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6장> 송영진 모세 신부
6장의 내용은 마태오복음 24장, 마르코복음 13장, 루카복음 21장에 나오는 재난과 비슷하고, 구약성경 즈카르야서 1장과 6장에 나오는 색깔이 다른 말들, 네 명의 기사 이야기와도 비슷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마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구절들을 여기저기서 모아서 짜깁기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종말의 재앙 이야기들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실제로 일어날 미래 사건들을 글자 그대로 예언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짜 뜻은 상징 속에 숨어 있습니다.
<1절-17절 : 처음 여섯 봉인>
1절..<나는 어린양이 일곱 봉인 가운데 하나를 뜯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 가운데 하나가 천둥 같은 소리로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앞의 5장에서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을 자격이 있는 분은 어린양뿐이라는 선언이 있었습니다. 이제 어린양이 봉인을 하나씩 뜯고, 그때마다 '네 생물'이 네 명의 기사를 호출합니다. '천둥 같은 소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뜻하고, 네 생물은 천사이기 때문에 '오너라.' 라고 기사들에게 하는 명령은 네 생물들 자신들의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절..<내가 또 보니, 흰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화관을 받자, 승리자로서 더 큰 승리를 거두려고 나갔습니다.>--'흰말'은 '전쟁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당시 로마 군인들은 주로 창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말 위에 탄 기사가 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던 이방 민족(로마의 적대국이었던 민족들)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화관, 더 큰 승리>--'화관'은 월계관입니다. '화관'과 '더 큰 승리'는 그 기사가 무적의 정복자, 승리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화관을 받자'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관이 씌워졌고'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승리자의 상징인 월계관을 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화관을 받자마자 나갔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게 번역한 새번역 성경의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화관을 차지했다거나 빼앗았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씌워졌다.' 라고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어떤 사악한 세력이라도 독자적으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하느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힘을 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허락을 받은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제한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흰말을 타고 있는 기사'에 대해 정반대 뜻의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뒤의 19장 11절에 그리스도가 흰말을 타고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흰말을 타고 있는 기사'를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그의 승리를 그리스도의 승리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지금 어린양은 봉인을 뜯고 있고, 천사가 기사들을 호출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천사의 호출 명령을 받고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세 명의 기사가 모두 재앙을 가져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용의 통일성을 생각하면 '흰말을 타고 있는 기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적대자라고 해석합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나름대로 다 타당한 근거가 있지만, 여기 6장의 전체 내용을 생각할 때, 2절의 전쟁은 그리스도와 악의 세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복음서에서 언급한 재난 중의 하나로 해석되고, '흰말을 타고 있는 기사'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적대자로 해석됩니다.
3절-4절..(3)<어린양이 둘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둘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4)<그러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어린양이 둘째 봉인을 뜯고 두 번째 기사가 호출됩니다.
<붉은 말>--이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상징합니다. 이 전쟁은 2절에서 말한 전쟁보다 훨씬 더 무섭고 파괴적인 것인데, 2절의 전쟁이 국가 간의 전쟁이라면 4절의 전쟁은 더 잔인하고 더 격렬한 내란으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도록>--이 말은 '내란'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2절의 전쟁은 로마제국과 다른 제국과의 전쟁이고, 4절의 전쟁은 로마제국 안에서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는(마태 24,7)' 내란으로 해석됩니다. 로마제국은 여러 작은 나라들과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제국이었습니다.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당시 로마의 사고방식으로는 평화는 황제가 베푸는 은혜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참 평화와는 다른, 인간적인, 또는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평 화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은 붉은 말을 탄 기사가 그런 세속적인 평화를 없애고,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칼'은 사람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상징합니다.'평화를 거두어 가는 권한과 큰 칼'이라는 표현은 마태오복음 10장 34절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종말의 재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여기서도 권한과 칼을 '받았다.' 라고 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2절과 마찬가지로 그 권한과 칼을 쓰는 일은 하느님께서 허용하는 한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5절..<어린양이 셋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셋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습니다.>--'검은 말'은 심한 기근을 상징합니다. 기근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에 검은 색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저울' 역시 심한 기근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식량을 배급할 때 사용하는 저울입니다. 그만큼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6절..<나는 또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 같은 것을 들었습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 그러나 올리브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마라.">--'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천사의 음성입니다. 6절은 기근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밀과 보리는 일년생 경작물인데 전쟁 때문에 경작할 여유도 없고, 기근 때문에 더욱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기근이 심해서 한 데나리온으로 밀 한 되, 또는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되'는 우리나라의 '되'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되'는 그리스어로 '케니쿠스'인데 1.09리터입니다. '밀 한 되'는 당시 기준으로 한 사람이 하루 먹을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평상시 물가로는 하루 품삯으로 밀 12되, 또는 보리 24되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한 가족이 아니라 1인분의 밀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물가고와 궁핍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올리브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마라.>--이 말은 일년생 곡식 농사는 망쳐도 다년생 과수농사는 그런대로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식량이라고 할 수 없는, 일종의 사치품인데, 이런 기근 상황이라면 사치와 향락을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기근의 피해를 입지 않겠지만, 사치와 향락은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7절-8절..(7)<어린양이 넷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넷째 생물이 "오너라."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8)<내가 또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저승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의 사분의 일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으니, 곧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권한입니다.>--<푸르스름한>--이것은 '시체가 썩을 때의 색깔'입니다. 따라서 '죽음'과 '저승'을 상징합니다.
'푸르스름한 말'을 탄 기사의 이름은 '죽음'이고, 그 뒤에 '저승'이 따르고 있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상징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죽음과 저승을 인격화한 표현인데, 죽음 앞에서 쓰러지는 희생자를 데려가기 위해서 저승이 뒤따르는 모습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지옥'으로 번역했는데, '저승'이 올바른 번역입니다.)
<땅의 사분의 일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으니>--여기서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권한을 사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은 '인류'를 뜻합니다. '사분의 일'만 죽인다는 것은 마지막 시기에 있을 큰 환난에 대한 서곡으로 부분적 환난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칼과 굶주림과 흑사병과 들짐승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권한>--이 구절은 에제키엘서14장 21절에서 온 표현으로 인류의 사분의 일이 전쟁, 기근, 전염병, 사나운 짐승 때문에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흑사병'이라고 번역한 단어를 공동번역 성서는 '죽음'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의 단어를 직역하면 '죽음'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내용상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을 뜻합니다.
9절..<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어린양이 다섯 째 봉인을 뜯었을 때 요한 묵시록 저자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은 순교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다가 살해되었다는 뜻입니다.'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언했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뜻입니다.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여기서 '제단'은 구약시대의 번제 제단 같은 것을 뜻합니다. 번제 제단은 구약시대 때 짐승을 잡아 태우는 제사, 즉 번제 제사의 제물을 바치는 제단인데 희생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피는 제단 둘레에 뿌렸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죽음을 당한 희생제물이고, 천상제단 둘레, 또는 제단 아래에 그들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영혼이 피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천상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즉 하느님 곁에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10절..<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지금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데, '거룩하시고 참되신'이라는 말은 앞의 3장14절에서 나왔던 '성실하고 참된'이라는 말과 같습니다.그래서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살아계신 참 하느님이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는 분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공동번역 성서는 '대왕님'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의 단어는 보통 '주님, 주인님'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땅의 주민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순교자들이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일을 언제까지 미루시려고 하느냐고 외치는 말을 글자 그대로 놓고 보면 자기들의 죽음에 대해서 심판하고 복수해달라고 하느님께 재촉하는 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복수해 달라고 조르는 뜻으로만 생각한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 복수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과 다스림을, 즉 하느님 왕국의 완성을 갈망하는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또 그만큼 종교박해가 심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해석합니다.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라는 말인데, 한시 바삐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또 그리스도의 재림과 승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말입니다.
11절..<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희고 긴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희고 긴 겉옷>--이것은 승리로 얻은 새로운 신분,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축복을 뜻하며,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이 구절은 일정한수의 영혼이 채워지면, 즉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뽑힌 사람들'의 수가 다 채워지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의 사상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어떻든 이 말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될 때까지' 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이 말은 10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좀 더 기다리라는 분부를 받았다는 뜻도 되고, 좀 더 쉴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는 뜻도 되고, 좀 더 인내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는 뜻도 됩니다.
12절..<어린양이 여섯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에 나는 보았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는 털로 짠 자루 옷처럼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되었습니다.>--이제 어린양이 여섯째 봉인을 뜯었고, 천체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납니다. 다섯째 봉인까지는 인간 세계에 한정된 재난이었는데 이제는 전 우주적인 재앙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고>--'지진', 또는 '큰 지진'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모습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해는 털로 짠 자루 옷처럼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처럼 되었습니다.>--이 구절은 아모스서 8장 9절, 이사야서 13장 10절, 50장 3절, 요엘서 3장 4절 등에서 온 표현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털로 짠 자루 옷'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머리털로 짠 자루 옷'인데 '머리털처럼 검은 색의 상복'을 뜻합니다. 태양이 그렇게 검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은 피처럼 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13절-14절..(13)<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14)<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은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13절과 14절은 이사야서 34장 4절에서 온 표현인데, 표현을 조금 바꾸고, '산과 섬'을 추가했습니다. 이 구절들 역시 하느님께서 놀라운 힘으로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2절, 13절, 14절은 구약시대 우주관을 반영하는 표현들입니다. 하늘은 반구의 형태로, 마치 천막처럼 땅 위를 덮고 있는데, 그 천막의 천장에 달려 있는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은 '거센 바람에 설익은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듯이' 땅으로 떨어지고, 땅을 덮고 있는 천막 같은 하늘은 '두루마리처럼 말려져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산과 섬'들도 부서지고 없어집니다. 이 표현들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어떻든 '인간의 생존 공간이었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인류는 종말의 혼돈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류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구절입니다.
15절..<그러자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 동굴과 산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일곱 계층의 사람들, 즉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자유인은 인류 전체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계급의 사람부터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까지 모든 계급의 인간들이 총망라된 모습인데, 각 계급 자체의 뜻은 중요하지 않고 여기서는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도 '일곱'은 완전성, 전체성을 상징하는데, 어떤 계급의 사람도 하느님의 개입과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모두 동굴과 산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이 말은 이사야서 2장 19절에서 온 것으로서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요동치고 우주 전체가 혼돈 상태에 빠지는데 겨우 동굴이나 바위틈에 몸을 숨긴다고 해도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상 숨을 곳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16절..<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로 무너져,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16절은 호세아서 10장 8절, 루카복음 23장 30절에서 온 표현으로, 산과 바위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서 우리를 숨겨다오.' 라고 말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피해서 땅속 깊이 숨고 싶다는 뜻이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죽고 싶다.' 라는 뜻입니다.그만큼 비참한 상태이고, 그만큼 무섭다는 뜻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느님이고, '얼굴'은 '시선'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말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해서 숨고 싶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얼굴'을'눈'으로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얼굴'입니다.) '어린양의 진노'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뜻합니다. 어떤 곳에 숨는다고 해도 아무도 하느님과 어린양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절망하게 됩니다.
17절..<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다는 말은 '최후의 심판의 날'이 닥쳐왔다는 뜻입니다.이 구절은 '야훼의 날(주님의 날)'이라는 구약성경의 개념에서 온 말인데(요엘 2,11 ; 나훔 1,6 ; 말라 3,2), 인간 역사의 종말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개입은 악에 대한 파괴와 징벌의 모습을 띠게 될 것입니다. '그분들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분노를 뜻합니다.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이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 악인들 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단 한 명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진노를, 또는 종말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이라고 해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7장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그래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7장 9절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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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우리를 숨겨다오"
정감록을 보면 십승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난리가 났을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열군데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전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원자폭탄 하나만 떨어져도 모든 곳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진 해일이 서남아시아를 덮쳤을 때,
우리는 그것이 먼 나라, 남의 일로만 보였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그 해일이 전 지구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지진, 해일, 화산 폭발, 전염병, 기근...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 죽는 재난이 아니라,
육십억 인류 전체가 일시에 죽는 우주 전체의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학문과 예술과 경제와 정치가, 인류의 문명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피난갈 곳도 없다고 요한 묵시록은 경고합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하느님 외에는 피난처가 없다고...
그런데 지금 당장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는 그런 재난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를 잃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들, 많은 걱정거리들, 슬픔들,
자신의 일들, 가족의 일들, 지역의 일들, 나라의 일들,
우리를 고민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슬퍼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
우주 전체의 재난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걱정을 시작하게 하고,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게 하고, 밥을 먹을 수도 없게 만드는 일들,
온갖 불안과 두려움들... 인생의 허무함과 절망감과 고독감,
배신감과 소외감, 채울 수 없는 욕망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들...
사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피곤함...
어디로 피난을 가고 어디로 숨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타이릅니다.
하느님을 피해 숨지 말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품에서 편하게 쉬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피해 달아나던 요나,
그는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
그는 결국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도망 다니기만 하는 사람은 평생 쫓길 수밖에 없습니다.
감옥에 가도, 저승에 가도, 쫓기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재난을 당해도, 어떤 일로 불안하고 두려워도,
슬프고 외롭고 걱정스럽고 우울해도,
지금 울고 있고, 분노하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어도,
쉴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피난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합니다.
"주께선 나의 피난처 의지할 곳 주님뿐
풍파가 심할지라도 내게는 평화 있네
메마른 우리 영혼에 새생명 주옵시며
주 안에 영원한 안식 누리게 하옵소서" (성가 59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