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비서(독서묵상)

2015. 11. 23. 오후 8:00:15

글자


 

필립비서(독서묵상)

 대림 제2주일 제2독서 (필리피1,4-6.8-11)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 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9-10)

'지식과 온갖 이해로' 여기에서 '~으로'라는 도구적 의미로 번역된 전치사 '엔'(en)은 오히려 상태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전치사구를 통해 사랑에 겸비해야 할 것으로 지식과 온갖 이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에서 '지식'으로 번역된 '에피그노세이'(epignosei)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는  일반적인 보통의 지식을 일컫는(1코린1,5 ;8,1 ;1베드3,7)   '그노시스'(gnosis)에 '~위에', '~에 더하여' 또는 '철저한' 이란 의미가 있는 전치사 '에피'(epi)가 더해진 것으로서, 신약 성경에서 20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노시스'(gnosis)보다 완전하고 진보된 깊은 지식을 가리킨다(1코린13,21). 즉 이것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가능하게 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한편, '이해'로 번역된 '아이스테세이'(aisthesei)의 원형 '아이스테시스'(aisthesis)감각적으로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감각', '지각', '경험'모두 포함한 도덕적인 이해와 분별력을 말하는데,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되었다(잠언1,4.7.22; 3,20 ;5,2)

그리고 '이해' 앞에 수식된 '온갖'으로 번역된 '파세'(pase)는 이해의 완전성을 말하기 보다는 이해의 깊이를 말한다(히브5,14).

바오로 사도가 사랑에 지식과 온갖 이해가 더하여지기를 기도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의(義)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별력'이란 바로 악에서 선한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며, 선을 택하고 악을 배격하며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분별력이 결핍된 사랑은 무분별한 헌신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지식없는 열정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법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바른 시기과 이해가 없이 '하느님의 의'를 저버리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했던(로마10,2.3)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필리피 교인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가페 사랑에 올바른 지식과 이해를 더불어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참된 지식과 올바른 분별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더욱 더 풍부해져' 풍부해져'로 번역된 '페릿슈에'(perissue)'페릿슈오'(perisseuo)의 가정법이다. '페릿슈오''풍부하다', '충분하다' 란 의미의 동사로서, 신약 성경에 39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바오로 사도가 26회 사용하였다. 이것은 복음이 가져온 결과를 한마디로 특징짓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시로 인하여 지혜가 풍성해짐(2코린8,7; 에페1,8)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사랑이 충만히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로마5,15-17). 이러한 현상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이다.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되는 것입니다'(10) 9절에 이어지는 10절은 필리피 성도들이 무엇인 옳은지 분별하고,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오로 사도의 두번 째 기도 내용이다. 이러한 본절을 시작하는 '에이스 토'(eis to)라는 전치사구는 10절이 9절의 결과(so that ~ may)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지식과 온갖 이해를 겸비한 사람은 무엇인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옳은지'로 번역된 '디아페론타'(diapheronta)'~을 통하여' 란 뜻의 전치사 '디아'(dia)와 '가져가다'(마태14,11), '데려오다'(마르1,32)란 의미가 있으며, 실제로는 '전파하다'(사도13,49), '배를 몰아가다'(사도27,27), '~보다 귀하다'(마태6,26 ;루카12,7)등의 다양한 뜻으로 번역되는 '디아페로'(diaphero)의 분사형이다.

'도키마제인 ~타 디아페론타'(dokimazein ~ ta diapheronta)는  '~보다 귀하다' 라는 의미을 따라 '탁월한 것들을 분별해내다' 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지식과 이해를 지닌 사랑은 '가장 탁월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하여 분별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분별할'로 번역된 '도키마제인'(dokimazein)의 원형 '도키마조'(dokimazo)금속의 순도를 시험하거나 화폐의 진위를 시험하는 것을 나타내는 기술 용어이지만,  신약에서는 대체로 도덕적인 문제나 진리인지의 여부와 관련하여 '주의 깊에 조사하다', '시험하다'(루카12,56 ;1코린11,28 ; 2코린13,5 ;갈라6,4 ;에페5,10 ;히브3,9),  모든 조사와 시험이 끝난 후 '순수한 것으로 증명되다','가치있게 여기다'(로마14,22;1코린16,3; 2코린8,22 ;1테살2,4) 등의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악한 것에 대하여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과 '선한 것 중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구별하는 것' 모두를 말한다.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본문은 지식과 이해를 겸비한 사랑이 풍부해질 때 오는 두번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필리피 교인들이 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순수'로 번역된 '에일리크리네이스'(eilikrineis)원형 '에일리크리네스'(eilikrines)'햇빛'이란 뜻의 명사 '헤일레'(heile)와 '판단하다'라는 뜻의 동사 '크리노'(krino)의 합성어로, '해가 비침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떤 것의 확실함' 을 의미하며, 이것이 '흠없는', '투명한','섞이지 않은'이란 의미로 발전하였다.

여기서도 '섞이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도덕적으로 순결한 것을 말한다(1베드3,1).

또한 '나무랄 데 없는' 으로 번역된 '아프로스코포이'(aproskopoi)원형 '아프로스코포스'(aproskopos)'넘어지게 하지 않는', '범죄케 하지 않는','불쾌감을 주지 않는'(1코린10,32), '깨끗한'(사도24,16)이란 뜻인데, 집에서 어떤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서 상처를 입지 않고', 그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인들이 더러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이 실족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9~10)


필리피서 1장 9절'기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프로슈코마이'(proseuchomai)하느님을 향한 기도를 나타내는 동사이며, 여기서는 직설법 현재 시제로 쓰였다. 여기서 직설법 현재 시제지속과 반복의 의미로 쓰여 기도의 행위가 지속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사도 바오로는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필리피 교인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한 것이다. 

그리고 9절부터 11절까지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 교인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의 발로로서 바친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다. 9절에 나오는 첫번째 기도 내용 필리피 교회가 사랑이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아가페'(agape) 사랑인데,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며, 하느님께 의존된 사랑이고 하느님으로부터 기인된 사랑이다. 또한 이 사랑은 타인이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아도 사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타인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 사랑이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인들에게 아가페 사랑이 더욱 풍성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간구한다. 


한편, '더욱더'로 번역된 '에티 말론 카이 말론'(eti mallon kai mallon; more and more)이란 부사구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뉘앙스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먼저 부정적으로는 필리피 교인들이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암시한다(필리3,12~15). 

즉 사도 바오로는 이 표현을 통해 필리피 교회가 사랑이 아직도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다. 


반면, 긍정적으로는 필리피 교인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아가페 사랑이 날이 갈수록 풍성해져서 그리스도의 성숙한 경지에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에페3,13참조).

그리고 '풍부해져'로 번역된 '페릿슈에'(perisseue; may abound)'페릿슈오'(perisseuo)의 가정법이다. 


'페릿슈오''풍부하다', '충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서, 복음이 가져온 결과를 한마디로 특징짓는 말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시는 일인데, 하느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지혜가 풍성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사랑이 충만히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


'지식과 온갖 이해로'

여기서 '지식'으로 번역된 '에피그노세이'(epignosei; knowledge)의 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는 일반적인 보통의 지식을 말하는 '그노시스'(gnosis)'~위에', '~에 더하여', 또는 '철저한'이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에피'(epi)가 더해졌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과 관련해서 '그노시스'(gnosis)보다 완전하고 진보된 깊은 지식을 말한다. 즉 이것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가능하게 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그리고 '이해'로 번역된 '아이스테세이'(aisthesei; insight)  감각적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감각', '지각', '경험'모두 포함한 도덕적인 이해와 분별력을 말한다.  또한 '이해' 앞에 수식된 '온갖'으로 번역된 '파세'(pase; all)'이해'의 완전성을 말하기 보다는 '이해'의 깊이를 말한다(히브5,14).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사랑에 지식과 이해가 더하여지기를 기도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에는 반드시 하느님의 의로움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별'이란 바로 악에서 선한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며, 선을 택하고 악을 배격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분별이 결핍된 사랑은 무분별한 헌신을 초래할 수 있으며, 또한 지식없는 열정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의로움'를 세우려 했던(로마10,2.3)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필리피 교인들이 답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가페' 사랑에 올바른 지식과 이해를 더불어 가지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참된 지식과 올바른 분별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이것은 지식과 이해를 겸비한 사랑이 풍부할 때 오는 두번째 결과이다. 그것은 필리피 교인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순수'로 번역된 '에일리크리네이스'(eilikrineis)'햇빛'이란 뜻의 명사 '헤일레'(heile)'판단하다'라는 뜻의 동사 '크리노'(krino)의 합성어로서 '해가 비침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떤 것의 확실함'을 의미하며, 이것이 '흠없는', '섞이지 않은', '투명한'이란 의미로 발전했다. 여기서도 '섞이지 않고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도덕적으로 순결한 것'을 말한다(2베드3,1). 


또한 '나무랄 데 없는'으로 번역된 '아프로스코포이'(aproskopoi)의 원형 '아프로스코포스'(aproskopos)'넘어지게 하지 않는', '깨끗한',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죄케 하지 않는'이라는 뜻인데, 길에서 어떤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서 상처를 입지 않고'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인들이 더러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을 지킬 뿐 아니라,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위해 기도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인들이 악한 것과 선한 것, 천한 것과 귀한 것을 구별하여 순결하고 흠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날'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로마2,16)이며, 여기서 쓰인 전치사 '에이스'(eis; into)순수하여 허물없는 상태가 그리스도의 날 이후까지 계속된다는 뉘앙스를 나타내고 있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461

 제30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필리1,18ㄴ-26)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20-21)

필리피 서간 1장 20절부터 23절까지는 자신의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바오로의 성숙한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기적 야망에서 그리스도를 투기와 분쟁으로 전한 자들과 달리 바오로에게는 거룩한 열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절한 기대'로 번역된 '아포카라도키안'(apokaradokian ; my earnest expectation)원형 '아포카라도키아'(apokaradokia)세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회화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예민한 기대감으로, 목(카라;kara)을  빼고(아포;apo) 앞을 바라본다(도케인;dokein)는 의미이다. 한자성어로는 '학수고대'(鶴首苦待) 라는 말이 적합하다. 바오로는 학수고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존귀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한편,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의 원형 '엘피스'(elpis; hope)'바라는 것'(사도16,19 ;로마4,18;1코린9,10;2코린1,7)과 '신뢰','신용' 이란 뜻과 아울러 '영원한 내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망덕' 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다.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부끄러운 일' 로 번역된 '아이스퀸테소마이'(aischynthesomai) 원형 '아이스퀴노마이'(aischynomai)'천함', '수치', '불명예'를 의미하는 '아이스코스'(aisch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보기 흉하게 하다','추하게 하다', '불명예스럽게 하다','수치로 가득 채우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서, 부정어 '우데니'(udeni ; nothing)와 함께 쓰였다. 따라서 직역하면,'나는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절의 선언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나오는 표현이며, 자신이 중상모략으로 인해, 혹은 결박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는 굳은 신앙의 고백이다. 바오로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시편25,3; 이사50,7)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아주 담대히' '언제나'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항상','늘' 이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또한 '아주'로 번역된 '파세'(pase)'온전히','모든'(all)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모든 담대함으로' 가 된다. 즉 바오로는 현재와 시간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만 담대한 것이 아니라 늘 담대했던 것이다.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파르레시아'(parresia; boldness; sufficient courage)언변의 거침없음마음이 담대하고 용기로 가득 차있는 두가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살든지 죽든지' 로 번역된 '에이테 디아 조에스 에이테 디아 타나투'(eite dia zoes eite dia thanatu; whether by life or by death)는  필리피서 1장 21절의 표현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초월한 바오로의 생사관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필리피서 1장 13절-14절에 나오는대로,그리스도 때문에 1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던 기간중인 A.D.62-63년경 로마 황제 체사르의 재판 결과, 사형이 선고되든지 혹은 석방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결과로 귀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로 번역된 '메갈린테세타이'(megallynthesetai)원형 '메갈뤼노'(megallyno)'존귀하게 만들다','위대하게 만들다', '웅대하게 하다'(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보이다,드러내다; 마태23,5),'증가시키다' (커져가다; 2코린10,15),'찬양하다'(루카1,46; 사도5,13; 10,46) 라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본래 문자적 의미는 '수를 증가시키거나 옷에 매달린 장식의 크기를 늘리는 것' 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 쓰여 바오로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바오로가 수동태로 쓴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로, 자신은 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수단)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코린6,20; 2코린4,10)

자신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전인격를 통하여(로마12,1; 에페5,28)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지만,그렇지 않고 사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확고한 신앙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으로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께 가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안에는 하느님의 직분을 맡은 사도로서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영광받으시고,주님만이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성숙한 봉사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이 몸으로'로 번역된 '엔 토 소마티 무'(en to somati mu; in my body)'감옥에 있으면서',혹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채찍에 맞은 흔적으로'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존재로써' 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갈라티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과 더불어 바오로 사도의 생사를 초월한 인생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삶'(사는 것)이라 번역되는 '젠'(zen)은 죽음에 대조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살아 있다','생명력을 소유하다'(로마7,1-3; 1코린7,39)라는 뜻을 갖는 동사 '자오'(zao)의 현재 부정사로 쓰여,현재 지속되는 삶의 과정을 나타낸다.

'나에게는 삶이 그리스도이며' 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신적인 삶이나(사도17,28) 혹은 영적인 삶(로마8,2-11; 2코린5,17)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의식과 체험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그리스도가 그의 최대의 관심이라는 것이다.(갈라2,20)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삶의 영감과 지침과 목적과 의미를 제공한다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서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있다.

즉 바오로가 행하는 모든 것,말씀에 순종하고,사랑의 힘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돌보는 것,복음을 전하는 것,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자신의 일생이 전부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고,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바오로가 존재하는 이유 것이다.(필리4,13; 2,5-11; 3,9; 4,4; 2코린5,15참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죽는 것'으로 번역된 '아포타네인'(apothanein)원형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자연적 죽음을 죽다'(마태9,24; 루카16,22; 요한4,47; 로마7,2),'도덕적 죽음을 죽다'(로마7,10; 묵시록3,2), '죄에 대해 죽다'(로마6,2 ;콜로2,30)란 다양한 용례로 쓰이는데,여기서는 육신적 죽음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상반절의 '사는 것'이 현재 부정사로 쓰인 반면,본문의 '죽는 것' 은  부정(不定) 과거 부정사로 쓰여 죽음의 과정이나(1코린15,31; 2코린5,12)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육체의 일회적 죽음을 나타낸다.

한편,'이득입니다' 로 번역된 '케르도스'(kerdos)'이익', '이득'(필리3,7; 티토1,11)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무조건 살기를 원한 것도 무조건 죽기를 원한 것도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바오로가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한 것은, 여러가지 육체적인 고통이나  삶의 무거운 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던 자신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 깊고 더 완전한 일치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란 표현이 나오는 23절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맺었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깝게 되기 때문에 죽음이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로마 8,38.39) 결국 바오로가 죽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23절),  바로 주님과 함께 본향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2코린5,8)

이처럼 바오로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바오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쨌든간에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필리2,1-4)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1-2)

바오로는 필리피서 1장 27절-30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 것과 더불어 복음적 신앙을 위해 상호 협력하며, 고난에 굴하지 않는 굳건한 용기를 가질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필리피 교인들 또한 바오로가 겪는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동역자임을 주지시켰다.

같은 복음을 위해 바오로와 함께 싸우는 그들은 당연히 그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 내부적으로 다툼과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이에 바오로는 새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인과 접속사 '운'(un; therefore)을 사용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필리피서 2장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먼저 1-11절은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위하여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는 부분이며,  그 다음 12-18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신앙의 정진을 권면하는 부분이고, 끝으로 19-30절은 하나의 삽입 부분으로서 티모테오와 에파프로디토스의 파견을 통보하는 부분이다.

한편, 필리피서 2장 1절은 동사없이 가정법 접속사 '에이'(ei ; if)가 이끄는 네 개의 짧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오로가 여기서 교회가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될 수 있는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사랑에 찬 위로','성령안에서의 친교','애정과 동정' 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필리피 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다.

바오로는 접속사 '에이'(ei; if)로 시작된 분문에서 어떠한 가정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있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ei)는  없는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격려' 본절에서 교회가 하나될 수 있는 이유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이다.  '격려'로 번역된 '파라클레시스'(paraklesis; encouragement; consolation)'곁으로 부르다' 라는 뜻을 갖는 '파라칼레오'(parakaleo)에서 온 명사로서 '가까이 부름' 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성경에서는 '격려 권고, 훈계'(사도15.31;1코린14,3),'위로나 위안'(루카2,25; 2코린1,4-7; 히브6,18) 등의 의미로 쓰였다. 성령을 지칭하는 보호자 '파라칼레토스'(parakaletos)라는 단어도 '파라클레시스'와 같은 어근을 지닌다.

'사랑에 찬 위로' 교회가 분열과 분쟁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두번째 이유필리피 교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에 찬 위로를 받았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위로'로 번역된 '파라뮈티온'(paramythion)'부드러운 격려',용기를 돋움', '장려' 라는 뜻으로 '파라클레시스'(격려)보다 더 부드러운 의미를 지니며, 주로 '파라클레시스'와 짝을 이루어 사용된다(1코린14,3; 1테살2,12). 본절에서 '파라클레시스'는 '격려','권면'의 의미가 더 강하고,'파라뮈티온'은 '위로'의 의미가 더 강하다.

한편, '격려'(권면)'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어구에 의해, '위로'는 '사랑에' 라는 어구에 의해 수식되고 있다. '격려'(권면)'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격려하고 교훈해야 함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에, '위로'는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랑에 기초하여 행해져야 함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안에서의 친교' 교회가 일치될 수 있는 세번째 이유로 제시되는 사실은 필리피 교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한 친교를 누리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신약에서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 친교; 우정; 일치)신자들간의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 여기서도 바오로는 친국 시민들로만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친밀한 관계나타내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성령안에서의 친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만들어진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이 모인 사랑의 유기체인 교회의 생명이라 하겠다. 성령을 통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로마12,5)을 이루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인인 것이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는 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있어 온(사도2,42-47; 4,32-35) 그리스도의 특징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 나 한 몸을 이루고 있어서, 사실상 다툼과 분열이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다. 코이노니아를 특징으로 하는 교회는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이익 단체나 영리를 목적으로 구성된 사단 법인과는 그 본질적 성격부터 다른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성령안에서의'로 번역된 '프뉴마토스'(pneumatos)는 정관사와 '거룩한 '이라는 형용사없이 쓰였지만, 성령을 가리킴이 분명하다.(로마7,6; 1코린2,4; 갈라3,3; 5,16; 18,25) 따라서 '코이노니아 프뉴마토스'(koinonia pneumatos)는 어떤 영적 교제나 영적 친교라는 의미가 아니라 새 성경에 번역된 대로 '성령안에서의 친교' 라는 의미이다.

'성령 안에서 친교'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첫째는 성령과 성도 사이의 친교이며, 둘째는 그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성도 상호간의 친교이다.

'애정과 동정' 교회가 분열과 분쟁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이유로 제시되는 네번째 요소는 애정과 동정이다. 여기서 '애정'으로 번역된 '스플랑크나'(splangchna)의 원형 '스플랑크논'(splangchnon)은 문자적으로  '내장'(bowel)을 가리키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 '온유함'(tenderness), '동정','친절'등의 마음의 감정을 나타낸다(피리1,8; 루카1,78; 코로3,12).

또한 '동정'으로 번역된 '오익티르모이'(oiktirmoi)'스플랑크논'과 거의 같은 뜻으로 연민이나 자비심 같은 감정들을 묘사하는데, 약한 자들에 대한 '동정'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바오로 서간에서 4회 사용된 이 단어는 그 중 2회가 '하느님의 자비하심'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로마12,1; 2코린1,3). 필리피 교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보이시는 따뜻한 애정과 동정을 경험했고,또 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그들 역시 그런 것들이 서로를 향해 보일 때, 더 이상 분열이나 분쟁은 없어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하십시오'  객관적 사실을 전제하는 조건절로 된 1절에 이어서 명령문으로 된 2~4절은 귀결절이라 할 수 있다. 즉 1절에서 제시한 그러한 요소들이 필리피 교회내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들로 하여금 2~4절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함으로써 바오로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것이다.

이에 바오로는 2~4절에서 성도간의 일치를 위해 삼중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첫째는 한마음 한뜻을 품으라는 것(2절), 둘째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라는 것(3절), 셋째는 서로를 돌보라는 것(4절)이다. 이러한 태도는 성도들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취해야 할 자연스런 태도이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필리2,5~11)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7~8)

필리피서 2장 7절그리스도의 자기비하, 케노시스(kenosis)을 말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케노시스'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본체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계시나 육화(강생)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그는 육화하심으로써 전지, 전능, 편재성 같은 속성들을 일시적으로 제한하셨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필리피서 2장 6절'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에서 '같음을' 로 번역된 '이사'(isa)원형 '이소스'(isos) 대등의 상태 또는 양식을 말하고, '당연한 것으로'(취할 것으로)에서 '당연한 것'(취할 것)으로 번역된 '하르파그몬'(harpagmon; to be grasped)이란 단어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계속 불잡고 놓지 않으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느님과 동등함(같음)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그의 지위를  계속 고수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그 영광스런 존재의 상태를 고수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오직 인간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에서 '자신을'로 번역된 '헤아우톤' (heauto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여기서 '헤아우톤'(heauton)'그리스도께서 갖고 있는 영광', 혹은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권위의 행사', '신성', '하느님과의 동등함'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비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지니신 신성이나 본질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우다'라는 표현은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우시어'로 번역된 '에케노센'(ekenosen)의 원형 '케노오'(kenoo)'비우다', '공허하게 만들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잠시 뒤로 한 채, 종의 모습을 취하셨음을 말한다.

본절은 3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을 비우셨다',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가 그것이다. 이중에서 '자신을 비우셨다'만 주문장이고, 나머지 둘은 원어상 분사로 되어 모두 '자신을 비우셨다'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한편,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여기서 '종''둘로스'(dullos; servant)하느님의 모든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의미한다(이사52,13~53,12). 그는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다 전하셨고 (요한17,8), 하느님의 을 온전히 다 행하셨으며(요한4,11) 그렇게 함으로써 성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요한17,4).

또한 그는 종으로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루카2,7), 공생활에도 머리 둘 곳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으며(루카9,58), 돌아가신 후에는 무덤까지도 빌리셨다(마태27,57~60). 여기에서 '모습'으로 번역된 단어 '모르페'(morphe)는 6절에서도 같이 '모습'(본체)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예수님이 단지 종의 외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이 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원문은 '엔 호모이오마티 안드로폰 게노메노스'(en homoiomati anthropon genomenos)인데, 직역하면 '사람들의 모양 안에서 만들어진'(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이다.  여기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원형 '호모이오마'(homoioma)는  명사이며, '모양'(likeness)이라는 의미로서(로마8,3 ;묵시9,7)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된 '호모이오시스'(homoiosis)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즉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듯이(창세1,26),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자기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대로 취함으로써, 인성을 지닌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성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인성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 희노애락의 감정, 오감 등을 지닌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죄는 없으셨던 것이다(히브4,15).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원문은 '카이 스케마티 휴레테이스 호스 안트로포스'(kai schemati hyuretheis hos anthropos)인데, 원문에는 7절에 포함된 구절로서 '외적 모습에 있어서 사람으로 발견되신'(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모양'으로 번역된 '스케마티'(schemati) 원형 '스케마'(schema)'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형태나 구조'를 의미한다. '스케마'(schema)'모르페'(morphe; 6절) 와 연결되는 중요한 단어로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전혀 다름이 없는 진정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는 여자의 몸을 통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고(루카2,7),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함을 경험하셨다(마태4,2; 요한4,6.7; 마르4.28). 슬퍼하며 울기도 하시고(마르3,5; 요한11,35), 육신의 몸이 지니는  최종적 한계인 죽음도 경험하셨다. 이런 그의 전체적인 모습은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르페'(morphe)가 아닌,  인간의 '스케마'(schema)로 나타나셨다고 표현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 되셨지만, 그 본체(모르페; morphe)에 있어서는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계셨고, 그 모양(스케마; schema)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여전히 신적 모르페'(morphe)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하는 사랑, 거룩, 진실, 의로움 등에 완전하시다는 것을 말하고, 인간의 '스케마'(schema)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가 편재, 전지, 전능, 영광 등의 신적 권위를 능동적으로 제한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는 인간처럼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끼는 존재 양식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말한다.

그는 신적 '모르페'(morphe)를 유지하고 계신 분으로서, 인간이지만 죄가 전혀 없는 인간, 인간처럼 시험을 당하셨지만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이었던 것이다(히브4,15; 2코린5,21).

한편 '나타나'로 번역된 '휴레테이스'(hyuretheis)원형 '휴리스코' (hyurisko)'(찾아서)발견하다', '만나다'(마태13,14; 루카4,17;  요한12,14; 사도17,23)라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여 그리스도께서 그 외양에 있어서는 인간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 순종하셨습니다' (8) '낮추시어'로 번역된 '에타페이노센'(etapeinosen)원형 '타페이노오' (tapeinoo)'낮추다', '내리누르다', '겸손하다'라는 뜻이다.  원문으로 볼 때, 본문의 주동사는 '에타페이노센'(etapeinosen; 낮추시어)이다.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몸이 아닌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그가 평생 하느님의 뜻 아래서만 사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분사형으로 사용된 '나타나셨다''순종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하느님의 뜻을 쫓아 당신 몸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하셨던 것이다(히브10,7). 또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마르10,4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느님께 대한 궁극적인 순종의 행위였던 것이다.

한편, '죽음에 이르기'로 번역된 '타나투'(thanatu) 원형 '타나토스'(thanatos)'죽음', '생명의 멸절'을 말한다. 이 죽음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자기 부인자기 헌신, 자기 희생으로 특징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루카9,23).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여 로마에서 널리 시행된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사형 방법이었고, 유대 사회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신명21,22~23; 1코린1,23; 갈라3,13; 히브12,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버림받아 죽기까지(마태27,46), 즉 저주받아 죽기까지(갈라3,13) 자신을 낮추신 것은 버려진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하고, 인간이 받을 저주를 대신 받음으로써,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필리2,12-18)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12)

필리피서 2장 1절-11절은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하여 권면하는 1장 27절-2장 30절의 부분으로서 성도간의 일치를 위하여 합심과 겸손과 상호 돌봄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겸손을  모범으로 제시하였다. 이어지는 새로운 단락인 2장 12절-18절자기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신앙의 정신을 권면하고 있다.

바오로가 안타까운 심정과 염려하는 마음으로 필리피 교인들에게 예전처럼 구원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기로 당부하고 있는 본절을 통해 볼 때,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와 함께 있었을 때에는 대체로 바오로의 권면을 잘 따랐으나, 지금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는 신앙 생황이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여러분 자신' 으로 번역된 '헤아우톤'(heauton)은 복수형 재귀 대명사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구원이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복수형의 표현을 통해 바오로의 권면은 필리피 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구원을'로 번역된 '소테리안'(soterian)원형 '소테리아'(soteria; salvation)거듭 남으로써 얻는 구원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받아들여지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까지 아우르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화의 측면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는 성화(sanctification)의 측면에서의 구원 종말론적 측면에서의 구원을 말한다.(필리3,12; 로마4,19;1코린9,24-27;1티모6,12) 따라서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라는 말은 필리피 교회가 완전한 모습을 이룰 때까지 이기심이나 불화 등을 없애고 '영적 성숙'을 위해 힘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힘쓰십시오'로 번역된 '카테르가제스테'(katergazesthe)원형 '카테르가조마이'(katergazomai; work out)'성취하다', '실행하다'(로마4,15; 5,3 ;7,13; 2코린4,17; 7,10), '애써 완성하다'(로마1,27 ;2,9)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명령법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계속해서 실행해 나가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즉 지속적 상태나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나태하지 말고,계속 영적 성숙을 위해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믿음을 이미 시작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확실히 완성될 구원이지만, 그 과정에서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부단히 성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거룩함이란 추구하는 것이며,단단히 붙잡는 경쟁이고 싸움이며 경주인 것이다.

한편,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 필요한 태도두려움과 떨림이다 '~을 가지고'(with)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메타'(meta)구원을 이루는 데는 이러한 태도가 반드시 요구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두렵고'로 번역된 명사 '포부'(phobu; fear)원형 '포보스'(phobos)위험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두려움'과 '놀람' 혹은 '당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경외심'이나 '존경' 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포보스'(phobos)는 또한 '떨리는'(떨림)으로 번역된 '트로무'(tromu; trembling)원형인 '트로모스'(tromos)와 함께 쓰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 앞에서 전율하는 두려움이나  떨리는 경외심을 갖고 서 있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창세9,2; 탈출15,16;1코린2,3;2코 린7,15; 에페6,5)

이러한 자세는 하느님 대전에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로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 이것은 내적으로 자신의 죄스러움을 발견하며,외적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인식할 때 나오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사도9,31; 로마3,18; 1베드1,17) 

바오로는 필리피 교인들이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죄스러움과 영적 무능을 인정함으로 인해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공동체의 영적 성숙과 정진을 이루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필리3,3~8ㄱ)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7~8)

바오로는 7절에서 지금까지 자랑해 오던 것을 '이롭던 것'(유익)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롭던 것'으로 번역된 '케르데'(kerde; gain)의 원형'케르도스'(kerdos)는 '이익','이득'(필리1,21; 3,7; 티토1,11)이란 뜻의 단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리사인으로서, 그것도 유다교의 골수분자로서 자신이 누리고 있던 혈통, 가문, 종교적 유산과 열심, 지식, 율법준수 등  육체의 자랑 거리들을 하늘 나라의 의로움을 얻는 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여겼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로 인해서', '~때문에' 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 '디아'(dia ; for)가 목적격을 취하고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로운 것'(해)란 뜻으로 번역된 '제미안'(zemian)원형 '제미아'(zemia)는  '손해'(사도27,10), '손상'(사도27,21)이란 뜻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여러 외적 조건을(필리2,4-6) 그리스도를 향한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실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이다.

이때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는 의미로 번역된 '헤게마이'(hegemai; consider)는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의 영향력이 현재에도 미침을 나타내는 시제인 현재 완료형으로 기록되어, 가치관이 바뀐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오로에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바오로가 이전에 소중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 것은  육체적 자랑 거리가 영적 진보를 막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할 신앙 생활이 육체적 자랑거리를 의존하는 것에 의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오로는 앞선 7절에 이어 자신의 육체에 관한 자랑거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고 있음을 밝힌다.  '모든 것'에는 지금까지 바오로가 가치 있다고 여기던 것의 전부로서,  유다교 내에서 그가 누렸던 높은 지위 등도 포함될 것이다.

여기서 '여깁니다' 라는 의미로 '헤구마이'(hegumai)원형은 '헤게오마이'(hegeomai)이다. 이 동사가 7절에서는 현재 완료 시제(헤게마이; hegemai)로 사용되었는데, 본절 8절에서는 현재 시제(헤구마이; hegumai)로 사용되었다.

앞서 현재 완료 시제를 사용한 것과 여기서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바오로는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항상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바오로가 세상 모든 이롭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높고 고상하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던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바오로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확인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일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가장 위대한 일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는 지식'으로 번역된 '그노세오스'(gnoseos) 원형 '그노시스'(gnosis)는  구약 히브리어 '야다'(yada)의 역어로서,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친교  혹은 본질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란, 그리스도 예수님과 관계없던 바오로가  그와 깊은 친교속으로 뛰어들어서,그와 깊이 있는 밀접한 친교를 나누고, 그가 누구인지 본질적으로 깨닫게 된 것을 말한다. 그 지식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그 이후 그의 평생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이 되었다.

한편, '지고한 가치'로 번역된 '휘페레콘'(hyperechon)'~위에', '~을 넘어서는' 이란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가지다', '소유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에코'(ech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로 올라가다', '뛰어나다'(로마13,1; 1베드2,13),'탁월하다','능가하다'(필리4,7)라는 뜻을 지닌 '휘페레코'(hyperecho)의 현재 분사형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가장 고상한 궁극적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470

토요일  제1독서 (필리4,10-19)

"여러분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마침내 다시 한 번 보여 주었기에,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0-13)

필리피서 4장 10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필리피 신자들의 재정 후원에 대한 바오로의 감사와 축복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필리피 신자들은 바오로가 옥고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전달했고, 그러한 재정적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의 호의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에서, '나는 기뻐합니다' 로 번역된 '에카렌'(echaren; I rejoiced)'즐거워하다', '기쁨으로 가득차다' 라는 뜻을 지닌 '카이로'(kairo)의 직설법 부정 과거형으로서 기뻐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크게' 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기쁨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크게'로 번역된 '메갈로스'(megallos ;greatly)'크게', '대단히 많이', '격렬하게' 라는 뜻을 가진 부사인데, 바오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이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큰 기쁨 역시 '주님 안에서'(en kyrio; in the Lord)이루어졌다고 표현했다. 즉 바오로는 자신의 이 기쁨이 세속적 측면이 충족된 것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일치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임을 밝히고 있으며,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이 자신을 돕다가 중단한 후 다시 시작한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다.

'사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해 주었지만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오로의 투옥 소식을 전해 들은 필리피 신자들은 한동안 바오로에게 선물을 보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바오로가 밝히듯이 필리피 교회가 잠시 바오로에게 후원하는 것을 중단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의가 없거나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원금을 가지고 바오로에게 갈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든지, 또는 갈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지 않았던 듯하다.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로 번역된 '에카이레이스테'(ekaireisthe)'아카이레오마이'(akaireomai)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과거에 지속된 행동을 나타낸다. 즉 이 말은 필리피 신자들의 바오로를 향한 관심이 표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좋지 않은 환경, 즉 카이사리아 혹은 로마에 이르는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또한 여행하기에 좋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이 그런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 에파프로디포스 편으로 보내 온 헌금으로 입증되어(필리4,18),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한 것이다.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리피 신자들이 에파프로디포스 편으로 보낸 헌금에 대해 바오로가 이처럼 기뻐하는 것은 단지 궁핍한 상태에서 도움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궁핍'으로 번역된 '휘스테레신'(hysteresin)원형 '휘스테레시스'(hysteresis)'결핍', '곤궁', '가난' 이란 뜻인데(마르12,44), 바오로는 이때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경제적 궁핍과 육체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본문에서 '궁핍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즉 바오로는 물질적 선물로 인해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는 오해를 막기 위해 굳이 궁핍함으로 인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준 것(필리2,25.30; 2코린11,9)에 대해 필리피 신자들에게 감사하면서도, 자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임을 밝힌다.

여기서 바오로가 말하는 '처지'는 원문으로 볼 때, 명사가 아니라 영어의 be동사와 같은 상태 동사 '에이미'(eimi; I am)로서,처해 있는 상태와 상황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처지에서도'로 번역된 '엔 호이스 에이미'(en hois eimi)는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무엇이든지' 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만족'으로 번역된 '아우타르케스'(autarkes)'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대명사 '아우토'(autos)'넉넉하다', '충분하다' 라는 뜻의 동사 '아르케오'(arkeo)의 합성어로서,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는' 이란 의미이며,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성행하였던 스토아 철학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의지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어떤 환경도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내면은 외부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오로가 말하는 자족은 그 의미에 있어서는 소토아 철학자들과 같을지라도 그 근거에 있어서는 그들과 같지 않았다. 바오로의 자족의 근거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아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콜로2,3),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성도들에게 주려고  예비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기에(1코린2,9) 언제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수 있었다.

'배웠습니다' 로 번역된 '에마톤'(emathon)원형 '만타노'(manthano)'행동이나 경험을 통해서 배우다', '습득하다'(1티모5,4.13)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바오로가 삶을 통해 이미 이것을 체득하였다는 의미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과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경험을 통해서(필리3,10),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그로 인해서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비천하게 살 줄'로 번역된 '타페이누스타이'(tapeinusthai)'타페이노오'(tapeinoo)의 수동태 부사이다. 원래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저수지의 수위를 낮추거나 산의 높이를 낮춘다는 의미가 있으나 성경에서는 은유적으로 사용되어 '겸손해지다','비천해지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마태18,4; 2코린12,31)

바오로는 복음 선교를 하는 가운데, 주림, 목마름, 추위, 헐벗음, 육체의 고난과 정신적 박해를 겪는 등 갖가지 비천에 처하면서도 그 가운데 적응해 나갔고, 또한 자족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수동태로 쓰인 것은 그러한 비참함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적 환경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풍족하게 살 줄'로 번역된 '페릿슈에인'(perissyuein)'페릿슈오'(perissyuo)의 부정사이다. '페릿슈오''꽉 찬 양으로 존재하다','풍부하게 갖추다','충분히 소유하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영적인 측면의 풍요함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바오로는 회심 전에는 물질적으로 풍요했었으나, 본 문맥에서는 그때의 상황이 아니라 복음 전파자로서의 삶을 말하고 있기에, 사목자로서 살아갈 때 물질적으로도 부요했던 때가 있었음을 가리킨다.  바오로의 자족함은 비천하든 풍족하든 그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삶의 풍요로움에 목표를 두고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바오로에게는 이런 외적환경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바오로는 오직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그리스도의 고난에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는 순교자의 영성으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처한 환경은 그를 기쁘게 하거나 혹은 슬프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로 번역된 '엔 판티 카이 엔 파신'(en panti kai en pasin ; in everything and in all things)에서, '엔 판티''엔 파신'은 각각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단어로서, '모든 것과 모든 일들에서' 라는 말이다.

또한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로 번역된 '메뮈에마이'(memyemai)원형인 '뮈에오'(myeo)'비법을 전수시키다', '성스러운 비밀을 가르치다' 라는 의미가 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그 비법을 전수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11절의 '만족하기를 배웠습니다'에서 '배우다'란 의미로 사용된 '에마톤'이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의미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배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전수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오로가 모든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모든 환경에 적응해 나간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힘을 주시는'으로 번역된 '엔뒤나문티'(endynamunti)원형 '엔뒤나모오'(endynamoo)는 동사의 서두에 붙어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 접두어 '엔'(en)그 자체로 이미 '힘을 주다', '강하게 하다' 라는 뜻이 있는 동사 '뒤나모오'(dynamoo)의 합성어로서, '능력을 주다', '원기를 돋우다', 활기를 불러일으키다' 등의 강한 뜻이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의 권능적인 활동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에페6,10 ; 1티모1,12; 2티모2,1; 4,17) 본문에서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그 능력을 부어주심이 항상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안에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엔'(en)은 일차적으로 '~안에'라는 뜻을 갖는데, 여기서도 주님 안에서 거주함으로써 비로소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전치사 '엔'(en)이 '말미암아', '통하여'(through)와 같은 방편의 의미로도 쓰이기에, '주님을 통하여'라는 뉘앙스를 가진다면, 이것은 역으로 주님 밖에서는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로 번역된 '이스퀴오'(ischyo)'힘'(마르12,33; 에페1,19)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명사 '이스퀴스'(ischys)에서 유래하여 '건강하다'(마르9,12 ;마르2,17), '능력을 가지다', '위력을 발휘하다'(사도19.16), '할 수 있다'(마태8,28; 마르5,4; 루카6.48 ;사도6,10)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현재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일반적 현재로서 관습적 동작이나 일반적 진리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항상 그러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초월적인 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어떠한 행동도 하느님 안에서 다 용납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적응할 수 있다는 의미,  자족에 관한 표현이다.

그는 약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며(2코린12,10)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2코린4,8)  바오로가 이처럼 모든 처지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었언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던 그 능력 때문이다.(필리3,9)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모든 것을 채워주는 지혜와 용기와 힘의 원천이신 것이다.

이처럼 본 문맥을 통해서 바오로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과 자신이 함께 일치하여 있기 때문임을 밝힘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신약 공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