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11장> 송영진 모세 신부
11장에서는 무대가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지금까지의 무대를 보면, 1장은 파트모스 섬이었고, 2-3장은 소아시아, 4-5장은 하늘나라, 6-10장은 전 우주였습니다. 11장의 내용을 보면, 박해를 받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설교를 하는 두 예언자의 순교 이야기가 나오고, 일곱째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하느님의 승리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찬미가를 부르는 장면과 함께 최후의 재난(심판)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1절-14절 : 두
증인>
1절..<그리고 나에게 지팡이 같은 잣대가 주어지면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을 재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세어라.>--<지팡이 같은 잣대>--잣대로 성전을 측량한다는 상징은 에제키엘서 40장에서 온 것입니다. 여기서 '지팡이'는 권력을 상징합니다.
<주어지면서>--'주다.' 라는 동사가 수동태로 표현된 것은 성전을 측량하라는 명령과 잣대를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서 하느님에게서 뭔가를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동사의 수동태를 '신적인 수동태'라고 합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라는 명령이 내리는데, 이것은 7장에서 사람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전과 신자들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 묵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성전은 실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성전, 즉 하느님의 백성, 또는 그리스도 교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절..<성전 바깥뜰은 재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원래 '성전 바깥뜰'은 성전 담 안에 있으면서도 이방인들의 접근이 허락되었던 곳이었고, 성역의 성격이 없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 바깥뜰을 재지 말라는 말은 하느님의 보호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 즉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사람들(하느님의 백성)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보호를 받겠지만, 성전 밖에 있는 사람들, 즉 인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그들'은 이민족(이방인)들, 즉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도성'은 예루살렘입니다. '마흔 두 달'은 다니엘서에서 온 표현으로 3년 반, 즉 7년의 절반입니다. 완전함을 상징하는 7년의 절반이기 때문에 아주 사악한 기간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끝나는 한정된 기간의 박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반영한 것인데, 기원전 168년에 그리스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이 3년 반이었습니다.
그 이후 3년 반이라는 기간은 온갖 박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3절..<나는 나의 두 증인을 내세워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두 증인>--당시의 유대인들은 종말이 되면 엘리야와 모세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민간신앙에 따라 '두 증인'을 엘리야와 모세로 해석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때 나타난 두 사람도 엘리야와 모세였습니다. (두 증인을 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해석하거나, '예수님의 영과 그 영을 지닌 신자들'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두 증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엘리야와 모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천이백육십일 동안>--2절의 '삼년 반'과 같은 기간으로서 이방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기간을 뜻합니다.
<자루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자루옷은 거친 삼베로 만든 자루 모양의 옷입니다. 이것은 참회와 고행을
뜻하는 옷입니다. 따라서 두 증인의 예언은 회개를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즉 그들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참회를 촉구하는 활동이 될 것입니다.
4절..<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땅의 주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서 있는>--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받아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올리브 나무>--즈카르야서 4장에서 온 표현으로 '대사제, 왕,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성령을 받은 인물들이라는 뜻입니다.
<등잔대>--즈카르야서 4장에서 온 표현으로, '등불, 또는 등잔대'는 하느님의 전지하심, 하느님의 빛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말은 그들이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의 등불을 밝히는 인물들이라는
뜻입니다.
5절..<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그들을 해치려고 하는 자는
'박해자'입니다.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린다.' 라는 말은 열왕기 하권 1장에서 엘리야의 적들이, 또 민수기
16장에서 모세의 적들이 당한 일에서 온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두
증인을 보호하신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의 말은(예언의 말은)
박해자들을 멸망시키는 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겠지만, 거부하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6절..<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은' 일은 열왕기 상권 17장에서 엘리야가 한 일이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치는' 일은 탈출기 7장에서 모세가 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두 증인에게 기적을 행할 권한을 주셔서 그들의 활동을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또 이것은 세상이나 지옥의 어떤 권세도 교회의 증언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7절..<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그러나>--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권한은 임무를 수행하는 기간 동안에만 사용되고, 그 기간이 끝나면 순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운명입니다.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두 증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임무 수행을 마치면, 즉 3절에서 언급한 '천이백육십 일'이 끝나면, 이라는 뜻입니다. 두 예언자가 활동을 하는 3년 반은 사실 박해를 받는 기간입니다. 박해를 받는 동안에도 예언자는 사람들의 회개를 위해서 활동을 하고, 결국에는 순교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예언자가 무기력하게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 "왜?"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도 공생활 기간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동안 사람들은 '남들은 살리면서 자신은 살리지 못하는구나.' 라고 비웃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또 우리 자신의 십자가 앞에서도 늘 "왜?" 라고 묻습니다. 그 대답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지하에서>--이 말은 '지옥에서' 라는 뜻입니다.
<짐승>--악마를 가리키는 말인데 '짐승'에 대해서는 13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신자들 사이에, 죽은 네로가 종말에 다시 살아나서 교회를 박해할 것이라는 '네로 재생설'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짐승'을 '네로'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두 증인이 박해를 받고 순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8절..<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여기서 '그 큰 도성'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즉 예루살렘입니다. 시체가 한길에 버려진다는 것은 장례식과 매장도 못하게 할 정도로 박해가 극도에 달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소돔'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도시의 전형입니다. 예루살렘을 소돔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돔과 다를 바 없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이집트라고도 하는데>--'이집트'는 예루살렘이 우상숭배, 마술, 미신의 도시로 타락했음을 비판하는 비유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자들과 두 증인을 죽인 자들이 동일한 세력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9절-10절..(9)<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10)<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온 세상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설교를 귀찮고 괴로운 것으로만 여기고 두 증인을 미워했기 때문에 두 증인이 죽게 되자 좋아하고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죽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아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그 짐승의 통치권이 인류에 대해 완벽하게 행사되고 있음을, 즉 온 세상이 악의 세력의 지배하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시체가 버려져 있는
'사흘 반'은 '악마에게 주어진 가장 짧은 시간 단위'로서 두 증인이 활동한 '삼년 반'에
대응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사흘 반'의 시간 동안 그들의 시체가 모욕당하는 것은 그들이
'삼년 반'의 기간 동안에 박해를 받았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1절..<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두 증인은 사흘 반이 지난 뒤에 부활하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선다는 표현은 에제키엘서 37장에서 온 것으로, 그들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겉으로는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승리한 것이고,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 증인이 부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큰 두려움, 즉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동시에 자기들이 추종하는 그 짐승의 힘보다 하느님의 힘이 훨씬 더
막강하다는 것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을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12절..<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두 증인의 승천 모습은 열왕기 하권 2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승천 모습에서 온 것입니다.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은 그들의 활동과 순교에 대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입니다. 즉 그들이 목숨을 바쳐서 충성을 증명했기 때문에 주시는 상입니다.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박해자들이 보는 앞에서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지를 드러냈다는 뜻이고, 악의 세력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승천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13절..<바로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습니다. 그 지진으로 사람도 칠천 명이 죽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하늘의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바로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지진은 죽은 자의 부활을 알리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에도 큰 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지진은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을 알리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두 증인을 살해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기도 합니다.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습니다. 그 지진으로 사람도 칠천 명이 죽었습니다.>--이 구절은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지면서 주민의 십분의 일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의 수는 칠천 명이었다.'로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규모가 크고 무서운 지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칠천 명'은 상징적인 숫자로서 사회의 모든 계층을 나타내는 상징수 7과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수 1,000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실제 예루살렘 인구는 12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하늘의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살아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서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라는 말은 회개를 했다는 뜻입니다. 원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다.' 라는 말은 우상숭배에 빠졌던 사람이 하느님께 되돌아온 것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하느님을 찬양했다.'로 번역했는데, '영광을 드렸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사람들의 회개는 두 증인의
설교로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는데 하느님께서 직접 기적을 통해 개입하심으로써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은 사람들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절..<둘째 불행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셋째 불행이 곧 닥칠 것입니다.>--9장 12절에서 언급되었던 두 가지 불행(재난) 중 둘째 불행이 지나갔고, 셋째 불행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고되는데, 둘째 불행은 10장 1절에서 11장 13절까지의 내용이고, 셋째 불행은 일곱째 나팔의 재난입니다.
<15절-19절 : 일곱째 나팔>
여기서는 최후의 재난에 앞서서 하느님의 승리를 미리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15절..<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님과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다.">--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재난이 닥쳤었는데, 일곱째 나팔에서는 재난 대신에 찬미가가 울려 퍼집니다. 그래서 일곱째 나팔은 특별한 재난 없이 8장-11장의 내용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나팔은 앞의 재난들을 마무리하는 나팔이 아니고, 12장-19장의 최후의 재난을 부르는 나팔 소리입니다.
10장 7절에서 일곱째 나팔이 울리면 하느님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했었습니다. 15절-19절은 바로 그 예고대로 하느님의 신비, 즉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이 완성되었음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일곱째 나팔 소리가 울리자 '하늘에서 큰 목소리', 즉 천사들의 찬양 노래 소리가 울립니다. 천사들은 이 세상에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이제 영원히 하느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라는 말의 원문은 '그분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고, 처음부터 이 세상의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반항하는 세력들이 하느님의 지배를 방해했습니다. 이제 그런 상황이
종료되었고,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완성(완결)되었습니다.
16절..<그때에 하느님
앞에서 자기들의 어좌에 앉아 있던 스물네 원로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느님께
경배하며>--천사들의 영광송에 대해 스물 네 원로가 응답하면서 하느님께 경배와 축하를 드리고
있습니다.
17절..<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주 하느님 큰 권능을 쥐시고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이 구절은 앞의 1장 4절과 같은 구절인데, 1장
4절의 표현과 달리 '앞으로 오실'이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원로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통치권을 완성하신 것을 축하드리면서, 동시에 악의 세력을 끝장낸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18절..<민족들이 분개하였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멸시키실 때가 왔습니다.">--<민족들이 분개하였지만>--여기서 '민족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분개했다는 말은 자기들이 추종하던 악의 세력이 멸망하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분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진노가 닥쳤습니다.>--하느님을 거부하고, 교회를 박해했던 악의 세력과 그 추종자들에게 하느님의 벌이 내렸다는 뜻입니다.
<이제 죽은 이들이
심판받을 때가 왔습니다.>--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산 채로, 그 전에 죽은
사람들은 부활해서 모두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할 사람들을 구별하게 되는데,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 즉
'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 성도들을 포함해서 낮은 사람이든 높은 사람이든 간에 모두 다'
하느님의 상을 받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을 파괴 하는 자들'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땅을 파괴하는 자들을 파괴하실 때가
왔습니다.'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런 자들에 대한 벌은 그에
상응하는 '파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땅을 어지럽히던 자들'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땅을 파괴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죄와 악을 행함으로써 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19절..<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면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떨어졌습니다.>--승리의 노래가 끝나자 요한 묵시록 저자의 눈앞에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는 성전 안, 즉 지성소에 있는 계약 궤를 보게 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2장을 보면, 바빌론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예레미야가 계약 궤를 느보 산에 감추어 두었다고 되어 있습니다(2마카 2,5). 그날 이후 지금까지 계약 궤는 그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종말이 되면 계약 궤가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요한 묵시록 저자의 눈앞에 계약 궤가 나타났다는 것은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라는 뜻이며, 하느님께서 승리한 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원래 구약시대 때의 계약 궤는 하느님께서 백성들 가운데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였습니다.)다시 말해서 전에는 하느님은 멀리 숨어 계신 분이었는데, 이제는 당신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번개, 요란한 소리, 천둥, 지진, 큰 우박>--이것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표징들인데, 이제부터 시작될 심판의 징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믿는 이들에게는 더없는 행복이지만, 하느님을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공포의 원인이 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상을 받는 잔칫날이 되겠지만,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벌을 받는 공포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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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기쁨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느끼는 순수한 영적인 기쁨도 있고,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인간적인 기쁨도 있고,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있을 때 느끼는 육체적인 기쁨도 있고,
그리고 악마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순교를 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죽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기분이 좋아서
예언자들이 죽은 것을 축하하는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적인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마다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 높은 곳까지 오른 것 같은 영적인 기쁨을 느끼면서
정말 순수한 상태로 지내다가도
누군가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불행을 겪을 때 은근히 느끼는 쾌감,
행여나 남들이 눈치 챌까 두려워하긴 하지만
악마적인 기쁨, 통쾌함, 기분 좋음을 느끼기도 하면서,
우리는 매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예언자가 죽었다고 악마적인 기쁨 속에서 좋아하는 '땅의 주민'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
그때 악마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반대로 말하면 악마적인 기쁨을 느낄 때
그때 우리는 악마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쪽에 서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순수한 영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 노력할 때
그때 우리는 하느님 쪽으로 더욱 가깝게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인간적인 기쁨에 젖어 있다면
좀 더 영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육체적인 기쁨에 빠져 있다면
이제 거기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악마적인 기쁨을 느끼는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더 나쁜 상태가 되기 전에 빨리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