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후서(독서묵상)
제1독서 (1베드1,3-9)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와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7)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순수성'으로 번역된 명사 '도미키온'(dokimion)과 '단련을 받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동사의 분사형 '도키마조메누'(dolimazomenu)이다. 여기서 이 명사와 분사의 어근은 동일하며, 금, 은 등의 광석이나 동전 등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불로 단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어근에는 불에 집어넣는 단련과 그 단련 속에서 순수성(가치)이 입증되었다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금에 비유하고 있다. 금은 원래 자연 상태에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돌 속에 소량 섞여 존재한다. 금광에서 채굴된 금이 섞인 돌을 용광로에 집어 넣게 되면, 거기에서 순금이 분리되어 나온다. 즉 자연 상태의 금광석에서 순금을 채취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뜨거운 용광로에서의 제련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들을 불 같은 단련의 도가니에 집어넣으신다. 생명도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금도 순금으로 나오기 위해 불로 단련을 받아야 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 불 같은 단련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단련은 믿음의 순수성을 입증해 주는 참으로 고귀한 시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통과해서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된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하느님의 시험의 목적을 언급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모든 시험들을 이겨나갈 것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제1독서(1베드1,10~16)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했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4~15)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4절에서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와 이후의 현재 신분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무지하여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면서 살았었으나 이제는 하느님의 은총 아래에 있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순종하는 자녀로서 ~~해서는 안된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새 성경이 '~로서'로 번역한 접속사 '호스'(hos)는 자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영어의 'as'의 의미이다.
그리고 '무지했던 때'에 해당하는 '엔 테 아그노이아'(en te agnoia)에서 '아그노이아'(agnoia)의 원형 '아그노이아'(agnoia)는 '무지'(ignorance)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희랍어 구약 성경 70인역(LXX)과 신약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특성인 하느님께 대한 무지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시편79,6; 예레17,30; 갈라4,8; 에페4,18). 이러한 용례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사욕들을 따라 산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을 때에 행한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욕망'에 해당하는 '에피튀미아이스'(epithymiais)는 복수 명사로서 '사욕들'(lusts; evil desires)이란 의미이다. 원형 '에피튀미아'(epithymia)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구라는 의미로서 본래는 가치 중립적 단어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도덕적,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을 나타내는 용례로 쓰였고(요한8,44; 로마13,14; 에페4,22; 2티모2,22 등), 베드로 전서에서도 동일한 용례로 쓰였다(1베드2,11; 4,2).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경계하여 엄격히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죄를 짓게 하며, 자연적인 본능의 충동대로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킨다.(마르4,19; 갈라5,16; 1베드2,11; 4,2; 1요한2,16). 사도 베드로는 지금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실천적인 요구로서 그런 욕망들을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베드로 전서 1장 13,14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고한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15~21절을 통해 이렇게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삶을 권고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특히 베드로 전서 1장 15~17절에서는 성도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어떤 예식이나 의식상(ritual)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유다인들이 지키던 전통, 즉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장터에서 돌아와 반드시 몸을 씻고 음식을 먹거나 그외에도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관례(마르7,3.4) 등에 관하여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통교함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영적, 도덕적 거룩한 정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전서 1장 15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면적이거나 '예수님의 구속사업의 공로의 은혜을 입어서 정결(거룩)하게 된' 존재론적인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을 일상의 구체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행실'('anastrophe'; '아나스트로페'; manner of conversation)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세상 속에서 윤리를 실천하는 면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1베드4,7-13)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10-11)
8절과 9절에 이어, 베드로는 본절에서도 재림을 기다리는 신도들이 상호간에 취해야 할 바람직한 생활 자세에 대하여 권면한다. 그것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느님의 다양한 은사를 맡은 선한 관리자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관리자'로 번역된 '오이코노모이'(oikonomoi)의 원형 '오이코노모스'(oikonimos)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oikos)와 '관리'를 의미하는 '노모스'(nomos)의 합성어로서 본래는 '집안 관리'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용례를 보면, 맡겨진 일과 연관된 집안 관리인의 활동이나 직위를 의미하는 것(루카12,42;16,1-9)에서부터, 은유적으로 교회의 일이나 기능에 관계되는 용어(1코린4,1;9,17; 콜로1,25)에 이르기까지 '관리' 혹은 '봉사'라는 두 가지 의미를 포괄적으로 가진다.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이 관리인(청지기 혹은 집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은사' 즉, '카리스마'(charisma)는 하느님의 은총에 기초해서 그 백성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영적 선물(특은)을 말하는데, 코린토 전서 12장 8절 이하에 나오는 특별한 은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가르치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자비를 베푸는 것들 처럼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섬기는 데 유익한 모든 것을 포괄한다.(로마12,6-8)
그런데 이 은사를 받은 관리인들은 특별한 사람 몇 명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관리인들은 소수가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각 은사가 주어졌으며, 그 은사를 맡은 관리인으로서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겨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은사를 교회 봉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맡기신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봉사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11) 본절은 10절에 이어, 신도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사용하는 은사의 범주를 두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말하는 것에 관계되는 것이고, 둘째는 봉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원문은 '만일 누가 말을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 이다. 본절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가리킬 때는, 흔히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랄레이'(lallei)가 쓰였지만,하느님이 말씀을 가리킬 때는 특별히 '신탁'(oracles)을 의미하는 '로기아'(logia)가 쓰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말을 하라고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말할 때, 특히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때에 '하느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처럼, 신중하고 또한 그 신탁을 주신 자의 존귀함과 영광이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모습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말씀을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범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베드로는 신도들이 봉사를 하려면,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하는 것같이 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주신'으로 번역된 '코레게이'(choregei)의 원형 '코레게오'(choregeo)는 본래 고전 희랍어에서는 '합창단의 연습 비용을 지불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충분히 공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2코린9,10)
본문에서는 현재 시제로 쓰여, 하느님께서 봉사에 필요한 능력을 한 번만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지속적으로 충분하게 공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봉사할 때에 자신들의 특출한 능력 때문에 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그로인해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가도록 해야한다. 이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생애동안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말하고 행동했던 것처럼, 신도들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무슨 일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11)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느님의 영광(doxa; 독사)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할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감격에 넘친 찬양을 드리고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분은 '성부 하느님' 이시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1베드5,5ㄴ-1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5ㄷ)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덕인 겸손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다. 아마도 베드로는 최후 만찬 전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장면(요한13장)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겸손을 앞치마처럼 두르고 서로 섬기라는 의미의 권면(5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본문에서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휘페레파노이스'(hypereoanois)의 원형 '휘페레파노스'(hyperepanos)는 '~위에, 너머에' 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hyper)와 '빛이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이노'(pa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들 위에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은 인간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데까지 이르게 되는데(창세3,5 ;이사14,13.14), 이것이 바로 교만의 극치이다. 하느님은 그런 자들을 대적하신다.
여기서 '대적하시고'로 번역된 '안티탓세타이'는 '안티탓소마이'(antitassomai)의 현재 직설법이다. 이것은 '~반대하여', '~에 대항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안티'(anti)와 '놓다', '두다'란 의미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대적하다'(사도18,6)뿐 아니라 '물리치다'(야고4,6)란 의미까지 지닌다. 이것은 적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이나 그 결과를 나타내는 군사 용어로서,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들이 철저히 패망하게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다." 라고 했다. 반면에 하느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하게 섬기를 자를 높여 주시는 분이다.
본문에서는 '대적하시고'에 해당하는 '안티탓세타이'(antitassetai)와 더불어 '(은총을)베푸십니다'에 해당하는 '디도신'(didosin)역시 모두 현재 직설법인데, 이것은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화와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 상황과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절대 불변하는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 여기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손'이라고 번역된 '케이라'(cheira)의 원형 '케이르'(cheir)는 일반 명사로서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의미하는 것과 더불어 때때로 권한, 소유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들어, 십자가상에서 죽어 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한다고 했을때에 그것은 곧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의 권한에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루카23,46) 또한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 속한 것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표현에서도 '케이르'는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다.(요한10,29). 이 단어는 아버지께서 만물을 아들의 권위에 복종시켰다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다.(요한3,35 ;13,3)
이상에서 '케이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는 소유, 권리, 권위, 능력, 주권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을 보게된다. 더구나 본절에서 '손'이란 명사앞에 '강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 혹은 통치 아래에서' 라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본문은 '하느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이러한 권고를 따를 때에 뒤따르는 보상이 언급되는데, 그것은 바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는 것이다. '여러분을'로 번역된 인칭대명사 '휘마스'(hymas)는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즉 하느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진 자만을 높이시는 것이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kairo)의 원형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주권하에서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결정적인 때, 또는 하느님이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때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때'는 그리스도인이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의 경륜 안에 있으며 하느님 아래에서 겸손한 자가 높여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때가 이 세상의 어느 한 때인지, 아니면 재림 후 심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두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성경의 흐름속에서 본문의 '때'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7) 본절에서 11절까지는 고난 중에 굳게 설 것에 대한 권면이다. 그리고 12-14절까지는 본 서신의 결말 부분으로 베드로의 마지막 권면이 담겨 있다. A.D.64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본서는, 기록된 지 얼마 후 로마 대화재 사건이 있었고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이를 그리스도인의 고의적 방화로 그 누명을 덮어씌움으로써, 정말 피비린내 나는 대박해가 있었다.
본서의 저자 베드로는 이제 스스로의 죽음도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면서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든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마치 유언하는 심정으로 고난 중에 굳세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모든 걱정을 주님께 내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여기서 '걱정'(염려)으로 번역된 '메리므난'(merimnan)의 원형 '메리므나'(merimna)는 본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메리죠'(mer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마음이 나누어 지는 것, 상이한 방향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걱정'(염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 걱정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긍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걱정의 자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걱정을 주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자들에게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마태오 복음6장 25-33절에서 하셨고, 루카복음 10장 38-42절에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간섭하면서 마음이 나누어진 마르타의 행동을 지적하며 꾸중하시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필리피 서간 4장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우리는 모든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맡기십시오'에 해당하는 '에피립산테스'(epiripsantes)는 '~의 위에' 혹은 '위를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던지다'(루카17,2)란 뜻의 동사 '립토'(ri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위에 던져버리다' 혹은 '위를 향하여 던져 버리다' 라는 의미를 가진 '에피립토'(epiripto)의 명령의 의미를 지닌 분사로서, 6절 상반절의 명령법과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종합하면, 우리들 마음의 관심사들을 독점하는 것이 결국 걱정(염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겨버리고 주님의 주권적 경륜 아래에서 겸손하게 살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심시오. 여러분이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8-9ㄱ) '정신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넵사테(nepsate)는 '근신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깨어 있으라'로 번역된 '그레고레사테'(gregoresate)는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단순히 잠에서 깨어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권고나 요청에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적 경각심에 대한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완벽한 헌신이 흔들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영적 경각심을 갖고 하느님을 신뢰할 것을 촉구한다.(1코린16,13)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사도 베드로는 과거 겟세마니 동산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놓고 있다가 마귀에게 삼키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베드로의 이러한 호소는 자기 체험에서 우러 나오는 것으로, 자신과 동일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가슴 절절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적대자'에 해당하는'안티디코스'(antidikos)는 법정 용어로서, '소송의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잠언18,17) 이 단어가 마태오 복음 5장 25절과 루카복음 12장 58절에서는 '고소한 자'로 번역되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꼐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베드로 사도가 마귀(악마)를 '안티디코스'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참소하는 마귀의 특성(욥기1,6-2,7 ; 묵시록12,10)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으면, 마귀는 그 틈을 이용해서(에페4,27) 하느님께 참소한다.(묵시록12,10)
이러한 사실을 '마귀'(악마)에 해당하는 '디아블로스'(diablos)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디아블로스'는 '디아'(dia)와 '블로스'(blos)의 합성어인데, '디아'는 '관통하는(through)','쪼개고 들어오는'의 뜻을 가진 전치사이고, '블로스'는 '(낚아채서)반대 방향으로 던져 버리다' (throw down)라는 뜻을 가진 '발로'(ball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마귀(악마)는 죄와 유혹을 통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이간질시켜서 인간을 하느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아블로스'는 '비방하다', '중상 모략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아발로'(diaba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방자', '참소자', ' 중상 모략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참소하는 자의 특성 및 그리스도인을 넘어지게 하는 자의 특성을 지닌 마귀(악마 ; devil)라는 의미로 쓰였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로 번역된 '레온 오뤼오메노스'(leon oryomenos)는 '우는 사자'(a roarling lion)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배가 고파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의 모습이나 혹은 먹이를 잡아 두고서 승리의 환호의 표현으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구약의 에제키엘 22장 25절과 시편 22장 13절을 참조하면 된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볼 때, 우는 사자의 이미지는 먹이감을 움키고 찢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두렵고 진인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마귀를 대적하라고 명한다. 이와같은 사상은 야고보서 4장 7절에도 나온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그리스도인을 피해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해야 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테이'(pistei)는 '신앙', '신뢰', '신실함'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피스티스'(pistis)의 여격이다. 이 용어는 특별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인 중심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라'고 베드로는 권고하는데, 여기서 '굳건히 하여'로 번역된 '스테레오이'(stereoi)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단단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박해를 틈타 마귀가 행하는 위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14ㄴ) 여기서 '평화', 즉 '에이레네'(eirene)는 '광야'를 의미하는 '에레모스'(eremo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적막한 광야의 분위기와 같은 평온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평온함은 외부에서 밀어 닥치는 소란과 위협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마음이며 모든 근심과 염려(걱정)와 두려움을 초월한 평정한 마음이다. 이런 '에이레네'는 그 평화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만 주시는 것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요 열매이다.(갈라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