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수요일]참 포도나무 (요한 15,1-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할례 문제로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한다. (사도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참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이시라며,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요한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15,1-6)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1~2)
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각하게 대두된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원로들이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게 되었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특히 바오로의 제1차 이방 선교 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 13장과 14장 직후에 기록한 것도 의의가 있다.
바오로의 선교를 통해 믿은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외의 것 즉 유대인의 전통과 같은 것은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대략 1년여의 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개최시기는 a.d.49년경으로 추정된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1)
여기에서 '관습에 따라'로 번역된 단어는 '에테이'(ethei)이다.
이 단어의 원형 '에토스'(ethos)는 성문 율법을 가리키는 '노모스'(nomos)와 달리 법적인 구속력이 없이 사람들의 관습과 관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들 유대인들이 '노모스'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에토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할례라는 행위가 십계명 같은 곳에 법조문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서 제정하셔서(창세17,10~14) 유대인들이 계약의 백성의 표시로 전통적으로 행해 오고 있는 관례이기 때문이다.
사실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계약의 백성에서 끊어지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그는 내 계약을 깨뜨린 자다.' (창세17,14)
그러나 이런 할례는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 표시일 뿐,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절대 조건은 될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된(로마1,17) 이방인들의 경우 할례의 과정이 필요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이 유대인들은 방편적으로 주어진 계약의 표징을 절대시하여,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자유롭게 하신 자들을 다시 종의 멍에로 얽어 매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무익하게 하는 것이었다(갈라5,1~2).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
'구원을 받을'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는 원형 '소조'(soz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수동태 부정사이다.
사실 '소조'(sozo)는 죽음이나 위험이나 병 등에 놓임을 받은 때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절에서처럼 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 쓰인 경우는 성경에서 본절에서 말고 7번 나오는데, 모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였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혈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며, 반(反)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한편, '~수 없습니다'로 번역된 '뒤나스테'(dynasthe)는 현재 직설법이다.
구원을 받는 것이 장차 결정될 미래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어(否定語) '우'(u)와 더불어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너무나 확실하게 주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할례받음과 구원을 조건과 결과로 규정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들의 주장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돌아와 안티오키아에 머물러 있던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충격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출범하기 시작한 이방인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고, 유대주의로 회귀하게 하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이 안티오키아 교회 내에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할례를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 사이에 분쟁과 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방인 할례에 관한 문제가 안티오키아 교회 자체에서 해결되지 않아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및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즉 이 단어에는 교회의 회중들이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예루살렘 모교회가 모든 교회의 모체로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있어 교리적인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여겼으며, 또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기에도 용이했기 때문에 내려졌을 것이다.
또한 '올라가기로'로 번역된 '아나바이네인'(anabainein)은 '올려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바이노'(anabaino)의 부정사로서 '올려보낼 것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안티오키아보다 고지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을 높이 표현하는 당시 보편적인 어법 때문이기도 하다.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15,1-8)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1)
요한 복음 15장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사랑과 인내에 대한 교훈이 주어지는 내용들은 요한 복음 13장에서부터 17장까지 전개되는 성주간 목요일 밤에 주어진 다락방 이별의 담화의 일부이다.
특히 요한 복음 15장 1~11절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비록 제자들과 떨어지게 될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의 일치된 유기체이심을 보여 주는, 그 유명한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이다.
이것은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믿는 이들의 상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하실 때, '참'이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인 이스라엘과 참포도나무이신 당신 자신을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서이다.
팔레스티나의 특산물이며 매우 흔한 식물이기도 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은 주님의 포도나무, 혹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비유되어 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밭(이사5,1~7)이었고, 주님께서 심으신 좋은 포도나무였으며 (예레2,21), 열매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였다(호세10,1).
하느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이집트에서 가져다가 팔레스티나에 심으셨다는 시편 저자의 노래(시편80,9)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다.
마카베오 시대의 화폐에 이스라엘이 포도나무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과 포도나무를 일치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 '참포도나무', '참된 포도나무'라고 주장하심 으로써, 동시에 가짜, 혹은 불완전한 포도나무와의 구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번역된 '알레티네'(alethine; true)의 원형 '알레티노스'(alethinos)는 가짜 혹은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프슈데스'(pseudes; pseudo)의 반대로서 '진짜', '순수한', '이상적인'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내포된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은 무엇인가? 그들은 가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포도밭으로 지칭되는 이스라엘이 열매가 없는, 형편없는 포도나무, 들포도 나무라고 말한다(이사5,2).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불완전한 포도나무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포도나무의 상징이 언제나 타락의 개념과 함께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하고 있는 주님의 포도밭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은 포도밭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사16,10).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야생의 낯선 들포도나무로 퇴화되었다고 탄식한다(예레2,21).
호세아 예언자도 헛된 포도나무라고 외쳤다(호세10,1).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칭하신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 없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이다.
유대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마태3,7~10참조).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민족, 혹은 혈통, 가문으로 만나시지 않는다. 오로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개별적으로 만나시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로마2,28.29).
하느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계승하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영적 이스라엘뿐이다(갈라3,7.9). 따라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머무를 때에만, 희망있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열매는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맺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시기 위해, 먼저 당신 만이 유일한 참포도나무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신 후에, 성부 하느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신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을 지칭하신 '나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호 파테르 무'(ho pater mou; my father)라는 호칭은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독생성자 예수님만이 성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농부'로 비유되고 계신다.
'농부'에 해당하는 '게오르고스'(georgos; gardener; husbandman)의 기본적인 의미는 '땅을 경작하는 사람'으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농부'(2티모2,6), '포도밭 주인'(포도밭지기)(마태21,33~35) 등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관리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도 하느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일치한 가지인 참된 믿는 이들을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을 세밀히 관리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한편, 당신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비유하시고, 성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곳 팔레스티나의 주요 농작물 가운데 하나인 포도 재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동시에 이 가르침이 주어졌던 당시의 장소가 성체성사가 이루어진 마르코의 다락방이었다고 할 경우에, 제자들 앞에 '아직 남아 있는 과월절 만찬용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이 가르침이 주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이 잘 알고 있던 친숙한 소재를 사용한 놀라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1-6).”
이
말씀은,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라.” 라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나무에 붙어 있어도, 열매를
맺는 가지가 있고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습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신앙인으로 보여도, 신앙인답게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잘해서 구원과 생명을 받는 사람이 있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구원과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안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받기를 스스로 거부한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믿고 나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구원의 은총을 받았지만,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온 삶으로 ‘실천’하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즉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구원과 생명을 얻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면, 너희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라는 말씀과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 또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자’는 ‘쭉정이’입니다. 즉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 또는 ‘예수님 안에 잘 머무르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면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38-43).”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 또는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자’는 가라지이고, 가라지는 최후의 심판 때에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 또는 ‘예수님 안에 잘 머무르는 사람’은 ‘좋은 씨’이고,좋은 씨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라지처럼 살고 있다고 해도 회개하면 ‘좋은 씨’가 될 수 있고, 의인들과
함께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반대로, 지금은 잘하고 있더라도 자만심에 빠져서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로마 11,18).”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2).”
잘리지 않으려면 ‘끝까지’ 충실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7-8).”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잘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즉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에게는 풍성한 은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아무거나 마음대로 청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만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리사욕만 꾀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충실한 신앙인이라는 것이 입증되면”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최종적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되면”이라는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는 “하느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수를 받아야만 영적인 생명을 누리며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삶의 목적과 방법이 다 다릅니다. 우리는 가장 순수하고 참된 삶을 위해 신앙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모든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잘 가꾼 나무라 하여도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내 시들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도 늘 예수님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하지요. 우리의 영혼이 더욱 정화되고 완성되려면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언제나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 안에 뿌려진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싹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를 위한 다양한 방법의 하나는 성경을 읽으며 어느 장면이나 문장, 단어를 선택하여 곰곰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어떤 영감이나 내용이 떠오를 때까지 내가 택한 내용을 반복하여 묵상하면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