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독서묵상)<1장-8장>

2015. 10. 16. 오전 1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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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1(독서묵상)<1장-8장>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1,1-7)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1)

신약 성경에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설립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이 유다, 사마리아, 안티오키아를 거쳐 제국의 수도 로마에게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보도하는 역사서이다. 이제 이어지는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의 21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는 이들의 구원 원리와 믿는 이들의 현실 생활에 이 원리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을 주고 있는 서간들이다. 이러한 서간들은 다시 바오로의 서간 13권과 공동 서간 8권으로 나뉘어진다. 그 가운데 로마서는 바오로의 서간 13권과 공동 서간 8권을 모두 합해 신약 서간의 가장 앞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로마서가 신약 서간들 중에 가장 앞 부분에 수록된 것은 로마서가 서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졌기 때문이 아니다.  A.D. 51년경 쓰여진 테살로니카 전서를 필두로 테살로니카 후서(A.D.51년), 코린토 전서(A.D.55년), 코린토 후서(A.D.56년), 갈라티아서(A.D.56년)가 쓰여진 다음 로마서는 A.D.57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가 서간들 중에서 가장 앞에 배치된 것은 로마서의 내용이 신약의 서간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 그 내용이 가장 포괄적이며 잘 짜여진 구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1장 1절-17절의 도입부와 1장 18절-15장 13절의 본론부, 그리고 15장 14절-16장 27절의 종결부가 매우 선명하게 구분되며 각 부분도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로마서의 도입부를 살펴보면, 서간이 갖는 보편적인 양식에 따른 인사말(1-7절)과 더불어 로마서 수신자인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감사와 바오로 자신의 로마 방문 계획 피력 및 로마서의 핵심 주제인 '믿음을 통한 의화' 원리에 대한 요약(8-17절)이 일종의 서론격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인사말의 원어상의 단어 수가 다른 바오로의 서간의 인사말의 단어 수가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많은 93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로마서의 인사말이 일차적으로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가 바오로 사도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며, 방문한 교회도 아니기 때문에(로마1,10.11.13) 격식을 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 부분이 단순한 인사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논술할 로마서의 핵심 사상을 서두에서부터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서 1장 1절에서 로마서의 발신자인 사도 바오로 자신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여기서 맨 먼저 나오는 단어인 '파올로스'(paullos)라는 이름을 소개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다' 혹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이 아니라 바오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ullos; a servant)의 기본적인 의미는 '노예'인데, 이것은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 자신의 의사는 전혀 내세울 수 없는 신분이다. 하지만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러기에 이 사실을 로마서 서두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 수 있게 된 것을 이 세상의 어떤 지위나 명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인들이 '둘로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점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노예라는 신분에 대해 오직 반감과 모욕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종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자율성 파기와 함께 다른 사람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복종시키고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둘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는 두 가지 사상적 배경이 있다. 먼저 '라는 '퀴리오스'(kyrios)의 반대어로서 종으로서의 철저한 책무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퀴리오스'는 사람이나 물건 등에 대한 확실한 소유권자임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바오로가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분의 소유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더 이상 자신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께 있음을 인정하였다(로마14,7.8; 갈라2,20). 그에게 있어서 '둘로스'의 의미는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기인한 자발적 책무였다.

그 다음, 구약에서 이 말은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들을 표현하는 상투어였다.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 모세는 하느님의 '둘로스'였다(여호1,2). 여호수아 또한 하느님의 '둘로스'였고(여호24,9), 이것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시키는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이기도 했다(예레7,25; 아모3,7).

바오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데에는 자신도 이같은 구약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꾼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바오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데 이어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음에 대한 소명 의식을 나타내었다.

복음에 대한 바오로의 소명 의식은 '사도'란 표현에서 잘 보여진다.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los)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와 '보내다', '떠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스텔로'(stello)의 합성어로서 '~로부터 보내다' 라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파생하여 문자적으로는 '~로부터 보냄 받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이 단어는 자의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부터 임무를 받아 파견받은 자를 가리킨다. 이때 파견받은 자는 보낸 자의 권위를 가지고 가게 된다. 그런데 바오로에게 권위를 주어 복음 선교사로 보내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바오로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게 된 것이다(사도9,1-31).

즉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에게 공문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길을 쫓는 사람들을 모두 결박하여 끌어오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달려가던 완악한 바오로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그리고는 직접 바오로를 부르셨는데, 이것이 바오로가 사도가 된 동기였다. '부르심을 받고'로 번역된 '클레토스'(klletos)는  '부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칼레오'(kalleo)의 형용사형으로 '부름을 받은'(called)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오로는 이 단어를 거의 항상 하느님의 부르심과 연관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사도라는 공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식에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생동안 그분에게 충성을 다할 수가 있었다. 한편 제자들 중에는 사도 바오로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2코린11,5; 12,11.12). 왜냐하면 바오로는 다른 열 두 제자처럼 예수님께서 공생활 때 사도로 부름받은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부름받은 사도였다(1코린7,10; 11.23). 따라서 바오로는 그의 서간 첫머리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밝히고 있다.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권을 밝히는 것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쓴 서간이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음을 수신자들로 하여금 확신시키기 위해서이다.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의 교인들 역시 자신과 직접적인 복음의 친교가 없었기 때문에 바오로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본 서간의 내용을 가볍게 여길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바오로는 본 서간 서두인 본절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앞서 바오로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규정했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울텐데, 본문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절대 권위를 지니신 하느님을 거론함으로써, 로마서를 접하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바로 하느님의 복음임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즉 바오로는 '테우'(theu)라는 소유격을 사용하여 복음이 바로 하느님의 소유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복음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복음'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온'(euanggellion)은 '좋다'라는 뜻이 있는 '유'(eu)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anggellion)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받을 비참한 운명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서 메시야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아무런 조건없이 누구든지 영원한 구원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선택받은'  '선택받은'에 해당하는 '아포리스메노스'(aphorismenos)는 '구별하다', '분리하여 따로 두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리조'(aphorizo)의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 '구별되어진', '분리된'(separated), '따로 놓인'(set apart)라는 의미이다. 신약에서 '아포리조'는 언제든지 '구별'과 관련된 용례로 쓰인다. 그리고 이 개념이 바오로에게 있어서는 '결정하다', '임명하다'라는 의미와 일치한다. 특히 바오로의 생애에 있어서 이 단어가 본절 외에도 사도행전 13장 2절, 갈라티아서 1장 15절에서도 발견된다. 갈라티아서 1장 15절에서는 하느님께서 바오로를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뽑으셨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사도됨의 기원이 태어나기 전부터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는 바오로가 제1차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성령께서 안티오키아 교회의 예언자들과 교사들에게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따로 세우고 안수하는 문맥에서 이 단어가 나온다. 이것으로 바오로는 사도로서의 본격적인 생애를 시작하게 된다. 즉 안티오키아에서의 성령의 명령은 그의 사도직의 권위를 세워주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본절에서 '아포리스메노스'(aphorismenos)는 완료시제이다. 이 시제는 바오로가 자신의 사도로서의 선택된 구별이 이미 과거로부터 이루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로서 하느님의 불변하는 계획에 근거되었음을 암시한다(에페1,4.5). 하느님께서 그를 구별하신 목적은 복음, 즉 '유앙겔리온'을 위해서였다. 이것을 알기에 바오로는 '좋은 소식' 즉 '유앙겔리온'을 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2티모4,7).



소돔의 멸망~~^*^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16-25)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8)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타락상과 믿음을 통한 의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안에서 로마서 1장 18절부터 1장 32절까지는 본론의 도입부로서 타락한 이방인들의 범죄와 하느님의 유기(버리심)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로마서 1장 18절불경건한 이방인에 대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진노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진노'로 번역된 '오르게'(orge; the wrath)는 본래 '자연스러운 충동', '기분', '천성', '기질'등을 의미했는데, 점차 '강한 내적 열정을 나타내는 격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구약에서 '오르게'(orge)불의에 대해 반응하시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속성묘사하는데 쓰였으며,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하느님의 '오르게'는 죄에 대해 그분께서 나타내시는 반응이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정당한 분노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관점이다. 그는 로마서 1장 18절에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임을 강조한다. '하늘에서부터'로 번역된 '아프 우라누'(ap' uranu; from heaven)에서 전치사 '아프'의 원형 '아포'(apo)가 나타내는 것은 어떤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진노가 시작되는 '하늘'은 물리적인 공간인 허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거처, 즉 옥좌(보좌)로 인식되었으며(마태23,22 ;사도7,55), 비유적으로는 초월적이며 전능하신 하느님과 동의어로 나타나기도 한다(루카15,18.20). 따라서 이 '오르게'의 출처가 '하늘'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 죄인들이 결코 초월적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없음에 대한 경고적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러한 피할수 없는 진노는 '모든 불경(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나타난다.

여기서 '불경'에 해당하는 '아세베이안'(asebeian)의 원형 '아세베이아' (asebeia;godlessness; ungodliness)부정 불변사 '아'(a)'예배하다'라는 뜻이 있는 '세보마이'(sebomai)의 합성어로서 '예배하지 않음','신(神)을 믿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을 가리키며,'불의'의 발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의'로 번역된 '아디키안'(adikian)의 원형 '아디키아'(adikia; unrighteousness;

wickedness)는 이처럼 '경건치 않은', '불경(不敬)한' 자들의 당연한 결과로서 '부도덕한 삶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의 특징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즉 '알레테이아'(alletheia; truth)는 문맥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명백히 계시된 하느님의 업적과 자취이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바로 바른 삶임을 알게 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불의'(아디키아)로 억누르고 있어서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여기서 '억누르는'으로 번역된 '카테콘톤'(katechonton; hold; suppress)'~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다','막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테코'(katecho; 루카4,42; 2테살2,6.7; 필레몬1,13)의 현재 분사로서, 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버릴 수 없어서 명백히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억눌러 불의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자들에게는 당연히 공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이것은 '나타나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칼륍테타이'(apokallyptetai; is being revealed)가  계속됨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로 쓰였다는 데서 암시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최종적으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완전하게 나타나지만,지금 현 시점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정의)의 속성이 범죄를 방치할 수 없어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범죄하는 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2,1-11)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5)

로마서 2장 1-5절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면서도 이방인을 판단하는 유다인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6-16절하느님의 심판이 이방인이나 유다인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심판의 기준과 근거를 가지고 논증한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화해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나오는데, 원문대로 번역하면 '다만 네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가 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잠언16,2; 예레17,10)의 눈에 비친 유다인들의 내적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회개로 나아가는 기회로 삼지 않고, 도리어 그 자비심을 외면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는 그들의 '완고함'이다. 여기서 '고집'으로 번역된 '스클레로테타'(sklleroteta)의 원형 '스클레로테스'(skllretes; hardness; stubbornness) '굳음'이라는 뜻인데, 유다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뻔뻔스러웠고, 완고하고 도리에 어두운 마음에 지배되고 있었다. 죄에 대해 뻔뻔스럽게 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첩경이다. 

'경화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sclerosis'의 어원이 '스클레로테타'라는 단어의 어근이라는 것은, 마치 동맥 경화증이 인간 육체의 건강에 있어 치명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완고함이 인간의 영적 건강에 있어 치명적임을 잘 보여준다. 

유다인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두번째 이유는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으로 번역한 '아메타노에톤'(ametanoeton)의 원형 '아메타노에토스'(ametanoetos; impenitent; unrepentant)부정 불변사 '아'(a)와,'회개하다'(마태3,2)라는 뜻의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메타노에오'(metanoeo)는 접두사로 쓰여 '다르게' 혹은 '후에'라는 뜻을 지닌 '메타'(meta)'깨닫다'(마태16,9), '생각하다' (에페3,20)라는 뜻을 지닌 동사 '노이에오'(noieo)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다', '후에 깨닫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아메타노에토스'(ametanometos)잘못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않는, 즉 뉘우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영혼의 세 가지 기능(역할)이라고 하는 '영혼 삼사'인 지성, 정서(감정), 의지의 모든 상태의 마비 현상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음으로 슬퍼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돌이키는 이들에게만 유효하다. 그렇지 않고 어떤 동기에서든지 죄악을 범하고도 완고한 마음으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계속 유린하고 있었다.사도 바오로는 이에 대해 가차없이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이들 가운데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계속 죄를 떠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는데, 이것은 심판날에 자신에게 내릴 진노를 쌓는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속히 그 죄에서 떠나야 하는 것이다.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날에 내릴 진노는 하느님의 공의에 따라 집행되지만, 그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자비를 오히려 죄짓는 기회로 삼으면서 완고함과 회개할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로마서 2장 5절에서 '진노의 날' '헤메라 오르게스'(hemera orges; the day of wrath)2장 16절에 진술된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공의로운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한편 '이루어지는'으로 번역된 '아포칼륍세오스'(apokallypseos)'계시' (revelation)라는 의미를 갖는 명사 '아포갈륍시스'(apokallypsis)의 소유격이다. 이것은 진노의 날에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 즉 공의로운 심판이 어떤 것인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전한다. 

그것은 곧 '진리에 따른 심판'(로마2,2.3)이며, 외적 조건이 아닌 내적 실체를 보고 행하는 심판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심판'(로마2,11)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날에 지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적나라하게 공개되고 있는 유다인들의 그 악한 실체를 보고 심판할 것이다. 

여기서 '그대에게'로 번역된 '세아우토'(seauto)는 재귀대명사로서 '바로 너 자신에게'(for yourself)라는 뜻이며, 스스로가 자신의 심판거리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쌓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테사우리제이스'(thesaurizeis; are storing up)돈과 재물을 저축하는 것처럼 쌓아가는 것을 뜻한다(마태6,19; 루카12,21; 야고5,3). 이 동사는 현재 시제로 쓰여 당시 유다인들이 계속하여 자신들에게 내릴 심판거리를 쌓아가고 있음을 회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평서문을 이루고 있지만, 단순히 사실 자체에 대한 묘사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의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사랑의 기도 그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3,21-30ㄱ)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3-24)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 개신교에서 의인론(義認論; 믿음을 통한 구원; 이신득의 以信得義)원리를 제시하는 필연적 이유가 되는 구절로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사실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죄인들의 구속과 의인으로 인정받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모든 사람이 죄인이며(예레17,9),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하느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절망적 선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로 번역된 '판테스'(pantes; all)'모두', '누구나'를 의미하며 인류전체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또한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판테스'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전 인류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리고 '죄를 지어'로 번역된 '헤마르톤'(hamarton; have sinned)'하마르타노'(hamartano)의 부정 과거 시제로서, '목표에서 벗어나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벗어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70인역(LXX)에서는 대부분 도덕적인 면에서 일탈된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특히 사오 바오로모든 사람의 영적, 도덕적 상태에서 설정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은 모두가 하느님의 신정법(신법)과 자연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인간이 자기들을 지으신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질서와 의도에서 벗어나 그분과의 친교가 단절된 것을 죄로 규정하고, 그 결과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창세3,8; 로마5,1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의 범죄에서 기인한다. 인류의 시조이며 대표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의 결과인 형벌과 원죄성이 그와 연대한 전인류에게 전가되어 전인류가 죽음과 영원한 벌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류를 묶고 있는 죄의 고리가 대표와 연대성의 원리에 의해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잃었습니다'로 번역된 '휘스테룬타이'(hysteruntai; come short; fall short)'미치지 못하다', '모자라다', '이르지 못하다'등의 뜻을 가진 '휘스테레오'(hystereo)의 현재 시제이다. 모든 사람이 그 죄로 말미암아 본래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에 부족한 상태임을 알게 한다.  여기서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낼 때 쓰는 현재형 시제를 사용해서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아무리 착하고 의롭다 할지라도, 그 의로움은 하느님의 영광에 도달하기에는 모자라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속량을 통하여' 로마서 3장 24절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 것을 나타낸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값진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혜이다. 여기서 '속량을'로 번역된 '아폴뤼트로세오스'(apollytroseos; redemption)원형 '아폴뤼트로시스'(apollytrosis)'~로부터'(from)라는 분리의 개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풀어줌'이라는 의미를 지닌 '뤼트로시스'(lytrosis)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인간을 얽어매고 있던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완전하게 분리하여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위해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몸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당신의 무죄하신 몸을 '모든 사람의 몸값', 즉 '속전'(贖錢)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인간을 사온 것이다(1티모2,6). 

구약에서는 인간의 죄를 씻음받기 위해서는 흠없는 과월절(유월절;해방절; 파스카절) 어린양의 대속의 피가 필요했다(탈출12,1-13).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것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온전히 해방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육화(강생)하신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려 인간을 구속하셨던 것이다(마태20,28; 2코린5,15). 

'거저 의롭게 됩니다' 여기서 '의롭게 됩니다'로 번역된 '디카이우메노이'(dikaiumenoi)

'디카이오오'(dikaioo)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며, '의롭게 되다'(being justified; are justified)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

개신교에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을 원상 회복이 불가능한 '부패된 본성'(nature corrupta)으로 보기 때문에, 속은 썩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의 성혈 공로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주고 칭해준다고 해서, '칭의'(稱義) 혹은 '의인'(義認)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범죄로 부패되어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원상회복이 가능한 '타락한 본성'(nature lapsa)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겉만이 아니라 속(내면)까지 의롭게 된다,'의화'(義化) 된다고 믿고 가르친다. 

우리가 이렇게 의롭게 되면 원죄와 본죄와 죄의 결과인 잠벌의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잃어버린 품위와 신분을 되찾고, 성령의 궁전이 되고,영원한 생명과 복락의 상속자가 된다. 그런데 이 의로움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하면, '거저' 얻어진다. '거저'로 번역된 '도레안'(dorean; freely)'선물'을 뜻하는 명사인데, 로마서 3장 24절에서처럼 부사적으로 쓰이면 '선물로'(as a gift), '값없이', '무료로' 등을 뜻한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값을 요구하셨다면,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여기에 참례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선물로 주셨기에 거저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의화'(義化)는 예수님의 구속 성혈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간구할지라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기독교 예수님 사랑♡]

제28주간 금요일 제1독서 (로마4,1-8)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3)"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았습니다."(4-5)

"일을 하지 않더라도"(5), "행위와는 상관없이"(6)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자,  믿음으로 의화된 자의 행복을 다윗이 노래한다."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여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7-8)

의인으로 판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라고 인정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시다. 의인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밀과 가라지의 요소가 공존하고 선악의 내면적 갈등을 느끼는 인간이 과거에 온갖 허물, 죄악, 실수, 불법과 불의로 가득차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지금, 이 자리, 여기에서 의인이라면 의인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주님께서는 통회하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

성경에 근거한 현행 교리대로 해도,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의 선성에 누를 끼치고, 공의를 거스르고, 거룩함을 모독함으로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데, 인간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상등 통회와 고백성사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하느님 대전에 고발할 수 있는가? 원수 마귀들이 고발하는가?  세상의 나의 원수들이 고발하나? 이미 성부 하느님 대전에 십자가 보혈로 우리들의 죄와 벌을 다 씻어주신 제 1변호자이신 예수님과 제 2변호자이신 파라끌리토 진리의 성령, 위로자이신 성령님께서 계시는데~~~ 

7절에 인용된 다윗의 행복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다."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굴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32,1-2)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제1독서 (로마4,13.16-18)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17)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18)

로마서 4장 17-21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때에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 4장 17절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유다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창세기 17장 5절의 인용이다.여기서 '내가 ~만들었다'로 번역된 '테테이카'(tetheika)는 '티테미'(tithemi)의 완료시제인데, 여기서 '삼았다', '만들었다', '되게 했다'(have made)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 완료 시제로 쓰였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결과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즉 아브라함의 지위가 이미 과거에 확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요지부동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 이 약속을 유다인들은 혈통적으로 그와 관련있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민족'에 해당하는 '폴론 에트논'(pollon ethnon)'많은 족속들', '많은 민족들'(many nations)로서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없이 모든 사람들이란 의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엄격히 따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포함된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 속하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지만(갈라3,7.9), 표면적으로 유다인일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서 제외된다. 표면적 유다인들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상속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들었다'는 뜻의 '테테이카'(tetheika) 동사의 인칭이 1인칭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동작의 주체가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믿는 모든 이들의 조상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파테라 폴론 에트논'(patera pollon ethnon; a father of many nations)이라는 자리에 앉히셨듯시, 그분께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도 역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리에 앉히신다. 이 지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얻지 못한다(요한1,12.13; 에페2,8.9).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17)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장 17절 상반절에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은 대상이 바로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밝힌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백 세가 되어 자식을 가질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음에도 죽은 이들을 살리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생기는 인간적인 회의의 시험을 이겨냈다.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가르친다(히브11,1). 그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가능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로 이 믿음이 더할 수 없이 큰 재산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두 가지 능력의 소유자로 요약하며 밝히고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살리시는'으로 번역된 '조오포이운토스'(zoopoiuntos)'살리다', '생명을 주다'등의 뜻을 가진 '조오포이에오'(zoopoieo)의 현재분사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한계를 초월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출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러한 능력을 체험하였다(로마4,19).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맘대로 주관하시기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거나 연장하시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월경이 끊어져 버린 사라의 태를 소생시켜서 이사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히브11,12)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창조하시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데,  창조의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 능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생성 및 보존은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러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아직 보이지 않으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믿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깊이와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문은 '파르 엘피다 에프 엘피디 에피스튜센'(par elpida ep elpidi episteusen)이다. 여기서 전치사 '파라'(para)는 목적격을 지배하여 '~대항하여', '거슬러'(against)라는 뜻을 나타낸다 또한 '엘피다'(elpida)'소망', '희망'을 뜻하는 '엘피스'(elpis; hope)의 목적격이다. 따라서 '파르 엘피다'(par elpida) '희망을 거슬러'로 번역하면 좋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던 당시의 상황이 매우 절망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처지와 상황을 바라볼 때에 그에게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나, 창세기 15장 5절에 나오는 대로 하늘의 별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희망을 가지게 된다. 믿는 이들의 희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한편, '믿었습니다'로 번역된 '에피스튜센'(episteusen)'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로서 믿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은 늙어 전혀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었으나 하느님의 약속이 진실하다고 믿었으며, 그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분의 전능성(창세18,14)과 신실성(2티모2,13),  그분의 말씀이 지닌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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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4,20-25)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3-24)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장 23-24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된 믿음을 통한 의화하나의 실례이며, 이것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밝힌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에 해당되는 부분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러나 그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가 된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의 효력이 아브라함 하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부정의 부사인 '우크'(uk ;not)가 문장의 맨 앞에 와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혼자만을 위한 것이'에 해당하는 '디 아우톤 모논'(di auton monon)에서 '아우톤'(auton ;him ;그 ;아브라함)을 지배하는 전치사 '디아'(dia)는 목적격을 지배할 때 어떤 일이 생기거나 존재하게 되는 이유를 나타내서 '~때문에', 혹은 '~을 위하여'(for his sake)라는 뜻이 된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단지 과거의 역사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원리라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만일 의화의 선포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믿음은 아무 가치나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중요성과 가치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자하느님께서 세우신 모델인 셈이다. 

사실 율법을 바라보면 사람은 누구나 절망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로마3,20). 그러나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바라볼 때 희망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의 선례(先例)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인생들이 하느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제 로마서 4장 24절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화가 그와 동일하게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짐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로 번역된 '멜레이 로기제스타이'(mellei logizesthai)에서 '로기제스타이'(logizesthai)'로기조마이'(logizomai) 현재 수동태 부정사이며, 기본 의미는 '계산하다', '평가하다','(계산의 결과로서)생각하다' 등이다. 

그리고 '멜로'(mello)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인 '멜레이'(mellei)는 여기처럼 현재 부정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하게 되어 있다', '~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따라서 '멜레이 로기제스타이'는 '(의롭다고)평가될 것이 확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이를 살리시는 하느님을 믿는 아브라함이 그로부터 의롭게 된 것처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을 믿는 신약의 모든 믿는 이들 역시, 반드시 하느님께로부터 의롭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5,12.15ㄴ.17-19. 20ㄴ-21)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8)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20)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아담과 그리스도께서 각각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영적으로 일치된 영적 대표로서, 그들의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속한 자들에게 전가됨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전가는 신학적으로 대표와 연대에 따른 죄의 책임과 의로움의 전가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의 행위는 모든 사람을 유죄 판결을 받게 한 반면, 그리스도의 행위는 많은 이를 의로움과 생명에 이르게 한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두 번씩이나 사용된 '판타스 안트로푸스'(pantas anthropus) '모든 사람들'(all men)이란 뜻이다. '판타스'(pantas)'많은'(many)이 아니라 '모든'(all)이란 형용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판타스 안트로푸스'는 '아담 아래 있는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며, 전자는 아담의 육적인 혈통 아래 있는 전인류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혈통 아래에 있어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1코린5,22).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 '범죄'로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행위 '의로운 행위'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의로운 순종 즉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가리킨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리2,6-8).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취하신 행위의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이 취하신 행동은 아담의 그것과 전혀 대조적이다. 아담은 일개 피조물로서 교만과 불순종으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과 같이 되려 하였으나(창세3,5)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이심에도(요한1,1-3)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오셨고(요한1,14), 자원으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셨다(요한10,18; 마태26,39).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행위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신분과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분의 '의로운 행위'(디카이오마; dikaioma)우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로마서 5장 19절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되었듯이'로 번역된 '호스페르 ~카테스타테산'(hosper~katestathesan)에서 동사 '카테스타테산'은 '~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부정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형이다. 이것은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의 범주에 들어갔고,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런 원리는 '될 것입니다'표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카타스타테손타이'(katastathesontai)'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미래 수동태 3인칭 복수형으로서 법적인 신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 상태에서도 의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법적인 신분에서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유기적 관계로 말미암아 의인의 범주 및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결과를 모두 동사 '카티스테미'(kathistemi)로 나타내는데, 아담에 대해서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단번에' 그리고 '이미' 죄인의 상태에 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미래 수동태로 표현해 많은 사람이 그분을 통해 계속해서 의롭게 될 것을 시사한다.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0) 어두움이 깊을수록 그 가운데 비치는 빛은 더 밝아 보이듯이, 죄가 더 많아지고 많이 드러날수록 하느님의 용서의 은혜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즉  하느님의 인류를 향하신 은총은 언제나 풍성하고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죄가 더 많아지고 죄의 책임이 더 커질수록,  그 은총의 풍성함 또한 더욱더 커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충만히 내렸습니다'로 번역된 '휘페레페릿슈센'(hypereperisseusen)의 원형 '휘페스페릿슈오'(hyperperisseuo)최상급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양을 초과하다',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페릿슈오'(perisseuo)'~을 초과하는'(more than; beyond; over)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휘페르'(hyper)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 동사는 더 이상 넘쳐흐를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른 풍성한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의 무게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고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죄가 바닷가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모랫더미에 비유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밀물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면 순식간에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을 정도로 큰 죄가 없으며,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없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의인 또한 없는 것이다.



 
  제29주간 수요일제1독서 (로마6,12-18)

"형제 여러분,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12)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13)

로마서 6장의 전반부인 1-11절은 사도 바오로가 성화(聖化)의 근거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죄에 대한 죽음을 주제로 논증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죄에 대해 죽은 자는 다시는 죄에 머무를 수 없으며, 마땅히 의로움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 이어지는 후반부인 로마서 6장 12-2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얻어 입은 성도로서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거룩한 삶에 이르는 성화(聖化)를 다시 촉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앞의 6장 1-11절과 내용상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앞은 이론적 성격이 강하고, 뒤는 실천적 권고의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중에서 로마서 6장 12-14절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새 생명안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바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에게 하는 명령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죄에 대해 죽고,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못하는 새로운 신분이 된 성도에게 옛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권고는, 새 생명을 얻은 자유인으로서의 특권과 권리를 향유하라는 아주 적절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지배하여'로 번역된 '바실류에토'(basilleueto; reign)원형 '바실류오'(basilleuo)의 현재 명령형이며, 기본적 의미는 '다스리다', '지배하다', '왕노릇하다', '왕이 되다'등이다. 강한 금지 명령어 '메'(me; not)과 더불어 쓰였는데, 이것은 죄가 성도들에 대해 그 지배력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다시 다스리려고 계속 유혹할 때 새 생명으로 사는 자유인의 특권을 이용해서 그 지배(다스림)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 성도들은 죄의 요구를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죄에게 일체의 기회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여전히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게 하거나 통제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는 은총을 헛되이 받은 것이다. 죄는 이미 상실한 자신의 통치 영역을 회복하고자 안간 힘을 쓸 것이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를 '헤 하마르티아'(he hamartia; sin)로 표현하면서 하나의 위격을 가진 실체처럼 나타낸다. 

개는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주워서 먹고, 돼지는 그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어도 다시 더러운 진창에 뒹군다(2베드2,21).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비단 개나 돼지만의 문제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도 그렇게 개나 돼지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여전히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의 지체를 마음대로 지배하게 한다면, 이것은 자유인이 다시 노예의 비참한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의 죽을 몸을' 이것은 단순히 장차 소멸하여 없어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는 인간의 육신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장악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본문에 '몸'으로 번역된 '소마티'(somati)의 원형 '소마'(soma; body) 전인(全人)을 나타내는 데도 쓰이며, 특히 죄와 죽음에 종속된 사람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로마6,6; 8,13; 콜로2,11). 본절에서도 죄가 지배하는 인간의 상태가 바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죽음'이란 표현과 더불어, 죄와 죽음에 종속된 인간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몸' 즉 '소마'(soma)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이것은 우리 성도중에 누구든지 죄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지배하고 통제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욕망에 순종(복종)하게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욕망'과 '순종'을 나타내는 두 단어를 좀 보자. 먼저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티미아이스'(epithymiais)'사욕'(邪慾), '동경'등을 의미하는 '에피티미아'(epithymia)의 여격복수이다. 초기 그리스도 문학에서는 '에피티미아'라는 단어는 중립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가 후에 윤리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것이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망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아와'(awa)'하마드'(hamad)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① 도덕적으로 평범한 욕망(신명12,20),  ② 칭찬할 만한 욕망(창세31,30; 이사52,8),③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욕망(민수11,4) 등을 나타낸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쓰인 적이 있으나,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피티미아'를 인간을 지배하는 죄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느님을 떠나서 죄의 지배 아래 처한 인간의 육체 속에 휘몰아치는 힘이다. 이 '에피티미아'는 모든 방면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성적 욕망, 물질적 향유, 타인의 재물을 탐내는 것 등이다. 우리 성도들은 이것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육체의 욕망은 언제든지 성령의 욕망과 대립되기 때문에, 죄가 자신의 몸을 지배하도록 방치하는 이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순종'으로 번역된 '휘파쿠에인'(hypakuein; you should obey)휘파쿠오'(hypakuo)의 현재 부정사이며, 기본적으로 '말을 듣다', '복종하다','따르다' 등을 의미한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을 지배하려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정욕, 혹은 악한 정욕에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과 맞서서 싸워야 한다. 죄의 노예였던 이전에는 맞설 힘이 없었지만,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죄와 관계가 끊어진 이제는 충분히 맞설 수 있고, 또 물리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제29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6,19-23)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6,19)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6,20)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6,23ㄱ)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6,22)

오늘 독서 말씀은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필자가 성령 운동에 연루되면서, 2000년대 미국에서 피정할때 수많은 사람들을 면담하고 성사주고 안수했다. 그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하느님께서 체험하게 하셨다.

초창기에 필자가 안수하면, 상대방의 안 좋은 것이 그대로 필자에게 전이되어, 화장실에서 좋지 않은 것을 다 뱉어 내었다. 그것이 한번 두번 쌓이고 쌓여 이제 면역성이 길러졌다. 그때 필자는 "아~인간의 죄가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과 심령까지 다 망쳐 놓는구나!" 하는 것을 뻐저리게 체험했다.

지금도 부마자나 특히 6계와 관련된 사람들을 안수하게 되면, 주님은 좋지않은 냄새를 맞게 하시고, 구토가 가끔 나와서 안수 후에는 반드시 "씻음(정화)의 기도"가 꼭 필요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안수를 안줄 수도 없다. 고통속에 있는 그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 사랑이신 성령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죄짓는 것을 죽기보다 더 무서워해야 한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기에, 죄없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성부 하느님 대전에 그토록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대속의 고통을 겪으셔야 했던가? 

우리는 세례의 은총인 성화(聖化)은총(생명의 은총:초성은혜: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혜: 성령의 다른 이름)이 얼마나 고귀한 무상의 선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고백성사를 통해 회복한 이러한 은총지위를 참으로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 이 성화의 은총(gratia habitualis)이 없으면 하느님께 갈 수 없다. 한마디로 천당에 못 간다. 

오늘 독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성경구절을 적어 본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1,15)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모릅니까?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3,16-17)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6,19-20)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로마7,18-25ㄱ)

오늘 독서는 로마서 7장 7-25절의 율법과 죄의 상관관계에 관한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와 같은 위대한 신앙의 스승도, 자신의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성을 겸손하고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늘 말씀을 가톨릭적으로 풀이하면 이런 내용이라고 본다. 

<나도 여러분들처럼 선악의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나약한 인간은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갈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 본성 자체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지만, 인간 본성은 가만히 놓아 두면 악으로 기울여지는 성향(경향:Tendenc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인 성령을 받아야만,인간 본성을 초월할 수 있는 초성생활(超性生活)이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총을 얻어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어야 하며,반드시 기도를 하고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7,19-20) 

그리고 자신안에 있는 죄의 법하느님의 법사이에 이성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성령의 빛, 은총의 빛, 말씀의 빛, 신앙의 빛을 받은 바른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 기분, 느낌, 본성을 잘 다스려야 성화(sanctification)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은 자신안에 있는 생명체와 같은 죄(罪:Hamartia)의 법지배를 받게 되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누가 이 죽음에 빠진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7,24-25)



제29주간 토요일 제1독서 (로마8,1-11)


율법이 나쁜 것인가?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좋은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은 율법이 아니라 다.율법은 죄를 분명히 드러내는 구실을 할 뿐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으로 말미암아 나약해져 이룰 수 없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루셨습니다.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 이는 육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채워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8,1-4)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육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안에 사시면,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8,5.8.9ㄱ.10-11) 


하느님이 만드신 육 혹은 육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주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도 육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다만 "육과 영" 중에 주체(Subject)가 어느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영을 가진 육"으로 산다. 육이 주체가 되어 산다.

1세기도 안되어 죽음으로 없어지고 재와 흙이 될 자신의 육, 없어질 자신의 육을 위해 영이 봉사를 한다. 영이 육을 섬기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삶이다. 우리 모두는 비물질적 실체로서, 물리적 파괴도 화학적 분해도 안되는 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육이 영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육을 가진 영", 영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땀흘려 일하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문화와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육을 끌고 유지하며 살아 가는 과정도 죄짓지 말아야 하지만, 자신이 번 돈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이웃의 공동선을 위해 봉헌하고 나누어야 하고, 육신도 자신의 영혼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미사하고, 피정하고, 봉사하고, 애덕과 자선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육신 생명안에 영혼 생명이 있으며, 영혼 생명안에 영혼의 핵인 심령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요한 4,24/1테살5,23참조) 심령은 세례와 견진때 받은 성령을 담는 그릇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모두가 알다시피,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육을 통해 죄와 죽음의 법을 따라 가면, 성령 하느님께서는 우리안에서 떠나 가신다. 


오늘 루카 복음 13장 6절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잘 보아야 한다. 주인이 왜 포도밭에 포도나무를 심지 않고,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 주인의 포도밭에 여느 포도나무처럼, 너무 흔해 수많은 군중속에 익명으로 자라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그만큼 드러나게 키우고, 돌보고, 정성을 쏟고,특별한 사랑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년, 이년, 삼년을 기다려  열매 맺었나? 찾아 살펴 보았지만, 아무 열매도 없었다. 그래서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셔서, 3년을 말씀과 영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특히 바리사이, 율법학자, 대제관, 원로들, 스스로 경건하고 구원을 보증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불신을 하고 회개의 열매가 없으니, 한번만 더 기다려 주었다가 정리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현세적 징벌보다는 종말론적 무서운 영원한 징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회개하고 육을 거슬러 살라고, 탄식하시며 간구하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해 드리지 말아야 한다.(로마8,26/에페4,30참조)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8,12-1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14,36)<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4,6)<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어째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까지 그들이 새겨듣는 복음서와 바올의 서간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표현 '압바' 호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Abba'호칭을 특별히 예수님께서 몸소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인들의 기도문에서는, 당시 아람어를 쓰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신뢰를 갖고 친숙하게 부르는 호칭,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아빠'라고 번역할 수 있는 'Abba'라는 호칭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당시의 언어 용법을 거슬러 가족들안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였던 '압바', 즉 '사랑하는 아빠'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전해 주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Pater)라는  그리스어의 단순한 호칭은 일종의 번역으로, 아람어의 가족적 신뢰를 드러내는 'Abba'라는 호칭의 의미를 가장 가깝게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족적이고 신뢰성을 드러내는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느님께 하느님의 위대함과 그 거룩함의 지위를 드러내는 예수님께서 칭하신 '압바'라는 호칭은, 그 거룩함을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올리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꾸준히 아빠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믿고, 또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 4,6과 로마 8,15에서도 아빠앞에서 자식의 특권(신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간의 어떤  특별한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지상에서의 아버지 상(像)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맺으신 결속 관계를 위한 상징으로 비쳐졌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곧 주인이기도 한 팔레스타인 문화권의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노아와 그 아들들 (셈, 함, 야펫)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치부를 덮어 준 셈과 야펫을 축복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하며, 형 셈과 동생 야펫의 종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신 '압바' 호칭은 상징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존중이 깔려있는, 피와 생명과 인격이 오고 가는 결속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전수받은 사람들, 마르코 3,33 이하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인 '형제들', '자매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종말의 때에 드러나실 하느님께 마음을 쏟는 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작은 형태의 '추종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포괄하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무리가 다 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bba 호칭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된 호칭이고, 교회를 구성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Abba를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저희의' 라는 표현을 쓸때, 우리는 수평적으로 하느님을 한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고 섬기는 한 자녀들이고, 한 가족이고, 한 공동체라는 말이다. 

쉽게 이야기 하자. 우리 가족이 전부 믿음을 가진 가족이라면, 할아버지,할머니, 부모, 형제, 자매,

조카, 손자도 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나의 부모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으니, 자식인 나는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경을 믿고, 주님의 기도를 아는 타 종파 신자들도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면, 수평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신뢰를 받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영광, 축복의 상속자인데,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8,17참조)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4,4-7과 로마 8,14-17 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는, 우리가 받은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서 성부 하느님은 진짜 아버지이신가?  어떤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 호칭을 부르는가?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 본당이나 교구,수도 공동체에서 체험된, 좋지 않은 아버지 상이나 상처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어려움은 없는가?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같은 믿음의 자녀로서, 수평적으로 가족적 사랑이나 우애, 형제애를 서로 느끼는가? 서로 원수처럼 살고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한 아버지라 부르는 같은 자녀라고 볼 수 있는가?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꼴베 순교 사제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8,31ㄴ-39)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5)~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37~39)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을 이어주시는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에서 드러난 그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 놓는 게 무엇인가? 성부 하느님 대전에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공격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공격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와 사랑을 끊어 버리도록 우리를 공격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탄이 공격하는 가능성에 대해 일곱 가지 도구를 지적한다. 

1) 환난(anguish)-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재난과 시련, 영적 고통을 말한다. 이 환난과 시련은 내 잘못으로 올 수도 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환난이 오면, 왜 나에게 하느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원망과 의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극복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고 미래의 영광과 축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

2) 역경(distress)-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곤고(困苦; '어렵고 고생스럽다'는 뜻- 보통 '좁은 장소' 혹은 '여유가 없다'라는 의미로 쓰임)라고 번역했다. 역경이 닥칠 때, 곤고할 때, 내가 마치 새장같은 아주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고 불안하고 외롭고 고독할 수 있으며, 믿음과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3) 박해(persecution)-이것은 환난과 시련과는 조금 다르다.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거부하고 방해하며 공격하는 핍박을 말한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했다.

4) 굶주림(famine)-이렇게 신앙때문에 믿음의 진리를 추종하다가 환난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때 사람들은 직업을 잃고 집에서 쫓겨나고,어디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굶주림, 기근이라 한다. 사도 바오로도 복음을 전하다 이것을 겪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느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도 그곳에서 기근을 겪게 되어  하느님께서 원치 않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아내 사라이를 빼앗길 뻔하고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굶주림은 육체적 고통을 주기에 우리의 믿음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5) 헐벗음(nakedness)-우리가 복음을 갖고 복음에 따라 살며 복음을 전하다 보면, 가끔 사도 바오로처럼 헐벗음(赤身; 적신)을 경험하게 된다. 헐벗음은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함을 말한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11,27)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와서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존재이지만  사는 동안 만이라도 좀 편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하고 수행하다 보면, 이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6) 위험(peril)-이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위험을 격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진리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질병과 생존의 위기, 죽음의 협박 즉 원수로부터의 살해의 위협을 받고 모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히브11,36-37참조).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 함을 깨우쳐 준다.

7) 칼(the sword)-칼은 죽음과 전쟁을 상징한다. 사람은 누가 죽이겠다고 하면 사람은 죽음앞에서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조국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배신한다.  칼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이고, 흔들리기 쉽다. 칼이란 우리 믿음의 선조들 중에서 동정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순결(정결)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는 믿음의 등반을 통해 완덕의 산을 오르면서 힘이 들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캐면서 완덕의 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선언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8,37)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흔들려고 하는 7가지 장애물들이 있었듯이, 사도 바오로는 이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흔들려고 하는 10가지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1) 죽음(death)-육체적 죽음과 죽음에 따르는 고통을 말한다(1코린15,55). A.D. 2세기의 순교자인 성 뽈리카르포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87년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 이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 해도, 나는 그 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했다.

2) 삶(life)-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을 말하며, 죽음과 반대 개념이다. 세상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특권, 쾌락, 즐거움이 이 말 안에 다 들어 있다. 광야의 유혹에서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절하면, 다 주겠다던 그것이다."

3) 천사(angels)-여기서 말하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천사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한 천사, 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 악령은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거짓말하게 만들고, 질병을 가져다 주고 우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 하더라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악령들이 집요하게 방해하고 못 살게 굴더라도, 넘어지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것이 신앙이다. 죽음을 통해, 마치 단련을 통해 풀무불에서 정금이 나오듯 고난없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4) 권세(principalities)-통치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높은 자, 지존자를 의미한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인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살했던 악한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이 많다. 그들 뒤에서 역사하는 세력들이 바로 악한 영들이다(에페6,12참조).

5) 현재의 것(present things)-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고통 등, 현재 손해를 보는 고통을 당하면, 아무리 좋은 일도 피하고 싶은 유혹이 오는 것이다.

6) 미래의 것(future things)-현재와 상반되는 '장래일'을 말한다.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을 지금 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구에 오는 재앙과 고통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정면으로 고통을 대결하게 한다.

7) 권능(powers)-악한 천사나 권세자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어떤 힘을 말한다. 마귀도 초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제한적으로 사용한다(점, 점성술, 타로 etc.).

8) 저 높은 곳(height)-위에 있는 어떤 힘(power above)을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  하느님의 허락하에 사탄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들-권세,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한다.

9) 저 깊은 곳(depth)- 아래에 있는 세상(power below)을 말한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가난, 멸시,천대, 낮은 지위 등등. 8)과 9)는 아주 좋거나 아주 낮고 비천한 환경에서 오는 고통을 말한다.

10) 그밖의 어떤 피조물(any other creature)-이것은 위에 열거한 9가지 외의 모든 것 말한다.

영적 세계의 어떤 악령들도,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필리3,8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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