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간 목요일]생명의 빵(요한6,44-51)
필리포스는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을 만나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다. (사도8,26-40)).
그 무렵 26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27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30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36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37)·38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40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인데, 당신께서 주실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신다. (요한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8,26-40)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 (26)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선교와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기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8장 4-25절에 이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부터 40절까지는 필리포스의 에티오피나 내시 선교 및 서부 해안 지역 선교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포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주님의 천사' 즉 '앙겔로스 데 퀴리우'(anggellos de kyriu)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천사' 혹은 '주님의 사자'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천사'를 네 번 언급한다.
즉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5,19), 필리포스에게 지시하는 주님의 천사(사도8,26), 감옥에서 베드로를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12,7-10), 헤로데를 내리친 주님의 천사(사도12,23)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님의 천사'는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다. 즉 사도행전 8장 29절과 39절에 다시 '성령', '주님의 성령'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주님의 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도와주는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등장하는 데는 특별한 선교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계속해서 더 큰 선교의 역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혹은 '외딴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땅으로 보내지며,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완전한 주관하심 가운데 그분에게 이끌려, 이제까지의 복음 선교의 터전 사마리아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어 보이는 광야로 가야 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일어나 ~ 가거라'
'일어나'로 번역된 '아나스테티'(anasteth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신약 성경에서 108회 사용될 정도로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의미도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에서는 '준비하라'(get ready)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여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 보다 적당한 명령이다(마르1,35). 따라서 필리포스가 이 명령을 듣게 된 상황은 잠자는 동안의 꿈속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의 두 단어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일어나'는 부정(不定) 과거이며, '가거라'는 현재이다. 이것은 '일어나' 동작은 일시적인 것이며, '가는 것' 즉 여행하는 것은 지속적인 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필리포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쉼없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의 행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먼저 '남'(南)으로 번역된 '메셈브리안'(mesembrian)의 기본형 '메셈브리 아'(mesembria)는 '중간의', '한가운데의'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날'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쪽'이라는 뜻과 함께 '한낮의'(midday), '정오쯤'(사도22,6)이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남쪽으로'로 번역된 '카타 메셈브리안'(kata mesembrian)는 '한낮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필리포스가 받은 지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된다. 그는 한낮에 즉 따가운 햇볕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벼려진 길을 가야만 했다.
또한 '외딴길'로 번역된 '에레모스'(eremos)도 '광야'나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할 지, 아니면 '버려진', '사람이 살지 않는'을 뜻하는 것으로 '가자'(gaza)지방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사도행전 8장 36절의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를 참조할 때, '외딴길', '황폐한 길'이 더 자연스럽게 보여 대다수 번역본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39)
필리포스의 선교와 세례의 집전은 '주님의 천사'(26절), '성령'(29절), '주님의 성령'(39절)의 지시와 인도하심으로 되어졌다.
즉 필리포스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그 전(全)과정에 있어서 성령 주도적이며, 성령이 세밀하신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에서 '잡아채듯 데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원문상으로 볼 때 '헤르파센'(herpasen)는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를 뜻하는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不定) 과거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4회 쓰이는데, '빼앗아 감'(요한10,28), '파괴의 위험에서 구함'(유다23절), '신속히 잡아 데려가는 것'(요한6,15; 사도23,10), '한 사람을 신비롭게 혹은 매우 빨리 다른 장소로 옮김'(묵시12,5; 2코린12,2.4; 1테살4,17)등을 의미한다.
특히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의 경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동사를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필리포스는 단순히 길을 인도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붙들림에 의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간섭,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는 자신에게 성경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세례까지 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자기 길을 갔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이 그의 상황을 압도할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던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적 기쁨에 흠뻑 젖어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요한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는 '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의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 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 (ego doso), 즉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 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신앙은 선물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여 졌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 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짐에서 자유로울 때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4-45).”
‘하느님의 뜻’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이 은총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배척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아들이는 사람만 받고, 안 받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그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인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는 이끌어 주시고, 누구는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편애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로 해석됩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나에게 온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에 제대로 응답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다는 뜻인데,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리 성경을 잘 알아도, 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은 구약성경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은 성경을 통해서도 주어지고, 세례자 요한이나 다른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주어지는데,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전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6).”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알아도, 아무리 율법을 잘 실천해도,
또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실천을 잘해도,
또 혼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아서 어떤 경지에 도달해도,
예수님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7-48).”
앞의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만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고,
당신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고,
그 ‘참 생명’ 자체이신 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온전히 함으로써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생명의 빵을 먹어서 그 빵과 내가 완전히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한 몸을 이룬 생명의 빵은 내 안에서 나를 살리는 생명력이 됩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9-51).”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만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지상의 모든 빵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시적인 양식일 뿐이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기적의 양식이긴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양식은 아니었고,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내려주신 육신의 양식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만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 양식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 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표현인데,
이 말은 “나 자신이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즉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서 ‘먹는다.’ 라는 말은 ‘믿는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이 말은 자신의 온 삶을 다 바쳐서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