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 주간 토요일]이름(요한 14,7-14)

2018. 4. 28. 오전 6: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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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4 주간 토요일]이름(요한 14,7-14)

 

연중 제16주간 목요일(7/23) - 오늘의 복음묵상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했는데 배척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선다고 말한다. (사도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에게, 당신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시며, 당신 이름으로 청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신다. (요한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돌팔매질 당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13,44-52)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52)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유대인들은 그 성(城)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동원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성에서 쫓아내 버렸다. 

'귀부인들'에서 '귀하다'는 뜻의 '유스케모나스'(euschemonas)의 원형 '유스케몬'(euschemon)은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형용사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태아 요셉이 이러한 사람으로 묘사되었고(마르15,43), 베로이아에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지체높은 그리스 여자들도 이런 사람으로 묘사되었다(사도17,12).


아마도 본문의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 그리스인들로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고위층 관리 부인들이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적지 않은 여인들이 황제에 의해 행정관으로 임명된 예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 여인들 중에서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그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을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나스'(sebomenas)'경건한'(devout) 혹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god-fearing)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유지들'(유력자들)로 번역된 '프로투스'(protus)의 원형 '프로토스'(protos)는 지위와 순서, 영향력에서 으뜸이고 최고인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안티오키아 성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여기에서 '박해하게 만들고' 라는 말은 단순히 말로 박해를 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신체에 해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박해하게 만들고'라고 번역된 '에페게이란 디오그몬'(epegeiran diogmon; raised persecution; stirred up persecution)'핍박케 하였다' 뜻이다.


코린토 2서 11장 23~26절의 바오로 사도의  술회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의 사건도 포함한다면,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붙잡혀 태장으로 맞은 후에 쫓겨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고위층 관리들은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아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가져다 주는 자들을 박해하고 강제로 추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 즉 상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에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명령(루카9,5; 10,11)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먼지'로 번역된 '코니오르톤'(koniorton)'티끌'(dust)을 말한다.


그런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 나타내는가?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자신과 그 지방은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발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도 털어내 버림으로써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많은 영적 결실을 맺었으므로, 그 도시 전체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기 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고 쫓아낸 유대인들과 고관들에 대해서 먼지를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믿음을 가진 그곳의 새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항하여 분노에 사로잡히고, 복음 선포자들을 내쫓아 버린 자들과 달리 복음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인 선물을 받아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가득 차 있었다'(충만하였다)로 번역된 단어 '에플레룬토'(eplerunto)계속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사도4,31; 8,8).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14,7-1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요한 복음 14장 10절은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질성과 하나되심을 보여 준다.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신적 위격(位格)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성자 '에고'(ego), 즉 '나'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고, 성부 역시 '토 파트리'(to patri; the father), 즉 '아버지'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란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아버지',즉 성부 하느님'내', 즉 성자 하느님께서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신적 위격으로서 요한 복음 14장 16절, 17절, 26절에 나타나는 성령 하느님까지 포함시켜 요한 복음 14장에는 삼위 하느님께서 모두 등장한다.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하느님 안에 계시다는 것은 이 두 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독립된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체론적 동질성을 가지며, 신적 속성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자와 동일 본체이신 성부 하느님을 본 것과 똑같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필리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며, 더 나아가서 성령 하느님도 하나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도 유비(analogy)를 찾아 볼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는 오직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계시다는'으로 번역된 '에스틴'(estin; is)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는 믿지 않느냐?'

여기서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에이스'(pisteueis; you believe)는  현재 시제이므로 진행 중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필립보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휘민'(hymin; to you)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므로, 이 문제는 단지 필립보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 하느님의 마음 및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생각을 지니고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고 함께 헀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이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영적 진리가 단순히 경험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적, 정체적 메시야로서 탁월하며 특별한 지도자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영적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부족과 영적 무지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역시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요한 복음 14장 10절 후반부의 '머무르시는'에 해당하는 '메논'(menon; dwells)은 현재 분사로서 중단없이 계속 거주하시는 상태를 나타내고, '하시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이'(poiei; does)도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잠시도 분리됨이 없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의복음(요한14.7~14)아버지께 가는길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기심을 채울 수도 남에게 해가 되는 무엇인가를 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구원을 청했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합니다.“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 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인간 아무개의 이름으로 청하면’인간적인 것을 얻을 것이고,‘예수님의 이름으로’청하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껏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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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로 양육되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을 닮는 것”이다. 그분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반영억(라파엘)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조성호신부, 하성호신부, 오상선신부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은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때로는 허상이거나 자기기만 또는 자신의 바람을 투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필립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예수님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런 필립보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비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의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져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실로 체험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얼굴이시고,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십니다.
강생의 신비인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입니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 한계를 지닌 인성과 대조되는 초월적 신성에 대하여 다양하게 가르치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들과는 달리 초월적 신성의 하느님께서 한계를 지닌 인성 안에 머무르시며 인간을 영원한 신적 생명에 초대해 주고 계시며,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절대적 기준이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 인격과의 만남에 있다고 확신하며 가르칩니다.
한 인간의 완성이 고통과 죄,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 희망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는 이에게 더 이상 세상의 한계들은 영원한 희망을 가두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부활 제4주간 토요일 / 장훈철 , 송용민 사도 요한 , 김형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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