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

2015. 2. 13. 오전 10: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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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묵시록 21장>    송영진 모세 신부

이제까지 묵시록의 주요 내용이었던 재앙, 고통, 전쟁, 형벌 등의 묘사는 사라지고, 이제 21장에서는 최후의 심판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8절 : 새 하늘과 새 땅>

1절..<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새 하늘과 새 땅'은 이사야서에서 온 표현입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이사 65,17)."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동안 죄와 죽음의 무대였던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어 더 이상 슬픔도, 죄도, 어둠도 없는 세상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이 말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지금의 우주 전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에 현재의 우주가 사라진다면 하느님의 창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현재의 우주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질서를 회복하고, 정화와 쇄신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고대의 우주관에 의하면 바다는 태초의 혼돈 상태를 마지막까지 간직한 곳이고, 악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런 곳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2절..<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여기서 '거룩한 도성'은 그리스도 재림 때의 이상적이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백성들 사이에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하느님 앞에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새 세상에서의 교회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에서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여기서 신랑은 주님이시고, 신부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19장 7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다.' 라는 구절이 여기서 반복된 것입니다. 사치스러운 옷과 보석으로 장식한 '대탕녀'의 모습과 '빛나고 깨끗한(19,8)' 결혼식 예복을 입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즉 교회는 오직 신랑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새 예루살렘이, 즉 교회가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온다는 말은 교회란 인간적으로 실현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우시고 인도하시는 공동체라는 것을 뜻합니다.

3절..<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는 아마도 4장에서 나온 네 생물 가운데 하나의 목소리일 것입니다. 그 목소리가 하는 말의 내용은 레위기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에 나의 거처를 정하고, 너희를 혐오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살아가면서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 26,11-12)."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함께 사는 공동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만이 그 대상이었지만, 여기서는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됩니다.

태초에 아담은 원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유대관계를 깨뜨렸고, 스스로 하느님을 피해 동산의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당신의 자녀들을 계속 찾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유대관계가 회복되었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면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4절..<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이 구절은 이사야서의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새 세상이 되면 하느님께서 직접 눈물을 닦아 주시고,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없고, 오직 하늘나라의 한없는 기쁨만 있게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한 모든 저주가 이전의 옛 세상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5절..<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이어서 "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하신 다음,>--<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께서 1장 8절에서 처음으로 직접 말씀하셨고, 여기서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데,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성경에 맨 처음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빛이 생겨라(창세 1,3)."입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이사야서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9)."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시겠다는 뜻입니다.또, 동시에 성경의 첫 번째 하느님 말씀이었던 "빛이 생겨라." 라는 말씀으로 생겨나게 하신 모든 것을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라는 마지막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시고, 당신의 말씀의 진실성을 보증하십니다. 여기서 '확실하다.' 라는 번역보다는 원문 그대로 직역해서 '믿을 만하다, 믿을 수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실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6절.<또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어졌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이 말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행해지던 일들이 이제 다 끝났다, 계시가 성취되었다, 완성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과거형으로표현된 것은 요한 묵시록 저자가 영상으로 본 계시들이 확실하게 실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이것은 1장 8절에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알파는 그리스문자의 첫 번째 문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문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하느님은 역사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시작이며 마침이다.>--'알파와 오메가'를 풀이한 말인데, 여기서 '시작'은 모든 것의 원천이고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마침'은 모든 것의 목표와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것의 기원, 근원, 원천이시며, 모든 것의 완성이고 목표라는 뜻입니다. 즉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완성자(피조물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목마른 사람'은 '참된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을 뜻합니다.'생명의 샘'은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과 생명, 완전한 행복과 생명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거저'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을 인간 세상에서 구한다면 갈증만 더욱 심해지겠지만, 하느님에게서 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7절..<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된 사람은 '이것들'을, 즉 하느님의 은총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받을 것이며' 라고 번역된 말은 원문대로 직역하면 '상속받을 것이며'가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으로 부터 받게 될 첫 번째 은총은 하느님의 아들이(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부자관계가 됩니다. 이것은 사무엘 하권 7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 다윗 왕실과 솔로몬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부자관계는 구약시대 때에는 윤리적인(율법을 지키는) 차원에서의 표현이었지만, 신약시대에서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부자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산 상속과 관계가 있는데, 새 세상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부자관계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재산을(모든 은총을) 상속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8절..<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이제 7절에서 말한 '승리하는 사람'과 반대쪽에 있는 '패배한 사람들'에 대한 위협의 말씀이 나옵니다.

'비겁한 자들'이 명단의 맨 앞에 언급된 것은 황제숭배를 강요받는 박해시대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비겁한 자들'은 용기가 없어서 믿음을 버리고 박해에 굴복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불충한 자들'은 믿음이 없거나 믿음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은 우상숭배 예식에 참석하는 자들입니다. '살인자들'은 글자 그대로 살인자, 강도 등의 범죄자들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은 보통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을 뜻했지만, 여기서는 우상숭배자들을 따로 직접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글자 그대로 불륜과 간음죄를 짓는 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마술쟁이들'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미신적인 마술사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미신과 우상을 믿는 자들입니다.'모든 거짓말쟁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죄인들을 종합해서 요약한 말이면서 동시에'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인 사탄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자들은 모두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에 던져지게 되는데 그것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즉 영원한 멸망입니다.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에 던져지는 것이 두 번째 죽음이라는 말은 앞의 20장 15절에 나왔었던 말입니다.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장면에서 온 것인데(창세 19,24), 하느님의 심판과 형벌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영원한' 형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9절-27절 : 새 예루살렘>

9절..<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17장 1절에서 일곱 재앙이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요한 묵시록 저자에게 대탕녀 바빌론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같은 천사가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합니다.17장의 도입 구절과 '새 예루살렘'의 도입 구절은 한마디, 한마디 서로 대응하는 표현으로 되어 있는데, 대탕녀 바빌론의 묘사와 새 예루살렘의 묘사가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고있습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새 예루살렘을 의인화해서 어린양의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의 도시 바빌론을 대탕녀로 표현한 것과 대응을 이루는 것입니다. '신부' 라는 표현은 뽑힌 사람들, 즉 교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새 예루살렘을 '신부' 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도시가 이제부터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어린양과 함께 살 곳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이어서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천사가 성령께 사로잡힌 요한 묵시록 저자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려간다는 것은 에제키엘서 40장 2절에서 온 표현입니다. 또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높은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17장에서 바빌론을 보여줄 때에는 광야로 데려갔었습니다. 거기서 '광야'는 악령들이 있는 곳을 뜻했습니다. 여기서는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기 위해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는데, '높은 산'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이미 2절에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2절에서는 내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면, 10절에서는 거의 다 내려왔거나자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음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온다는 말은,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직접 세우신 도시(교회)' 라는 뜻입니다.

11절..<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그 도성이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 광채가 매우 값진 보석, 또는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다는 말은 그 광채의 휘황찬란함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것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벽옥 등의 보석으로 묘사한 것은 4장 3절과 비슷합니다.

12절-14절.(12)<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새 예루살렘은 성벽과 성문과 주춧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묘사는 이사야서 54장 11절-12절과 에제키엘서 48장을 합하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열두 성문에 열두 지파 이름이 적혀 있다고 했기 때문에 '열두 성문'은 새 예루살렘에 재건된 옛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성문을 지키는 열두 천사는 이사야서 62장 6절에서 온 것으로 성문을 지키는 보초, 즉 수호천사입니다. 크고 높은 성벽이라는 말과 천사들이 성문을 지킨다는 말은 그 성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쳐들어 올 적군이 없기 때문에 성벽을 크고 높게 쌓고 천사들이 성문을 지키는 것은 적의 공격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성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성벽의 네 방향으로 성문이 세 개씩 있고, 성벽의 열두 주춧돌(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에페소서에 사도들이 주춧돌이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여기서 자주 나오는 '열둘'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고, '넷'은 우주를 상징하는 숫자,  '셋'은 하느님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열두 성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주춧돌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의 완벽한 조화를 나타냅니다. 즉 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신약의 하느님 백성간의 일치를 나타냅니다.

15절..<나에게 말하던 천사는 도성과 그 성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된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1장 1절에서 요한 묵시록 저자가 '지팡이 같은 잣대'로 하느님의 성전을 측량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과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여기서는 천사가 '금으로 된 잣대'를 가지고 도성과 성문들과 성벽을 측량합니다. '금으로 된 잣대'는 하느님의 도성을 측량하는 데 어울리는 하늘의 측량자입니다. 측량의 목적은 도성의 완전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16절..<도성은 네모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그가 잣대로 도성을 재어 보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도성의 길이, 너비, 높이가 똑같다는 것은 그 도성이 정육면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건물로는 가능하지만 도성의 실제 모습으로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당시에는 정사각형과 정육면체가 완전함을 상징했습니다. 여기서도 도성이 정육면체라는 것은 완전하고 거룩한 도시라는 상징입니다.

<만 이천 스타디온>--1스타디온은 185 - 200m 입니다. 따라서 만 이천 스타디온은 약 2,400Km 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한, 거대한 규모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12'는 완전함, '1,000'은 거대함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만 이천 스타디온은 완전함과 거대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입니다.

도성이 정육면체라는 것에 대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였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도성이 정육면체라는 것은 그 도성 자체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지성소라는 뜻이 됩니다.

17절..<또 성벽을 재어 보니 백사십사 페키스였는데, 사람들의 이 측량 단위는 천사도 사용하는 것입니다.>--성벽의 높이는 '백사십사 페키스'입니다. 이것은 약 70m 높이입니다. 앞의 12절에서는 '크고 높은 성벽'이라고 했었는데, 도성의 거대한 규모에 비해서 성벽의 높이가 너무 낮습니다. 이것은 이 성벽이 수비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도성을 외부와 구별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뜻입니다.또 144 = 12 X 12 이기 때문에 역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사람들의 이 측량 단위는 천사도 사용하는 것입니다.>--천사가 사람들의 측량 단위를 사용했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라는 하느님의 도시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측량 단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18절-21절.(18)<성벽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도성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도성 성벽의 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초석은 벽옥, 둘째는 청옥, 셋째는 옥수, 넷째는 취옥,> (20)<다섯째는 마노, 여섯째는 홍옥, 일곱째는 감람석, 여덟째는 녹주석, 아홉째는 황옥, 열째는 녹옥수, 열한째는 자옥,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21)<열두 성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데, 각 성문이 진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이제 요한 묵시록 저자는 도성과 성벽의 건축 재료를 설명합니다.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도시의 모습은 토빗기 13장 16절-17절, 이사야서 54장 11절-12절에서 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벽의 재료는 벽옥이고, 도성의 재료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입니다. 성벽의 열두 주춧돌은 열두 보석이고, 열두 성문은 진주, 도성의 거리는 순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값진 재료만을 사용해서 도성을 건축했다는 뜻입니다.

또 새 예루살렘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 묵시록 저자는 자신이 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보석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따라서 이것을 읽는 우리들에게는 그 도성의 모습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보석 이름들과 오늘날의 이름들이 일치하지도 않고, 각각의 보석의 이름들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또 각 보석들의 색깔과 보석 자체의 상징에 대해서도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열두 주춧돌입니다. 이것은 탈출기 28장 15절-21절에 나오는대사제의 가슴받이에 박힌 보석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즉 대사제의 가슴받이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그 보석들을 새 예루살렘의 성벽 주춧돌에 사용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와 요한 묵시록의 보석 이름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하여간에 이것은 도성 자체가 성전이고, 주민 모두가 야훼의 사제가 된다는(1,6) 뜻입니다.(21절에서 '각 성문이 진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라는 말은 '성문들이 각각 하나의 진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22절..<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는 말은,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도성 자체가 성전이고 지성소이기 때문에 따로 성전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또 11장 19절에서 언급했던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도 이제는 필요 없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은, 새 예루살렘에서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과 함께 사는 것이 실제 현실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장소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상징이 현실이 되면 상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23절..<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새 예루살렘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으므로 해와 달이 필요 없게 됩니다. 해와 달은 땅을 비추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었는데,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 필요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는 어둠도, 밤도 사라지기 때문에 낮과 밤을 가르는 해와 달의 기능도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곧 어린양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어린양의 등불이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23절의 표현은 이사야서 60장 19절-20절에서 온 것입니다.

24절..<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닌다는 말은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빛 안에 모여서 머물게 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에서 흩어졌던 인류가 이제 다시 한 곳으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간다는 말은 그들이 권세와 재산 때문에 다투는 일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개인주의나 이기심이나 욕심 등이 모두 사라지고, 모든 이가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봉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24절은 이사야서 60장 1절-5절을 요한 묵시록 저자가 재구성한 것입니다.

25절..<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바다'와 마찬가지로 악의 근거지인 '밤과 어둠'도 새 예루살렘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밤과 어둠이 없기때문에 성문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옛 예루살렘에서는 밤마다 성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기 때문에 성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현존의 완전한 개방성을 나타냅니다. 누구나  자유스럽게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탈출기 19장 12절을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 접근하지도 못했습니다. 접근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까지 하느님을 직접 본 사람도 없고, 항상 천사나 예언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글자 그대로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26절..<사람들은 민족들의 보화와 보배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24절의 임금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도 자신들의 귀중한 보물들을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서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25절과 26절은 이사야서 60장 11절에서 온 것입니다.

27절..<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27절은 이사야서 52장에서 온 것입니다. '부정한 것과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도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새 예루살렘 도성의 바깥 지역에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은 온 세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심판이 끝난 뒤에는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것과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영원한 형벌을 받고 멸망했기 때문에 도성 안이나 밖에 그런 것들이나 그런 자들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지금' 요한 묵시록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 20장 12절과 21장 8절을 되풀이해서 경고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겁을 주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새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도록, 즉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로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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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거기에는 밤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밤과 낮,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가,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높음과 낮음, 귀함과 천함이,

모든 좋은 것과 모든 나쁜 것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 찾아오고, 기쁨과 슬픔이 붙어 다닙니다.

사랑과 미움이, 희망과 절망이 짝을 이루어 찾아옵니다.


때로는 웃다가 때로는 울고,

때로는 행복했다가 때로는 불행과 절망에 빠지고,

마음이 대낮처럼 밝았다가도 금방 칠흑같이 어두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밤도, 어둠도, 그림자도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지 않고 모두 천사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악은 없고 오직 선만 있습니다.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함이 없이 모두가 다 귀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불행은 사라지고 행복만, 슬픔은 없고 기쁨만 있습니다.

두려움은 없고 편안함만 있습니다.

그러니 시기 질투할 일도 없고 욕심을 부릴 일도 없습니다.

미워할 일도 없고 고집을 부릴 일도 없습니다.

상처를 줄 일도, 받을 일도 없습니다.

후회할 일도 없고, 한 맺힐 일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 사랑뿐입니다.

오직 행복, 행복뿐입니다.

오직 기쁨, 기쁨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갖고 싶은 모든 것을

그곳에서는 다 가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것만 갖고,

나 한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라면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

지금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일을

그곳에서는 마음껏 다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일만 하고,

나 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라면 미련 없이 포기할 것입니다.

'나'는 없고, '우리'만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현실 세계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상상 속의 천국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왜 안 됩니까? 

우리가 마음을 합하고, 자신부터 실천하고 노력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새 예루살렘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믿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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