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6장-15(독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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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 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 유지가 힘든 과부들 (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 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젠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 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6,8~15)
"그 무렵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8)
사도행전 6장
1~7절은 초대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생겨난 배급 (구제)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부제를 선출한 내용과 더불어 그 이후 교회가 더욱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도행전 6장 8~15절은 이때 선출된 자 가운데 한 명인 스테파노 부제의 활동 및 체포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던 핍박이 보다
본격화되고, 급기야 최초의 순교자를 내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 가운데 본절에서는 스테파노 부제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으로 번역된 '테라타'(terata)와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아'(semeia)들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은총'에 해당하는 '카리토스'(charitos)와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메오스'(dynameos)는 사도행전 6장 5절의 '믿음과 성령 충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여기에서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스테파노
부제의 인자한
성품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사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당시까지 초대 교회에서는 큰 이적과
표징들을 열두 사도만이 행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는 열두 사도로부터 안수받은 스테파노와 필리포스 같은 부제들도
이러한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사도 8,13). 하지만 스테파노와 필리포스 부제는 안수받기 전에도 이적과
표징들을 행했을 것이며, 이적과
표징들을 행함으로써 교회 공동체로부터 성령이
충만하다는 증거를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사도 6,3).
그러나 본절의 기록이나 필리포스 부제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8장의 기록으로 보아서 이들이 사도들로부터 안수받은 이후에 더욱 활발하고 능력있게 이적과 표징을 행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 역시 초대 교회가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7,51~8,1ㄱ)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51)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55)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8)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51)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50절까지 스테파노 부제는 예수님 복음의 정통성과 유대인의 오류를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논증했다.
율법과 (예루살렘)성전을 절대시하는 유대인 그들 스스로가 율법을 어기며 성전을 우상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스테파노 부제의 변론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지금 현재 스테파노 부제의 말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최고 의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책망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이고(51), 둘째는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려 행한다는 것이며(52),셋째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거슬려 행한다는 것이다(53).
스테파노 부제는 그들을 향해 '목이 뻣뻣한 사람들아'라고 부른다. 이것에 해당하는 단어 '스클레로트라켈로이'(sklerotracheloi)의 원형 '스클레로트라켈로스'(sklerotrachelos)는 '목이 뻣뻣한(곧은)'이란 의미이며, 비유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stubborn and obstinate)이라는 뜻이다. 즉 '교만하다'는 의미보다는 '자기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하려 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하느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탈출33,5).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라는 말도 표현만 다를 뿐, '목이 뻣뻣한 사람들아'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할례'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일컬을 때,'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칭하면서 업신여겼다(창세34,14; 판관14,3; 1사무17,26; 1역대10,4).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서도, 내적으로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레위26,41; 신명10,16; 예레4,4; 9,26). 즉 그들의 마음은 항상 죄의 정욕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둔감하였고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표현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경향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동일하였다(마태23,37; 요한5,59).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63장 10절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영을 거역하고 괴롭혔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의 적이 되시어 몸소 그들과 싸우셨다' 라는 구약의 표현을 상기시키지만,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이다.
'거역하고'에 해당하는 '안티핍테테'(antipiptete)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줄곧'으로 번역된 '아에이'(aei)는 '영원'(eternity)을 뜻하는 '아이온'(aion)과 관계된 단어로서 '끊임없이', '영원히','변함없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유대인들의 변함없는 완악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5) 여기서 '하느님의 영광'이 무엇일까? 먼저 빛이신 하느님(1요한1,5)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의 광채를 나타낸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사도행전 22장 11절에도 동일하게 '영광'을 나타내는 '독사'(doxa)라는 단어가 쓰였으며 '빛'(광채)으로 번역되었다. 바오로는 이 광채로 인하여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스테파노 부제는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고(에이덴; eiden)한 것으로 보아 본절의 '독사'(doxa)는 시력을 해칠 만큼의 강한 '빛의 광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이것은 하느님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표시(sign)였을 것이다.
타불산에서 제자들이 변모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 즉 '독사'(doxa)가 시력에 손상이 없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스테파노 부제가 본 것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온 우주의 지배자이신 하느님과 그와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위엄(majesty)와 영광(glory)으로 이해할 수 있다(1베드4,11; 마태24,30). 그리고 '오른쪽에'로 번역된 '덱시온'(dexion)의 원형 '덱시오스' (dexios)는 말 그대로 '오른편'(right)를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오른편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자리이다(시편110,1).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과 그 위엄과 영광을 동일하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유대인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죽임당한 예수님께서는(마태26,65.66) 결코 신성 모독자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금은 그의 예언 그대로(마태26,64) 하느님으로부터 영예로운 대접을 받으면서 영적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까지 보여준다.
다음에 '서 계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드러내면서 믿음으로 순교의 자리에 서 있는 스테파노 부제를 격려하고 환영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스테파노 부제가 믿음의 순교자라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서 증언해 주는 증인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앉아 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테파노 부제는 결고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과 동일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 보고 계시는 가운데 순교하고 있는 것이다. 스테파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삶의 승리자였다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8) 일제히 달려든 유대인들은 스테파노 부제를 질질 끌고 예루살렘 성(城)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간 것은 죄인을 처형할 때 '진 밖에서' 행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레위24,14)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시킬 때 죄인의 부정(不貞)으로부터 예루살렘 성(城)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城) 밖에서 쳐죽였다.예수도 예루살렘 성(城) 밖 골고타 언덕에서 처형당했다(루카23,33).
'돌을 던졌다'에 해당하는 '엘리토볼룬'(elithobolun)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이것은 스테파노를 돌로 치는 시간이 상당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 즉 그들은 한 두번 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의 격정과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스테파노에게 연신 돌을 던졌던 것이다. 악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추악한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들이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인 것은 그들이 스테파노 부제의 발언을 신성 모독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유대 율법에서는 주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나 다른 신을 섬긴 자(신명13,9.10), 신접자나 박수 등의 무당들(레위20,27)에 대해 돌로 쳐죽이는 형벌을 명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유대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쳤다는 것은 그에게 사형을 집행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사형 집행권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유대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 언도 권한은 있어도 집행 권한은 없었다(요한18,31).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권한으로 스테파노를 처형했는가? 첫째 그들의 행동이 로마 관리에게 쉽게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스테파노 부제를 즉결 처형한 것이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카이사리아에 살고 있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스테파노 부제를 죽이는 일과 같은 사건이 터져도 쉽게 알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설령 빌라도 총독이 알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그는 정치적 입지가 매우 불안했으므로, 유대 최고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인 대사제를 비롯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눈감아 줄 이유가 충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요한19,12).
이러한 가능성이 상황적으로 볼 때 충분했지만, 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쳐 죽인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부정과 오류를 정곡으로 찌르는 스테파노 부제의 말(51~53절)과 신성 모독적이라고 여겨지는 발언(56절)에 이성을 잃고 격정과 분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쳐죽일 때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 둔 것은 어깨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쉬나(Mishinah)의 기록에 따르면, 죄인을 죽일 때 첫번째 증인이 죄인의 뒷머리를 잡고 숙이게 한 다음 돌로 쳐 넘어지게 하면, 두번째 증인이 돌을 들어 죄인의 가슴을 쳤으며, 그런 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돌을 들어 집단적으로 던짐으로써 죽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편, 여기에서 처음 언급하고 있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이름이다. 사도행전 전반부의 핵심 인물이 베드로라면, 후반부의 핵심인물은 바오로인데, 바오로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증인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권위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 출신의 유력한 사울을 증인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의 처형을 마땅히 여기면서도(사도8,1), 그의 당당한 순교 장면을 지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그리스도교인에 대하여 이처럼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울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 사건에 직접적인 핍박자로 연관되었던 자가 후에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서 복음의 위대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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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8,1ㄴ~8)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3)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원문에 '사울'로 번역된 '사울로스'(Saulos)가 문장의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회심하기 전 사울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모습을 강조하여 그 이후의 헌신적인 사울의 모습과 대조시키기 위한 기교적 표현이다.
여기서 '없애 버리려고'로 번역된 '엘뤼마이네토'(ellymaineto)는 '황폐하게 하다', '망하게 하다', '학대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뤼마이노마이'(lymainomai)의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이다. 이 단어는 멧돼지가 밭에 들어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 잠언 18장 9절에 '제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파괴자의 형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못쓰게 만들다', '철저히 파괴하다', 비유적으로 '사람을 망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사울은 매우 강렬한 기세로 그리스도교를 계속 핍박하려고 덤볐던 것이다. 사울의 의도는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는 것이었으며, 그 양상은 그리스도교를 짓밟고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울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고 박해하여도,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결코 진멸되거나 말살되지 않았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역사 및 교회사를 통해 여실이 증명되고 있다.
한편, 사울이 박해의 대상으로 삼은 자는 '남자든 여자든'으로 표현된 '안드라스 카이 귀나이카스'(andras kai gynaikas)이다. 이것은 사울이 '남녀'를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는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표현인 동시에 당시 교회안에서의 여자의 비중도 매우 컸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 더 늘어났다.' (사도5,14)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볼 때 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충만을 받은 여자들은 복음 전파나 교회안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4) 사도행전 8장 4절부터 13절까지는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복음이 두루 널리 퍼져서 사마리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사도행전 1장 8절의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대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되는 시발점이 기록된 구절이 바로 사도행전 8장 4절이다.
본문의 '흩어진 사람들' 즉 '핍박으로 흩어진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어떤 안전한 곳에 숨어 버린 것이 아니라 두루두루 다녔다고 말한다. 여기서 '흩어진 사람들'을 뜻하는 '디아스파렌테스'(diasparentes)의 원형 '디아스페이로'(diaspeiro)는 '분배'(distribution)를 의미하는 전치사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이로'(speiro)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원어적 뉘앙스로 볼 때, 이 흩어진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서 마치 씨앗처럼 널리 퍼져 많은 결실을 맺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로 번역된 '디엘톤'(dielthon)은 '~을 통하여 다니다'라는 의미의 동사 '디에르코마이'(dierchomai)의 부정(不定) 과거 복수(pl.)이다. '디엘톤'은 '모든 곳으로 갔다'(went everywhere)와 '가는 곳마다'(wherever they went) 그리고 '주위를 다녔다'(went around)등으로 번역되어,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선포를 암시하고 있다.
스테파노가 순교를 당하였고, 많은 그리스도교 남녀 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었는데도, 복음의 전파가 더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더욱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형제들이 내가 갇혀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더욱 대담하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필리1,14).
결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박해와 핍박이 나쁜 것만이 아니며,교회의 영혼인 성령께서는 박해를 통한 흩어짐을 통해 더 많은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복음을 전하거나 살다가 겪게 되는 고통이나 핍박 때문에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그럴수록 더욱 더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부활 제3주간 제1독서 (사도8,26~40)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 (26)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39)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선교와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기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8장 4~25절에 이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부터 40절까지는 필리포스의 에티오피나 내시 선교 및 서부 해안 지역 선교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포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주님의 천사' 즉 '앙겔로스 데 퀴리우'(anggellos de kyriu)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천사' 혹은 '주님의 사자'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천사'를 네 번 언급한다. 즉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5,19), 필리포스에게 지시하는 주님의 천사(사도8,26), 감옥에서 베드로를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12,7~10), 헤로데를 내리친 주님의 천사(사도12,23)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님의 천사'는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다. 즉 사도행전 8장 29절과 39절에 다시 '성령','주님의 성령'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주님의 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도와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등장하는 데는 특별한 선교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계속해서 더 큰 선교의 역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혹은 '외딴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땅으로 보내지며,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완전한 주관하심 가운데 그분에게 이끌려 이제까지의 복음 선교의 터전 사마리아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어 보이는 광야로 가야 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일어나 ~ 가거라' '일어나'로 번역된 '아나스테티'(anasteth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신약 성경에서 108회 사용될 정도로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의미도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에서는 '준비하라'(get ready)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여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 보다 적당한 명령이다(마르1,35). 따라서 필리포스가 이 명령을 듣게 된 상황이 잠자는 동안의 꿈속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의 두 단어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일어나'는 부정(不定) 과거이며, '가거라'는 현재이다. 이것은 '일어나'의 동작은 일시적인 것이며, '가는 것' 즉 여행하는 것은 지속적인 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필리포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쉼없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의 행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먼저 '남'(南)으로 번역된 '메셈브리안'(mesembrian)의 기본형 '메셈브리아'(mesembria)는 '중간의', '한가운데의'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날'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쪽'이라는 뜻과 함께 '한낮의'(midday), '정오쯤'(사도22,6)이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남쪽으로'로 번역된 '카타 메셈브리안'(kata mesembrian)는 '한낮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필리포스가 받은 지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된다.
그는 한낮에, 즉 따가운 햇볕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벼려진 길을 가야만 했다. 또한 '외딴길'로 번역된 '에레모스'(eremos)도 '광야'나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할 지, 아니면 '버려진', '사람이 살지 않는'을 뜻하는 것으로서 '가자'(Gaza)지방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사도행전 8장 36절의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를 참조할 때, '외딴길','황폐한 길'이 더 자연스럽게 보여 대다수 번역본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필리포스의 선교와 세례의 집전은 '주님의 천사'(26절), '성령'(29절), '주님의 성령'(39절)의 지시와 인도하심으로 되어졌다. 즉 필리포스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그 전(全)과정에 있어서 성령 주도적이며, 성령이 세밀하신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에서 '잡아채듯 데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원문상으로 볼 때 '헤르파센'(herpasen)는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를 뜻하는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不定) 과거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4회 쓰이는데, '빼앗아 감'(요한10,28), '파괴의 위험에서 구함'(유다23절), '신속히 잡아 데려가는 것'(요한6,15; 사도23,10), '한 사람을 신비롭게 혹은 매우 빨리 다른 장소로 옮김'(묵시12,5; 2코린12,2.4; 1테살4,17)등을 의미한다.
특히 테살로니카 1서 4장 17절의 경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동사를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필리포스는 단순히 길을 인도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붙들림에 의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간섭,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는 자신에게 성경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세례까지 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자기 길을 갔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이 그의 상황을 압도할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던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적 기쁨에 흠뻑 젖어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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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9,1~20)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3~5)
사도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건이다. 여기 사도행전 9장 3절에서는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사도행전 22장 6절에는 '정오쯤'이라고 시간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동족 유다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사도 바오로의 섬세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거기서 '정오쯤'으로 번역된 '페리 메셈브리안'(peri mesembrian; about noon)은 '가운데'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낮'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메셈브리아'(mesembria)가 시간(마태20,3; 마르6,48)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전치사 '페리'(peri; about)와 결합한 것이다. 자신의 회심 사건의 회고 가운데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도 바오로의 상세한 보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도행전 9장 3절에는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고 되어 있지만, 사도행전 22장 6절에는 '큰 빛'이 번쩍였다고 나온다. 즉 하루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태양이 내리쬐는 시간에 이 태양 빛보다 훨씬 강력한 '큰 빛'이 등장하였음을 말함으로써 초자연적 현상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사도22,6) 사도행전 22장 6절에서는 그 빛이 단순한 빛이 아닌 '큰 빛' 즉 '포스 히카논'(phos hikanon)으로 되어 있다. 특히 '큰'(great)으로 번역된 '히카논'(hikanon)은 '충분한'이란 뜻으로 사용된다(사도11,24; 19,26). 따라서 본절에서 언급된 '큰 빛'은 '많은 빛' 또는 '어마어마한 빛'(a great light)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 광선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신적인 빛이 분명하다. 이 빛이 초월적이며 신적인 빛이라는 사실은 '갑자기'로 번역된 '엑사이프네스'(eksaiphnes)가 더욱 강조해 준다.이 단어는 '갑자기'라는 뜻과 더불어 '뜻밖에', '홀연히'(suddenly)의 의미도 지닌다.
신약 성경에 사용된 5회의 용례 모두가 신적이며 초월적인 일들의 급격한 진입을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사도9,3; 마르13,36; 루카2,13; 9.39). 따라서 사도행전 22장 6절은 태양과는 또 다른, 신적이며 초월적인 어마어마한 빛이 '갑자기' 바오로를 비춘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 빛이 사도 바오로를 둘러 비추고 있다.
여기서 '둘레를 비추었다'로 번역된 '페리아스트랍사이'(periastrapsai)는 '주위에', '둘레에'를 뜻하는 전치사'페리'(peri)와 '붙들어매다', '고착시키다'를 뜻하는 '합토'(hapto)가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합성 동사이다. 따라서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이 구절은 한낮의 태양보다 더 어마어마한 신적이며 초월적인 빛이 사도 바오로 주위를 빙 둘러싸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이 구절은 사도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기록한 사도행전 22장 7절('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과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서 신적이며 초월적인 빛에 압도된
사도 바오로가 엎드러져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회고하는 장면이다.
사도 바오로가 엎어진 이 사건이 바로 신적이며 초월적인 어마어마한 빛 때문에 발생한 것인데, '엎어졌다'로 번역된 '에페사'(epesa)는 '떨어지다', '넘어지다','엎어지다'의 뜻을 지닌 원형 '핍토'(pipto)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에게 비친 큰 빛이 단순히 밝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힘을 가진 것이어서 그를 무력화시켰음을 시사한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사도9,4; 사도22,7)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26장 14절을 보면, "그리고 나는 히브리 말로,'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히브리 말로'란 표현은 사도 바오로가 들은 음성이 당시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대인들이 일상 생활 가운데서 사용하던 아람어화된 히브리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두 번 부르는 이중 호격을 사용했다.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부르시는 경우가 몇 번 나타나는데, 이때마다 연민을 품은 애정이 가득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루카10,41; 22,31). '박해하느냐'로 번역된 '디오케이스'(diokeis)는 '집요하게 괴롭히다'를 뜻하는 '디오코'(dioko)의 현재 능동태이다.
여기서 능동태가 사용된 것은 사도 바오로가 산헤드린의 재가를 거치고 대사제의 수락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사도9,1~2; 22,5), 사실상 대사제나 온 원로단의 수락이나 동의가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동기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는 자기 스스로 즉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동사가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일을 수행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오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외에도 실제로는 더 많은 박해와 핍박을 가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과 사도행전 22장의 같은 내용 중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사도행전 26장 14절에는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라고 번역된'스클레론 소이 프로스 켄트라 락티제인'(sklleron soi pros kentra laktizein;It is hard for you to kick against the pricks)라는 표현으로 더 나온다.
이것은 당시에 자주 사용되던 격언으로서 '가시채를 차서 심한 상처를 입은 소'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와 거의 동일한 표현이 아에스킬루스(Aeschylus)의 저서 <아가멤논>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가시채를 바로 차지 말라'를 뜻하는 '프로스 켄트라 메 락티조'(pros kentra me laktizo)라고 기록되어 있다.
'뾰족한 막대기'(가시채)로 번역된 '켄트라'(kentra)는 '켄트론'(kentron)의 복수형으로서 쟁기질하는 사람의 손에 있는 소몰이 '꼬챙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끝에 뾰족한 쇠나 뼈를 박은 막대기로서, 소가 말을 듣지 않으면 찌르기 위해 농부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여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그 소는 더욱 심하게 찔리고 상하게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것은 농경 문화의 배경에서 생겨난 격언인데, '신을 대적하는 행동은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 라는 교훈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어리석은 열정으로 하느님께 대적하는 바오로를 예수님께서 직접 꾸짖으신 것이다. 사실 바오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오로를 예수님 당신 자신의 박해자로 지목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바오로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9,5; 22,8; 26,15)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던 (마태28,20)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할 때 그들만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늘 같이 계셨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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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1,1~18)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 (14~15)
사도행전 1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할례받은 신자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코르넬리우스 가문과 함께 식사했다는 데 대한,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 및 베드로의 변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할례받은 신자들의 비판의 계기가 된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로마까지 복음이 증거되며 교회가 확장되는 역동적인 역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안에서도, 이방인 선교의 하나의 큰 전환점을 이루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의 회심 사건과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사건이다.
사실 이 사건은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폐쇄적인 유대적인 전통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이방안의 선교의 물꼬를 터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코르넬리우스의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의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다시 한번 베드로의 변론을 통해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서도 이방인의 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됨으로써, 이방인의 선교의 길이 더 환하게 열렸음을 보여 주려는, 역사가인 동시에 그 자신이 선교사이기도 한 사도행전 저자의 의도적인 기술이다.
'그가 너에게 말씀을 일러 줄 터인데, 그 말씀으로 너와 너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14) 본절은 병행 구절인 사도행전 10장 30~33절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이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에게 전한 말이었음은 분명하다. 코르넬리우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말을 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한 말인 것이다. 여기서 '너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파스 호 오이코스 수'; pas ho oikos su)는 '집의 거주자들', '한 집안 식구'라는 뜻이다. 즉 구원의 범위가 코르넬리우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 살고 있는 가족 모두에게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처럼,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를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목적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그 온 집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본절의 코르넬리우스의 이 진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할례를 받은 후에야 구원에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방인 코르넬리우스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러한 절차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본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리셨습니다.'(15) 본문을 직역하면, '성령이 떨어졌다'(epepesen to pneuma to hagion;에페페센 토 프뉴마 토 하기온; the Holy Spirit fell)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무거운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거나 덮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는 이것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본문의 '에페페센'(epepesen)은 성령의 주도적 역사를 더 강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성령께서 임하신 시기를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라고 언급했는데, 사도행전 10장 44절을 보면,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다르게 언급하고 있을까?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사도10,34) 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결과는 신령한 언어(방언)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 나타났는데, 이 표징은 베드로가 설교를 다 마치는 때에 맞추어 일어났을 것이다(사도10,46).
그러니까 본절인 사도행전 11장 15절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가 시작될 때부터 각 사람에게 임하여 그들의 심령과 영혼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도행전 10장 44절은 베드로의 설교 말미에 신령한 언어와 하느님을 찬송하는 행위로써 성령받은 사실이 외적 표징으로 나타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성령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코르넬리우스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말해서 성령께서 유대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 부어진 것처럼, 이제 이방인들 중의 믿는 자들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말한다.즉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카이사리아에서 있었던(사도10,1) 코르넬리우스 가정의 성령 강림은 이방인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처음에 우리에게 내리셨던 것'이란 표현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성령께서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에게 말함으로써,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행위가 전혀 비난받을 것이 아님을 힘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말)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 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사도9,27; 11,30; 12,25; 13~15장;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 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 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제자로서의 기본 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 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 표정, 사고, 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 (prostithemi)로서, 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12,24~13,5ㄱ)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말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 (2~3)
사도행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1장~7장까지로 예루살렘 교회 설립 및 성장을 다룬다. 둘째 부분은 8장~12장까지로 유다 중심의 복음 전파 활동에서 이방 중심의 복음 전파 활동을 위한 과도기로서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 주변으로 까지 복음이 확장되는 역사를 다룬다.셋째 부분은 13장~28장까지로 본격적인 이방인 중심의 복음 증거의 역사를 다루어 복음이 안티오키아에서 로마까지 미치는 역사를 기술한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도행전의 셋째 부분을 시작하는 장이다. 그리고 복음 증거의 중심 인물로 볼 때에도, 지금까지는 열두 사도의 대표격으로 유대인의 사도로 불리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오로(사도9,15)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이 진행된다.
또한 이제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의 중심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방 땅에 세워진 시리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선교의 중심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3장은 바야흐로 복음이 전세계를 향하여 확장되는 장대한 역사의 막을 여는 중요한 전환의 장이라 볼 수 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13,1)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방 선교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안티오키아 교회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여기에서 '예언자들'에 해당하는 '프로페타이'(prophetai)의 원형 '프로페테스'(prophetes)는 '발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프로페미'(prophemi)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발설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통상 그리스어적 용례로는 신탁이나 감추어진 일들을 선포하거나 해석하는 자를 가리키며, 성경적 용례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해석하는 자를 가리킨다. 즉 이들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기도 하였고(사도11,28), 성령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사도21,10.11).
이러한 예언자 직책은 사도직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한시적 직분으로서, 교회가 굳게 서 가고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교사들'에 해당하는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원형 '다디스칼로스'(didaskalos)는 문자적으로 '가르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는데(2티모1,11), 당시 교사는 탁월한 지혜로써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것을 교회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자를 지칭했다(에페4,11참조).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말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 (2-3) 여기서 '그들'로 번역된 '아우톤'(auton)은 3인칭 복수 대명사로서 사도행전 13장1절에 언급된 다섯명의 예언자와 교사만이 아닌, 안티오키아 교회 신도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들은 주님께 예배드리고 단식하였다.
여기에서 '예배드리고'로 번역된 '레이투르군톤'(leiturgunton)의 원형 '레이투르게오'(leiturgeo)는 어원적으로 국가를 위해 자비(自費)로 봉사하며 사회를 위해 공적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 에서는 만남의 천막(성막)이나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에 종사한 대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샤라트'(sharath)의 역어로 자주 사용되었다(민수18,2; 요엘1,9).
본문에서는 종교적인 용례로 쓰였으므로, 후자의 의미와 더불어 기도와 예배와 가르침과 이에 상응하는 기타 다른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나타낸다. 전례를 가리키는 라틴어 'Liturgia'(Liturgy)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이 단어가 주로 예배와 관련되어 주를 섬기는 것에 관계된 용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그들은 단식하였다. 이것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고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금욕의 방편으로 단식을 하였던 초대 교회 당시의 영지주의자나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하는 단식(콜로2,20~23)이 아니었다. 또한 국가적인 재난(1사무31,11~13)이나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레위16,29)을 맞아 민족적으로 단식하는 구약 시대의 단식이나,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번씩(월, 목요일)단식하였던 바리사이인들의 정기적인 단식(루카18,12)도 아니었다.
이것은 육체적 쾌락을 이겨내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 감동과 말씀을 받기 위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단식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성령께서는 행하실 일을 지시하였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2ㄴ) 본절은 '성령께서 파견하신'이라고 기록된 사도행전 13장 4절 말씀과 더불어 초대 교회 당시의 선교 활동의 중심에 성령이 계셨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성부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이 땅에 오셔서 당신 몸을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전하는 일을 이제는 성령 하느님께서 주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따로 세워라'고 번역된 '아포리사테'(aphorisate)의 원형 '아포리죠'(aphorizo)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경계를 지어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1장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이라고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용례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본절에서 이 단어는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에게 복음 전하는 특별한 임무를 부과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라고 번역된 '데 모이'(de moi)에서 '데'(de)는 명령어와 함께 그 명령이 즉각 시행되기를 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며, '모이'(moi)는 '나에게'라는 의미를 지닌 1인칭 단수 여격 대명사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자기 자신(성령)에게 즉각적으로 구별하여 따로 세울 것'을 명령했음을 보여준다.
본문은 선교사 파견이 인간의 자발적인 열심이나 원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업의 주체이신 성령 하느님의 주도적 선택과 사명 부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을 선교지로 파견하는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바로 성령 하느님의 뜻을 묻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3) 본절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구별하여 세운 뒤 그들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보내는 장면이다. 본절에서 '그래서'로 번역된 '토테'(tote)는 '바로 그 때'라는 의미로서 성령의 지시가 있자 마자 안티오키아 교회의 전 신도들이 바로 단식하고 기도한 사실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 단식하며 기도한 것이다.
한편 '떠나보냈다'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파견하다'라는 의미의 단어 '아포스텔로' (apostello)(2티모4,12)가 아니라 '아펠뤼산'(apelisan)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아폴리오'(apolio)는 '~로 부터'(from)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 와 '풀다'(to loose)라는 의미의 동사 '뤼오'(lyo)가 합성된 동사로서 '~로 부터 풀어 놓아 자유롭게 보내다'라는 의미이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 교회를 놀랍게 성장시킨 위대한 지도자들이다(사도11,22~26). 따라서 안티오키아 교회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이방 선교사로 보낸다는 것은 교회 입장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이방 선교를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에만 매이도록 하지 않고, 부담없이 자유롭게 떠나도록 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아펠뤼산'(apelisan)이라는 단어에 잘 나타나 있다.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13,13~25)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3)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 또는 '야훼는 구원',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 '여호수아', '죠수아'를 희랍식 이름으로 표기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 1장 20~21절에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계시되어 있다.
루카 복음 1장 31~33절에도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계시되어 있다.
일찌기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에게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하겠다.'(1역대17,14)고 말씀하셨는데, 사도 바오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구원자를 세우고 그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이끄신 역사와 구원자(구세주)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그 약속에 따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끌어내서 그 역사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약속을 어떤 방식으로 지키셨고,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밝힌다. 겉으로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볼 때, 다윗의 왕조는 무너진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왕좌가 영원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 처럼 들리는 상황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윗과 약속하신 그 왕좌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13,26~33)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히였습니다.(27) ~ 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29)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목소리'를 뜻하는 '포네'(phone)의 복수형 '포나스'(phona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해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그 입을 통해서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들려온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즉 사도 바오로가 '로고스'를 쓰지 않고 '포네'를 쓴 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현재 듣고 있는 것처럼 암송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안식일마다 봉독되는'에서 '봉독되는'으로 번역된 '아나기노스코메나스'(anaginoskomenas)는 '암기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큰소리로 읽다', '낭독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기노스코'(anaginosko; 루카4,16; 사도8,28)의 현재 수동태 분사형이다. 따라서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살려서 '읽혀지고 있는'이라고 번역하는게 좋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큰소리로 낭독했다.
'이루어지게 했습니다'로 번역된 '에플레로산'(eplerosan)는 '플레로오'(plero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3인칭 복수형이므로, '그들은 이루었다'(they have fulfilled)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의미상의 목적어는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오히려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찌기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이사53,5.12).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인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 17절에서 그렇게 말하였고, 사도 바오로도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에 자신이 훼방자요, 핍박자요, 학대자였던 것을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1티모1,13). 이처럼 무지는 진리를 죽이고,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고 대항하는 죄악이다. 그러나 이 무지가 죄은 죄에 대한 면죄의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다 이행한 뒤'에서 '성경에 기록된'으로 번역된 '게그람메나'(gegrammena)는 '기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그라포'(grapho)의 완료 분사형으로서 '기록된' (was written)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죽음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시편22편; 이사53,3~12).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일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이 인간의 자발적인 사악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사악한 의지와 자발적인 동기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나무'에 해당하는 '크쉴루'(ksilu)는 뿌리와 잎이 있는 살아있는 수목이 아니라 잘려서 가공된 목재를 뜻한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달린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나무라고 한 것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떄문일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갈라3,13; 사도5,30; 10,39참조).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33) 사도 바오로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메시아의 부활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하였다. 시편 저자가 시편 2장 7절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육화(강생)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가 인용할 때는 문맥으로 보면,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원수 사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인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그의 부활은 그의 두번째 탄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에 해당하는 '에고 세메론 게겐네카 세'(ego semeron gegenneka se)에서 '낳았다'에 해당하는 '게겐네카'(gegenneka)란 동사에 이미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ego; 내가)가 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에고'가 쓰인 것은, 낳으신 주체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오늘'로 번역된 '세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구약 번역본인 70인역(LXX)에는 '오늘날'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문의 단어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부활하게 하신 때를 의미한다. 이것을 굳이 '오늘'로 표현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있어서는 모든 시간이 '오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돌팔매질 당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제1독서(사도13,44~52)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52)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유대인들은 그 성(城)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동원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성에서 쫓아내 버렸다. '귀부인들'에서 '귀하다'는 뜻의 '유스케모나스'(euschemonas)의 원형'유스케몬'(euschemon)은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형용사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태아 요셉이 이러한 사람으로 묘사되었고(마르15,43), 베로이아에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지체높은 그리스 여자들도 이런 사람으로 묘사되었다(사도17,12). 아마도 본문의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은 그리스인들로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고위층 관리 부인들이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적지 않은 여인들이 황제에 의해 행정관으로 임명된 예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 여인들 중에서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그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을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나스'(sebomenas)는 '경건한'(devout) 혹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God-fearing)의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유지들'(유력자들)로 번역된 '프로투스'(protus)의 원형 '프로토스'(protos)는 지위와 순서, 영향력에서 으뜸이고 최고인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안티오키아 성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여기에서 '박해하게 만들고' 라는 말은 단순히 말로 박해를 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신체에 해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박해하게 만들고'라고 번역된 '에페게이란 디오그몬'(epegeiran diogmon; raised persecution; stirred up persecution)은 '핍박케 하였다'는 뜻이다.
코린토 2서 11장 23~26절의 바오로 사도의 술회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의 사건도 포함한다면,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붙잡혀 태장으로 맞은 후에 쫓겨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고위층 관리들은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아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가져다 주는 자들을 박해하고 강제로 추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 즉 상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에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명령(루카9,5; 10,11)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먼지'로 번역된 '코니오르톤'(koniorton)은 '티끌'(dust)을 말한다.
그런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자신과 그 지방은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발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도 털어내 버림으로써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많은 영적 결실을 맺었으므로, 그 도시 전체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기 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고 쫓아낸 유대인들과 고관들에 대해서 먼지를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믿음을 가진 그곳의 새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항하여 분노에 사로잡히고, 복음 선포자들을 내쫓아 버린 자들과 달리 복음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인 선물을 받아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가득 차 있었다'(충만하였다)로 번역된 단어 '에플레룬토'(eplerunto)가 계속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사도4,31; 8,8).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14,5~1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8~10)
사도행전 14장 6~7절에서는 이코니온에서 리카오니아 지방으로 온 사도 바오로 일행이 계속적으로 복음 전파 활동에 힘썼음을 포괄적으로 기록하였다. 사도행전 14장 8~18절에서는 리스트라에서의 선교 활동 중에 일어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치유 기적과, 그와 관련하여 리스트라인들이두 사도를 신(神)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저자가 리스트라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과 같은 사건을 이처럼 길게 다룬 것은 이 사건이 리스트라에서의 바오로 일행의 복음 전파 활동이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심없이 겸손하게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는 리스트라에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만난 하반신 마비자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라는 이러한 중복적 표현은 본래 직업이 의사였던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전혀 걸을 가능성이 없는 그사람의 상태를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람을 '두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라는 말 한 마디로 완치시켜 주는데,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앉아 있는 하반신 마비자를 완치시킨 것(사도3,1~10)과 평행을 이루는 사건이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도 바오로가 사도 베드로와 동일한 기적을 일으킨 사실을 통해 그가 열 두 사도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는 사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사도 바오로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으며,그의 사도됨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9ㄴ) 여기서 '유심히 바라본'으로 번역된 '아테니사스'(atenisas)는 '눈을 고정시켜'라는 의미로서, 아름다운 성전 문 곁에서 앉은뱅이를 바라보았던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에게도 쓰였던 단어이다(사도3,4).
그러나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동전 한 푼 구걸할 수 있을까하여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쳐다 보았지만(사도3,5), 리스트라의 앉은뱅이는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선교에 이끌려(9ㄱ) 그를 주목하고 있었으며, 사도 바오로도 그러한 그에게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무엇인가? 첫째, 그 앉은뱅이가 자신의 하반신 장애를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둘째, 그 앉은뱅이에게 있었던 믿음은 자기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구원받을 만한'으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의 원형 '소조'(sozo)는 육체의 치유(마르6,56)와 영혼의 구원(마태1,21)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둘 다 해당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리스트라의 선교 현장에서 주변에 많은 사람을 청중으로 두고서 사도 바오로가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것을 추측해 보면, 후자(영혼의 구원)가 보다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앉은뱅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의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된다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사도13,38.39)을 듣고,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도 바오로는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진 앉은뱅이에게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동일한 성령의 기운을 느끼고, 그에게 다가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0) 그런데 이러한 치유의 순간에 사도 바오로는 의술이나 다른 방법을 쓰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가 다가가 앉은뱅이의 다리를 한 동안 주물렀다거나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는 묘사가 전혀없다. 오직 '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라'는 한 마디 말만 사용하였다. 이것은 치유의 근원이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이 기적을 주위 사람들도 보게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가 믿는 하느님의 능력을 인정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 일을 복음 전파의 방편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다리가 오그라져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도 바오로는 '똑바로'에 해당하는 '오르토스'(orthos; uprightly; straghtly; 일직선으로 곧게)라는 말과 '일어서라'에 해당하는 '아나스테티'(anastethi'; stand)라고 명령을 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어이가 없어 보이는 명령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순종하였고, 그 결과 믿겨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가 벌떡 일어날 뿐만 아니라 걷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기적은 많은 경우에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에 의하여 일어난다.
'벌떡 일어나'로 번역된 '할라또'(halato)의 원형 '할로마이'(hallomai)는 '솟아 오르다', '뛰어 오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한4,14; 사도3,2), 사도 바오로의 명령을 들은 그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마치 용수철처럼 뛰어 올라 일어섰음을 나타낸다.
'걷기 시작하였다'로 번역된 '페리에파테이'(periepatei)는 계속되는 행동을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데, 이것은 일어선 그가 감격에 겨워 자기 주변을 이리저리 연신 걸어다녔던 것을 나타내며, 그 치유가 일시적이거나 속임수가 아닌 완전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나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11~14)
리카오니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사도 바오로는 다른 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당시 국제적 언어인 그리스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엄청난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너무나 놀랐기 때문데 자기도 모르게 출신 지역 사투리로 말했던 것이다.
'신들이 사람이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로 번역된 '호모이오텐데스 안드로포이스'(homoiothentes anthropois)에서 '호모이오텐테스'의 원형 '호모이오오'(homoioo)는 '유사하게 하다', '같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므로 '유사하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의 외모와 유사한 신(神)들이 내려왔다는 말이다. 말 한마디로 선천적인 앉은뱅이를 완치시키는 일을 보면서 리스트라 사람들은 전설로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가 그들 눈 앞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알고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즉 리스트라 지역에서는 그리스의 주신(主神)인 제우스(Zeus)와 그의 전령신(神)인 헤르메스(Hermes)가 과거에 사람의 모양으로 그곳에 방문하였지만,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자 그들을 홍수로 멸망시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 전설이 자기들의 시대에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한 리스트라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神)들 중 최고의 신(神)이며, 로마 신화의 쥬피터(Jupiter)에 해당한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른 것은 그의 외모가 사도 바오로보다 훨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사도 바오로에 비해 많고 사도 바오로 뒤에서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리스트라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이 신은 제우스의 신탁을 받아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신이었으며 로마 신화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한다. 그들이 사도 바오로를 웅변과 연설의 神이기도 한 헤르메스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군중 사이에서 탁월한 말 솜씨로 연설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13) '황소'로 번역된 '타우루스'(taurus)는 '몇 마리의 소들'을 가리키며 '화환'으로 번역된 '스템마타'(stemmata)는 제사를 드릴 때 희생 제물 위에 놓는 띠로서 꽃으로 만든 화환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 즉 '퓔로나스'(pylonas)는 리스트라성(城)의 문을 말한다. 고대 성읍에는 성문 주위에 넓은 광장이 있었고 여기서 대중 집회나 교역이 이루어졌다.
리스트라 사람들이 사람의 모습을 한 사도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쉽게 神으로 단정한 것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神들이 모두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신(神)들은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과는 달리 제한된 공간 속에 인간과 동일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유한한 신(神)들이었던 것이다.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14) 여기서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근심과 슬픔을 표시하는 유대적 관습이며 주로 개인적인 슬픔 뿐만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크나큰 죄가 되는 일을 목도했을때 취하는 행동이다(욥1,20; 마태27,65).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는 리스트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신(神)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을 느꼈다. 그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로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진정한 신(神)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신성 모독적인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오로의 1차 선교 여행 지도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14,19~28)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타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1~23)
데르베에서 사도 바오로는 큰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으며 또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도 바오로가 핍박을 당했다거나 반대에 부딪혔다는 기사가 없고, 오직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가슴 벅찬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제자로 삼고'로 번역된 '마테튜산테스'(matheteusantes)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마태28,19)이 원활하게 수행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는 '마테튜오'(matheteuo)의 명령형이 사용되었으며, 본문의 '마테튜산테스'는 분사형으로 같은 단어이다. 제자로 삼았다는 것은 데르베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들어오게 하였을 뿐 아니라 세례를 주고 말씀대로 살게 하였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22) '힘을 북돋아 주고'로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 하고 강화하며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사도15,32.41; 18,23),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해 얻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나 유대인들의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믿는 바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는 몇 마디의 격려보다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22)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환난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수받고 믿기 시작한 성도들에게도 닥쳤을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점점 증가하는 핍박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사탄과 그 졸개들이 공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에페2,1), 불신자들은 다 그러한 세력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게 마련이고,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거나, 그로 말미암아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리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7). 또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도 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로마8,18).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23) 사도 바오로 일행은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복음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이 신앙 생활을 원활히 하며, 복음이 더욱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운 뒤 교회를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구심점이 될 원로들을 임명한 것이다.
여기서 '임명하고'로 번역된 '케이로토네산테스'(cheirotonesantes)의 원형'케이로토네오'(cheirotoneo)는 '손을 뻗는'을 뜻하는 '케이로토노스'(cheiroton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본래 '손을 내뻗어 투표하다'는 뜻이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코린토 후서 8장 19절에만 쓰였으며, 모두 '택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한글 새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원로들을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의 뜻에 의하면, 그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손을 들어 투표한 다음 사도 바오로나 바르나바가 뽑힌 그들을 원로로 세웠다는 의미가 된다.
그들이 '원로'에 해당하는 '프레스뷔테루스'(presbyterus)들을 세운 목적은 이방 지역의 한복판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잘 감독하고,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등 어려움 속에서도 신도들이 힘을 잃지 않고 든든히 서 가도록 위로와 격려의 일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영적으로 암흑의 땅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의 밝은 빛이 지속적으로 비치는 교회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들이 믿게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3ㄷ)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새로 세워진 교회와 원로들을 주님께 의탁했다는 것은 그곳을 떠나면서 하느님께 그 교회들과 성도들을 전적으로 맡겼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제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떠난 그곳 교회들은 외형적으로는 원로들을 통해 이끌어질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굳게 지켜 주실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
부활 제5주간 수요일제1독서(사도15,1~6)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1~2)
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각하게 대두된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원로들이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게 되었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특히 바오로의 제1차 이방 선교 여행을 기록한 사도행전 13장과 14장 직후에 기록한 것도 의의가 있다. 바오로의 선교를 통해 믿은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외의 것 즉 유대인의 전통과 같은 것은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대략 1년여의 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개최시기는 A.D.49년경으로 추정된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1) 여기에서 '관습에 따라'로 번역된 단어는 '에테이'(ethei)이다. 이 단어의 원형 '에토스'(ethos)는 성문 율법을 가리키는 '노모스'(nomos)와 달리 법적인 구속력이 없이 사람들의 관습과 관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들 유대인들이 '노모스'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에토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할례라는 행위가 십계명 같은 곳에 법조문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서 제정하셔서(창세17,10~14) 유대인들이 계약의 백성의 표시로 전통적으로 행해 오고 있는 관례이기 때문이다.
사실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할례를 받지 않으면, 계약의 백성에서 끊어지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그는 내 계약을 깨뜨린 자다.' (창세17,14)
그러나 이런 할례는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 표시일 뿐,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절대 조건은 될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된(로마1,17) 이방인들의 경우 할례의 과정이 필요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이 유대인들은 방편적으로 주어진 계약의 표징을 절대시하여,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자유롭게 하신 자들을 다시 종의 멍에로 얽어 매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무익하게 하는 것이었다(갈라5,1~2).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 '구원을 받을'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는 원형 '소조'(soz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수동태 부정사이다. 사실 '소조'(sozo)는 죽음이나 위험이나 병 등에 놓임을 받은 때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절에서처럼 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 쓰인 경우는 성경에서 본절에서 말고 7번 나오는데, 모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였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혈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며,반(反)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한편, '~수 없습니다'로 번역된 '뒤나스테'(dynasthe)는 현재 직설법이다. 구원을 받는 것이 장차 결정될 미래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어(否定語) '우'(u)와 더불어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너무나 확실하게 주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할례받음과 구원을 조건과 결과로 규정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 출신의 개종자들의 주장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돌아와 안티오키아에 머물러 있던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충격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출범하기 시작한 이방인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고, 유대주의로 회귀하게 하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이 안티오키아 교회 내에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할례를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 사이에 분쟁과 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방인 할례에 관한 문제가 안티오키아 교회 자체에서 해결되지 않아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및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형제들이 ~ 하였다(작정하였다)'로 번역된 '에탁산'(etaksan)이 '결정하다'는 뜻이 있는 '탓소'(tasso)의 3인칭 복수 부정(不定) 과거형이란 점에서 잘 보여진다. 즉 이 단어에는 교회의 회중들이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예루살렘 모교회가 모든 교회의 모체로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있어 교리적인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여겼으며, 또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기에도 용이했기 때문에 내려졌을 것이다.
또한 '올라가기로'로 번역된 '아나바이네인'(anabainein)은 '올려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바이노'(anabaino)의 부정사로서 '올려보낼 것을'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안티오키아보다 고지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을 높이 표현하는 당시 보편적인 어법 때문이기도 하다.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15,7~21)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 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 (16~18)
사도 야고보가 구약 70인역(LXX)을 인용한 듯 보이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즉 70인역 성경의 아모스 9장 11절에는 '그 뒤에'라는 말이 없고, '그 날에'라는 표현이 있다. 아모스 9장 11절의 '그 날'은 단수로서 어느 한 날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날, 즉 심판과 구원의 날을 말한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그 날에'라고 하지 않고, '그 뒤에', 즉 '메타 타우타'(meta tauta; after this)라고 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그 날에'란 표현을 메시아의 날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자가 미래의 날로 본 것으로 해석하여 '그 뒤에'라고 풀어 인용하므로 큰 문제는 없다. 한편, '나는 돌아와'라는 구절도 아모스 9장 11절에는 없다. 여기에 해당하는 '아나스트렙소'(anastrepso)는 '내가 돌아올 것이다'(I will return)는 뜻으로서 이미 버렸던 자들로 생각되었던 자들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를 바빌로니아에게 포로로 넘겨주심으로서 버리셨다.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왔을 때에도 임금을 허락하시지 않으셨고, 예수님이 강생하실 때까지 약 400여년 동안 예언자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여기서 다시 돌아 온다는 것은 그 백성에게 메시아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아모 9,11~12)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16) '무너진 다윗의 초막'에서 '초막'에 해당하는 '스케넨'(skenen)는'성막'(tabernacle)이 아니라 '천막'(tent)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윗의 초막이란 성전이나 성소가 아니라 그가 통치하는 보좌를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시아가 오셔서 그 무너졌던 다윗의 보좌를 다시 짓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사항이 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사셨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스케노센'(eskenosen)으로 '천막을 치다'라는 뜻의 동사 '스케노오'(skenoo)의 부정(不定) 과거형이다. 즉 무너진 다윗의 '스케네'(skene), 즉 '초막'(천막)을 다시 지을 분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스케노오', 즉 사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정치적 왕권을 다시 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영적 나라를 다시 세우시는 분이시다.
다윗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고(1사무13,14; 사도13,22), 다윗 이후 남부 유다에서 몇몇 임금들이 그 길로 갔으나(1열왕15,11), 거의 대부분의 임금들이 그 길로 가지 않아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는 하느님에 의해 심판을 받았고, 다윗의 정치적 왕국은 물론 그 영적나라까지도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즉 다윗처럼 하느님의 뜻대로 걸어가는 사람이 끊겼던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서 영적인 의미에서의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우셨다. 따라서 본 문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새로운 나라, 즉 신약 시대의 교회를 세우셨던 것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17) 본절에서 사도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2절의 내용을 히브리어 마쏘라 텍스트가 아닌 희랍어 70인역(LXX)에서 인용한다.
마쏘라 텍스트와 70인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차이점이 있다. 1) '에돔의 남은 자들'이 70인역에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 (그 남은 사람들)로 바뀌었다. 2)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기업을 얻게 하리라)가 70인역에는'주님을 찾게 되리라'로 바뀌었다. 3)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민족들(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소유하게 될 기업인데, 70인역에서는 그들이 주님을 찾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마쏘라 텍스트는 유대인이 중심이며, 메시아의 나라가 도래하면 그들이 이방인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반면에, 70인역은 이방인 중심이며, 메시아의 나라가 도래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하느님으로만 인식되어 왔던 그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 야고보는 본절에서 바로 이방인 중심으로 말하는 70인역을 인용함으로써 이방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나머지 다른 사람들'(그 남은 사람들)은 구약의 '남은자' (the remant) 개념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구원에 대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인간의 패역부도와 죄악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신실한 소수의 의인을 남겨 두셨는데, 이런 자들이 바로 '남은자'이다(2 열왕19,31; 이사37,32; 46,3; 에제31,7). 본문에서는 유대인 가운데에서 남은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신 메시아를 알아 보고 환영한 세례자 요한이나, 안나, 시메온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대의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고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오신 메시아를 환영하며 찾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뿐만이 아니라는데 본절의 강조점이 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20)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격인 사도 야고보가 할례와 율법 문제로 이방인을 괴롭히지 말고, 다만 4가지 사항만을 이방인 신도들이 최소의 의무 조항으로 지키도록 제안한다. 이 4가지들은 모두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율법상 절대적으로 금하는 것인 동시에 이방인 신도들은 관습적으로 죄책감없이 행하는 것들이었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오는 '알리스게마톤'(alisgemayon; 더러운 것)이라는 단어인데, 이교의 우상에게 바치는 데 사용되던 고기와 같은 제물을 뜻한다(사도15,29; 21,25 참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어떻게든 우상과 접촉함으로써 그 우상을 숭배하게 되거나(묵시2,14.20), 그 제물을 먹음으로써 마음이 우상에게로 기울어질 수도 있는 관계로 금지되었다.
이방인들은 특별히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는 때일지라도, 연회나 축하연을 할 때 우상의 신전을 사용하는 일이 있었으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상과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불륜'(음행)에 해당하는 '포르네이아스'(phorneias) 역시 우상숭배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이교도의 우상 신전에는 흔히 신전 창기들이 있어서 우상 숭배가 음행으로 연결되곤 했다. 그러나 본문의 불륜은 신전에서의 음행 뿐 아니라 일상에서 행해지던 각종 음란과 성적 방종을 다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15,19; 1코린5,1).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목졸라 죽인'으로 번역된 '프닉투'(pniktu)의 원형 '프닉토스'(pniktos)는 피를 흘리지 않고 교살되어 질식해 죽임당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목졸라 죽인 짐승을 멀리하라는 것은 피가 빠지지 않은 고기를 그 피째 먹지 말라는 것이다(창세 9,4; 레위17,10~14). 이것은 구약 성경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엄격히 지켜오던 규례였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레위17,10~14).
한편, '멀리 하라고'로 번역된 '아페케스다이'(apechesthai)는 '억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페코'(apecho)의 부정사 현재형으로서'늘 억제하도록'이라는 의미이다. 이상의 4가지는 이방인 신도들에게 강제적으로 금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인의 관습이 완전히 조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친교와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자제해 줄 것을 권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