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독서묵상)

2015. 10. 24. 오후 2: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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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독서묵상)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갈라1,6~12) 2012.10.07.(435)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1) 

갈라티아서 1장 6~10절에서 다른 복음을 쫓는 갈라티아인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책망한 사도 바오로는, 이제 1장 11~17절에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변증하기 위하여 이 복음이 신적 기원을 가졌음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배후에는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논지를 전개하면서, 사도 바오로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 (adelphoi; 아델포이)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형제들과는 대조되는, 배교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는 갈라티아 지방의 이방 성도들을 향해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같은 조상을 가진 다른 유대인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레위19,17;신명1,16; 사도행전7,2; 로마9,3),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의 종교 공동체에서도 그 구성원들이 서로를 '형제들'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볼때, 초대 교회에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을 '형제'로 불렀던 관습은 이러한 유대와 헬레니즘의 두 관습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사용된 '형제'라는 호칭에는 그 인식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 란 호칭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자신과의 관계적 측면에서,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는 측면에서 '형제들'로 부른데서(마르3,31~35)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였다(로마8,29).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더 나아가 이러한 공동의 관계를 기초로 해서 계속해서 '형제'라는 호칭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애로써 애정깊은 상호 공조의 자세로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로마14,10.13.15; 1코린5,11; 6,5~8; 8,11~13; 2코린1,1; 2,13).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심지어 본서와 같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엄격한 어조 가운데서조차 그들에게 '형제들'이란 호칭을 사용하여 자신과 갈라티아 교인들간의 형제로서의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지금 그러한 사실조차 잊은 채, 배교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2)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왜냐하면'이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가 나온다. 1장 12절 전체가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을 좇아 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1장 11절의 까닭을 상세하게 해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본절은 '우데 ~ 우테'(ude ~ ute)라는 이중 부정 구문을 사용하여 사도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그리고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전한 복음의 기원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 신적인 계시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원문에는 '내가' 에 해당하는 1인청 주격 대명사 '에고'(ego)가 사용되고 있다. 희랍어에서는 동사에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격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주어를 특별히 부각시키고자 할 때에는 사용한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지방에서 활동하는 거짓 교사들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거짓 복음을 전했던 반면에, 자신은 이들과 달리 신적 기원을 가진 참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에고'(ego)란 1인칭 주격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당시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 인도되고 있는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우선 왜곡된 거짓 복음에 대한 경계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앞에서 '우데 ~ 우테'(ude ~ ute)란 이중 부정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혀 인간적인 것과 관계없음을 강하게 변론한 후에, 새 성경은 '오직' 이란 부사로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그러나'(but)란 뜻을 지니는 접속사인 '알라'(alla)를 사용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의 기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갈라1,13~24)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5~16) 

'따로 뽑으시어' 에 해당하는 '아포리사스'(aphorisas)의 원형 '아포리조' (aphorizo)'경계를 지어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동사로서 '갈라내다'(마태13,49), '분별하다'(마태25,32), '따로 세우다'(사도13,2)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할 목적으로(15절) 하느님께서 사도 바오로를 따로 세워 임명했음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에는 단순히 사도 바오로의 개인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택하심 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느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선택하신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란 표현은 하느님의 선택이 사도 바오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할 때,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루어진 신비한 것이며 불변할 것임을 보여준다.이와 더불어 이러한 표현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녔던 소명 의식나타낼 때에도 사용된 표현이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사49,1; 예레1,5). 즉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그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아드님을'로 번역된 '톤 퓌온 아오투'(ton phion autu)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표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그분의 신성(神性)이야말로 복음 선교의 주요 내용임을 드러낸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당신의 아드님을', 곧 '하느님의 아들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계시해주셨습니다'라고 번역한 '아포칼맆사이'(apokalypsai)의 원형 '아포칼맆토'(apokalypto)는 본래 '덮개를 벗기다', '베일에 가리거나 덮인 것을 열어젖히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특히 신학적으로는 구원과 관련하여 이런 의미에서 발전하여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대해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마태11,25; 루카10,21; 1코린14,30). 본문은 분명히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계시를 받은 사건(사도9,1~19)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1서에서는 '아포갈맆토'동사 대신에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지닌 '호라오'(horao)동사를 사용하고 있다(1코린9,1; 15,8). '호라오'동사가 외적인 경험을 나타낸다면, 본문의 '아포갈맆토'는 내적인 체험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때 내적 계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을 번역하면 '나는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로'로 번역된 '유테오스'(yutheos)'즉시'(immediately)라는 뜻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또 이방 선교 사명에 대한 명령을 받은 '직후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사람'이란 표현은 '살과 피로'(with flesh and blood)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피를 나눈 가족(혈육)을 지칭하기 보다는 피조물인 연약한 인간지칭한다(마태16,17; 히브2,14). 즉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을 가지고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뜻을 내포한다.



제27주간 수요일 (갈라2,1-2.7-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14)

'모든 사람 앞에서' '앞에서' 에 해당하는 '앰프로스텐'(emprosten)는 부사 혹은 전치사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단어가 재판관이나 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것이다.(마태27,11; 루카21,36 ; 사도18,17 ; 2코린5,10) 바오로는 마치 검사가 피고의 죄목을 논고하듯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이민족처럼 살면서' 에 해당하는 '에트니코스'(ethnikws)'이방인'을 뜻하는 '에트니코스'(ethnikos)에서 유래된 부사로서, '이방인같이'(like the Gentiles), '이방인의 방식을 따라' (after the manner of Gentiles)란 뜻이다.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에 해당하는 '유다이코스'(yudaikos) 역시 '유다인처럼', '유다인의 방식을 따라' 란 뜻의 부사이다. '이민족처럼 살면서' 라는 말은, 율법을 수여받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매여 살던 베드로 당신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없던 이방인들처럼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의 옛 방식을 살지 않으면서' 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할례받은 자들을 두려워하여(12절) 비겁하게 자리를 피함으로써, 그의 이방인을 향한 마음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책망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결과적으로 그의 이 비겁한 행동은 위선이 되었으며, '억지로 이방인을 유다인답게 살게 하려' 한 꼴이 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베드로의 이 행동을 놓고, 복음 선포자로서의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 일행의 예루살렘 사도회의 참석 바오로의 이방인 사도직에 대한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공식 인정과 관련하여 보도하고 있는 2장 1절 ~ 10절에 이어, 2장 11절 ~ 14절은 바오로가 베드로 책망 사건 회상을 통해 율법주의적 잔재를 지적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가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은 그 구체적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베드로가 바오로가 사목하던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했을 때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바오로가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 시점일 것이다. 

책망의 사유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 있다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다인들을 피하였고, 그로 인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다인, 특히 바르나바까지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바오로는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행동하지 아니하고 상황에 따라 이중적으로 행동한 데 대하여 책망하였던 것이다.



 제27주간 목요일 (갈라3,1~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 (5) 

사도 바오로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이 전한 너무나도 분명한 믿음을 통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진리를 저버린 갈라티아 교인들의 영적 우매함을 반어법적 질문을 통해 통렬히 3장 1~5절에서 책망하고 있다. 

즉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 교인들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이것을 그들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믿음을 버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율법으로 회귀한 영적 어리석음을 범한데 대하여 반어법적 질문을 통해 질타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다시 바른 신앙을 회복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3장 1절에 그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확실하게 믿고 있었지만, 그 믿음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려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이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에 따른 행위'와 '복음을 듣고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의 불완전하고 나약한 본성의 소유자인 우리는 율법을 지켜 자력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를 짓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대속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께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과 복락의 길이 열렸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필요없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율법의 정신인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안에서의 이웃 사랑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 입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 율법을 자연스럽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서 율법의 정신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으로 번역된 '운(un)'그러므로'란 뜻인데, 문장에서 결론을  내릴 때와 문장들을 논리적으로 함께 연결할 때 사용되는 접속사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3장 2~4절의 내용을 3장 5절에서 요약하여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그리고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피코레곤'(epishoregon)'그리하시는 것입니까'에 해당하는 '에네르곤'(energon)은 각각 '공급하다'(콜로2,19)란 뜻을 지닌 '에피코레게오'(epishoregeo)'행하다'란 뜻의 '에네르게오'(energeo)현재 분사형이다. 

모두 관사 '호'(ho)의 지배를 받는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각각 '주시는 이', '행하시는 ~ 일이'란 뜻을 나타낸다. 이처럼 두 단어가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된 것 지금 현재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다'란 의미로 번역된 '에피코레게오'는 일반적으로 '주다' 란 뜻을 갖는 '디도미'(didomi)동사와 달리 '값없이 제공하다','선사하다' 란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받은 위로자요, 변호자이신 성령께서 값없이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3장 5절 원문에는 문장 구성상 동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3장 5절이 앞에서 언급한 3장 2~4절을 요약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본문의 완성된 문장을 추론해 낼 수 있다. 3장 2절에 '여러분은 ~받았습니까'에 해당하는 '엘라베테'(elabete)3장 4절에 '여러분은 ~ 체험했습니다'에 해당하는 '에파테테'(epathete)그 해답의 열쇠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그 성령을 여러분이 받은 것이(엘레베테),그리고 하느님께서 행하신 그 능력들을 여러분이 체험한 것이(에파테테),율법의 행위에서인가, 복음을 듣고 믿음에서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너무나 당연한 후자의 대답이 나오는 이러한 질문을 통하여 갈라티아서 수신자들이 직접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제27주간 금요일 (갈라3,7~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습니다.  성경에 "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지적했듯이, 율법은 그 특성상 모든 율법 조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온전히 지킬 것을 요구하는데,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결국 율법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살 수 없음을 반의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율법의 저주아래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3장 13절의 상반절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로 번역된 '엑세고라센'(eksegorasen)원형 '엑사고라조'(eksagorazo)'되사다','대가를 지불하여 타인의 지배에서 소유권을 되찾다', '몸값을 치르고 되찾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도록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우리에게 선포한 단죄의 판결과 그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대해(신명30,15.19; 요한3,36; 로마5,12; 에페2,3)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되찾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대속(탈출21,30)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그 속전은 바로 무죄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피였다(1코린6,20; 7,23; 묵시록5,9)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 것이다. 

이사야 예언서 53장 6절"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사실이 이미 하느님의 깊으신 계획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대속적인 것이며,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의로움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2코린5,21)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신명기 21장 23절 인용한 부분이다. 그런데 신명기는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로 표현하여 저주를 내리는 주체가 '하느님'임을 명확히 제시해 주고 있는 반면에, 본문에는 '하느님께'에 해당하는 '휘포 테우'(hypo theu; LXX 70인역) 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하느님에 의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인 생략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명기의 인용구 자체가 직접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처형 방법은 로마 시대에 보편화된 것이며, 모세 당시에는 생소한 것이었다. 오히려 신명기는 형을 집행하고 난 뒤, 죄인의 시체를 기둥이나 나무에 매달게끔 되어있는 관습을 반영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시체의 매달림이 저주를 의미한다는 구약의 관습적 사상을 들어서, 나무에 달린 채 죽어가는 십자가 형벌은 두말할 나위없이 저주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7주간 토요일 (갈라3,22-29)2012.10.12(440)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27.29)

'하나되는'에 해당하는 '에이스'(eis)는 기본적으로 '~안으로'(into)란 뜻을 지닌 전치사이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속하여'(1코린10,2), '~와 연결하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례'는 단순한 외적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유'로 말미암아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서  '자기 육을 그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갈라5,24.25).이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자'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 관계에 들어간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한 새로운 관계를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13,14) 또한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 인간을 입는 것'이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4,23.24)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29) '그리스도께 속한다면'(그리스도께 속한 자)에 해당하는 '크리스투'(christu)'크리스토스'(christos)의 소유격으로서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번역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것'이란 뜻이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이며, 인종이나 신분이나 지위나 성별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 곧 그의 진정한 영적 후손이 된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에 따른 상속자가 된다. 

본문에서 '상속자입니다'에 해당하는 '클레로노모이'(kleronomoi)는  '상속자'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kleronomos)의 복수형으로 갈라티아서 3장 18절의 '상속 재산'(유업)에 해당하는 '클레로노미아'(kleronomia)와 동일한 어근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따라서 '상속자'(유업을 이을 자)란 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할 자'란 의미를 갖는다. 

갈라티아서 3장 12절부터 계속 되어온 모든 진술들을 통하여 사도 바오로는 율법과 믿음의 차이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모세 율법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진정한 영적 후손으로 만들지 못한다. 또한 우리를 그 상속자로 만들지도 못한다. 이것을 이루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약속뿐이다.그것은 믿음이요,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세례이며, 결코 율법이 아니다.


하가르의 추방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갈라4,22~24.26~27.31~5,1)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25-26)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는'에 해당하는 '하티나'(hatina)'호스티스'(hostis)중성 복수형이며, '호스티스'는 일반적으로 앞에 나온 명사를 받는 관계 대명사 '호스'(hos)와는 달리, 앞에 나온 진술에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계 대명사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여기에는'(이것들)이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가르 및 두 아들과 관련해서 언급한(22,23절)것들을 요약적으로 대변하며, '하티나'(hatina)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지닌 해석학적인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해석학적인 특성이란 바로 '우의'이다. '비유'에 해당하는 '알레고루메나'(allegorumena)'우의적으로 말하다'(speak allegorically),'우의적으로 해석하다'(interpret allegorically)란 뜻을 가진 '알레고레오'(allegoreo)현재 분사 수동태'우의적으로 해석되는 것' 이란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의적으로'(allegorically)란 말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교훈 방법이었던 '비유' 곧 '파라볼레'(parabole)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파라볼레'는 한 사물이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거나 연상할수 있는 다른 사물 혹은 사실을 예로 들어 서로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언어의 한 표현 방법이다. 이와는 달리 '알레그레오'는 어원적으로 '다른' 이란 뜻의 '알로스'(allos)가 합성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그 사건의 일반적 이해와는 다른 어떤 해석이나 사실을 설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른' 해석이나 사실은 그 본래적인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본래적인 사건을 기초로 하면서 그 뒤에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바오로는 아브라함과 그 두 아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뒤에 감춰진 현재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우의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현재적 삶에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학습장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가르치시려고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현재 상황에 적용토록 하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바오로는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란 표현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바오로는 앞서 22절, 23절의 내용이 우의임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왜 이것이 우의가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왜냐하면' 이란 뜻이 있는 '가르'(gar)로 시작된다. 즉 본문은 계집종과 자유인 여자두 계약이란 측면에서 이것이 우의가 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계약은 물론 하느님의 은혜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갈라3,16~18)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통하여 모세와 맺은 계약을 가리킨다.(갈라3,19) 그런데 여기서 '두'(dyo ; 뒤오)란 표현은 이같은 두 개의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여기서 '뒤오'는 그 둘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표준 원문은 '뒤오' 앞에 정관사 '하이'(hai)가 첨가되어 있다. 희랍어에서 '뒤오' 가 관사와 함께 사용될 때는 그 둘이 별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마태19,5 ; 마르10,8 ; 1코린6,16 ; 에페5,31)

본절에서도 표준 원문은 하가르와 사라로 알레고리화되는 이 두 계약이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강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관사를 붙였다고 볼 수 있으며, '뒤오' 자체가 이런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 바로 하가르입니다' 원문으로 볼 때 강조 문장이다. 새 성경은 번역되지 않았으나, '진실로'(마태3,11), '과연'(마태17,11)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멘'(men)이란 불변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시나이산으로부터 나와서 종살이할 자식을 낳았던 한 계약, 하가르가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문은 시나이산으로부터 종살이할 자식을 낳은 계집종이 누구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그는 바로 '하가르'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4절 후반절과 25절에서 계집종 하가르를 통하여 율법의 성격을 설명했던 바오로는 이제 본절에서 자유인 사라를 통하여 계약의 성격을 설명한다. 이처럼 본절의 내용이 앞선 내용과 대조된다는 사실은 '그러나'(but)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 '데'(de)가 잘 보여준다. 

율법과 계약의 차이점'지금의 예루살렘' 으로 묘사된 반면, 계약이 본절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ano yerusalem ; 아노 이예루살렘)으로 묘사되고 있고, 25절의 '종살이를 하고' 란 표현이 본절에서는 '자유의 몸' 이란 표현으로 바뀐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란 표현은 하가르와 사라의 신분이 그에 속한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바와같이 사라로 비유되는 계약에 속한 자 모두가 사라와 같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며, 이것은 갈라티아 교인들도 이러한 축복 가운데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제28주간 화요일 (갈라5,1~6)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으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6)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로 번역된 '(우테 페리토메 티 이스퀴에이 우테 아크로비스티아 ; ute peritome ti ischyei ute akrobystia)직역하면  '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고 비할례도 (아무 효력이) 없다' 이다. 

'우테 ~ 우테'(ute ~ ute)는 영어의 'neither ~ nor' 과 같이 '~도 아니고 ~도 아니다', 혹은 '~도 없고 ~도 없다' 라는 이중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그리고 번역이 생략된 '티'(ti)'어떤 것'(anything)을 뜻하는 형용 대명사이며, 본문에서는 '우테'(ute)와 함께 쓰여 '아무것도 아니다(없다)' 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요하지' 에 해당하는 '이스퀴에이'의 원형 '이스퀴오'(ischyo)원래 '~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란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 '육체적으로 강하다' 즉 '건강하다'(마르2,17), '능히 ~하다'(루카6,48), '~할 힘이 있다'(루카16,3), '~할 수 있다'(필리4,13), '효력이 있다'(히브9,17) 등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우테 ~티 이스퀴에이''~ 할 수 있는 아무 힘도 없다','아무 효력도 없다' 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니고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신 가운데 다른 두 곳에서도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는 갈라티아서 6장 15절이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코린토 전서 7장 19절이다."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이 구절들을 비교하면 본문의 의미를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세 경우에서 모두 사용된 반어법적인 확실한 말은, 그렇다면 과연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효력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란 문제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절에서는 이것은 바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임을 밝히고 있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왜 사도 바오로가 갈라티아서에서 두 번씩이나 할례 뿐만 아니라 '비할례' 역시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할례'(peritome;페리토메; circumcision)란 말에 대한 반대말로서 그 말을 첨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할례를 받음으로써 구원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할례를 받지 않음(비할례; akrobystia; 아크로비스티아; uncircumcision)으로써, 유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은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은 그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7장 18절"누가 할례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받은 흔적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누가 할례 받지 않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라는 권면을 통해서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할례나 비할례 어느 쪽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할례를 받거나 비할례로 남거나 그것은 어느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서 의롭게 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믿음' 만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필요없이 관심을 가졌던 할례와 비할례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앞선 두번의 부정에 이어, 바오로는 '그러나'(alla; 알라; but)란 뜻의 접속사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이 부분에 집중시킨다.

여기서 '~으로(써)' 에 해당하는 '디'(di) '~을 통하여'(through), '~으로 말미암아'(by)란 뜻의 매개체나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써, '믿음' 이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비할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행동하고 표현되는 믿음만이 효력을 갖는 것이다.

한편 '행동하는' 에 해당하는 '에네르구메네'(energumene)의 원형 '에네르게오'(energeo)'운동력있게 일하다' 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의 형용사형 '에네르게스'(energes)는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라는 표현에 쓰였다. 

따라서 '에네르게오' 라는 단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효력을 갖는데, 그 믿음도 사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살아서 운동력있게 나타나는 믿음뿐이라는 사실이다.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갈라5,18~25)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입니다. 이러한 것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22) 

'열매'라고 번역되는 '카르포스'(karpos; fruit)는 성령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사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성령의 역사하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 안에 작용하는 한편,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응답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을 아홉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흔히 성령의 9가지 열매 지칭되는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의 은총과 진리안에서 자유를 얻게된 모든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마땅히 드러내고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한편 19절의 '육체의 행실'에서 '행실'(일)에 해단하는 '에르가'(erga)복수형으로 쓰인 것에 반해, '열매'에 해당하는 '카르포스'(karpos)단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혜들이 그 자체로서 통일성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사랑,기쁨,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말하고, <인내, 호의,선의>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이며,<성실,온유,절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 말한다.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agape; love)는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의미한다(요한3,16; 로마5,18). 따라서 본문에서 '아가페' 용어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우리도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 있다. 바오로는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그러한 사랑의 진리를 장엄하게 외치고 있다.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1티모1,5).

'기쁨'(마태2,10)을 뜻하는 '카라'(chara; joy)는 저급한 인간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오는 순간적이며 육적인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기쁜 마음을 의미한다(로마14,17; 15,13). 즉 이것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을 가리키는 것이다.

'평화'(마태10,13; 루카24,36; 로마10,15)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히브리어 '샬롬'(shallom)마찬가지로 우선적으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화해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느님과의 평화를 의미한다(로마5,1).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평화가 우리 자신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평화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의 상호 의존성 코린토 후서 13장 11절과 콜로사이서 3장 14절,15절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그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면(필리4,7), 우리 성도들의 관계 속에서도 그러한 그러한 평화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인내'에 해당하는 '마크로티미아'(makrothimia; patience,longsuffering) '길다'라는 의미의 형용사 '마크로스'(makros)와 '마음','감정'을 뜻하는 '티모스'(thymos)의 합성어로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계속하여 참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관용할 줄 아는 성품 뜻하는 말이며, 역시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로마2,4; 1베드3,20)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호의'(자비, 인자; 로마11,22)를 뜻하는 '크레스토테스'(chrestotes; kindness)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성품','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봉사하려는 마음' 뜻하는 말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특히 하느님의 자비하심, 곧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무한한 친절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말이다(로마11,22; 에페2,7). 성령의 열매로서 '호의'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의'(양선, 선함; 로마15,14)를 뜻하는 '아가토쉬네'(agathosyne; goodness)선한 성품과 행동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이 명사형은 신약 성경에서 모두 4번 사용되고 있는데(로마15,14; 갈5,22; 에페5,9; 2테살1,11), 하느님의 선하심을 가리키는 말로서는 사용되지 않고, 인간적인 선을 지칭하는 말로서만 사용되고 있다.

'성실'로 번역된 '피스티스'(pistis; faithfulness)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사용된 명사로서 거의 대부분 '믿음'(마태8,10)이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믿음'으로 번역된 까닭은 '피스티스'가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나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이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미덕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믿음'(faith)이나 '충성'보다는 '신실 함'(faithfulness)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충성'이란 표현은 수직적이고 상하 관계의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이다. 즉 본문에서 '피스티스'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는 자질의미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온유'에 해당하는 '프라우테스'(prautes; gentleness,meekness)이웃을 향한 윤리적 관용 의미한다. 우리에게 어떤 해(폭력)를 가하는 자에 대해 위협적인 보복으로 분개하지 말아야 할 것 말하는 것이다(2티모2,25). 

'절제'를 뜻하는 '엥크라테이아'(engkrateia; seif-control,temperance)하느님을 향한 것도,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향한 미덕이다. 이 말은 특히 19절에 언급된 성적(性的)인 문제들에 있어서의 절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것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막는'에 해당하는 '카타'(kata)는 '~에 반하는','거스르는'(against),'~에 대항하는'이란 뜻을 지니 전치사이다. 여기서도 갈라티아서 3장 21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법은'에 해당하는 '노모스'(nom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세속적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 '성령의 열매'를 거스려 그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율법이 없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결코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갈라3,18).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맺어진 이러한 덕목들은 모든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갈라5,14).                     http://cafe.daum.net/FiatLove/mCrC/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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