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테오서(독서묵상)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1티모1,1~2.12~14)
티모테오 1.2서, 티토서는 사목(司牧)서간이라고 불린다. 세 서간의 주요 관심이 초기 교회의 열정적 선교 활동이 아니고, 선교사들이 세운 공동체의 관리(사목)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의 티모테오는 유다인 어머니 에우니케(2 티모1,5; 할머니의 이름은 로이스)와 이방인 아버지(사도16,1)사이에서 태어나 소아시아 동남쪽 리스트라에서 살다가 A.D.46년경 그곳에 복음을 전하러 온 사도 바오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A.D. 50년경부터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참한 티모테오는 그 뒤 사도 바오로의 충실한 협력자요 동업자로 남았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를 높이 평가하고 따뜻하게 소개했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하느님의 협력자'이다(1테살3,2). '나와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일을 성심껏 돌보아 줄 사람이 나에게는 티모테오 밖에 없습니다.'(필리2,20) '그는 내가 주님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성실한 아들입니다.'(1코린4,17) 그외에도 티모테오서는 그를 아직 젊은이로 묘사하고(1티모4,12; 2 티모2,22), 위장병을 비롯하여 다른 질병에 자주 시달렸던(1티모 5,23) 약골로 소개한다.
대다수 성서학자들은 사목 서간들을 사도 바오로의 친저 서간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 이후의 세대에 그의 신학 사상을 현실에 적용하여 저술한, 사도 바오로 계열의 서간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근거는 첫째, A.D. 2세기 와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영지주의 사상과 특징이 나타나 있고, 예컨대 부활의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주장(2 티모2,17~18)과 혼인에 대한 경멸과 지나친 금욕주의(1티모4,3.8)가 그것이다.
둘째, 교회 조직에 대해 특별한 관심(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안에 감독, 원로, 남녀 보조자, 과부 등의 위계적 직무와 질서)을 드러내고,
세째, 사도 바오로 친서 서간과는 다른 신학, 윤리적 관점을 보인다. '율법'은 올바른 처신함으로(1티모1,8~11) 이해하고,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응답하는 것이라기 보다 헌신과 절제로 이어지는 하나의 덕행으로(1티모5,8; 2티모2,22), '의화'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기 보다 그리스의 철학 개념인 '정의'의 덕으로 (1티모6,11) 이해한다.
대다수 성서학자들은 티모테오 2서가 사도 바오로의 생애 마지막 몇 달 또는 며칠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저자에 의해 사도 바오로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쓰였을 것이라 추정한다(A.D.70년경). 그리고 이 서간을 일부 참조하여 1세기 말엽 어느 무명 저자들이 티토서와 티모테오 1서를 집필한 것으로(A.D. 90년경) 판단한다.
티모테오 1서의 서간의 머리말(1,1~2)은 다른 바오로 서간의 경우와 다르다. 감사의 말이 없고, 사도 바오로가 사도직을 받은 게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이라고 되어 있다. 티모테오 1서는 에폐소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요 주제를 다룬다.
첫째는, 참 가르침과 거짓 가르침의 구분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수많은 신(神)들에 얽힌 이야기와 만신전(萬神殿)에서의 위계질서(신화나 끝없는 족보이야기)와 모세의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율법 교사들(히메네오스와 알렉산드로)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경계이다. 둘째는, 믿는 이들의 올바른 처신, 세째는, 교회의 직무에 대한 규정과 지침을 다룬다.
오늘 독서는 친서 형식을 빌려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인 것처럼 전하는 티모테오에 대한 인사말과(1티모1,1~2)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독하고 박해하던 죄인이었지만, 나중에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입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직무를 맡아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1티모1,12~14.15~17참조).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띈다.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한 것이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구절이다. 아무도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환경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영적 무지에서 나오는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충분히 주님의 구원의 진리와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깨우칠 수 있으며 살아야 하는데도, 영적 나태와 무관심과 악습에서 헤어나기 싫어서 의식적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할 때는, 똑같은 조건과 처지와 신분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주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도 하느님의 정의임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알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끝가지 고집을 부려 회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25주일 제2독서 (1티모2,1-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8)
티모테오 전서 2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만인과 위정자를 위하여 중재 기도를 명령하며, 중재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어지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공적 예배때 남녀 성도의 품행 및 창조원리에 근거한 남여 상호간의 기본 질서에 대해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그러므로'로 번역된 '운'(un; therefore)은 새로운 문장으로 내용을 전환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 전환 접속사이다. 그리고 '바랍니다'로 번역된 '불로마이'(bullomai; I will; I want)는 '원하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라는 뜻을 지닌 단어인데, 여기서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도자요 사도이며, 이방인의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포함된 다소 권위적인 명령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권고하는 대상을 '남자'로 국한시키고 있다. 이것은 여자가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본절이 남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회당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인도했던 관례에 비추어 볼 경우에 그렇게 생소한 것은 아니다. 공적 예배때 원로(장로)들이 자연스럽게 기도 순서를 맡았던 교회의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 이하에서부터 교회의 질서를 염두에 두고 공적 예배 때 준수해야 할 규범에 대해 계속 권고하고 있다.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사도 바오로는 당시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남자들이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전제하고 본문의 권고를 주고 있다. 이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기도의 태도를 특별히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성을 내거나 말다툼이 없어야 한다. 성 요한 금구는 "당신은 당신의 형제에게 불리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그러나 당신의 기도는 그에게 불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다. '그에게도 꼭 같은 벌을 내려주십시오. 그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있게 해 주십시오. 그를 쳐주십시오. 그에게 보복하여 주십시오'라고 경건하지 않은 말로 기도를 드리면, 당신은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해 여기서 말하는 분노의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말다툼'으로 번역된 '디알로기스무'(diallogismu; doubting; disputing)는 본래 '대화하다'라는 뜻을 지닌 '디알로기조마이'(diallogizomai)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의논', '의아하게 생각'(루카5,22), '변론', '논쟁'(루카9,46)등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며, '시비', '따지기'(필리2,14)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트집잡기 좋아하는 이들의 공연한 시비'를 말한다.
둘째, 이들은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는 고개를 숙이고 하는 기도,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서 하는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하는 기도 등 많은 자세가 있지만, 여기서는 보다 보편적인 기도 자세로서 일어나서 손을 들고 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외적 자세로서의 손의 위치가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의 영적 태도에 관한 것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로 번역된 '에파이론타스 호시우스 케이라스'(epairontas hosius cheiras; to lift up holy hands; lifting up holy hands)는 흠이 없고 정결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도하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거룩한'으로 번역된 '호시우스'(hosius; holy)는 일반적으로 '부정한 것과 단절된 상태'를 뜻하는데, 단적으로 말해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 등과 같은 추악한 범죄에서 분리된 상태, 즉 '부당한 행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지칭한다.
따라서 티모테오 전서 2장 8절은 만일 기도하는 자가 이러한 부정한 범죄로 자신을 더렵혔다면, 결코 공적 예배때에 대표로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시편24,3-4; 마태5,23-24).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시편24,3-4)
수요일 제1독서(1티모3,14-16)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5)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 전서 3장 15절에서 자신의 에페소 방문이 늦어지게 될 경우, 티모테오로 하여금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본 서간을 집필한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티모테오 전서 3장 15절은 티모테오 전서의 기록 동기를 밝히고 있다는 점과는 별도로 사도 바오로의 교회관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사목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교회관을 세 가지로 피력하고 있는데, 첫째는 하느님의 집이요,둘째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요, 셋째는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이다.
우선 사도 바오로가 첫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교회관은 '하느님의 집'('오이코 테우'; oiko theu)으로서의 교회이다. 여기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코스'(oikos)는 통상 '건물로서의 집'이나 또는 '그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로서의 집안(가족)'을 뜻한다.
코린토 전서 3장 16절이나 베드로 전서 2장 5절은 교회를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으로, 히브리서 3장 5절이나 베드로 전서 4장 17절은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집안'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에서는 이 두 개념이 결합되어 진술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이코'(oiko)는 이미 티모테오 전서 3장 4절과 5절,그리고 12절에서 줄곧 일관되게 '집안'(가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기 15절에서도 '건물'의 의미가 아니라 동일하게 '집안'(가족)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교회는 한 분 하느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영적 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하느님의 집안(가족)인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라고 번역된 '에클레시아 테우 존토스'(ekkllesia theu zontos)가 사도 바오로가 피력한 두번째 교회관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이 섬기는 생명없는 우상과 의도적으로 대조시키기 위해 자주 주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표현하였다(신명6,15).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도 나온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전서 1장 9절에서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명백하게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것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여호3,10)와 같은 선언은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계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머무를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느님의 될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같은 사상은 성경 계약의 기초를 이루며(탈출25,8; 29,45-46; 레위26,12;시편114,2; 에제키엘37,27), 사도 바오로의 신학 사상에서도 두드러진다.
사도 바오로는 실제로 코린토 후서 6장 16절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라고 선언한 뒤에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교회관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과연 하느님의 충만한 임재와 현존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필요하고도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라고 번역된 '스튈로스 카이 헤드라이오마 테스 알레테이아스' (styllos kai hedraioma tes alletheias)가 사도 바오로의 세번째 교회관이다.여기서 '진리'에 해당하는 '알레테이아스'(alletheias)의 원형 '알레테이아'(alletheia)는 부정사 '아'(a)와 '숨기다'(마르코7,24)라는 뜻의 동사 '란타노'(lantha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숨길 것이 없는 진심'이라는 뜻에서 '진리'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인 진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에페4,25; 로마9,1) 더 많은 경우에는 그리스도교에서만 발견되는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에페4,21; 콜로1,5).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요한1,14.15; 14,6). 여기서도 그리스도교 특유의 구원의 진리나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기초'(터)로 번역된 '헤드라이오마'(hedraioma)는 본래 '굳게 하다', '견고케 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헤드라이오오'(hedraioo)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대지'를 의미한다.
교회에 대해 이러한 의미의 '기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단이나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지켜야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기둥'으로 번역된 '스틸로스'(styllos)는 신약에서 여기와 갈라티아서 2장 9절, 묵시록 3장 12절에서만 등장한다.
사실 기둥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서 건물의 외양을 높이 드러냄으로써 멀리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 '이라는 뜻은 기둥이 건물 안쪽에서 건물을 높이 떠받들듯이 교회도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내세우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라는 은유적 표현으로서, 진리를 견고하게 지지하여 거짓 가르침의 공격으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를 높이 쳐들어 세상에 진리를 알려야 하는 교회의 두 가지 책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1티모6,2ㄹ-12)
여기 에페소 공동체에는 사치와 수다로 소일하는 부유층 여자들이 있었던 모양인데, 여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는 2장 8-15절의 권고는 여성 전반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물의를 빚고 있던 일부 부유층 여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티모테오 1서의 저자는 이들에게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이 아니라 정숙과 선행으로 자신을 가꾸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낳아 잘 기를 것을 요구한다. 이런 부유층 여자들은 여자들은 돈을 노리는 거짓 교사들의 표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6,5) 세속 사회처럼 교회안에서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로부터 오는 예언의 은사인지 교회안에서 검증되지도 않았는데~~그리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자기 것인양~~그리고 하느님의 은사를 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된다. 저자는 그들에게 돈의 위험성을 지적하고(6,5) 자선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6,17-19).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믿음에서 떨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사람들이 있습니다."(7-10)
또한 저자는 참다운 사목자로서 티모테모가 어떻게 처신하고 신자들을 어떻게 처신하고, 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세세히 가르쳐 준다(4,6-5,2;6,11-14). 오늘날 한 개인도, 회사도, 종교 단체도, 국가도 돈 때문에 망가져버려 시끄럽다.
인간도 육신, 몸 한덩어리로 끝나는게 아니라 눈에 드러나는 겉 모습과, 상대적 빈곤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허영과 사치에 빠져~ 부채에 허덕이며 감옥이든 자살이든, 몸으로 떼워야 되는 지경에 온 사람들이 많다.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릇된 판단과 인식의 콩깍지에 눈이 멀어, 뜬 구름 같은 신기루를 쫓아, 좀 더~~조금만 더~하다가, 그놈의 욕심 때문에 잘못 투자해서 망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 정선에서도 "그놈의 한방, 땡기는 것 때문에~~"패가망신 알거지가 되고, 알콜릭이 되고, 노숙자가 되고,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미국은 전쟁에 너무 돈을 많이 써서 너무나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고~~그리스 뿐 아니라 세계의 대다수 나라가 부도덕한 소수의 가진 자들과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몰염치하고, 국민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정치 권력때문에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역시 돈과 부의 정의롭고 공평한 분배와 동서남북의 균형 발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 개인의 윤리적 종교적 가치관과 신념의 문제로 귀결된다.
가정에서부터 어떻게 자랐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구조악이나 제도적 모순이나 악법이나 그릇된 관행도,그것을 만들고 시행하는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는 말씀은 실천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못 알아듣는 이야기다. 한 개인도, 재벌 회사도, 심지어 교구도, 본당도, 청빈을 모토로 하는 수도회도 나누어야 한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 대신에 쓰라고 준 것을, 제대로 쓰지도 않고 왜 묻어두는지를 못 알아듣겠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왜 걱정하는가? 특히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과 제 단체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하느님임을 체험하고, 미래를 가장 튼튼하고, 무너지지 않고, 말씀 한 마디면 무엇이든 창조하시는 전능의 하느님께 맡길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절대적 부의 원천이며, 마르지 않는 금고이고,영원히 썩지 않는 은행임을 왜 모르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번다고 죽을 고생을 했지만, 한푼도 못 가지고 가는 것을, 한 푼도 좋은 곳에 쓰지도 못하고 그냥 가는~~그야말로 불쌍한 인생을 산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진다.
한 수도회 단체도 그렇게 "청빈~청빈~" 해서 모은 돈들을, 왜 선교하는데, 그리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영육간에 돕는데 사용하지 하고, 서서히 멸망해 가는 지구의 종말을 기다리면서, 은행안에, 금고안에 사장시키고 있는지~~~ 도대체 납득이 안간다.
옛날 분도 성인이 몸담았던 작은 공동체에 수도자들이 먹을 빵도 없었을때, 성인이 기도하니까, 수도원 문앞에 누군가가 밀가루를 갖다 놓고 갔다. 우리는 좀 더 복음의 말씀에로,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의 모습대로 돌아가~~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고, 물심양면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에 박차를 가해야 된다.
<옛날 큰 부자가 죽으면서 특이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어 시신을 장지로 옮길 때, 반드시 두 손이 관 밖으로 나가도록 하여라." 유언에 따라 가족들이 상여를 메고 갈 때, 두 손을 관 밖으로 내놓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관 밖으로 내민 두 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사람들아, 보아라. 나는 돈도 많고 집도 크고 식솔들도 많지만,오늘 이때에 당하여 나 홀로 간다. 부귀영화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평생 모은 재산도 한푼 가져갈 수 없음이니~~"
이렇게 관 밖으로 두 손을 내놓도록 한 까닭은,인생은 올 때도 빈손, 갈 때도 빈손임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돈보다 더 소중한 무엇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무언으로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이다.>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제1독서(2티모1,1~8)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6~7)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의 은사를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과거 자신이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티모테오에게 주셨던 은사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절은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의 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물론 표현의 차이는 다소 드러나지만, 이 둘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는 티모테오에 대한 안수가 원로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언급된 반면, 여기서는 '내 안수로'로 언급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디아 테스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 무'(dia tes epitheseos ton cheiron mu; through the laying on of my hands; by the putting on of my hands)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에 의해서'( by),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이것은 곧 '나의 안수를 통하여'가 된다.
그렇다면,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의 개인 안수를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로단의 안수를 받은 것인가? 당시 초대 교회의 관례를 보면, 티모테오는 원로단의 안수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안수를 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티모테오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자신(2티모1,1)의 계승자요, 대리자요, 영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사'로 번역된 '토 카리스마 투 테우' (to charisma tu theu;the gift of God)에서 '카리스마'(charisma)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리스마'는 본래 '거저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리죠마이'(charizomai)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코린토 1서 1장 7절, 코린토 2서 1장 11절, 로마서 1장 11절 등에서 나타나는 바오로 사도의 특유한 용어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령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교회의 건설과 선익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와 능력(특은)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교회를 세우고', '가르치며 교회를 다스리고', '참된 자들과 거짓된 자들을 식별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는' 은사일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로 하여금 이러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로 번역된 '에피테세오스 톤 케이론'(epitheseos ton cheiron)에서, '에피테세오스'는 본래 '얹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티테미'(epitithemi)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70인역(LXX)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손'에 해당하는 '타스 케이라스'(tas cheiras)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사도6,6; 8,19; 13,3; 1티모5,22) 안수 행위의 특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 행위는 안수하는 자를 통하여 안수받는 자에게 하느님의 능력이나 축복, 그리고 권위 등이 전달되는 것을 상징한다. 티모테오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은사를 부여 받았다. 그런데 티모테오 1서 4장 14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가 '예언을 통하여' 부과되었다고 첨언하고 있는데, '예언에 의해 부과된 것'이라기 보다는 '예언과 함께 동반된 것'임을 드러낸다.
아마 이 예언은 티모테오가 안수를 받을 때, 안수에 동참한 원로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베푼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결국 이 예언은 테모테오가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께서 부르신 사람으로 확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여기서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는 사목적 직책과 소임과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받은 은사가 외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은혜라는 점을 '그대가 받은'(호 에스틴 엔 소이; ho estin en soi; which is in you)이란 표현을 통해 드러낸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속에 있는' 이다.
곧 티모테오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목적 소임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은사를 이미 부여받았으므로, 그 받은 은사를 다시 불일듯 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불태우십시오'라고 번역된 '아나죠퓌레인'(anazopyrein)은 본래 '계속해서 새롭게 불타오르도록 하다','계속해서 극렬하게 타오르도록 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나죠퓌레오'(anazopyreo)의 현재 부정사로서, '티모테오 안에 있는 은사가 새롭게 불타오르도록'이라는 의미이다(to kindle of fresh; to fan into flame).
사도 바오로가 보기에, 티모테오에게는 거룩한 하느님의 사목을 위임받던 당시의 은사들이 식지않고 계속 뜨겁게 타오를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어렸던 티모테오는 내적으로는 교회 내에서 활동하던 거짓 교사들로 인해, 그리고 외적으로느 점차 가중되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탄압으로 인하여 크게 위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로마 감옥에 있었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인 아들 티모테오에게 에페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사목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안수받을 때의 일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무릇 모든 그리스도교 봉사자들은 그들 자신이 받은 일들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작은 일일 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한 특별한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원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가 포함되어 있어서, 티모테오에게 그의 안수식을 상기시켜 그가 부여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워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를 밝힘에 있어, 사도 바오로는 영어의 'not ~ but' 용법처럼, 전자를 부정함으로 후자를 보다 강조하는 '우 ~ 알라'(u ~alla)란 표현을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가 먼저 부정하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다. '비겁함의'로 번역된 '데일리아스'(deilias)는 본래 '의기소침함' 이나 '비겁함', '두려워함'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비겁함의 영' 곧 '의기소침한 마음'이나 '비겁한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번역되고 이해됨이 타당하다. 사도 바오로가 이 부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 티모테오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마음 혹은 정신; 프뉴마; pneuma)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힘의 영'이다.
여기서 '힘'(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오스'(dynameos)는 사도 바오로 특유의 표현으로, 로마서 1장 16절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어구에서 강력하게 표명된 바로 그 힘(능력)이다. 나아가 티모테오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사랑의 영'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페스'(agapes)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표명된 대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다(1요한4,18).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부여하는 것은 '절제의 영'이다.
여기서 '절제의 영'으로 번역된 '소프로니무스'(sophronimus)의 원형 '소프로니스모스'(sophronismos)는 '보존하다'(루카17,33)라는 의미의 동사 '소죠'(sozo)와 '생각'이란 뜻의 명사 '프렌'(phren)의 합성어로서, '근신하다','통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소프로니죠'(sophronizo)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통제'(self-control)을 말한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주일)제2독서(2티모4,6~8.17~18)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6~8)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바른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6ㄱ) 티모테오 후서의 본론 부분인 1장 6절에서 4장 8절 전체를 마치는 4장 6~8절에서는 죽음을 예견한 바오로의 유언적 신앙 고백과 승리 선언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에고 가르'(ego gar)로 시작되는데, '나는'으로 번역된 '에고'(ego)는 주격으로 사용된 단수 일인칭 대명사로서 강조 용법으로 사용되어 문두에 등장하고 있으며, 접속사 '가르'(gar; 영어로는 for에 해당)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데, 앞의 1~5절의 권면을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즉 사도 바오로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목을 대신할 후계자 티모테오에게 그와 같이 간곡하게 명령한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을 단순히 '죽는다'고 표현하지 않고,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스펜도마이'(spendomai)를 번역한 것으로서 '제주(祭酒)를 붓다','제주를 들이키다' 라는 뜻을 지닌 원형 '스펜도'(spendo)의 현재형으로 민수기 15장 1~10절에 언급된 제사를 연상시킨다.
거기에는 화(火)제물('잇셰'; issheh; an offering by fire; 제단 위에서 제물을 불태워 그 향기를 드리는 모든 제사를 총칭하는 단어)이나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바칠 때에, 어린양일 경우는 포도주 1/4 힌을 제주로 바치고, 숫양일 경우는 포도주 1/3 힌을 제주로 바치며, 수소일 경우는 포도주 1/2 힌을 제주로 각각 올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민수15,5~10).
여기서 '힌'(hin)은 '작은 항아리'를 뜻하는 이집트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액체의 양을 재는 단위이다. 성경에서는 주로 제물로 쓰이는 기름이나 포도주, 물의 양을 잴 때 쓰였다.1힌은 약 3.8리터, 즉 2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며, 예를 들어 포도주 1/4 힌이면 약 0.95리터에 해당한다.
여기서 '제주(祭酒)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란네셰크'(lannesek)인데, '제주를 위해서'(for a drink offering)로 직역할 수 있다. '제주'란 '(포도주나 독주를)붓다'(호세9,4)라는 뜻의 동사 '나싸크'(nasak)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제주'는 번제물이나 화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서 드리던 구약의 제의(祭儀)형식을 말한다(탈출29,40).
포도주를 비롯하여 독주, 물, 기름 등을 제단 주위나 제물 위에 붓는 제사였다. 이것은 제단 주위에 뿌려졌던 번제물의 피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봉헌자가 그의 모든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상징하였다. 즉 '제주'는 하느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리기 위한 제사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티모테오 후서 4장 6절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죽음을 희생 제사의 마지막 의식으로 이해하고,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피 한방울 마저도 하느님의 제단에 쏟아붓고 가겠다는 결연한 순교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미 로마서 12장 1절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본절은 이제 그의 산 제사로서의 믿음의 경주가 종착지에 도달했음을 그가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6ㄴ) 여기서 '떠날 때'로 번역된 '호 카이로스 테스 아날뤼세오스'에서 '카이로스'(kairos)는 '기회','때'를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어떤 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시점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떠날 때'에서 '떠날'로 번역된 '아날뤼세오스'(analyseos)는 본래 '느슨하게 만들다','풀어 놓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날뤼오'(anally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선원이 배를 바다로 출항시키기 위해서 정박해 두었던 배의 줄을 푸는 것', 또는 '여행자가 새로운 행선지로 향하기 위해 자신이 기거하던 텐트를 걷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을 배가 여행을 위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 혹은 여행자가 새로운 행선지로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필리1,23)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7) 앞서 6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7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서 8절과 함께 암송까지 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세 가지 단언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는 '내가 훌륭히 싸웠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싸웠고'로 번역된 '에고니스마이'(egonismai)는 '싸우다', '투쟁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고니죠마이'(agonizomai)의 현재 완료형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9장 5절이나 콜로사이 1장 29절 등에서 나타나듯이 사도 바오로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며, 사도 바오로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투쟁의 삶을 살았음을 나타내준다.
새 성경은 그냥 '훌륭히'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은 '톤 칼론 아고나' (ton kalon agona; a good fight)로서 '선한 싸움을'이란 말이다. 여기서 '싸움'이란, 이어서 등장하는 '달릴 길'이란 어구를 참조할 때에 사도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싸움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운동 경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이 올림픽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고, 이제 그것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달릴 길'로 언급된 '드로몬'(dromon)은 일반적으로 '경주 코스'를 뜻하는데, 이것은 본문이 운동 경기 가운데서도 마라톤 경기와 관련된 비유임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그 긴 거리를 완주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마라톤 경주를 마쳤다고 회고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다 달렸다'로 번역된 '테텔레카'(teteleka)가 본래 '끝내다','완수하다'는 뜻을 지닌 '텔레오'(teleo)의 현재 완료형이란 점은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한 그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왔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완수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즉 본문의 핵심은 사도 바오로가 그다지도 긴 믿음의 코스를 완주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세째로, 사도 바오로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믿음'으로 번역된 '피스틴'(pistin)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신실성'을 의미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이후에 한번도 굴하지 않고 줄곧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켜왔던 것이다.
이것은 '지켰습니다'로 번역된 '테테레카'(tetereka)가 '지키다','보존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레오'(tereo)의 현재 완료형이란 사실이 보여 준다. 이 단어는 경기하는 자가 자신이 참가한 종목에서 경기 규칙을 지키는 것, 군인이 군대와 그 상관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지키는 것, 나아가 청지기(집사)가 자신의 주인이 위탁한 재산을 지키는 것과 결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정리하면, 죽음에 즈음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과거의 생을 돌아 보건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만큼은 당당히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8) '이제는'으로 번역된 '로이폰'(loipon)은 문자적으로는 '이제 남은 것은'이란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6절에서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7절에서 자신의 과거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반면, 이제 8절에서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관한 한, 떳떳한 인생을 살아온 사도 바오로의 미래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의로움의 화관'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화관'으로 번역된 '스테파노스'(stephanos)는 일반적으로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월계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주어질 '의로움의 화관'이란, 결국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것으로서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에서 수여되는 영원한 생명과 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1티모6,12; 야고1,12; 1베드5,4; 묵시2,10).
한편 본절에서 '마련되어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포케이타이'(apokeitai)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의로움의 화관'이 수여되는 시점이 미래이지만, 현재에 이미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할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바로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이다. 여기서 '의로운 심판관'에 해당하는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ho dikaios krites)는 문자적으로 '정직한 재판장'(the righteous judge)이란 의미에 가깝지만, 문맥상 '일체의 오류를 허용하지 않고, 모든 인류 곧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는 분(2티모4,1),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의미한다.
그 의로운 심판관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날'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재림의 날에'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주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로움의 화관을 수여하실 것이다. 여기서 '애타게 기다린'으로 번역된 '에가페코신'(egapekosin)은 본래 '사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가파오'(agapao)의 현재 완료 분사 복수형이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상급을 받을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의로움의 화관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베드로 사도(엘 크레고 작품) ◈ 참수 치명 당하는 사도 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