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독서묵상)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요한1서1,1-4)
오늘은 어부 출신으로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 사도의 동생인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이다.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함께 최초의 제자단에 속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 했으며 예수님의 당부로 성모님을 모셨다.
교회의 전승은 요한 복음과 요한 1,2,3서, 요한 묵시록을 사도 요한이 저자라고 가르쳐왔다. 그러기에 오늘 축일의 독서도 요한 1서의 내용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서학계에서는 요한 1,2,3서의 저자가 요한 복음 저자도, 예수님의 애제자도 아니라고 밝힌다. 세 편지에서 저자는 자신을 '원로'라고 밝힌다.원로라는 칭호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교회에서 흔히 주님의 직제자 요한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을 가리켰다.
한편, 저자는 자신을 나자렛 예수님을 직접 본 목격 증인으로 내세운다. 따라서, 그는 요한계 공동체에 속하면서 사도 전통을 직접 이어받은 요한 사도 바로 다음 세대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세 편지의 저자는 동일 인물이다. 세 문헌의 메시지, 문체, 어휘등이 서로 매우 비슷하게 때문이다. 세 서간의 집필 연대는 성 폴리카르푸스와 유스티누스가 요한 1서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A.D.150년 이전에 쓰인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요한 복음이 쓰인 뒤인 A.D.100년경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독서는 요한1서의 머리말(1,1-4)에 해당하며, 요한 복음의 로고스 찬가(요한1,1-18)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우리'는 애제자의 목격 증언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온 요한의 직계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생명의 말씀이시다(1,1-2).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1) 요한 1서의 서문은 인격화된 말씀의 육화를 강조한 요한 복음의 서문과는 달리, 우리가 보고 듣고 만져본 생명의 말씀, 곧 나자렛 예수님의 공생활을 강조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우리 모두(저자와 수신자들)가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기쁨이 넘치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1,3-4). 이 친교는 두 주체가 어울리면서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하는데, 요한 복음에는 이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20,2-8인데, 빈 무덤을 본 마리아 막달레나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 20,3-4에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고 전한다.
그만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란 걸 드러낸다. 그리고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두었으면, 베드로 사도보다 먼저 달려가 빈 무덤에 다다랐다고 표현을 한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중의 하나이고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운명할 때 성모님을 맡겨 주셨다. 그리고 12사도 중의 유일한 동정이며, 가장 오래 장수하여 천상의 신비와 계시로 가득찬 요한 복음을 저술했다.
주님께서 12사도 중에 특별히 요한 사도를 간택하여 사랑을 쏟아 주시고, 큰 사명을 맡기신 것은 분명히 사람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주님 마음에 드는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수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요한1서 1,5-2,2)
요한 1서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1,5-3,10)의 대주제는 빛이고, 둘째 부분(3,11-5,12)은 사랑인데, 두 부분의 첫 구절에 그리스어로 '메시지' 또는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아'(angelia)라는 말이 나온다.
요한 1서에서 앙겔리아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 안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키는데, 요한 복음을 비롯하여 4복음서는 이 말의 동의어로 '기쁜 소식'을 뜻하는 '에우앙겔리온'(euangelion)을 사용한다.
첫째 부분(1,5-3,10)의 첫 머리에서 저자는 하느님을 빛으로 계시한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없다."(1,5)
여기서 저자는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눈 요한의 세계관을 반영한다.(요한3,19-21) 빛 속에서 거닐고 진리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게 되고 동료 인간들과도 친교를 나누게 된다. 빛 속에서 거닐기 위해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받아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우리안의 주어진 그분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1,8-10)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죄인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 축일'이다. 헤로데 대왕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기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부인이 10명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자녀들이 권력 승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 탄생 무렵, 권력에 위협을 느껴 수많은 죄없는 아기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3-17참조)
초세기 교부들은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들을 순교로 이해하였다. 곧 희생된 아기들은 말 없이 피를 흘림으로써, 주님의 강생의 신비를 증언했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어 인류 구원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실지를 미리 보여준 것이다.그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진리가 아닌 거짓 속에, 사랑이 아닌 탐욕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오늘 예수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의 비참한 살해는 '끽' 소리도 못하고 죽은 아기들 뿐 아니라 그 아기들의 부모와 가족들의 통곡과 울부짖음, 절규와 원망이, 헤로데 대왕과 그 군대들 뿐 아니라 이집트로 피난가는 나자렛 성가정의 성모님과 요셉 양부를 향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 강생안에는 여러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 희생과 수난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원자 예수님 때문에 죽고, 고통 받고 눈물 흘렸으며, 내세에서의 보상이라도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원죄의 사함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해되는 낙태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빛이 아닌 어둠, 죄악과 탐욕으로 가득차,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구속하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태아들을 죽이는 우리들은 또 하나의 헤로데가 아닌가? 우리 안에 헤로데의 어둠과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죄 없이 순교하여 원죄의 사함을 받은 아기 순교자들이여! 이 시대 낙태되는 아기들을 위해 빌어 주소서!
목요일 (요한1서2,3-11)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3)
'계명'으로 번역된 '엔톨라스'의 원형 '엔톨레'(entole)는 구약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 중에 하느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례'들을 뜻하는 것으로 '십계명'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테로멘'의 원형 '테레오'(tereo)는 시선을 '고정시키다', '준행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주신 명령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여 철저하게 준행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알고 있음"(3)과 "나는 그분을 안다"(4)에 나오는 '안다'는 동사 '기노스코'(ginosko)는 단순히 지식적 차원의 앎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관계성 속에서 참된 체험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본래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5)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판단과 지식적 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까지 나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 '완성된다'는 단어 '테텔레이오타이'의 원형 '텔레이오오'(teleioo)는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으로서,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께 대한 자녀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7)저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컨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등에도 이미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다시 강조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유대적 노선과 그리스도교적 노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통적인 교훈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 영지주의 이단 중 한 사람인 마르시온(Marsion)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날카롭게 분리시켜,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잔인한 짓을 일삼는 저열한 신인 반면,신약의 하느님은 그리스도에게 임한 영으로서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고 사랑으로 다스리는 우등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마르시온에게 있어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이 구약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마르시온의 그런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자신이 지금 권면하는 계명이 오래된 정통 신앙을 따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 entolen kainen)(8)이란 말은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에 나온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지만,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마태5,44)라는 사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족례때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가리옷과 십자가의 길에서 다 도망간 사도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몸소 자신의 교훈을 실천해 보였다는 차원에서는 새 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8절 이하에 나오는, '어두움'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kotia)는 '흑암'(darkness)를 뜻하는 단어로,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가려진 상태, 빛이 없는 혼돈과 절망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빛'으로 번역된 '포스'(phos)는 하느님의 진리 및 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계명을 알지 못하던 시간을 어두움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이 계명의 의미를 알게 된 사실을 참 빛이 비친 것에 비유하고 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9)의 표현은 요한복음 12장 46절에도 나오는데, 빛의 비추심을 받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사랑의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녀의 거룩한 성품을 말하는데, 빛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9절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서 '미워하다'로 번역된 '미손'(mison)의 원형 '미세오'(miseo)는 '싫어하다','증오하다'라는 뜻으로, 형제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형제'로 번역된 '아델폰'(adelphon)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된 교회 내 구성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마땅히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한 형제의 사랑의 실천이 없는 자는 아직까지 어두움에 속한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10) 10절의 '걸림돌'로 번역된 '스칸달론'(skandalon)을 '덫', '올무', '거리낌'으로도 번역된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다', '실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그 안에 걸려 넘어질 요소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낮에 다니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밤이라 할지라도, 빛과 같이 동행하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밝히 비추어 주어, 발의 걸려 넘어짐을 막아주고,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절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임한 축복을 보여 준다면, 11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임한 불행을 보여준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인데, 여기서 '눈'은 비유적으로 '판단력'을 가리키며, '멀게 하였음'은 '시력을 잃다', '정확하게 보지 못하다'는 뜻으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실례로 어두움 가운데 잠시 머무는 것은 시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오래 머물게 되면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어 마침내는 소경이 될 수도 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항상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움직이게 되어 머지 않아 영적 시력을 잃고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에게 명하신 계명의 절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실패자는 이미 자기 인생의 반을 실패한 자이다.
토요일 (요한1서2,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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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1요한2,18ㄱ,ㄴ) '때'로 번역된 '호라'(hora)는 신약 성경에서 70회 사용되었는데, 요한 문헌에만 38회 나온다. '호라'는 어느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역사적 종말의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에서 '마지막 때'는 역사적 종말의 때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재림 사이의 모든 기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적'(적 그리스도)로 번역된 '안티크리스토스'는 '대항하는'(against) 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두어 '안티'(anti)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크리스도스' (christos)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자'라는 뜻이다. 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자신을 가장하여,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자들이다. 요한의 세 편지는 요한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통 신앙을 위협하는 '그리스도의 적들'에게서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데, 그 집필 의도가 있다고 본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두고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정한 가현(假現)주의자들(docetists)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가 공격하던(110년경) 이단론자들이다. 둘째로,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가 보통 인간 예수에게 세례 때에 내려왔다가 십자가 처형 직전에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체린투스(Cerinthus)를 생각할 수 있다. 체린투스는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가 요한 사도의 적대자로 지목한 인물이다. 세째로, 세상과 육체를 경멸했던 2세기의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 gnostici)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의 편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적들'은 이들의 보다 원초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요한계 공동체의 정통 신앙을 위협한다. 첫째, 그리스도론적 차원인데,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지 개입해 들어오는 것으로 충분하지, 굳이 인간의 살과 피를 취하여 강생한 다음,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예수님은 분명히 당신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쳐 우리 죄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없애 주셨으며(1요한1,7 : 2,2 : 4,10 : 5,6), 이를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아버지와 아드님을 동시에 부인하는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규정한다.(1요한2,22) 둘째, 윤리적 차원인데, '그리스도의 적들'은, 한 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을 알고, 그분과 직접 통교를 이룰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육신 안에서 저지른 죄는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고, 죄를 지은 상태에서 어둠 속을 거닌다. 저자는 이들을 두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들은 의롭게 행동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 특히 이웃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죄를 피한다고 가르친다.(1요한3,9-11.23 : 5,18 : 2요한5절) 셋째, 영적 체험적 차원인데, '그리스도의 적들'은 자신들이 성령에 인도를 받는 교사요,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치켜 세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1요한4,1)보라고 충고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세상에 속한 거짓 예언자들을 이끄는 '속이는 영'도 있고, 하느님께 속한 이들을 인도하는 '진리의 영'도 있으니, 이를 잘 구별해야 한다.(1요한4,4-6) |
월요일 (요한1서2,22-28)
1요한 2,12-14에는 세 가지 칭호가 두 번 나온다. '자녀 여러분'은 요한계 공동체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리킨다. '아버지 여러분'은 처음부터 계시는 한 분 하느님을 오래 전부터 알고 섬겨 온 구교우를 가리키고 '젊은이 여러분'은 악한자(사탄)와 싸워 이긴 새 신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과 세상의 가치, 즉 육체의 정욕(감각적인 욕망)과 안목의 쾌락(눈을 현혹시키는 쾌감), 이승의 자랑(사치와 허영, 교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권고한다.(2,15-17)
이제 악한 자의 하수인인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으니 그들에게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데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들어온 전통적 믿음을 충실하게 지키고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어야, 그 분이 재림하실 때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다.(2,18-27)
악한 자, 악한 자의 하수인인 그리스도의 적들, 그리고 세상과 세상의 가치들은 모두 어둠의 세력들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이런 어둠의 세력들과 단절하고 빛이신 아버지와 아드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
화요일 (1요한2,29-3,6)
요한1서 2,29-3,10에서는 진리의 실천, 곧 의로움의 실천을 기준으로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분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29)
인류의 첫 사람의 범죄 때문에 사탄에게 빼앗긴 우리 영혼을, 죄없으신 천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상 대속으로 다시 찾으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잃어버린 당신 자녀로서의 품위와 신분과 자격을 우리에게 도로 주셨다. 그만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안다면, 의로우신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의 의로운 계명(말씀)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닮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3,1-2ㄱ 참조)
장차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분께서 재림하시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그리스도화, 신화(神化)될 것이다.(3,2ㄴ-ㄷ) 그리고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해야 한다.(3,3)
그분을 뵙고, 알고, 일치하고 싶으면, 제일 먼저 전제되는 조건이 영혼의 순결함, 의로움, 흠 없음, 즉 죄가 없어야 한다. 그 분 안에는 죄가 없고,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3,6참조)
마태오 5,48 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내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레위11,44-45 :레위19,2 :레위20,26 :1베드1,15-16) 외적으로 자비로운 자 되는 것이다.(루가6,36) 여기서 <거룩함>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코데쉬'(kodesh)인데, 동사 '카다쉬'(kadash : 깨끗하게 하다. 순결하게 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축성(봉헌)이란 말이 유래되는 성별(聖別)이란 말도, 속된 것에서 끊임없이 분리하고, 구별하고, 벗겨내면, 그만큼 거룩해 진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 만큼 거룩하신 하느님께 가까워 진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거룩함은 의로움과 순결함(흠도 티도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우리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지극히 존엄하시고 거룩하신 성삼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성삼위 앞에 우리 심성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항상 그 영혼의 순백 위에,티 없고 흠 없는 삶의 제사를 봉헌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 할 수 있다
수요일 (1요한3,7-10)
요한 1서 2장 29절에서 3장 10절 까지는 진리의 실천, 곧 의로움의 실천을 기준으로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에게서 태어난 그분의 자녀이다. 그들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자, 곧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악마에게 속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요한 복음 8장 44절에도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당신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 복음 8장 45절에는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되어 있고, 요한 복음 8장 47절에는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 13장 1절에는 "~ 그 짐승은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이었으며, 열 개의 뿔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고, 머리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고, 요한 묵시록 13장 5절에는 "그 짐승에게는 또 큰소리를 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이 주어 졌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사탄'(satanas)이란 말은 '나의 적대자'(my adversary)라는 뜻이고, '베엘제불'이란 말은 더러운 '파리들의 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탄의 졸개들인 '악마'(마귀)는 희랍어로 '디아볼로스'(diabolos)란 단어를 쓴다. 'diabolos'는 'dia'와 'bolos'의 합성어이다. 'dia'는 '관통하다', '쪼개고 들어가다'는 뜻의 단어이다. 영어로 하면, '디아'(dia)는 'through'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볼로스'(bolos)는 '발레'(balle)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낚아채서, 반대편으로 던지다'(throw down)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마(마귀)는, 자신보다 못한 지성과 의지를 가진 인간이, 하느님의 천주성에 참여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이 배가 아파서, 인간의 약점을 공격하고 죄를 짓게 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쪼개고 파고 들어와서,인간을 낚아채서 하느님의 반대편으로 던져 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즉 악마(마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를 가리킨다.
오늘 독서 말씀대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10절ㄴ)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면서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 교만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한번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지 않으며, 한번도 '용서'와 '자비'로 표출되는 하느님의 '사랑'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오늘 복음(요한1,35-42)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일종의 메시아 호칭인데, '어리다'는 것은 '흠이 없다', '티가 없다', '깨끗하다', '순결하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임을 당하고, 살해되었으니' (요한 묵시록5,6. 9,12),'죽임을 당한(살해된) 어린양(고양)'으로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인류를 구원한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 속하고 그분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께 속해 있다면, 죄를 지을 수도 없고, 과거로 돌아가서 죄를 지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목요일 (1요한3,11-21)
요한 1서의 둘째 부분(3,11-5,12)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저자는 카인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을 저지른 카인과는 달리,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으니,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도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 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은 무엇인가? 속죄제, 번제등 희생물을 잡아서 규칙대로 드리는 제사는 모세 시대 이후에 율법을 통해 들어왔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는 모세 이전의 시대이다. 그때에는 제사에 대한 규례가 없었다. 다만 자연 계시와 아담과 하와를 통한 감사의 제사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사는 수확의 한 절기, 혹은 목축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드려야 하고, 반드시 감사의 제사여야 옳다. 창세기 4장 4절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곡물이든, 동물의 희생물이든, 제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 뜨렸다."(창세4,4)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카인과 아벨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이 드린 양 떼 가운데 '맏배들'이 무엇인가? '첫 새끼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맏배(첫 새끼)'는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즉 '맏배(첫 새끼)'는 만물이 하느님의 것임을 압축해서 나타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맏배를 드렸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한 아벨의 고백과 행위, 그리고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척도이다. 아벨은 양이 새끼를 낳을 때마다 생명의 탄생을 무한히 경이로워하고 감사하면서, 생명의 주권(절대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려고 미리 구별(성별)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이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표본은 맏배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굳기름'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최상품,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벨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과 믿음의 고백을,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장 중심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증거이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에 데리고 가서 살인을 한다(창세4.8).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여 형제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그전에 먼저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있다.
믿음과 정성에 있어서, 하느님 마음에 들었던 아벨의 '양떼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받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 진리와 절대선에서 나오는 무한히 완전한 자유요, 그르침이 없는 자유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이러한 자유와 선택에 간섭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카인의 죄이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수직적으로 깨어진 사람은 수평적으로 부모와 형제, 형제와 형제,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진다는 진리를 창세기에서 야휘스트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으로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으면, 먼저 수직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약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요한 1서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결국 카인과 예수님이 비교될 수 있는 차원도 아니지만, 카인에 의해 죽은 아벨의 모습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성부)께 충성과 순명을 하시면서 인류(우리 죄인들)를 위해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이 미리 예표되고 암시됨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요 목적이신 하느님, 우리 영혼, 육신 생명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피로써 구속한 인간들을(한 부모 아래 같은 형제, 자매요 같은 자녀들)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14)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5)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6)
"누군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8)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수직적인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수평적인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17-18)
금요일 (1요한 5,5-13)
요한 1서의 둘째 부분(3,11-5,12)의 마무리는 믿음과 사랑과 계명의 연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녀들도 사랑한다(5,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자녀인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5,2-3).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낸다(5,4-5).
"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5,5)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인은 성령과 물과 피, 이렇게 셋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실 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실 때 가장 잘 드러났다.
그런데 세 증인은 다 같이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5,11-12)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17,3)라는 말씀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요한1서 5장 13절에는, 저자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안다"고 하는 희랍어 단어 '기노스코'(ginosco)는 단순한 지성의 인식 행위만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을 포함하는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는 말이며, 성삼위가 우리안에 내주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종합하면, 참 인간이시요,참하느님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예수 그리스도)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피(고난)의 잔에도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토요일 (1요한 5,14-21)
요한 1서의 맺음말(5,13-27)도 요한 복음처럼 이 글을 쓰는 목적을 다시 밝힌다.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집필 목적이었는데(요한20,31), 여기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집필 목적이라고 말한다(1요한 5,13).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요한 1,1) 이렇게 머리말이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된 요한 1서의 가르침이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1요한5,20)라는 신앙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죽을죄"(1요한 5,16)에 관한 언급이다. "누구든지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죽을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가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살인, 간음, 배교"를 죽을죄(대죄大罪 : 중죄重罪 :사죄死罪)라고 했다. 신약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교회는 하느님의 천주성(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혜인 "생명의 은총"(성화은총:초성은혜:상존성총)을 잃어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죽을죄"(대죄)와 "죽을죄가 아닌 죄"(소죄)로 구분된다.
윤리신학에서나 교리에서는 "대죄"와 "소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 인간은 생각과 말과 행위로 대죄를 짓는다. 대죄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계명과 지성의 인식 행위와 자유 의지의 동의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줄 분명히 지성으로 알면서도 자유의지로 좋아서 동의할 때, 대죄가 성립되고, "생명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은총"은 세례성사때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의 공로로 주어진 것인데, 대죄를 지음으로 잃게 된다. 그러나 고백성사를 통하여 다시 되찾아지고, 성체성사를 통해 "생명의 은총"은 계속 성장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화 혹은 하느님화(神化)되는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서는 하느님의 생명(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간구(청)하라고 가르친다(1요한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