해 쓰일 때에는 '그것은 가치가 있다'(it is of value; it is of avail)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오펠레이'(ophelei)를 부정하기 위해 '우크~우덴'(ouk~ouden)이라는 이중 부정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여 '육'이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됨을 강조하시고 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성경은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며(로마8,6),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결과가 하느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경고한다(에페2,3).
즉 '육'(사륵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육'의 무익함을 죄로 기울여지는 성향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게서는 인생을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가치를 소홀하게 여기는 육적 가치에 치우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이 매우 특별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말은'으로 번역된 '레마타'(remata; words)는 '레마'(rema)의 주격 복수로 '말하여진 것들', '예언들', '명령들'로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이다.
'레마'(rema)는 기본적으로 '분명하게 말하여진 어떤 것', 즉 진술이나 성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내가 한'에 해당하는 '에고 렐랄레카'(ego lelaleka; i have spoken)는 말하는 주체를 나타내는 1인칭 대명사 '에고'(ego)를 사용하여 말하는 주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렐랄레카'(lelaleka)는 '랄레오'(laleo)의 완료 시제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 혹은 주장하신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내가 이미 설교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그 말씀들이 '영이며 생명'이라고 단언하신다.
당신 자신의 말씀 속에 생명의 영과 생명의 능력이 존재함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것은 본성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말씀과 성품이 죄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생명이며 오직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만 할 수 있는 말씀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라는 성경의 증거는 그 말씀이 지닌 능력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낸다.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레미타'(remata)가 있는 곳에서는 새 생명의 역사와 영적 갱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 복음 6장 68절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에서도 '말씀'은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레마타'(remata)가 사용된 것을 볼 때, 이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이해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곁에 머묾과 떠남의 갈림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 하시고,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6,54).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에 많은 사람이 이런 말씀을 듣고 있기조차 거북하다며 되돌아가버립니다(6,61-62).
왜 그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북스러워하며 떠나버렸을까요?
인간적이고 감각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던 그들이었기에,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표징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단한 능력까지는 인정한다 해도,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썩지 않을 빵이라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욕구를 채우는데 몰두하다보니,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을 뜻과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이나 내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전해지는 생명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입니다.
그들 자신의 욕심과 기대, 고정관념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육적인 욕구 충족과 자신에 대한 애착의 늪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며, 하고 싶은 것만 하려 합니다.
누구든 시간과 공간의 틀과 물질과 육의 껍데기에 둘러싸이게 되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진리의 말씀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비극은 시작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투덜거리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6,63)
영원한 생명이란 천년만년 몸뚱이가 산 채로 남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건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주는 영이신 예수님의 얼을 지니고,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할 때, 시공과 육신을 초월하여 행복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생명을 주는 길과 쓸모없는 육의 길 가운데 선택하라는 결단의 촉구이자, 항구한 믿음을 가지라는 격려입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예수님만이 삶의 길이요 목적이며,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갖고 계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완전히 이해해서 예수님 곁에 머물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했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 그분께 있음을 믿었기에 머물려 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너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물질과 돈과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 되어가는 이 시대에, 예수님 곁에 끝까지 머문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임이 분명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스스로 믿음이 약해지고, 혼란스러워하고, 절망하고, 죄의 어둠에서 헤매며 넘어지곤 하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함이나 대단한 업적을 요구하지 않으심을 상기해야겠습니다. 그저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시려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그분께서, 우리 곁에 함께하시며 먹히는 밥이 되어주려 하십니다.
그분 친히 영으로 육인 나를 채워주시고, 나의 밥이 되어주시어 나를 살리시고,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헷갈림 없이 이것을 믿고 그분 곁에 머물며,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행복한 우리였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에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예언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당신을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자기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에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불평을 터뜨리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물론 실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모두를 대신해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히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 담긴 확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 버릴지는 베드로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이후에야 베드로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의 자리로 오르셨음을 깨달은 베드로는, 세상의 모든 병과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능력에 맡겨진 일임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자신의 손을 빌려 중풍에 걸린 애네아스를 치유하고, 타비타라는 여제자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육체를 경시하고 영적인 일에 매달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육은 한계를 지닌 인간을 뜻하고, 예수님의 영의 인도와 도움 없이 인간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과 표징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매순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으며 성령의 지혜를 청합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생영원한 생명의 말씀>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버립니다(요한 6,60.66).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라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기가 거북하다고 했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듣기 편하게'(또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지 않았고, 듣기 싫으면 떠나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십니다.
예수님이 융통성 없는 분이라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아닙니다. 믿으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믿음이란, 교리를 이해한 다음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믿으면, 믿음 속에서 교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됩니다.)
교리 가운데에는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교리는 계시된 교리라서 우리가 믿고 있긴 한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거나 체험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영원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속성을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54)." 라는 말씀이 듣기가 거북한 것은 사실이고, 인간의 언어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을 못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설명을 잘 해 주셔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는 말씀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인데, 생명을 원한다면 듣기가 거북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도단을 대표해서 한 말이기 때문에 사도단의 신앙고백입니다.
사도들도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떻든 그들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다른 길보다 더 좋은 길도 아니고, 여러 길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길도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러니 다른 길은 모두 버리고 예수님만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참 종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모두 적대시하고 말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하되, 다른 종교들은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도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말씀들을 모두 잘 깨닫고 이해한 상태에서 설교를 합니다.
사도들은 믿음으로써 깨닫게 되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는데, 그들의 설교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듣는 사람들의 숙제로 남게 됩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저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다." 라는 말은, 마음으로 믿고 있는 것과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일치되어 있음을, 즉 강하게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맹신'하는 것도 아니고, 믿으면서도 속으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것들도 생각하는 그런 어정쩡한 믿음도 아닙니다.
(자기가 누구를 왜 믿고 있는지를 알고 있고,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고 그대로 실천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암시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요한 6,70).
꽤 긴 내용의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뒤에 유다의 배반을 암시하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또는 복음서 저자가 이 말씀을 여기에 기록한 것은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고 제자들이 떠나버릴 때, 어쩌면 유다도 예수님 곁을 떠나려고 했다가, 어떤 이유로 떠나지 않고 남았을 것입니다.
사도라는 체면 때문에 속마음과 다르게 그냥 남아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떠날지 남을지 망설이다가 떠날 기회를 놓치고 남게 된 것인지...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유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곁에 남은 것이라면, 예수님 곁에 남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 즉 믿는다는 표시가 되지 않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