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독서묵상)

2015. 10. 21. 오전 10: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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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독서묵상)

60년만에 핀다는 인내의 꽃, 대나무 꽃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야고 1,1-11)


4세기초 에우세비우스는 바오로 서간에 이어지는 서간 일곱개, 곧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1,2,3서, 그리고 유다서가톨릭 서간이라 불렀다. 여기서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서간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가 아니라 보편 교회에 보내졌다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야고보서는 전형적인 권고서한에 속한다. 명령형 동사가 자주 쓰인다는 단순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서간은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이신득의 ; 以信得義)와 달리 행동(실천)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에, M. Luther는 이 서간을 다른 신약성경 책들과 비교하면서 "복음적 특성을 전혀 간직하지 못한 지푸라기 같은 서간" 이라고 깎아 내렸고,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개신교 전통에서는 그리스도론과 구원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질 낮은 경전으로 평가하였다. 

19세기의 역사 비평가들 이 서간을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던 두 경향, 바오로적인 경향과 유다교적인 경향 사이의 절충을 시도한 문헌으로 보았다. 

가톨릭에서는 주로 병자성사의 근거를 제시하고(5,14-15),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2,14-26) 이 서간을 이용하였다. 한편, 개신교에서는 야고보서의 집필 목적을 연구하면서,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야고보서가 집필되던 당시 교회 상황이, 사도 바오로의 믿음을 통해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이 교회내에 편만한 상태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성도들이 그 '믿음으로서 의로움(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복음을 관념론으로 변질시켜, 믿음을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신앙 행위와 분리시켜 버렸다고 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고보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연스런 표출이다. 사람이 운동을 많이 하면 땀을 흘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앙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본다. 

특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동'(행함, 실천)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 '에르곤'(ergon)바오로 서간중 테살로니카 전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행위' 표현할 때도 쓰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거기에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당연히 그 믿음으로부터 '에르곤'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따라서 '이신득의'를 말하는 바오로의 사상과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칭의' ; 야고 2,24)을 말하는 야고보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현대 개신교에서는 사도 바오로와 야고보의 사상이 그 뿌리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어쨌든, 야고보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특성과  내용을 지닌 만큼 독립적으로 다루는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야고보서의 내용은 결코 가볍거나 진부하지 않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서만큼 사회의식 뚜렷한 경전도 없을 것이다. 이 서간이 초대교회에서 정경으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것도 사도적 기원의 취약성 때문이지, 결코 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1,1)

여기서 야고보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인 제배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 <장(長)야고보 ; 마르1,19>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다른 제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차(次)야고보 ; 마르3,13>인가? 그도 아니면, 나중에 교회 전승에서 밝힌 주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원로단의 대표가 된 야고보(사도12,17 ; 15,13 ; 1코린15,7 ; 갈라1,19 ; 2,9.12)인가? 

야고보서가 저자로 내세운 이 이물은 마지막 야고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우선 요한의 형 야고보는 A.D.40년대 초에 순교하였고(사도12,1-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셋째 야고보는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다.(마르6,3 ; 마태13,55) 

고대의 테르풀리아누스는 신약 성경의 기록만 가지고 예수님의 형제들을 마리아와 요셉이 첫 아들 예수님 다음에 낳은 아들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성모님과 성요셉의 (평생)동정을 부정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야고보를 주님의 사촌으로 여겼던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 따라 그들을 예수님의 사촌 육촌 팔촌등 가까운 친척으로 본다.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들은 열두 사도단과 구별되었다.(사도1,13-14 ; 1코린15,5.7)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열두 사도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로 통한다.(1코린15,7 ; 갈라1,19)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동반하지 않고, 다른 친척들과 함께 나자렛에서 머물러 있었다.(마르3,21.31-32 ; 6,1-4) 

그러나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만큼 그분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였고(1코린15,7), 그 뒤 예루살렘 모교회가 창립될 때 원로단의 대표가 되었다.(갈라2,9 ; 사도12,17 ; 15,13-22 ; 21,18) 

야고보는 60년대 초에 순교하였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 총독이 없는 틈을 타, 대사제 아나누스 2세가 산헤드린을 소집하고, "메시아라고 불린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율법 위반자로 몰아붙여 돌로 쳐 죽였다.(유다 고대사 20,9.1)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야고보서의 저자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야고보서는 저자가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 서간이다. 그리고 이 서간에 인용된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이다. 아마도 저자는 야고보의 제자이거나 추종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후대에 알리고자 했던 인물일 것이다. 

그 다음 이 서간의 인사말에서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는 누구를 말하는가? 본문에서 '흩어져'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을 통해 널리', '쪼개고 들어가는','관통하는' 이라는 의미의 전치사 '디아'(dia)와 '흩뿌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페리오'(sperio)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분산', '흩어진 자'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신약성경에서는 세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요한7,35 ; 1베드1,1)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된 뒤, 팔레스티나 지역 밖에서 신앙을 지키며 흩어져 살아왔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본문에서 팔레스티나 밖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라는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 당시에 신앙의 박해로 인해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교인들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사실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밖으로 흩어졌으며(사도8,1), 이는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고보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본 서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2-4)

'시련'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모이스'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heirasmos)는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중 '시험'이란 표현은 '시련'과 '유혹' 모두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유혹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켜야만 하기에 따르는 시련이라는 의미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내적인 욕심으로 인한 시험이라기 보다는, 외적 고난으로서의 시험이란 의미가 더 강한 것이다. 

여기서 '갖가지 시련'에서 '갖가지'라는 표현은 종류가 다양하다의 의미의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삶의 모든 영역 어디에서건 뜻하지 않은 갖가지 종류의 위협적인 시험에 직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사도20,19 ; 2코린11,23-28)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2) '빠지게 되면'으로 번역된 '페리페세테'(pheripesete)는 '~주위에'란 뜻의 전치사 '페리'(pheri)와 '빠지다'(마태15,14), '넘어지다'(마태17,15)란 의미의 동사 '핍토'(phipto)의 합성어로서, '~에 에워 싸이도록 빠지다', '~에 빠져 에워 싸이다' 란 뜻을 가진 '페리핍토'(pheripipto)의 가정법 동사이다. 

이 동사는 성도들이 시련들을 일부러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시련들이 느닷없이 예기치 않게 닥쳐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특히 가정법 동사 '페리페세테'는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불변사 '호탄'(hotan ; '~할 그때에는')과 함께 쓰였다. 여기서 '호탄'은 여러 번의 반복적 동작이 일어나는 때를 묘사하므로, 시련의 닥침이 일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자꾸 반복적으로 닥쳐왔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1장 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당할 때, 왜 그것을 전적으로 기쁘게 생각해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3) 먼저 여기서 '시험'으로 번역된 '도키미온'(dokimion)마치 금, 은을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녹여, 그 진위를 시험하듯이, 믿음의 진위를 입증하거나 시험하는 단련(연단)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본문과 베드로 전서 1장 7절에만 나타난다. 

즉 본문에서 이 단어는 시험 곧 단련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진위를 테스트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 있어서, 이것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번 되풀이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닥치는 믿음에서의 시련은, 그것을 겪는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여기서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넨'(hypomonen)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는 '~아래에'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다'(마태10,11)란 뜻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어떤 상황아래 흔들림없이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서 '확고부동', '복면', '항구성'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휘포모네'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을 충실하게 지켜나간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확고부동함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성취되는 것이다. '생겨난다', '만들어 낸다'는 뜻의 '카테르가제타이'(katergazetai)가 '카테르가조마이'(katergazomai)동사의 현재형이란 사실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희랍어 동사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여러가지 시련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시험이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자세를 온전히 구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시험을 당하는 그 당시는 비록 그것이 힘겨울지라도, 결국 믿음으로 잘 인내할 그리스도인들에게,그것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난의 시험없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영적 기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8) 간구하는 자의 마음 상태가 간구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의심하지 않는 것'(6)이다. 의심없는 태도만이 하느님께 간구하는 바를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이것이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믿음일 것이다. 

'의심하다'라는 '디아크리노'(diakrino)동사는 '자기 자신과 모순되다', '주저하다', '망설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6절에서 두번씩이나 연속 사용함으로써, 의심이란 주제를 강조했다. 특히 '의심하는 자'의 모습을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비유를 통해 시각화시켰으며,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조시키고 있다.

의심의 위험성과 더불어 의심의 성격이 액체와 같이 불안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잔잔하다가도, 이내 요동치며 험상궂게 변모해 버리는 바다의 물결은 참으로 그 잔잔함을 믿을 수 없는 불안정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 물결의 비유는, 의심의 규모가 바다처럼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단 하나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의심이 지니는 여러가지  부정적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6절의 이러한 '의심하는 자'가 바로 8절의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두 마음을 품은'으로 번역된 '딥쉬코스'(dipsichos)는 '두 번'이란 뜻의 '디스'(dis)와 '마음', '영혼'이란 뜻의 '프쉬케'(psche)로 이루어진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두번의 마음' 이나 '망설이는', '동요하는', '의심하는' 또는 '시련의 때에 특히 더 필요한 믿음의 일관성과 결의가 부족한'이란 뜻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언제든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마음으로, 일관성있는 태도를 기대하기 힘들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데, 그 두번 다 본서에서만 나타나고 있다.(야고4,8)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9-10)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당당하고, 부한 자는 겸손해야 한다는 권면의 내용이다. 9-11절은 앞의 단락과 내용상 연결되는 것으로서, 시련의 때에 가난한 자는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높여 주신다는 믿음으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부자는 그의 부요함이 영원 무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말한다. 

믿음의 시련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자신이 가난하고 상황이 부정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기가 꺾이거나 주눅이 들어서는 안된다. 현실의 환경과 세상적 평가에 의하면, 이들은 한없이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영광스럽고 존귀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화요일  (야고 1,12-18)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2) 

시험 중에 있는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하여 권면하는 2-12절의 결론적 진술로서, 시험을 통해 옳다고,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은 자는 생명의 화관(면류관)이 상급으로 주어질 것임을 밝힌다. 

'시련'(trial)이라고 번역된 '페이라스몬'(pheirasmon)의 원형 '페이라스모스'(pheirasmos)는 2절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견디어 내는'(참는)에 해당하는 '휘포메네이'(hypomenei)는 '~아래에서'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hypo)와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의 동사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아래에 머물러 있다' 라는 의미이다. 

영어로 하면, 'Blessed is a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이다. 시련 아래에서 시련의 무게를 떠 맡으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지만, 바로 그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 시련 가운데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자기 자신을 저주하거나 환경에 대해 불평을 토로하면서 마음이 황폐해져 신앙을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시련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자세로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간다. 이것은 구약의 욥이나 요셉이나 다니엘이 보여준 모습이다. 

한편 '행복합니다'(복이 있도다)로 번역된 '마카리오스'(makarios)마태오 복음 5장의 진복팔단에 나오는 '행복하여라'에 해당하는 '마카리오이'(makarioi)의 단수형으로서 문장 서두에 배치되어 강조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팔복(八福)의 경우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행복하다는 것은 생명의 화관을 받는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면서 11절의 '없어져 버리다'(시들어 버리다)라는 표현과 반대의 개념을 가진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행복(복)의 개념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가르치는 행복의 개념과  동일한 것이다. 세속적 의미의 복이 아닌 영적 의미의 복, 또는 종말론적인 측면의 천상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이것에 옳다고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에서 '도키모스'(dokimos)는

용광로에 들어가는 제련의 과정을 통해서 금,은과 같은 금속의 진위가 가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 역시 성도의 믿음이 옳은 것인지를 입증해 보이는 과정임을 말하는 것이다. 

욥처럼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께 인정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생명의 화관(면류관)이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논'(stephanon)의 원형 '스테파노스'(stephanos)는 본래 왕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경주에서 승리한 자가 머리에 쓰는 월계관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늘의 복락을 의미한다.(2티모4,8 ; 1베드5,4 ; 묵시2,10)

즉 로마 제국 당시 월계수 모양의 황금 면류관을 쓴 왕이나 푸른 월계수 관을 쓴 경주의 승리자들은 모두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것처럼, 하느님께 인정받은 성도들은 하늘에서 그와 같은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생명'은 유한한 목숨이 아닌 영원히 지속될 천국의 복락과 영원한 생명 가리킨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3-15) 

야고보는 1장 2-12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 13-18절에서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면의 욕심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사와 선물에 대하여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온갖 좋은 선물들만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2절과 12절에서는 '시험'이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13절에서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페이라스모스'(pheirasmos)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페이라조'(pheirazo)는 인간의 욕심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 (창세22,1 ; 탈출15,25 ; 신명8,2 ; 13,3 ;33,8 ; 2사무24,1 ; 시편26,2)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테스트하는 성격의 시험일 뿐,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마태4,1-11),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의 성향을 가진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서 발생한 죄의 유혹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창세3,12-13 ; 잠언19,3)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죄의 유혹들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3)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 누구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가 쓰였다는 것은 이 사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마치 죄를 부추겨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탈출4,21 ; 7,3 ; 10,1.20 ; 2사무24,1 ; 1열왕22,19-23) 여기에 대해 우리는 로마서 1장 28절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오히려 온 천하에 주 하느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셨다.(탈출10,1.2) 또한 하느님께서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교만에 빠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부추기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1역대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이미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합 왕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마음을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꾀어 죽게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열왕22,19-23) 이러한 세 가지 사례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14) '사람은 저마다'라고 번역된 '헤카스토스'(hekastos)는 '각 사람'이라 말할 수 있고, 인간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시험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스'(ephithimias)의 원형 '에피튀미아'(ephithimia)는 '~을 향하여'란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hi)와 그 자체로 이미 '열망' 혹은 '뜨거운 감정'이란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고, 죄악된 자아만을 충족하기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욕망에'에서 '~에' 번역된 전치사 '휘포'(hypo)는 '~아래에'라는 문자적 의미와 더불어 '~의 영향력 하에서' 라는 비유적 의미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욕심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로잡혀'(끌려)로 번역된 '엑셀코메노스'(ekselkomenos)는 사냥감이 덤불에서 끌려 나오듯이 사람이 자기의 욕심에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 수동태로서 그 무력한 태도가 강조된다.

'꼬임에 넘어가는'으로 번역된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는 낚시나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유혹에 걸리도록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 역시 수동태로서,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꼬임에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사냥이나 낚시에서 사용되는 두 단어의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유혹을 받는 그 원인이 다른 제3자나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를 짓고 싶어하는 각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있다. 이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의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므로, 죄에 빠진 그 원인을 하느님께 결코 돌릴 수 없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5) 이 구절은 욕망(욕심)이 갖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악의 진행과정을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잉태와 출산, 성장과 죽음의 모습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쉴라부사'(sillabusa)의 원형 '쉴람바노'(sillambano)동사는 마치 여자가 은밀하게 아이를 가지듯이, 마음에 욕심의 씨가 뿌려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욕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 '욕심'에 눈이 멀어 유혹된 인간의 내면에서 '욕심'은 그를 사로잡아 '죄'(하마르티아 ; hamartia)를 낳는다.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그 '죄'를 낳는 것이다. (잠언7,15-23) 

여기서 죄는 태아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죄는 갓난 아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죄를 방치하면 성장한다. 여기서 '다 자라면'(성장한 후)로 번역된 '아포텔레스데이사'(aphotelestheisa)의 원형 '아포텔레오'(aphoteleo)는 '완성하다', '다끝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성취될 때'(when is accomplished), 또는 '완전히 자랄 때'(when is full-grown)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자란 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죽음'이다.(로마5,12 ; 6,20-21 ; 7,11) 여기서 '죽음'(다나토스 ; thanatos)은 바로 영적인 죽음, 즉 최후 심판때의 두 번째 죽음(묵시20,14)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최종 결과인 '죽음'은 12절의 '생명의 화관'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전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7-18) 이제 야고보는 17-18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란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심을 밝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선물'로 번역된 '도시스'(dosis)와 '은사'로 번역된 '도레마'(dorema)는 동의어이다. '도시스'는 주로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도레마'는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일 뿐, 둘 다 영역으로는 'gift'이다. 

'위에서'라는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어지는 '빛의 아버지에게서'동일한 의미이다. '빛의 아버지'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이다. 좋고 완전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내려옴을 강조한다.  

'뜻을 정하시고' 번역된 '블레테이스'(buletheis)의 원형 '블로마이'(bulomai)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나오는 사악한 욕망(욕심)의 반대 개념을 지니기도 한 동사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이는 외부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써,인생에 대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낳으시어'로 번역된 '아페퀴에센'(aphekiesen)의 원형'아포퀴에오'(aphokieo)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 동사가 부정 과거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거듭남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첫 열매', 즉 '아파르케'(apharche)는 원래 구약의 전문적인 제사 용어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과 동식물의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침으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말론적 새 창조(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첫 열매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이다.(1베드1,23 ; 2코린6,7 ; 에페1,18 ;콜로1,5 ; 2티모2,15 ; 로마10,13-17)

 

제6주간 수요일 (야고 1,19-2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19-21) 

1장 2-18절에서는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였다. 이어지는 1장 19절-2장 26절은 야고보 서간의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는 믿음, 곧 '행위와 믿음'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가운데 첫 단락이 1장 19절-27절인데,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로지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신심(경건)에 대해 설파한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19) 구약 성경은 물론 유대교 문헌에서 이런 의미의 격언은 너무나 풍부하다. (잠언10,9 ; 13,3 ; 15,1 ;29,2 0 ; 코헬7,9 ; 집회4,29 ; 1꿈란문헌5,25등) 일찍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흔히 어떤 한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 졌고, 이 모임에서는 말씀이 선포되며 성경의 진리에 관한 토론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거나 토론하는 자세에 대해 바른 지침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기울여 경청한 다음, 충분히 생각한 후에, 서서히 자기 의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 (잠언18,2) 그리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분노'라고 번역된 '오르겐'(orgen)의 원형 '오르게'(orge)는  ① 타고난 '성질', 기질', '성격'이란 뜻  ② 마음의 움직임 또는 동요에 대한 '충동', '욕구'라는 뜻  ③ 온갖 격렬한 감정을 의미하는 '분노', '화', 진노'란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세번째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화를 안낼 수는 없겠지만(에페4,26),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수만 있다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 (잠언16,32) 이 외에도 잠언 19장 11절, 12장 16절, 15장 1절, 25장 11절, 15절 등에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식견이요, 대화시 합당한 말과 유순한 대답과 부드러운 혀를 통해 상대방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고 말한다.

19,11 ; "사람을 관대하는 만드는 것은 사람의 식견이고,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12,16 ; "미련한 자는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만 영리한 자는 모욕을 덮어 둔다." 15, 1  ;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괘한 말은 화를 돋운다" 25,11 ;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 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 25,15 ; "끈기는 판관을 설득하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 

야고보서는 이같은 믿음에 대한 실천적 권면을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의 잠언'이라 불리워진다. 그 다음, 야고보는 사람이 분노하는 것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대조시키면서 왜 사람이 화내기를 더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분노의 감정 표출을 더디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로움'(디카이오시네 테우 ; dikaiosinen theu)이 무엇인가? ① 하느님의 속성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기본 원리인 공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 시편 89,15) ②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③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 하느님의 기준인 이웃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분노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한다.  

분노하면, 마음의 판단력이 흔들리고 평정심이 무너져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마음의 황폐함이 사탄이 일하는 터를 만들어 줄 뿐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분노는, 옛 사람의 그릇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로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야고보의 이같은 명령의 직접적인 배경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고 저주하는 것을 금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마태5,22)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로 변역된 접속사 '디오'(dio)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의 분노하는 것과 본절에 나오는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더러움'으로 번역된 '파산 뤼파리안'(phasan rypharian)에서 '뤼파리안'의 원형 '뤼파리아'(rypharia)는 '불결', '더러움'이란 뜻으로, 때로 상처의 불결함이나 몸이 땀으로 얼룩지고 오물로 더러워진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문에서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은유적으로 도덕적 더러움을 의미하면서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입으로 나가는 악한 말을 가리키고 있다.(에페4,31) 

또한 '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 ; pheriseian kakias)은 마음속에 있는 악이 솟구쳐 올라 밖으로 표출되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안에서 악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기만 하고, 새로운 것으로 덧입지 않는다면, 그에게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마음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다'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손함'(온유함)에 해당하는 '프라우테티'(phrauteti)의 어근은 본래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 고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가 약으로 인해 진정된 상태, 갈증이 냉수로 인해 해갈된 상태등을 말한다.(마태5,5) 

그런데 공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즉 '마음에 심어진 말씀' 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로곤'은 '로고스'(logos ; 말씀; word)의 목적격이며, '마음에 심어진'으로 번역된 '엠퓌톤'(emphiton)의 원형 '엠퓌토스'(emphitos)는 '가르침을 통해 심기워진'이란 뜻으로, 이미 사도들을 통하여 수신자들에게 심기워진 가르침(18절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심겨진 말씀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복음은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로마1,16)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복음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원리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 속의 윤리적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2-25) 

야고보는 19-21절에서 말씀을 신중히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들은 바를 실행하는 자세의 중요성 대해 언급한다. 

아마도 야고보는 마태오 복음 7장 15-27절의  산상설교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원리는 로마서 2장 13절의 바오로에게도 나타난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행함으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더러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속이는 자(사람)'으로 번역된 '파랄로기조메노이'(pharalogizomenoi)의 원형 '파랄로기조마이'(pharalogizomai)는 '위반', '정도(正道)이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파라'(phara)와 '계산하다'란 뜻의 '로기조마이'(logizomai)가 결합된 동사로 '잘못 세다','잘못된 추론에 의해 기만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들 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듣고도 행하지 않음으로,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데도, 본인은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결국 영혼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야고2,14-26)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분명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주의 깊게 보기는 하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내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 버린다.

더군다나 당시 거울은 동(bronze)으로 만들어져서, 거기에 비추어지는 물체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깊게 보지만 정확한 모습을 보기 힘들고, 또 보고서 돌아서면 거울로 본 기억마저 희미해졌던 것이다. 이는 마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발견했으나,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이 무효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 18절의 '진리의 말씀'과 21절의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새겨진 말씀)과 일치한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곧 진리의 말씀인 복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의 거울은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다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나, 이어지는 27절과 2장 1-13절의 진술로 보아,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의'(자유하게 하는)로 번역된 '엘류테리아'(eluthdria)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통해 주실 자유(갈라5,1),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 임하는 자유(2코린3,17)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원죄 아래 있는 사람을 명백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유를 구가하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26-27) 

여기서 '신심이 깊은', '신심'에 해당하는 형용사 '트레스코스'(threskos)와 명사 '트레스케이아'(threskeia)는 '떨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트레오'(treo)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떠는', '신들에 대한 경외', '종교적인'이라는 의미이다.(사도26,5 ; 콜로2,18) 

그러나 여기서 앞서 나오는 '트레스코스'는 '종교적인', '신앙심 깊은', '경건한'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뒤에 나오는 '트레스케이아'는 1세기 당시 기도나 금식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종교적 행위들로 자신이 신심이 깊고 경건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한다 해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신심깊고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종교적 행위는 헛된 것일수 밖에 없다.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에서 '카타라 카이 아미안토스'(kathara kai amiantos ;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는 본래 구약의 제의적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에제22,26),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제물, 또는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사제가 지녀야 할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경건)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경건이며, 이 경건의 모습은 먼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것으로 증거된다. 

당시 종교, 시회적 배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부양해줄 사람이 없을 뿐더러, 그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해 줄 자를 갖지 못한 가장 비참한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사랑의 실천 대상이 고아와 과부의  두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등 훨씬 포괄적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세상'(세속)에 해당하는 '코스무'(kosmu)하느님을 거스르고 죄악된 옛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속 사상, 가치관, 비도덕적 삶, 불경건한 심령 등을 두루 지칭한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거룩'이며 '경건'이다. 

또한 '물들지 않도록'으로 번역된 '아스필론'의 원형 '아스필로스'(asphil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점'(2베드2,13), '티'(에페5,27)로 번역된 '스필로스'(sphilos)의 합성어로서, 원래 '흠없는', '점없는', '비난할 점이 없는' 이란 뜻으로 제의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1베드1,19) 그러나 본절에서는 '영적,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故복녀 마더 데레사와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야고 2,1-9)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1-4) 

2-13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사람을 외적 조건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되며, 진심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메 엔 프로소폴렘프시아이스 ; me en phrosophlempsiais)에서 '차별하다'의 의미로 번역된 '프로소폴렘시아이스'는 '얼굴'(마태6,16), 혹은 '외모'(마태22,16), '용모'(루카9,29)란 뜻의 '프로소폰'(phrosophon)과 '취하다'(마태15,26)라는 뜻의 동사 '람바노'(lambano)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의 외적인 모습을 보고 그것만을 중시하여 판단하는 것 의미한다.  즉 사람의 본질적인 면을 중시하기보다는 그의 신분이나 직업, 성별, 경제적 능력 등 여러 외적 조건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창세1,26-28)로서, 존재 자체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절대 존엄성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나 사회적 신분, 혹은 지위만을 기준으로 삼아 차별하는 편파적인 태도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야고보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배에 참석하러 회당에 오거나 법적 소송을 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부자들만 편파적인 특별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성도들간의 그러한 태도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부합될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의 구절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바로 그들이 영광스러운 우리 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 사업을 이루셨다. 즉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은 유대인이나 부자나 고위 관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나 가난한 자들이나 소외된 계층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 자가 사람을 차별해서 되겠는가? 외적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 동격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는 영광을 누리고 계시지만, 지상에 계실 때는 자신을 낮추어 인간으로서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가치관과 결코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2) 여기서 '모임'으로 번역된 '쉬나고겐'(synagogen)의 원형 '쉬나고게'(synagoge)'함께', '더불어',란 의미의 전치사 '쉰'(syn)과 '데려오다'(사도25,6), '인도하다'(요한10,16)란 의미의 동사 '아고'(ag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함께 모이는 집회소' 의미를 가지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회중이 모여서 율법을 읽고 예배드리는 처소인 회당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 이 회당은 유대인들의 거주지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점차 확산되어 A.D.1C 당시는 유대인 거주지마다 회당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 그리스도교의 선교와 예배는 이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후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의 회당 출입을 금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선교와 예배는 회당에서 벗어나 각 개인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교회'(에클레시아 ; ekklesia)의 기원 되었다. 

본절에서, 야고보는 초대교회 모임 안에 두 사람이 들어온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두 사람은 너무나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권세있는 관리나 유력한 부자가 금가락지를 손에 끼고 화려한 옷을 입고 모임에 들어와 자신들 지위를 과시함으로, 자신의 그러한 면에 사람들이 압도당하기를 바라는 허세를 부린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더럽고 낡고 남루한(누추한) 옷을 입었다. 

그런데 3절에서 야고보는 회당에 들어온 두 사람이 신자인지 아니지를 언급하지 않고, 모임에 모여있는 성도들이 들어온 자들에게 보인 반응의 차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에서 '여러분이~ 쳐다보고서는' 해당하는 '에피블렙세테'(ephiblepsete)의 원형은 '에피블레포'(ephiblepho)이다.

이것은 '향하여'란 뜻의 전치사 '에피'(ephi)와 '보다'란 뜻의 동사 '블레포'(blepho)가 합하여져 '유심히 보다', '주목해서 보다', '관찰하다'란 뜻이다. 그러니까 이 동사의 사용은 오로지 금가락지를 손에 끼고 호화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에게만 주목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 23,6에 나타난 당시 유대인의 관습상, 잔치상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는 랍비들이 차지하였는데, 이러한 관습이 초대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회중들이 부자들에게는 이런 류의 높은 자리를 권하고, 반면에 가난한 자에게는 자리는커녕 홀대를 서슴치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3) 지시 부사 '저기'(에케이 ; ekei)는 회당에 모인 자들이, 가난한 자가 자신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있기를 원하는 표현이다. 또한 '발판'(발등상 ; 휘포포디온 ; hypophdion)은 '~아래' 란 뜻의 전치사 '휘포'(hypo)와 '발'(마태4,6)이란 뜻의 명사 '푸스'(phus)의 합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발 아래 까는 '발판'(footstool)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아래 앉으라는 것은, 자신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발판에 발을 대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발판에 앉는다는 것은 굴욕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대하는 이러한 대조적 행동을 지적함으로써,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태도가 1절의 언급처럼 사람의 차별대우임을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비단 이런 태도는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돈과 학벌과 권력이 있는 자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 주지만, 반대로 가진것이 없어 가난하고 무식하고 헐벗은 사람, 혹은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어 부자유한 자들에게는 무관심인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4) 여기서 '차별하는 것'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 의미상 일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생각을 가진'(디알로기스몬 ; dialogismon)의 원형 '디알로기스모스'(dialogismos)는 '~을 가지고'란 뜻의 전치사 '디아'(dia)와 그 자체로 이미 '계산하다',  '심사숙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로기조마이'(logizoma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같이 숙고하고 추론하여 얻은 생각' 의미한다. 

즉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이해 득실을 꼼꼼히 따져보고, 부자와 빈자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 지를 판단해서, 다르게 대우한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사악한 행위임에 분명하다.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모든 사람의 영혼은 소중하고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동일하게 좋은 대우를 해주는 것이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행할 태도이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고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5-7) 

5-7절에서는 성도들이 가난한 자를 차별하고 멸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로서, 하느님 편에서의 가난한 자에 대한 옹호 및 부자에 대한 경계를 권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5) 

'세상의'(토 코스모 ; to kosmo)로 번역된 뜻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in the eyes of the world)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가난한 자들은 틀림없이 초라하고 힘없는 자들이며, 세상은 그들에게 조그마한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선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믿음 안에서 부요해지기 위해서는 심령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마태5,3) 이런 측면에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깨닫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 쉬우며, 또한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는데 보다 좋은 여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강조하며, 야고보는 '가난한 자'를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자,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물질이나 사회적 지위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으로 하느님께 구원을 받는다.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억누르는 사람들이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6-7) 교회 성도들이 가난한 자에게 치욕적으로 대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이 떠받드는 부자들은 실상 그리스도인들을 압제하는 이들이다. 부자들은 빈번하게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압박했다. 

또한 야고보는 채권이나 채무관계에 얽힌 그리스도인들을 부자들이 잔혹하게 법정으로까지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있다.(예레7,6 ; 아모4,1 ; 8,4) 여기서 '끌고가는'에 해당하는 '헬쿠신'(helkisin)의 원형 '헬퀴오'(helkio)칼을 빼는 것과 같이 '날카롭게 잡아끌다'라는 의미가 있다.

부자들은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법적인 힘을 빌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며 법정으로 끌어내었던 것이다. (5,1-3)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부자들을 예수님의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본단락에 나오는 부자는 불신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보아 그리스도교에 대한 약간의 관심을 가지나,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는 자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 (8-9) 

여기서 '지고한 법'에서 '지고한'(바실리콘 ; basilikon)의 원형 '바실리코스'(basilikos)'왕의', '왕에게 속한'(사도12,20), '고상한', '숭고한'이란 뜻으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고 한 율법(노모스 ; nomos)이 왕이신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법이며, 그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법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신적 명령임을 야고보는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최고의 법은 레위기 19장 18절 지칭한다. 

그리고 '범법자' 해당하는 '파라바타이'(pharabatai)의 원형 '파라바테스'(pharabates)'~에 대항하여', '~에 거슬러'란 의미의 전치사 '파라'(phara)와 '발걸음'이란 뜻의 명사 '바시스'(basis)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정해진 길이 아니라 곁길로 가는 자'란 의미를 지닌다. 

율법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소홀히 하는 자에 대하여, 율법이 정한 길을 걷지 아니하는 자로, 유죄 선언을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범죄 행위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는 재판할 때 가난한 이의 권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라는 탈출기 23장 6절의 말씀과, 잠언 14장 21절의 말씀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짓는 사람이고" 라는 구절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의 행동이 율법에 비추어 범죄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제6주간 금요일 (야고2,14-24.26)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1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는 1,1-13절 단락에 이어지는 14-26절 단락에서 믿음은 반드시 실천(행함,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실천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적 실천 의무 모든 성경가운데 가장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본 서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오늘 독서이다. 믿음을 통한 의로움(구원)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강조하는 바오로의 주장(로마3,21.22 ; 갈라2,16)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동'(행위, 행함, 실천)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란 용어를 바오로와 야고보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오로와 야고보가 사용하는 '에르가'의 의미를 규명한다면, 이러한 오해가 풀리며, 결코 두 사람의 메시지가 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바오로는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행위는 할례의 준수와 같은 '율법적 행위'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이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를 제쳐놓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도 하느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지 못한 자로서,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에게 있어서의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행위(실천)를 의미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은혜로 믿었다면, 믿고 난 후에는 당연히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등은 참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나 야고보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다만 야고보가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실천(행위)으로써 증명된다는 사실을 보다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강조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에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16) 

15-16절은 야고보가 이 서간을 쓰던 당시 초대교회내의 실제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형제' 해당하는 '아델포스'(adelphos)'자매'에 해당하는 '아델페'(adelphe)란 표현은 그리스도로 맺어진 공동체, 즉 교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여자 교인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이다.(1코린12,12-27) 그리고 '헐벗고'로 번역된 '귐노이 휘파르코신'(gymnoi  hyparchosin)문자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be naked)이지만, 사실은 거의 옷을 입지 못한,  또는 남루하여 적절한 의복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먹을 양식'으로 번역된 '에페메루 트로페스'(ephemeru trophes)는  '매일의 양식' 의미한다. 또한 '없는데'로 번역된 '레이포메노이'(leiphomenoi)의 원형 '레이포'(leipho)는 '결핍하다', '없다'란 뜻으로, 음식의 결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속한 교회내의 지체들 가운데는, 충분한 의복 뿐만 아니라 음식 또한 먹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교회안에서도 인간으로서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갖추지 못한 채,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비극적 상황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이제, 야고보는 15절에서 제시한 비참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실제적으로 돕지 않고,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평안히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hypagete en eirene)는 서로 헤어질 때 유대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이것은 원래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의 행복을 소망하는,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마르5,34 ; 루카7,50). 여기서는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에게 '하느님께서 너를 평안하게, 즉 결핍에서 채워주실 것이니 그냥 가라'고 하는 의미로 쓰였다. 스스로 돕지 않고, 단지 입술로 평안함을 빌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잠언 3장 28절에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고 했다. 도울 수 있음에도, 빈손으로 보내면서 평안함을 비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따뜻이 녹이고'에 해당하는 '테르마이네스데'(thermainesthe)는 '테르마이노'(thermaino)의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덥게 하다' 의미이다.또한 '배불리 먹으시오'에 해당하는 '코르타제스테'(chortazesthe)도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배부르게 하라' 의미이다. 이런 단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대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교회 공동체 내에 가난한 자들이 궁핍에 처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교인들이 그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해 주기보다는 값싼 동정의 무책임한 말로만 떠들어대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행위조차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 이 구절은 실천(행동,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구절로서, 서간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야고보는 15절과 16절에서 예를들어 설명한 사실에 대해, 이제 중간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죽은'으로 번역된 '네크라'(nekra)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다.(루카15,24.32) 즉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본인과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측면에서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7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8-10절에서도 선행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 하셨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19)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멸망할 마귀들이 가진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야고보는 신앙 문답과 같은 양식으로, 유일신론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마귀들도(타 다이모니아; ta daimonia) 유일신론을 인정하고 있다. '떱니다'로 번역된 '프릿수신'(phrisusin)의 원형 '프릿소'(phriso)는 '떨다','극한 공포에 사로잡히다', '소름끼치다'란 뜻으로, 마귀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매우 크게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마귀처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실천(행동, 행함)이 배제된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1) 야고보는 이제 실천있는 믿음만이 하느님 대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유대인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한다.(요한8,39) 본문에서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파테르 헤몬 ; pater hemon)이라고 언급한 것은 본 서간 수신자들의 대부분이 유대계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3) 여기서 야고보는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창세기 15장 6절을 이용하고 있다.

야고보는 먼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후사가 없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의 씨로 하늘의 무수한 별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창세15,5) 그리고 그 믿음을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그러나 그 후 이사악을 기꺼이 제물로 드린 <'아네넥카스'(anenegkas)의 원형은 '아나페로'(anaphero)로 '제단에 놓다', '제단에 가져가다'는 뜻> 사건을 통해,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일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산 제물로 드릴지라도,죽음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능히 그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히브11,19) 아브라함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그 약속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이처럼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믿음과 행함(실천)의 일치를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이루어졌고'로 번역된 '에플레오데'(eplerothe)의 원형 '플레로오'(plerow)는 '충만하게 하다', '완성하다', '온전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창세기 15장 6절의 '칭의'(의로움의 선언)도 법정적 선언이고(로마4,3) 창세기 22장은 그 '의로움의 선언'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명백한 증거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본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26) 야고보는 서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행위(실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26절에서 맺고 있다. 실천(행함, 행동, 행위)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이것은 17절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말이다. 즉 야고보는 실천없는 믿음은 숨을 쉬지 않는 육체에 비교하면서,  믿음을 육체에, 그리고 실천(행함)을 영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pneumatos)의 원형 '프뉴마'(pneuma)'호흡','숨', '생명'이란 일차적인 뜻이 있으나, 구약에서부터 보편적으로 '호흡이 있는 생명'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인간 생명의 삼중 구조(1테살5,23)에 입각해서 새 성경은 '영혼'안에 있는 '영혼'의 핵인 '심령'(영)으로 번역되어 있다. 

숨쉬지 않는 육체는 시체일 뿐이다. 이처럼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호흡이 끊긴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육체와 영이 하나이듯이 믿음과 실천(행함)도 하나이다. 육체와 영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이 없는 몸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믿음은 실천 없이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구관조(앵무새)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야고 3,1-10)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  

야고보서 3장 1-12절은 올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진술한다. 야고보는 1장 26절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제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에서 짧게 언급하였던 성도의 바른 언어 생활에 대한 주제를, 이제 본 장에서 구체적으로 새롭게 전개시켜 나간다. 

먼저, 야고보는 언어 생활에 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충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는데, 우선적으로 <교회안의 교사>에게 적용시킨다.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기본형은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가르치다'(마태4,25)란 뜻의 동사 '디다스코'(didasko)의 명사형으로, 글자 뜻 대로 '가르치는 자'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교사 직분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으며, 따라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소양과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됨으로써,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가르치는 자가 모범이 되지 못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고보는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자들 및 그 직분을 탐내는 자들에게 주의깊은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교사)는 하느님께서 교회안에 세우신 이들 중에 사도들과 예언자들 다음, 세번째 위치 놓여진 사람들이다.(1코린12,28) 교회의 모든 직분, 예컨대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들은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실천하는 통로이다.(에페4,11)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다 그렇듯이, 가르치는 직분 역시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이 그 직분에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가 중요하지, 그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교사가 비록 바로 가르치더라도,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으면, 배우는 자보다 훨씬 더 큰 심판을 당하게 된다. 

야고보는 교사가 되는 것을 신중을 기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구원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치는 은사를 부여받아,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교사가 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교사로서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사가 만약 그 책임을 충실히 실행하지 못했을 때는, 하느님의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로 번역된 '에이도테스'(eidotes)는 '오이다'(oida)의 완료 분사로서 이러한 교사의 막중한 책임을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 받을' 로 번역된 '렘프소메다'(lempsometha)'람바노'(lambano)의 일인칭 복수형으로서, 야고보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교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 (2-6) 

말이란 의사 전달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실수가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야고보는 만약 혀로 범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리켜 '완전한 사람'(텔레이오스 아네르 ; teleios aner)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수를' 번역된 '프타이오멘'(ptaiomen)의 원형 '프타이오'(ptaio)'걸려서 비틀거리다', '걸려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잘못하다','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혀로 실수(범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란 표현도, 절대로 완전하여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이같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온몸, 즉 모든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가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3-8절에서도, 이 비유와 의미가  동일한 일련의 비유를 들어, 혀의 큰 영향력과 그 혀가 잘못 사용될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3) '재갈을 물려'의 '재갈'로 번역된 '칼리누스'(chalinus)의 원형 '칼리노스'(chalinos)는  말의 입에 가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키며,  이곳에 고삐를 맨다. 고삐를 매면, 말은 사람이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성질이 사나운 야생마라 할지라도 고삐를 사용해 다스릴 수 있다. 

야고보가 이 비유를 말하는 이유는 혀의 기능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큰 데 비해,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럼에도 혀는 통제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의 비유는 말의 재갈처럼 혀를 통제하는 사람이 허물을 감출 수 있으며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이 많은 데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잠언10,19)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4) 3절에서는 힘이 센 가축을 통제하는 재갈의 비유 사용한 바 있는 야고보는 몸 전체를 조절하는 혀의 능력을 재강조하며, 두번째 비유로 배의 크기와 키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배는 바람에 밀려 움직이는 매우 큰 범선을 가리킨다.  

의 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아무리 크고' 뜻을 가진 지시사 '텔리카우토스'(telikautos)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의 크기는'아주 작은'이란 뜻을 가진 '엘라키스토스'(elachistos)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두번째 비유에서 앞의 비유보다 더 직접적으로 크기의 대조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공(키잡이)에 의해 키가 조종될 수 있다면, 배가 거센 바람(광풍)에 밀리지 않을 것이다. 배는 외부적인 광풍이 아닌 내부의 작은 키에 의해 진로가 결정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라는 외부 환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배의 키와 인간의 혀는 외부적인 환경을 거슬러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충분히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 덕에 좋은 것으로 배부르고  인간은 제 손이 한 행실에 따라 되돌려 받는다." (잠언12,14)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5)는 '메갈라 아우케이'(megala auchei)의 번역인데, 이것은 '메갈라우케오'(megalacheo)와 같은 뜻으로, '과장하다', '호언장담하다','언행에 있어서 거만하게 처신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오만불손한 말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것을 말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 (시편12,4) "하늘을 향해 자기네 입을 열어 젖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네." (시편73,9)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5-6) 야고보는 혀를 불의 이미지로 묘사하며 작은 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아주 작은'(헬리콘 ; helikon)'얼마나 큰'(헬리켄 ; heliken)으로 번역된 단어가 원형으로 볼 때 동일한 단어라는 점이다. 야고보는 이 두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로서 '헬리코스'(helikos)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 

수십만 헥타르의 광대한 숲이 작은 담배 꽁초 하나 혹은 작은 성냥불 하나로 다 타버리는 일이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된 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산 전체를 다 삼켜 버리는 것이다. 야고보는 일상적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화를 가지고, 작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불과 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누구라도 인생을 망칠 수 있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잠언18,21) 혀는 '불'(퓌르 ; pyr)이란 은유법에 이어, 혀는 '불의의 세계' 또 다른 은유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세계'에 해당하는 '코스모스'(kosmos)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는(마태23,22) '하늘'을 가리키는 '우라노스'(uranos)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죄악으로 타락한 상태의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와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우심 나타내는 '다키아오스'(dikaios ; 요한17,25 ; 2티모 4,8 ; 묵시 16,5)에 부정 불변사 '아'(a)가 결합되어 의로움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는 '아디키아'(adikia)란 단어가 사용되어, '불의의 세계'는 곧 '악의 세계', '사악한 세상'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지금 혀, 곧 말의 파괴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악이 마치 악한 혀에서 비롯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혀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한 특성을 드러내며, 실제 그런 혀는 결과적으로 우리 몸의 지체 전부를 더럽히고, 우리 삶의 바퀴를 태워 버린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는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6)  여기서 '더럽히고'에 해당하는 '스필루사'(spilusa) '오염시키다' 뜻을 지닌 동사 '스필로오'(spilow)의 현재 분사로서, 혀를 통해 내뱉는 말이 전인격을 오염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오염은 일시적이지 않고, '인생행로'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생행로'에 해당하는 '톤 트로콘 테스 게네세오스'(ton trochon tes geneseos)'인간 존재의 과정', '우리 생의 과정' 이란 의미로,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인생, 또는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인생 노정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제, 인간의 전인격을 부패시켜 인생 전체를 태워버리는 혀의 해악성을 지옥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지옥불'로 번역된 '게엔네스'(geenes)의 원형 '게엔나'(geenna)본래 예루살렘 남쪽의 좁은 골짜기인 '힌놈의 골짜기'(게 힌놈)을 말한다. 이 골짜기는 흔히 지옥, 또는 악마가 거주하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그곳은 최후의 심판 후 악인이 들어가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마르9,43) 여기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이미지로 쓰였으며,  특히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악한 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7-8) 

인간은 창세 후에 하느님께로부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도록'(창세1,28)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통치권  아래에 두고 지배해 오고 있지만,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조시켜, 후자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고 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8) 동물이나 새는 우리나 새장에 안전하게 가두어 둘 수 있지만, 혀를  활동하지 못하게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혀가  언제나 쉬지 않고, 악을 내뱉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이다.(야고4,8)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이란 의미이다. 마치 강한 독을 가진 독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선한 말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의하고 더럽고 독기 가득한 말들만 뿜어내기를 더 좋아한다.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너는 선보다 악을  의로움울 말하기보다 속임수를 더 사랑하는구나  거짓을 꾸미는 혀야  너는 온갖 멸망의 언사를 사랑하는구나." (시편52,6)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9) 야고보는 이제 한 입으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동시에 그 입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저주' 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조로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과 악, 둘 다를 말할 수 있는 혀의 이중성과(마태12,34-37) 더불어 혀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혀의 가장 아름다운 기능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창조주 하느님께 찬양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전하리라." (이사43,21) 그런데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한다. 이것처럼 심각한 자가당착이며 모순도 없다. 하느님을 찬양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된다.(루카6,28 ; 로마12,14)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미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에서 쓰인 '율로구멘'(eulogumen)과 '카타로메 '(katarometha)는 '율로게오'(eulogeo;찬양하다)와 '카타라오마이'(kataraomai;저주하다)의 현재 시제가 쓰임으로써, 교회 안에서 한 입으로 두가지 말을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야고 3,13-18)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롭고 총명합니까?  그러한 사람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속에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거든,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3-16) 

야고보는 3장 13절에서 5장 6절에 이르기까지 비세속주의로 입증되는 믿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오늘 3장 13-18절에서 야고보는 그 삶에 선한 열매가 맺히는 자는 하늘로부터 참된 지혜를 받은 자이지만, 그 삶에 시기와 이기심등 악한 열매가 맺히는 자는 스스로 지혜롭다 자랑해도, 그 지혜는 악마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악한 지혜와 하늘의 선한 지혜를 대조하고 있다. 본절의 의문문을 이끌고 있는 '누가 ~~ 합니까?' 에 해당하는 의문사 '티스'(Tis ; Who is ~?)는 물론 전체 교회 구성원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나,여기서 특별히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먼저 '지혜'로 번역된 '소포스'(sophos)는 '현명한', '지혜로운'이란 뜻으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하느님께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소유한 자, 즉 교사들이 가지는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지적 능력 가리킨다. 

다음으로 '총명이 있는'으로 번역된 '에피스테몬'(ephistemon)은 신약 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된 용어로, '경험있는', '이해력이 있는'이란 뜻으로, 특별히 전문가로서의 특정한 경험적 지식과 전문적 분야의 이해력을 의미한다. 

이 두 용어는 그 의미가 구분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지적 능력과 이해력 그리고 경험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보면 된다. 야고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마 당시 교회내에서 교사들을 포함하여 스스로 '지혜와 총명(지식)'이 있다고 내세우며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지식)'을 소유하였다고 해서, 누구나 다 무조건적으로 교회내에서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만을 가지고 뽐내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과연 하느님의 사람들인지의 여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온유한 마음으로 지혜와 총명(지식)의 일들을, 그들의 선한 행실(실천)로 보여야 한다고 제시한다. 

여기서 '실천'(선행)에 해당하는 '테스 칼레스 아나스트로페스'(tes kales anastrophes)는 야고보만의 특유의 표현이 아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비방하는 불신자들에게 자신의 참됨을 나타내 보이라고 말했고(1베드2,13 ; 3,16), 이런 요구는 당시 유대 랍비들도 흔히 사용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수신자들도 이미 알며 공감하고 있는 사상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해당하는 '엔 프라우테티'(en prauteti)는, '온유함 안에서'(in the gentleness)라는 의미이며, 이는 선행이 온유함의 기질과 태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내적 온유함은 사실 외적 선행으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다. 이 온유함은 악마적 지혜의 특징인 모진 시기와 이기심(14절)이라는 개념과 대조된다.  참된 믿음이란 합당한 행위의 열매가 수반되어야 함같이, 진정한 '지혜와 총명' 역시 반드시 온유함안에서 선행으로 드러나야만 한다. 그리고 14-16절은 이와 반대로 시기와 이기심이란 특징을 지닌 세상의 악한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모진 시기와 이기심'은 타락한 본성에서 맺히는 열매이다. '시기'로 번역된 '젤론'(zelon)의 원형 '젤로스'(zelos)는 '열심','열정'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질투'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 단어가 신앙을 유지함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의인의 거룩한 열심이란 긍정적인 의미(요한2,17 ; 로마10,2 ; 2코린9,2 ;11,2 ;필리3,6 ; 히브10,27)로도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잘못된 열심 즉 그리스도인을 대항하는 유대인의 열심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사도5,17 ; 13,45 ; 로마13,13 ;갈라5,20) 본문은 후자의 의미로 본인보다 더 나은 사람에 대해 갖는 '시기'를 말한다. 

이 단어를 수식하는 '모진'으로 번역된 '피크론'(pikron)은 '독한', '쓴'이란 뜻이다. 따라서 '모진 시기'는 남에 대한 열등감에서 오는 시기심, 또는 남의 가치를 애써 깎아내리는데에 혈안이 되어 비방을 일삼는 태도를 말한다. 

다음으로 '이기심'으로 번역된 '에리테이안'(eritheian)의 원형 '에리테이아'(eritheria)'이기적 야심', '다툼', '분파(파당)심', '강한 당파 근성'이란 뜻으로, 자신만을 내세우려고 저급한 술책도 불사하는 이기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기심'의 악은 '모진 시기'와 함께,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열거되어 있는 육의 행실(열매)중의 하나로서, 거기서는 '분파'(당짓는 것)로 번역된다.

실로 인간이 모인 모임에서 그 조직체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암적 요인은 이같은 이기적 야심에서 비롯되는 분파심이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지도자적인 중심 인물 야고보는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시기와 이기심의 추악함을 본 서신의 수산자들에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만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14)  당시 교회안에는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는 자 중에 자신이 지혜롭다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진 시기와 이기심(분파) 자체가 이미 그들의 지혜가 거짓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행동은 그 사람의 진리의 가르침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마십시오'(말라)로 번역된 금지 부정어 '메'(me)는 '자만(자랑)하지'로 번역된 '카타카우카스테'(katakauchaste)와 '거짓말을 하지'에 해당하는 '프슈데스데'(pseudesthe)를 모두 지배한다.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가득한 자가 자신에게 지혜(13절)가 있다고 자만(자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마음속에 속한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역행하여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5) '그러한'으로 번역된 지시사 '하우테'(haute)가 가리키는 것은 14절에 언급된 '모진 시기와 이기심을 품고 있는'이란 의미이다. 그러한 지혜가 하느님께 기원을 둔 지혜가 아니며,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지혜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조목조목 열거한다. 

먼저 이러한 지혜는 '세속적'이라고 정의한다. '세속적'으로 번역된 '에피게이오스'(epigeios)는 '~위에'란 뜻의 전치사 '에피'(epi)와 '땅'이란 뜻의 명사 '게'(ge)의 합성에서 유래하여, '땅 위에 존재하는'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진다. 주로 하늘과 땅으로 구분시키는 이중성과 연관되어 '이 세상의', '지상의'란 으로 쓰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오류를 범하기 쉽고 그르치기 쉬운 인간의 지혜, 곧 세상의 시각만을 기준으로 삼아 적용하는 불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세상적인 기준은 언제든지 쉽게 변하는 상대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지혜는 불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난 지혜가 아닌 거짓 지혜인 것이다. 그런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는 항상 땅의 일만 생각하며(필리3,19), 신앙적인 면에는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음 이러한 지혜는 '세속적'인 동시에 '현세적'이다.

여기서 '현세적'으로 번역된 '프쉬키케'(psichike)는 '숨', '호흡'을 의미하는 단어 '프쉬케'(psiche)에서 유래한 단어로서,욕구와 정욕에 복종하며 감각적인 본성에 의해 지배받는 영혼을 말한다. 짐승들처럼 감각적인 본성에 의해 지배되어 살아가는 성령이 결여된 상태를 말한다.(1코린2,14 ; 15,44.46)본문에서 이 용어는 타락한 욕구나 성향에서 솟아나는 세상적인 지혜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세속적이며 현세적인 지혜는 동시에 '악마적'이다. 여기서 '악마적'으로 번역된 '다이모니오데스'(daimoniodes)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로서, '악한 영을 닮은', 혹은 '악한 영에서 기인하는'이란 뜻이다. 악마의 세력은 세속적이고 현세적(정욕적)인 '그러한 지혜'를 조장하는 보이지 않는 배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는 사람들에게 속한 시기와 이기적인 야망을 품도록 부추기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파괴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세력에 지배를 받는 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분열을 일으키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지막때에 어떤 이들은 사람을 속이는 영들과  마귀들의 가르침에 정신이 팔려 믿음을 저버릴 것입니다." (1티모 4,1)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6) 모진 시기와 이기심이 생산해 내는 해악의 결과들은 혼란과 온갖 악행이다. '혼란'으로 번역된 '아카타스타시아'(akatastasia)는 '무질서한 상태', '불안정', '혼동', '요란'이란 뜻의 명사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평정이 없으며, 일관된 언어가 없어, 결국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혼란과 다툼을 초래한다.  

'온갖 악행'에서 '악한'으로 번역된 '파울론'(phaulon)의 원형 '파울로스'(phaulos)'나쁜', '악한', '무가치한'이란 뜻을 가진 '카코스'(kakos)와 동일한 뜻으로, 여기서는 공동체의 조화와 평화를 깨트리는 악한 면을 지칭한다. 따라서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심지어 교회일지라도, 그곳에는 필연적으로 평화를 깨뜨리는 무질서와 파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7-18) 

이제 세속적이고 현세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와 대립되는 '위에서 오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지혜가 어떤 열매를 가져 오는지를 진술한다. 우선 '위에서 오는'으로 번역된 '아노텐'(anothen)은 이 땅에 근거를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요한3,3.7 ; 19,11 ; 야고1,17)

따라서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로서, 세상으로부터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이 지혜는 교회를 위한 축복의 열매를 맺도록 한다. 야고보 바오로가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갈라5,22-23)와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난 지혜의 8가지 구체적인 특성을 나열하고 있다. 

순수 ; '하그노스'(hagnos)는 '순결한', '순수한'(pure)이란 뜻으로,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음과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느님의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을 왜곡없이 따르며, 하느님 앞에 항상 동일한 모습만을 견지한다. 

평화 ; '에이레니코스'(eirenikos)는 '평온한', '평화로운'이란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여기와 히브리서 12,11에서만 발견된다. '혼란'으로부터 나온  세상의 지혜와 대비된다.

관대 ; '에피에이케스'(epieikes)는'온화한', '온순한', 공정한'이란 뜻으로, 세상의 지혜를 가진 독선적이며, 오만한 사람의 마음과 달리,  참을성과 이해심이 많고, 관대하며 친절한 마음을 의미한다.

④ 유순 ; '유페이데스'(eupeides)는'복종하다'에서 유래되어, '쉽게 순종하는', '고분고분한'이란 뜻이다. 이것은 거칠고  완고한 것과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온당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⑤ 자비 ; '엘레오스'(eleos)는 고통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동정심'이란 뜻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와 동정심을 아끼지 않는다. 냉정과 냉랭함이 그 반대이다.

 ⑥ 좋은 열매 ; '자비'의 결과를 나타나는 '구제'(자선)로 이해할 수 있다.

 ⑦ 편견이 없는 ; '아디아크리토스'(adiakritos)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디아크리노'(diakr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구별되지 않는'이란 뜻이다. 사람의 외관만을 보고 판단하거나 공정성을 잃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⑧ 위선이 없는 ; '아뉘포크리토스'(anipokrit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체하다'라는 뜻의 '휘포크리노마이'(hypokrinoma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거짓없는', '진실한', '있는 그대로', '숨김없는'이란 뜻을 지닌다.  바리사인들처럼 위선을 행치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8가지의 위로부터 난 지혜는 교회를 사랑으로 하나되게 한다.

우리 교우들이 세상의 지혜를 멀리하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지혜를 가까이 한다면, 이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지혜와 총명을 지닌 자로서, 교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18) 야고보는 17절의 지혜의 특성 가운데 '평화'(에이레네; eirene)의 덕목을 다시 강조하면서 본 장을 마무리한다. 이 평화는 다툼과 싸움과 분쟁과 요란이라는 세상적 지혜의 모습에 대조적인 속성이며, 그런 악의 열매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서 난 지혜의 여러 특징을 아우르는 덕이다.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의로움의 열매를 거둔다. '의로움의 열매' 번역된 '카르포스'(열매) 디카이오쉬데스'(karpos dikaiosynes)의 개념은 17절의 위에서 오는 지혜에 속한 모든 특징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려 하는 자에 의해서 심겨진 평화의 씨로 만들어진다. 평화는 14절에서 언급된 시기와 이기심과 16절에서 언급된 혼란과 온갖 악행의 상태와 상반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소란한 일들이 가득하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열매, 즉 의로움의 열매인 평화가 감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마태5,9)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야고 4,1-10)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1-3) 

야고보는 3장 13-18절에서 언급되었던 세상의 악한 지혜의 대표적 특성이기도 한 다툼의 원인을 정욕으로 규명해서, 세속적 욕망에 대한 경계 및 하느님을 향한 신도의 합당한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의 싸움이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이 어디에서 옵니까? " 이다.

여기서 '여러분의'로 번역된 '엔 휘민'(en hymin)은 '교회 구성원들 중에'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신앙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과 다툼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싸움'으로 번역된 '폴레모이'(polemoi)의 원형 '폴레모스'(polemos)'전쟁', '전투'란 뜻이나, 여기서는 '알력', '불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다툼'으로 번역된 '마카이'(machai)의 원형 '마케'(mache)'투쟁', '쟁론', '논쟁'이란 뜻이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싸움과 다툼'의 유사한 두 용어를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함으로써, 그 당시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디아스포라)내에 이런 '싸움과 다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 모든 '싸움과 다툼'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자신들의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야고보는 신도들간의 '싸움과 다툼'의 원천이 외부적 환경이 아니라  그들의 내부적 원인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욕정(정욕)'으로 번역된 '헤도논'(hedonon)의 원형 '헤도네'(hedone)는 '기뻐하다'라는 뜻이 있는 '한다노'(handano)에서 유래하며, 문자적으로는 '기쁨'이란 의미이나 주로 '죄스런 정욕', '쾌락'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헤도네'는 루카8,14, 디도3,3, 베드로후서 3,3 에서도 나온다.

본절에서 이 용어는 하느님을 떠나거나 멀리하고, 쾌락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철학적 용어로서 '쾌락주의'를 가리키는 영어의 '헤도니즘'(hedonism)도 이 용어에서 나왔다. 야고보는 여기서 수신자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의적 쾌락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쾌락적인 삶에 만족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키워가는데, 그 탐욕스럽고 다투기 좋아하며, 남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들 서로간의 싸움을 확대 재생산한다. 

인간 내부의 무한한 충동들이 마음대로 표현되어, 결국 쾌락이 지배하게 되면인간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평화가 아닌 분쟁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려는 쾌락적 욕망은, 자신을 방해하는 그 어떤 대상도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야고보는 개인 자신의 쾌락과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이웃에 대한 피해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속적인 신도들을 바라보면서,'싸움과 다툼'의 원인은 바로 '욕정(정욕)'에 있다고 규명한다.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는 싸움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로 회복해야할 그들 각자의 욕정(정욕)에 분쟁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욕정에 의한 구체적 결과는 2절에 언급된 욕심, 살인, 시기와 같은 악한 것들이다. 야고보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살인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운다는 이러한 다양한 표현은, 수신자들이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얼마나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추구하였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에 해당하는 '에피티메이테'(epithimeithe)는 '~위에', 혹은 '~을 지배하여' 등의 의미를 지닌 전치사 '에피'(epi)와 '열정', '욕망'을 뜻하는 명사 '티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열망하다', '몹시 탐내다', '갈망하다'라는 매우 강력한 뜻을 지닌 동사 '에피뒤메오'(epithimeo)의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 지속적 상태나 진행중인 동작을 표현하고자 할 때사용되는 시제이다. 따라서 이런 표현을 통해, 소유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욕망이 지속적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본절의 '살인하다', 시기하다', '다투다', '싸우다'에 해당하는 동사도 모두 직설법 현재 시제로 쓰여, 그들이 항상 그러한 원초적이며 지극히 쾌락적인 본능에 지속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준다. '살인까지 하며'로 번역된 '포뉴에테'(phoneuete)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마태오 5장 21-22절에서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곧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고, 요한1서 3장 11-15절에서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카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인것처럼 살인한 자와 같다고 말했다.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의 태도는 형제를 살인한 행위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해 걸림돌이 되는 형제를 미워하여 그에 대해 분노하는 자를 살인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뒤에 이어지는 '시기를 해 보지만' 이란 표현은, 앞에 나오는 '살인까지 하며',즉 형제를 증오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야고보는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형제를 대적해도, 그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국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3)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바로 악한 동기로 구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잘못'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카코스'(kakos)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데, '악한 동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지 않고(1요한 5,14),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정욕을 따라서 기도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잘못된 기도에는 부정적인 응답으로 답해 주시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우리가 변화되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절개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4-6) 

'절개없는 자들이여' 해당하는 '모이칼리데스'(moichalides)'간음하는 여자들이여' 라는 뜻이다. 원래 의미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않고, 다른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은유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구약시대 선견자 및 예수님과 동일하게, 야고보는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싸우고 다투고, 이기적인 동기로 기도하는 자들을 향해, 하느님을 적대하는 이 세상과 짝하여, 하느님과의 결혼 관계를 깨뜨려버린 영적 간음자라고 지탄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는 하느님과 계약(언약) 관계를 깨뜨린 자를 '절개없는 자들'(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불렀다. 본문에서는 특히 하느님과의 정조를 깨고 간음한 자를 가리켜, 세상과 친구(벗)가 된 자들이라고 밝힌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는 관계가 되었다 할지라도(로마5,1), 세상과 짝하게 되면 하느님과 적대 관계가 된다.

하느님의 뜻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과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하느님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것을 나타낸다. 세상과 하느님은 동반자가 아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미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죄악된 삶을 철저히 멀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5) 새 성경 번역자가 원문을 너무 의역을 해서,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는 뜻이다.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성령'이 원문에는 주어인데, 목적어로 번역하여 헷갈리게 만들었다.

 

야고보는 다만 성경에서 하느님은 '질투하시는 하느님'이라고 언급된 말씀을 염두에 두고,

성령이 신도들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그 표현을 바꾸어 말한 것이다.

실제로는 야고보서 4장 5절에서 인용된 말씀이,구약성경에는 제3위 하느님이시며 신도의 마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또 프뉴마 ; to pneuma)이 신도의 영적 순결을 바라며, 신앙의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그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면, 불타는 질투심을 품으신다.왜냐하면, 하느님과 그의 백성은 제3자가 끼어 들어올 수 없는 배타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세상과 친구하고 하느님과 원수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케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야고보가 지적한 대로 세상을 좋아함으로써,하느님의 말씀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조롱받을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감히 스스로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하느님과 원수되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무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7-10)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7)  여기서 '너희는 복종할지어다' 번역된 '휘포타게테'(hypotagete)'복종하다', '순종하다'란 뜻을 지닌 '휘포탓소'(hypotasso)의 명령형으로, 6절과 같은 사실을 안다면, 이기적인 욕망과 세상과의 벗됨을 거절하고, 더욱 큰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복종하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휘포탓소''~아래' 뜻의 전치사 '휘포'(hypo)'높다', '두다' 뜻의 동사 '탓소'(tasso)의 합성어란 점에서 잘 드러나듯, 하느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 아래 굴복시키는 적극적 순종을 말한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자발적인 자유 의지의 행동에 의해 내어 맡기는 겸손한 태도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께 순복하는 것은 마땅하다. 더욱이 세상적인 정욕으로 인한 시기와 다툼으로 일어난 신앙공동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겸손함으로 하느님께 순종해야만, 비로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 의해 유혹받을 때, 성경말씀으로 대적함으로써,믿는 자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범을 보여주셨다.'악마에게 대항하다' 본문의 명령은 바로 이와같은 자세를 가지라는 말이다. 특히 악마는 분쟁과 다툼과 이기적 욕망의 주범이다. 따라서 악마를 대항해야만, 분쟁과 다툼을 극복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본문에서 '대항하다'로 번역된 '안티스테테'(antistete)는 '대적하다', '거역하다'란 뜻을 지닌 '안티스테미'(antistemi)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마귀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우라는 강력한 의미를 전달한다. 끊임없는 마귀의 공격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적한다면, 분명 마귀는 그들을 피할 것이며,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들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달아날 것이다' 번역된 '퓩세타이'(pheuksetai)의 원형 '퓨고'(pheugo)는 '달아나다','도망하다', '피하다' 라는 뜻이다. 마귀가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신도들을 피하여 도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들은 두 마음을 품은 자들처럼, 이제 더 이상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쾌락적인 정욕을 쫓아 세상과 벗하는 삶이 아니라, 악마를 대항하는 보다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8) 여기서 '가까이 하다' 번역된 '엥기사테'(enggisate)는 원형 '엥기조'(enggizo)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명령의 단호함과 명령 이행의 즉각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만큼 그 명령이 시급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야고보는 만약 신도들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이킨다면, 그분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그들을 가까이 하셔서, 도우심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8) 야고보는 이어서 세상과 벗(친구)한 신도들은 '죄인들이여','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야고보는 세상과 벗하는 동시에 하느님과 벗하려는 신도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그들을 부르는 호칭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만큼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손을 깨끗이 하다'로 번역된 '카타리사테 케이라스'에서 '카타리사테'(katharisate)원형 '카타리조'(katarizo)는 구약 제사의 문맥에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가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특히 손을 씻는 행위는 구약의 사제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중요한 의식이었다.(탈출30,20-21)이 의식은 유대인들에게는 음식을 먹기전에 행해야만 하는 전통이기도 했다.(마르7,1-4) 그러나 여기서 야고보는 의식적 정결례를 도덕적, 영적 정결의 의미로 전환한다. 죄인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자신의 범한 죄를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성혈에 씻음 받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둘째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 번역된 '하그니사테'(hagnisate)의 원형 '하그니조'(hagnizo)'정결하게 하다', '순결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과 동일하게 구약  사제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제반 정결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마음을  한 곳으로만 돌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의심과 믿음 사이(야고1,6-8), 바알과 하느님 사이(1열왕18,21), 세상과 하느님 사이(야고4,4)에 서 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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