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화요일]하나 (요한 10,22-30)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에서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사도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달라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며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고 하신다. (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 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말)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 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사도9,27; 11,30; 12,25; 13~15장;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 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 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제자로서의 기본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 (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 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 표정, 사고, 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prostithemi)로서, 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30)
요한 복음 5장 17절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의 일체성이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과 근본에서 일치됨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번역된 '헨'(hen; one)은 중성이며, 여기서 중성이 사용된 것은 희랍어 어법을 잘 반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에서 '토 헨'(to hen; the one)은 존재의 궁극적인 통일성, 영원성, 불변하고 파생되지 않는 단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구별이 없는 존재의 동일성(oneness)을 나타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는 '헨'(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협력자의 관계 이상이며, 본질상 본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존재의 통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실은 '~이다'로 번역된 '에스멘'(esmen; are)이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와 계속, 그리고 변함없음을 나타내므로,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이같은 주장은 모여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장 돌을 집어들어 던지게 할 만큼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선언은 신성(神性) 모독의 극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 말씀들에는 모두 “나는 메시아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하고서 예수님께,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알아듣지 못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들을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라는 뜻인데, ‘믿음’이 먼저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게 되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으니까 예수님을 잘 알게 되고, 말씀들을 알아듣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공부하는 생활이 아니고 ‘믿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사도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사도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 말씀들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라는 말의 뜻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들”, 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들”인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본다면,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싫어하는 자들은, 믿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보면서도 그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방한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마르 3,22).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씀은,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양인 사람과 양이 아닌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양인데, 예수님을 충실하게 믿고 따르는 양이 있고,
믿고 따르기를 거부하는 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가 아니라,
“구원받으려면 나를 믿어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양이 된다.” 라는 말은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처음부터 예수님의 양인 사람과 양이 아닌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도 공로가 되지 못하고,
안 믿는다고 해도 책임질 일이(죄를 짓는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이 말씀의 뜻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고 따라라.
나는 나의 양들을 영원히 지켜 줄 것이며, 영원히 살게 해 주겠다.”입니다.
여기서 ‘알아듣는다.’는 ‘알아들어라.’이고,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나를 따른다.’는 ‘나를 따라라.’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는 “나는 그들과 사랑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게 되고, 영원히 예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9-30).”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주시고, 영원히 살게 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이고, 아버지는 이 세상 누구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분, 즉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힘은 곧 예수님의 힘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예수님의 양들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지상에서는 신앙인들이 박해와 고난을 겪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신앙인들이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송영진 모세 신부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하고 유다인을 향해 하셔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먼저 믿어라. 그리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보려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완고한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