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화요일] 평화 (요한14,27-31ㄱ)

2018. 5. 1. 오전 5: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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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화요일] 평화 (요한14,27-31ㄱ)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한다. (사도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하신다. (요한14,27-31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바오로의 1차 전도여행 지도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사도14,19-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타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1-23)


데르베에서 바오로는 큰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며,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바오로가 핍박을 당했다거나 반대에 부딪혔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는 가슴 벅찬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제자로 삼고' 번역된 '마테튜산테스'(matheteusantes)'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태28,19)이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본문의 '마테튜산테스'는 분사형으로 같은 단어이다.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데르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세례를 주고 말씀대로 살게 하였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22) 

'힘을 북돋아 주고'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 하고 강화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 (사도15,32.41;18,23),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 얻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나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몇 마디의 격려보다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2)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받고  믿기 시작한 신도들에게도 닥쳤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한 신도들은 점증하는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 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과 그 졸개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에페2,1), 불신자들은 다 그러한 세력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이고, 신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그로 인해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리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7) 또 신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8)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23 

바오로 일행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원활히 하며,복음이 더욱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운 뒤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구심점이 될 원로들을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임명하고' 번역된 '케이로토네산테스'(cheirotonesantes)의 원형 '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는 '손을 뻗는'을 뜻하는 '케이로토노스'(cheiroton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손을 내뻗어 투표하다'는 의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코린토 후서 8장 19절에만 쓰였으며, 모두 '택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한글 성경상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원로들을 택한 것으로 보이나, 원어의 뜻에 의하면, 그 지역 교회의 신도들이 손을 들어 투표한 다음, 바오로나 바르나바가 뽑힌 그들을 원로로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원로들(프레스뷔테루스 ;presbyterus)을 세운 목적 이방 지역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잘 감독하고,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등 어려움 속에서도 신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든든히 서 가도록,  위로와 격려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의 밝은 빛이 지속적으로 비치는 교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믿게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3ㄷ)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새로 세워진 교회와 원로들을 주님께 의탁했다는 것은 그곳을 떠나면서 하느님께 그 교회들과 신도들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떠난 그곳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원로들을 통해 이끌어질 것이나, 내용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굳게 지키실 것이다.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4,27~31ㄱ)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7)


요한 복음 14장 27절과 28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이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내는 일이 없어야 할 이유를 밝히신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 뭔문을 직역하면, '평화를 내가 너희에게 가게 한다'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하신 위대한 선물이다. 

여기서 '남기고 간다'로 번역된 '아피에미'(aphiemi; I leave)'남기다', '가게 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누리는 평화를 주시는 주체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나 권력을 가진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이 세상이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평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상의 평화이며, 영적인 평화이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맛볼 수 없고, 막강한 정치 권력자나 군사력을 동원해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이다.


'평화를'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 peace) '에이레네'(eirene)단수 목적격이다. 고전 희랍어에서는 이 단어가 전쟁과 대립적인 개념,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기인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였다.

하지만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의 역어로 나오는데, '샬롬'은 전쟁에 반대되는 상태라기보다는, 불안이나 갈등이 없는 완전한 정의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이같은 평화는 주님에게서만 나오며,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두고, 기드온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쌓은 제단의 이름'예호와 샬롬'<yehowa shalom; '에이레네 퀴리우'(eirene kyriou); 판관6,24>이라고 한 것은 평화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잘 알게 한다.

말하자면, '예호와 샬롬''주님의 평화'라는 뜻이며, 악(惡)이 득세하는 상황 가운데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가 있으며, 이 문제의 해답과 열쇠가 주님께 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믿는 이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동안에(2티모 2,3.4) 분쟁과 문제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 평화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다. 하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주님의 길을 막지 못했으며,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이다.

감옥 속의 베드로(사도12,6.7)나 바오로(사도16,25)가 보여 준 태도에서 이 평화의 실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어서 참 평화를 얻어라." 라는 뜻입니다.
(무슨 물건을 주는 것처럼 '평화' 라는 것을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 지켜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호와 구원을 믿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산란해지는 일, 겁을 내는 일'을 한마디로 줄이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평화가 없는, 또는 평화를 잃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려움'은 '평화'의 반대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평화'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또는 처음부터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 상태가 바로 평화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두려움의 종류나 성격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불명예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굶주림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자유를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는 일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하고,
어떤 사람은 심판과 지옥을 두려워하고...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도 모든 두려움의 끝에는,
또는 모든 두려움의 바탕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숨어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사실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죽는 것을 안 무서워한다면 무서워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마태 10,28).
그런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완전히 제압하시는 분입니다.
"......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요한 14,30)."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그에게 모든 권한이 있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세력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것도 지배하시고 제압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세상의 우두머리' 라는 말은
우리를 두렵게 함으로써 우리의 평화를 빼앗아가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승리자이신 예수님 편에 서는 것이고,
그래서 평화를 얻을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안 믿는 것은 패배자인 악한 세력의 편에 서는 것이고,
그래서 평화를 얻지 못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승리가 예수님 쪽에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에는 악한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상이 주는 평화' 라는 말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악한 세력과 타협하거나, 아니면 그런 세력에게 굴복하면
안전과 생명과 평화를 얻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착시 현상일 뿐입니다.
잠깐 동안만 편안해지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게 사는 동안에는(루카 15,13)
그 생활을 자유와 평화라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사도들을 속이고(사도 5,2) 일시적으로 느꼈던 '만족감'을
평화라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던(창세 3,6) 그 순간에 느꼈던
달콤한 맛을 평화라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일시적이고 허무한 쾌락이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붙잡아서 죽이려고 했을 때,
사형집행 전날 밤에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아주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사도 12,6).
그 모습을 보면 아무런 두려움도, 근심 걱정도 없는 모습입니다.
날이 밝으면 사형당할 죄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바로 그런 평화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안 죽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태연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누린 것이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과 함께라면..." 이라는 그 믿음이 곧 평화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회 현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 가정과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계속됩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지요.

나의 아픈 상처나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서,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지키려고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타인에 의해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닫힌 문을 열게 하고, 평화를 가득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하느님이나 이웃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자신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내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을 실천하려는 나와 이기심에 사로잡힌 나이지요.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19).
이런 경향을 극복해야만 하지요. 우리가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자기 안에 있는 모순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온갖 욕심과 질투로 얼룩진 분열은 치유되고, 이웃과 친교를 나누게 되지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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