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4장> 천상 예배

2015. 2. 13. 오후 2: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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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 4장>    송영진 모세 신부

요한 묵시록 4장-5장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계시를 말하기 전의 서론 부분인데, 4장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내용과 그분이 계신 하늘나라를 묘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 5장은 봉인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소개하는 내용과 그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을수 있는 구세주이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11절 : 천상 예배>

1절..<그 뒤에 내가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그 뒤에 내가 보니>--이 구절은 묵시록이나 예언서 등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인데, 계시를 받는 특별한 탈혼 상태를 뜻합니다.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이것은 구약시대의 우주관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원반 모양의 지구를 하늘의 천장이 반구체 모양으로 덮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그 하늘의 천장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도 하늘이 열렸고, 에제키엘서 1장 1절에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사도행전 7장 56절에서는 스테파노가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문이 열려 있다.' 라는 말은 예언자에게 예언의 사명을 위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여기서 말하는 '목소리'는 1장 10절에 나왔던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 즉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가 전하는 계시는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주시고 말씀해주신 것임을 뜻합니다.

<이리 올라오너라.>--이 말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에게 새로운 현시를 보여주기 위한 초대의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대목의 내용을 보면 요한 묵시록 저자는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았고, 다만 열린 문을 통해서 천상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1장 1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라고 명령했었습니다. '일어나야 할 일들'은 틀림없이 일어나게 될 일들, 즉 종말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인데, 지금 그것을 기록할 수 있도록 미리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2절..<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이 말은 즉시 '탈혼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탈혼 상태가 되면 자기 임의대로 계시를 받을 능력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계시를 받아들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지각 능력은 확대되어서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어좌(옥좌)'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임금님이신 하느님의 완벽한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어좌(옥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은 하느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뜻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부르는 관습이 있었고, 또 하느님은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직접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하느님을 '어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이 구절은 하느님의 모습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광채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티모테오 1서 6장 16절에서는 하느님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벽옥'은 각종 빛을 내는 '흰 다이아몬드', 또는 무지개의 빛을 내는 '오팔'로 생각됩니다.'홍옥'은 진홍색의 '루비'일 것입니다.'취옥'은 '에메랄드'일 것입니다.'무지개'는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의 은총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3절에 언급된 보석들은 전체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4절..<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하느님의 어좌 둘레에 앉아 있는 24명의 원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보통 뒤의 21장 12절-14절에 나오는 열두 성문과 열두 주춧돌로 해석합니다. 열두 성문은 구약의 열두 지파이고, 열두 주춧돌은 신약의 열두 사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스물네 명의 원로는 구약과 신약의 대표자 24명이고, 새 예루살렘, 새로운 하느님 백성, 천상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또 역대기 상권 24장-25장의 사제단 조직과 성가대 조직을 보면 각각 24개의 조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24원로는 천상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전례적인 상황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흰옷'은 그들이 천상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금관'은 그들이 받은 상급을 뜻합니다.그들이 '어좌'에 앉아 있다는 말은 하느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5절..<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것은 탈출기 19장 16절에서 온 표현인데,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모습을 나타내실 때 따르는 표지를 뜻합니다. 또 이것은 하느님은 인간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시나이 산의 하느님', 즉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번개와 천둥과 함께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 횃불, 하느님의 일곱 영>--'일곱 횃불'은 1장 12절의 '일곱 황금 등잔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성령입니다. (성령이 일곱 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일곱'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1장 20절에서는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라고 요한 묵시록 저자가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장면을 보면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고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불꽃 모양'이라는 표현과 지금 이곳의 '횃불'이라는 표현이 비슷합니다. 여기서 '어좌 앞에서' 라는 표현은 '하느님 앞'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라는 뜻입니다.

6절..<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솔로몬왕은 왕궁을 지을 때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 모형을 만들었습니다(1열왕 7,23-26). 지금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는 '유리 바다'는 솔로몬 왕궁의 바다 모형에서 온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또 창세기를 보면 하늘 위에 있는 물(궁창 위에 있는 물, 창세 1,7)과 궁창 아래에 있는  물, 즉 바다를 언급하고 있는데 창세기의 내용을 따른다면 여기서 말하는 '유리 바다'는'궁창 위에 있는 물'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악의 세력이 숨어 있는 곳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모든 악의 세력이 사라지는 새 세상(새 예루살렘)에서는 바다도 없어지고 하늘나라에 있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만 남아 있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유리 바다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넓은 공간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얼마나 초월적인 존재인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해석됩니다. '수정처럼'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맑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한가운데와 그 둘레'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렵고, 확실한 설명도 없습니다. 아마도 어좌 둘레가 넷으로 구분되고, 구분된 구역 중심에 '생물'이 하나씩 있다는 말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네 생물'은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천사들입니다. 아마도 피조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입니다. 네 생물의 모습은 에제키엘서 1장에서 온 표현들입니다. 이 천사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앞뒤로 눈이 가득' 달려 있다는 말은 눈이 많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을 못 보는 것 없이 전부 다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넷'이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사방)을 상징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7절..<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네 생물의 각각의 모습은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강하고 고귀한 존재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사자는 야생동물 중에서 가장 강하고, 황소는 가축 중에서, 독수리는 날짐승 중에서 가장 강하고, 사람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네 생물을 영성적으로 해석하여 네 생물이 4복음서를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시작되는데 이것이 '사자후', 즉 사자를 연상시키므로 사자는 마르코복음이고, 사자가 동물의 왕이므로 '왕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되기 때문에 '사람'은 마태오복음이고, '사람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루카복음은 사제 즈카르야의 제사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사제들이 황소를 제물로 사용하므로 '황소'는 루카복음이고, 제물로 바쳐지는 '야훼의 종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위에 떠돌다가 그 말씀에 의해 세상이 창조되었으므로 '독수리'는 요한복음이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황소'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를 공동번역 성서는 '송아지'로 번역했는데, 원문의 단어는 '나이 어린 수소'입니다.)

8절..<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날개를 여섯 개씩 가지고 있는 천사의 모습은 이사야서 6장 2절에서 온 표현인데, 여기서는 '지존하신 주님의 뜻을 재빨리 실천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사야서 6장 2절을 보면 천사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다른 두 날개로는 발을(성기를) 가리고, 또 다른 두 날개로는 날아다닌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여기서 '가득 달린 많은 눈'은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천사들의 임무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거룩하시다.>--천사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 라는 말은 '세속과 분리된(구별된) 신성함, 위대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하시다.' 라는 뜻입니다. 3은 완전함, 지극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통치자로서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지금 천사들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 구절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9절-10절..(9)<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10)<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9절과 10절과 11절은 천사들이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 즉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와 감사'의 뜻이 담긴 찬미, 찬양을 선창하면, 원로들이 이에 응답하는 전례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미사 때 화답송을 바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양할 때마다 원로들이 엎드려 경배를 하면서 찬양의 말을 외치는 모습이 미사 때 선창자가 찬미가를 선창하면 회중이 화답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이 구절은 자기들의 존재와 구원과 영예는 오직 하느님 덕분이라는 표시로 자기들의 금관을 벗어서 하느님 앞에 바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던지며' 라는 말은 원문의 단어를 직역한 것인데, '바치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11절..<"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11절은 천사들의 찬양에 대해 원로들이 화답하는 말입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이 말은, 하느님은 우리의 주님, 즉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이라는 뜻의 찬양입니다.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앞의 9절에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구절은 네 생물이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라는 뜻의 찬양입니다. 여기서 '합당하다.' 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 최고의 찬미와 찬양을 바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1장 6절에서는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라고 하면서 영광과 권능을 예수님께 바쳤는데 지금 여기서는 하느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동등한 영광과 권능을 누리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피조물인 천사들이나 인간들이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드리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주고, 받고'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원래 하느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피조물들이 찬양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이 말은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진화론이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이 말은, 하느님께서는 '선한 뜻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의 찬양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뜻'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에 세상 만물 모든 것은 우주의 창조자이신 그분께 의지하고 있고,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생겨나고 창조되었다.' 라는 말은 원문대로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다.'로 번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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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어떤 분, 어떤 사랑"

 

진화론자들은 어쩌다 생겨난 생물들이

적자생존의 법칙대로, 생존본능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위해 희생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랑과 희생은 살아남지 못할 약자의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합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돌연변이... 거기에 참된 사랑이란 없습니다.

그저 종족보존과 생존본능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태어나서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죽기도 합니다.

생존본능보다 더 강한,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희생은 내가 약해서 당하는 패배가 아닙니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얄팍한 계산도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게 보이는 그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죽으셨고, 순교자들도 그렇게 죽었고,

우리의 어머니들, 아버지들도 그렇게 희생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종족입니다.

그러나 본능을 누르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늘 '어떤 분'입니다.

막연하고, 멀고, 있는지 없는지 아리송한 어떤 분...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무 데서도 만날 수 없는 분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믿음과 사랑이 가득하다면

어디에나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고 마음이 닫히고 눈이 닫혀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열고, 빈 마음에 믿음과 사랑을 채워야겠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없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분, 어떤 사랑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어떤 분'이 '바로 그분'이고, '바로 그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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