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서이서(독서묵상)
수요일 제1독서(콜로1,1~8)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 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희망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구원의 미래적 양상이며, 이 희망은 부활 때 이루어지게 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믿음을 지닌 자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자가 미래에 얻게 될 것에 대한 바람과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마련되어 있는'으로 번역된 '아포케이메넨'(apokeimenen; is laid up; is stored up)의 원형 '아포케이마이'(apokeimai)는 '간직해두다', '저축하다','미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비축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미래에 받게 될 상급을 위해서 이 땅에서 삶을 계속적으로 지혜롭게 살아가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매우 의도적으로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 콜로새의 세속적인 사람들이 추구했던 이 땅에서의 안락한 삶과 대조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 hope)의 원형 '엘피스'(elpis)는 미래에 성도들이 성취하게 될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그 무엇을 얻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이다.
당시 콜로새는 오로지 세상적 관심과 목표를 가지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콜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리 하늘에 희망을 쌓아두고 살고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콜로새의 성도들이 가진 희망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법적으로 보면 '복음'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우'(euanggelliu; of gospel)는 소유격 명사로서 '진리'를 수식한다. 또한 '진리의'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스'(elletheias; of truth) 역시 소유격 명사로서 '말씀'(토 로고; to logo; the word)를 수식한다. 따라서 이것은 여러분이 전에 들은 '말씀'이 바로 '진리'에 속한 것이며, 그 '진리'가 바로 '복음'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사도 바오로는 성경에서 사용되는 주요 단어인 '복음'(euanggellion; 유앙겔리온), '진리'(alletheia; 알레테이아), '말씀'(logos; 로고스)이라는 세 단어를 사용해서 각각의 단어들 앞에 정관사를 붙임으로서 콜로새 성도들이 전에 들은 것이 바로 '그 복음'이며, '그 진리'이고, '그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당시 콜로새 성도들이 신앙 생활의 유일한 기준이요 교과서인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해서 살고 있음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목요일 제1독서(콜로1,9~14)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11)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2)
주님께 합당한 콜로새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세번 째 기도 제목은 하느님의 영광의 힘을 받아 강하게 되는 삶이다.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힘'에 해당하는 '토 크리토스 테스 독세스 아우투' < to kratos tes dokses autu ;his glorious might(power)>라는 표현은 하느님 자신 속에 존재하는 내적 능력 혹은 감추인 위엄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영광 속에 존재하시는 당신 자신(이사33,17)을 나타내 보일 때에 형체가 아닌 힘으로 나타내신다(탈출19,16~25; 신명4,12.15). 여기서 '힘'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크라토스'(kratos)는 신약에서 12번 사용되었는데, 그중에 인간에 대해 사용된 것은 한번도 없고 마귀에 대해 사용된 한번(히브2,14)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느님께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에서 살펴보면, 이 단어는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권능과 권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영적 존재이신 당신 자신에게만 있는 그 권능(크리토스)을 따라 당신 백성들을 모든 힘(뒤나미스; dynamis)으로 능하게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강해져서'로 번역된 '뒤나무메노이'(dynamumenoi; strengthened)의 원형 '뒤나모오'(dynamoo)는 '권한을 부여하다', '강하게 하다'는 뜻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강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히브11,34).
본문에서는 현재분사로 쓰였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신앙의 여정 내내 지속적으로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원문은 2인칭 복수 수동태로서 성도들이 능력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써 내적 심령이 하느님에 의해 강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온전히 추종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상기시키거나, 또는 성령님의 역동적 활동을 통해 그들을 강하게 하신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본문은 전치사 '에이스'(eis; so that ~ may~)를 통해 앞 문장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강한 힘을 의지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잃지 않고 인내하게 된다는 것이다.
방향이나 결과의 의미를 지닌 전치사 '에이스'(eis)로 시작하는 본문에서 '에이스'는 결과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따라 능력으로 가득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 서간 1장 2~4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에 기뻐하라고 권고했듯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시련과 시험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마지막 승리를 바라보며 담대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인격으로 성숙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견디어 내기를'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 patience)의 원형 '휘포모네'(hypoone)는 '~아래에'(under)를 뜻하는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러 있다'(remain)를 뜻하는 동사 '메노'(men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환경적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 환경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참고'로 번역된 '마크로튀미안'(makrothymian; longsuffering; endurance)의 원형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는 대인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가운데서 복수하지 않고 오래 참는 모습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가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바라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의 세번째 모습은 어떠한 환경적 또는 대인 관계의 어려움 앞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능의 힘을 받아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자가 가지게 되는 강한 능력이고 힘이며, 동시에 흔들림없는 모습이다.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사는 콜로새 성도들의 구체적 삶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마지막 기도 제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이다. 여기서 '빛의 나라에서'로 번역된 '엔 토 포티'(en to poti; in light)는 '빛 안에서' 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영광, 은총, 사랑 등과 같은 개념이며, 종말론적으로는 빛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기 때문이다.
'상속의 몫을'로 번역된 '텐 메리다 투 클레루'(ten merida tu klleru; the partakers of the inheritance)에서, '상속'(기업)으로 번역된 '클레루'(klleru; inheritance)의 원형 '클레로스'(klleros)는 구약적 개념으로 제비뽑기로 얻게 된 '몫', '분깃'을 뜻한다.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면서 분배받은 땅과 관련된 표현이지만, 신약 이후로는 구원 및 마지막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상급을 상징한다.
사실 모든 성도들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러한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하느님의 계명을 그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응답하며 믿음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분깃이 허락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인 동시에 사도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이 감사('유카리스툰테스; eucharistuntes; giving thanks)인 것이다.
금요일 제1독서(콜로1,15~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2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어 만물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평화를 이룩하시어'로 번역된 '에이레노포이에사스'(eirenopoiesas)의 원형'에이레노포이에오'(eirenopoieo)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와 '행하다',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다.
그 의미는 '평화를 만들다'(make peace)이며,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과 만물 및 만물안의 모든 생명체 상호간에 평화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5장 10절과 에페소서 2장 15절과 16절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무죄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죄는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흠없으신 당신 몸을 자원으로 희생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본문의 전치사 '디아'(dia)는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십자가의 피가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독생 성자의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는가? 이것은 이 땅에 첫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겨 죄가 들어오고, 모든 인류가 첫 사람안에서 죄를 지어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후로 그 죽음을 막는 유일한 원리가 바로 '피흘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어겨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며, 그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려 일어나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의노는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은 하느님만이 풀어 드릴 수 있고, 죄는 인간이 지었기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속죄를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하느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 세우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17,11; 히브9,22)고 선언하셨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흘려지고 뿌려졌던 양과 송아지의 피는 해당 제사 그 한가지 죄에 대해서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사였지만(히브7,27), 저주의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단 한번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여 죄사함 및 화해를 위한 더 이상의 피흘리는 제사가 필요없도록 만드신 것이다.(히브10,10.11).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원문은 새 성경의 번역과 조금 다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의 구속 공로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류와 화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여기서 '화해시키셨습니다'로 번역된 '아포카탈락사이'(apokatallaksai)의 원형 '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는 끝마침과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라는 전치사와 그 자체로 이미 '화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탈랏소'(katallasso)의 합성어이다.
사도 바오로는 '화목하게 하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때 주로 '카탈랏소'(katallass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로마5,10; 2코린5,18.20). 그러나 여기 콜로새서 1장 20절과 22절,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아포카탈랏소'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완전한('아포'; apo) 화해('카탈랏소'; katallasso)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카탈랏소'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가졌던 평화의 관계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같은 강조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과의 완전한 화해를 기뻐하시며 간절히 희망하셨던 것이다.
한편 '유도케센'(eudokesen)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콜로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새성경에는 '기꺼이'로 번역했다. 이 단어의 원형 '유도케오'(eudekeo)는 '잘하다', '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하다'(마태3,9), '여기다'(2코린11,6)란 뜻의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좋게 생각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것은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마태3,17; 갈라1,15.16). 이 단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시 화해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의 이러한 바람이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십자가상 대속적 죽음을 가능케했다.
토요일 제1독서(콜로1,21~23)
"그러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2)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로 번역된 '엔 토 소마티 테스 사르코스 아우투디아 투 타나투'(en to somati tes sarkos autu dia tu thanatu; in the body of his flesh
through death)는 번역하면 '그의 살의 몸 안에서 죽음을 통하여'가 된다. 보통 '육체'를 표현할 때 '소마'(soma) 혹은 '사륵스'(sarx)중 한 단어만으로도 표현 가능하고, 그런 표현이 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굳이 두 단어를 다 쓰고 있다.
이러한 중첩적 표현으로 사용한 이유는 초대 교회 때부터 유포되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육체가 아닌 영이라는 주장과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죽음을 겪지 않고 다만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Decetism)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 역시 그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즉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목마르다'(요한19,28)라는 십자가상의 말씀을 기록하였고, 육체의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단지 고난당하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는 가현설에 반박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숨이 끊어진 예수님의 옆구리를 군사 하나가 창으로 찔렀고, 그때 '피와 물이 나왔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던 것이다(요한19,34).
이러한 그리스도의 육체의 수난과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은 무려 700여년 전 이사야 예언자의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다(이사53,1~5).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독생 성자를 피흘려 죽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성도들과 당신과의 화해만을 원한 것이 아니다. 화해한 성도들이 영적 성숙을 통해 점점 성화되어 하느님 대전에 어떠한 부끄럼도 없는 완전한 존재로 서기를 원하신다.
첫째, '거룩하고'로 번역된 '하기우스'(hagius)의 원형은 '하기오스'(hagios)이다. 이 단어는 '봉헌된', '하느님께 성별된'이라는 뜻으로 하느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산 제물을 뜻한다(로마12,1.2). 하느님의 어린양의 보배로운 구속 성혈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깨끗해진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하느님의 어린양을 위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둘째, '흠없고'로 번역된 '아모무스'(amomus)의 원형은 '아모모스'(amomos)이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아'(a)와 '흠이 있는'이라는 뜻의 '모모스'(momos)의 합성어로서 일점의 티도 없는 깨끗한 상태를 뜻한다. 마치 방금 세탁한 흰 옷과 같이 조금도 더러움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묵시7,14). 특히 이 단어는 유다인들의 정결 의식을 묘사할 때에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하느님께 바쳐지는 일체의 흠이 없는 최고의 제물을 뜻한다.
셋째,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번역된 '아넹클레투스'(anengklletus)의 원형은 '아넹클레토스'(anengklletos)이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아'(a)와 '책임지우다', '결점을 찾아내다'라는 뜻의 '엥칼레오' (eng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일에 대하여 결점이나 비난, 문책같은 것이
없는 상태로서 특히 비난받을 만한 죄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흠없고'라는 단어보다 그 의미가 몇 배나 강한 단어로서 단순히 흠이 없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제물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서목 서간에서 이 단어를 사용해 봉사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인 원로와 감독 등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러야 하며(1티모3,10; 티토1,6.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종말의 심판 때에 이러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1코린1,8) 말한 적이 있다.
위의 세 개의 형용사는 결국 성도들이 하느님 대전에 가서 서게 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밟아나갈 성화(聖化)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리스도와 같이 변하게 될 성도들의 영광스런 모습(로마8,29.30; 에페4,13)이 성도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목표이며, 십자가 죽음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통해 독생 성자를 십자가에 넘기시고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지만, 그들이하느님의 자녀된 이후에는 거룩하고 흠없고 나무랄 데 없는 모습으로 성장해 가기를 원하시며, 완전히 성화된 사람을 천국으로 맞아들이실 것이다.
한편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로 번역된 '파라스테사이'(parastesai; to present)는 '옆에'라는 전치사 '파라'(para)와 '두다'라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곁에 두다', '가까이에 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 가까이에 성도를 둔다는 의미인데, 일차적으로는 마지막 종말 심판 때에 성도들이 부끄럼과 두려움 없이 하느님 대전에 서게 될 것이라는 미래적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이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 일상의 삶이 하느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의 산 제사로 봉헌되어야 한다는 현재적 의미가 있다(로마12,1). 성도들은 마지막 날 주님 심판 대전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기 위해 날마다의 삶 속에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부단히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즉 모든 성도들은 매 순간 그리스도 가까이에 자신의 삶을 두는, 거룩한 하느님 대전의 삶, 즉 '코람 데오'(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한다.
월요일 제1독서(콜로1,24~2,3)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4)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1장 24~29절에서 복음의 일꾼이 된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음을 전하면서 콜로새 교회 내의 복음의 일꾼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먼저 콜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겪는 고난을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교회를 직접 설립하거나 사목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 말미암아 받았던 직접적인 괴로움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이방인 출신 교인들을 위해서 유다인들로부터 받는 고난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한 고난 역시 이방인인 콜로새 교인들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고난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뻐합니다'로 번역된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으로서 행복과 번영, 평화와 평안에서 오는 감정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처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사도16,25; 2코린11,16~33; 로마5,3;필리2,18).
사도 바오로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기쁨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희망을 가질 성도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평화 때문이었다. 본 서간을 쓰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사도 바오로는 투옥이라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사도 바오로의 내면을 감싸고 있던 것은 성령 하느님의 충만한 영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 채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혹은 '모자란' 고난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자란'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타'(hysteremata; which is behind; what is still lacking)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라는 것'으로서 부족함이 보충되어야 할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난이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도의 고난을 경험하심으로써 완전한 구속(救贖;Redemption)을 이루셨다(요한19,30).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고난이 사도 바오로 자신에게는 물론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업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맏기셨다(마태28,18~20). 사도 바오로는 이 점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도로서 복음 선교를 감당한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또한 복음 선교 도중에 자신이 고난 겪는 것은 곧 자신과 영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겪으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 선교 과정에서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의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갈라6,17).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바오로야, 참 수고했다. 나를 위해 겪은 너의 고난은 바로 나의 고난이다'라고 말씀하실 예수님의 이 한마디를 늘 염두에 두고 고난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확신을 가진 사도 바오로는 고난 가운데 기뻐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성적으로 사도 바오로 시대의 콜로새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 공로를 헛되이 돌리는 죄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수 없으시니까, 사도 바오로 자신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 예수가 되어 그들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고난을 바쳐야 된다는 믿음과 충성에서 나온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한편, '채우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안타나플레로'(antanapllero; fill up)의 원형 '안타나플레로오'
(antanaplleroo)는 그 자체로서 이미 '번갈아 채우다'라는 뜻이 있으며, 특히 여기서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새로운 고통으로 가득가득 채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비하면 매번 새로운 고통이 자신의 육신에 와도 부족하며, 날마다 고난을 극복하는 생활을 계속한다는 고백이다.
더구나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신으로' 혹은 '자신의 육신 안에'(in my flesh) 채우고 있다는 것은 그 고난이 아무런 목적없이 당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복음으로 인해 겪는 사도 바오로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사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깨달았던 사도 바오로는 교회에 맡겨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 절대 명령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사목중에 겪게 되는 고난을 상급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사도 바오로와 같은 복음의 신실한 일꾼들을 교회안에서 찾고 계신다고 보아야 한다.
수요일 제1독서(콜로3,1~11)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5) 이것들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6)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5절에서 5가지로 제시한 성도들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성품들은 인간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먼저 '불륜'(음란)에 해당하는 '포르네이아'(porneia; immorality)는 신약에서 명사의 형태로 25회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영어에서 '도색'을 의미하는 '포르노'(porno)의 어원이 되는 단어로서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인 성행위 및 불법적인 성관계를 망라하는 표현이다.
그 다음으로 '더러움'(부정;不淨) 에 해당하는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impurity)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정결케 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다이로'(kadair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정결치 못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신약에서 명사의 형태로는 10회 나오지만, 형용사 '아카타르토스'(akathartos)의 형태로 32회나 사용되어 우상 숭배나 제의적 혹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세번째로 '욕정'(사욕)에 해당하는 '파토스'(pathos; passion)는 신약에서 3회 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로마1,26; 콜로3,5; 1테살4,5),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스토아(Stoa)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이것은 이어 나오는 '나쁜 욕망'(정욕)으로 번역되어 주로 능동적 측면에서의 악한 욕구를 가리키는 '에피튀미아'(epithymia)와 동의어이지만, 그와 구별되어 수동적 측면에서 제어하기 어려운 욕구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네번째로, '나쁜 욕망'(정욕)에 해당하는 '에피튀미아'(epithymia; evil desire)는 앞에 말한 '욕정'(사욕)과 동의어이지만, 능동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서 신약에서는 명사의 형태로는 38회, 동사의 형태('에피튀메오'; epithymeo)로는 16회 사용된 단어이다.
마지막으로 '탐욕'(탐심)에 해당하는 '플레오넥시아'(plleoneksia; greed)는 비교급으로서 '더 많은', '더 큰'이란 의미의 '플레이온'(pleion)과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코'(ech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자신이 이미 지닌 것과 상관없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를 가리킨다.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10회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고대 희랍 문헌에서는 자주 사용된 단어이다.
이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성도들이 버려야 할, 옛 사람의 성품들인 5가지를 언급하고 난 뒤에 '탐욕은 우상 숭배(idolatry)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탐욕이 바로 5가지의 근원이 되는 욕구이며, 아담과 하와의 인간성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성(異性)에 대한 탐욕의 드러남이 '불륜'(immorality)과 '나쁜 욕망'(evil desire)이며, 돈에 대한 탐욕의 드러남이 '더러움'(impurity)과 '욕정'(passion)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다른 것을 더 탐하는 탐욕(greed)은 그야말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야고1,14.15). 이러한 탐욕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면, 하느님 대신에 탐욕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고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은 하느님과 나 사이에 있는 그 무엇으로서 하느님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체의 모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성(異性)이나 명예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이나 지식 등이 우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상이 커지게 되면, 그것이 하느님을 가리워서 결국 하느님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세적인 것들(the parts of you that are earthly)을 죽이라는 강한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있어야만 가능한데, 그것도 일회적인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 충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사도 바오로는 현세적인 것들, 즉 땅에 있는 지체의 탐욕을 죽이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곧 불순종의 사람들이며, 이들 위에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에페소서 5장 6절과도 조화를 이룬다. '여러분은 어느 누구의 허황한 말에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러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에페5,6)
'진노'로 번역된 '오르게'(orge)는 과일의 즙이 꽉 차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격체에 사용되먼, 좋지 않은 감정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나타내게 된다. 여기서는 하느님 안의 '공의로운 분노'(의로운 분노; 의노)가 가득 차 올라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 의노는 복음과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항하는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이다.
여기서 '내립니다'로 번역된 '에르케타이'(erchetai)는 '에로코마이'(erochomai)의 현재형인데, 이것은 장차 내릴 하느님의 진노가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제는 먼 장래만이 아니라 죄를 짓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죄 때문에 살아가도, 진노를 내리시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거나 유보하신다(로마2,23.24). 이 죄에 대한 침묵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현재적 심판의 일종이다.
물론 이 죄에 대한 최종적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의 진노가 내린다는 말이 미래적 개념과 더불어 믿는 자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한 현재적 진노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요일 제1독서(콜로3,12~17)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6)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3장 12~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서 교우가 실천해야 할 덕목을 말하면서 하느님의 성품에 따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12~14절)과 더불어 평화와 감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권면을 주었다(15절).
이제 이어지는 콜로새서 3장 16절과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교우는 그리스도께서 전례와 영적 친교와 생활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권면을 준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16절과 17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풍부히 머무르게 하여라'(Let the word of Christ in you richly)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전례와 영적 친교와 생활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 속에 풍성히 간직해야 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번역된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ho logos tu christu;the word of christ)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것은 곧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서 (요한6,68), 곧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가리킨다(2티모3,16).
무엇이 옳으며, 어떤 일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이별하는 자리인 마르코의 다락방에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요한17,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없이 이 세상에서 복음 선교를 감당해야 할 제자들에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주신 것이다.
한편 '머무르게 하십시오'로 번역된 '에노이케이토'(enoikeito; let dwell)의 원형 '에노이케오'(enoikeo)는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과 '살다', '머무르다'라는 뜻의 동사 '오이케오'(oik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안에 머무르다'라는 뜻이다. 실제적으로는 '~안에 머물러 그에게 영향력을 끼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교우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리잡아 그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또한 '풍성히'로 번역된 '플루시오스'(pllusios; richly)는 부족함이 없이 흘러 넘치는 모습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우의 내면에 자리잡아 때에 따라 부족함이 없이 방향과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전에 머물렀던 속되고 불순한 모든 생각과 말들이 깨끗하게 정리되고, 그 대신에 생명의 말씀이 자리잡아 언어 생활 뿐 아니라 사상과 지식까지 새로워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콜로3,10).'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119,105)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교우들 속에 풍성히 머무르게 해야 할 시점이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며 권면할 때이고, 그리고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할 때임을 밝히고 있다. 교우들은 영적으로 친교할 때와 하느님께 예배할 때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말씀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으로 번역된 '프살모이스'(psalmois)의 원형 '프살모스'(psalmos; psalm)는 '문지르다'는 뜻의 동사 '프살로'(psalo)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수금을 문질러 탈 때 나는 '수금의 소리'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진다. 본문의 시편이 다른 노래들과 구별되는 요소가 있다면,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면서 드리는 찬송이라는 말이다. 특히 '프살모스'는 구약의 시편(the Book of Psalms)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어 (루카20,42; 사도1,20) 'Psalm'으로 번역되었다.
신약 시대의 교우들은 유다인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예배에 모였을 경우, 하느님을 찬양하는 찬송시를 지어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1코린14,26). 그리고 '찬미가'에 해당하는 '휨노이스'(hymnois)의 원형 '휨노스'(hymnos)는 영어에서 '찬송'이라는 뜻의 단어 'hymn'의 어원이다.
'시편'(Psalmos)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 반면에, '찬송'(hymnos)은 이방 세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즉 이방 종교에서 어떤 신이나 신화적 인물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휨노스'(hymnos)라고 불렀다.
이방 종교를 위해 사용되던 노래를 가리키는 용어를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곡들을 빌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는 데 사용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영가'(신령한 노래)에 해당하는 '오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odais pneumatikais; spiritual songs)는 일반적인 성가곡을 가리킨다. 예배 때에 사용되는 송시(頌詩)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도 바오로가 시편, 찬미가, 영가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개별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향해 가져야 할 찬양의 마음을 극대화 할 것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성령충만'과 마찬가지로 '찬양'은 의무 사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 2인칭 복수 현재 분사 명령형이 사용되었는데, 그리스어에서 현재 시제는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의미하므로, 찬양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