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2(독서묵상)<9-16장>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9,1-3)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9장 1-3절에서 자신의 민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예수님께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천국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지게 될지라도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절규한다.
사도 바오로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꿈은 "민족 구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생각은 사도 바오로와는 전혀 달랐다. 하느님은 사도 바오로에게 이방인들을 위해
살라고 명령했다.
사실 은총 안의 삶이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제30주간 토요일 제1독서 (로마11,1ㄴ-2ㄱ.11-12.25-29)
로마서 9-11장은 구세사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과 율법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의지를 직접 전달하셨다(9,4-5). 이런 특전과 약속을 받은 유다인들이 왜 오늘날 구원의 길에서 멀어졌는가?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실로 의화의 길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은 그들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자유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 약속을 행실로 획득하려 하지 말고, 믿음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지만,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에 집착한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고, 이방인들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실패, 그로 인한 이방인들의 선택과 혜택, 그리고 이스라엘이건 이방인들이건 믿음을 통한 의화의 필요성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바오로는 '야생 올리브의 접붙이기' 표상을 이용한다(11장).
하느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올리브 나무를 심으셨다. 일부 가지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것을 잘라 내시고, 대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이신다. 그러나 접붙인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그것도 잘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잘려나간 원 가지들이라도, 다시 믿음을 회복하면, 그것들을 다시 접붙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11,25ㄷ)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28-29)
선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는데, 이방인들이 구원의 복음을 믿어 축복과 혜택을 누리는 것을 보고, 마지막에 선민 이스라엘이 돌아와서 예수님을 영신적인 메시아와 구원자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신비적 계시를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것이다.
결코 철회될 수 없는 맏아들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과 은사와 소명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하자.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4-5)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2,5-16ㄴ)
"형제 여러분,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5)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8)
로마서 1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간에 각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체'로 번역된 '멜레'(melle; members)는 복수형인데, 여러 기능을 가진 각기 다른 몸의 여러 지체들을 나타낸다(마태5,29; 에페4,25; 로마6,13.19; 12,4.12.18; 1코린6,15; 12,12.18.20.22.25.26.27).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실제와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성령께로부터 받아서 봉사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와의 '코이노니아'(koinonia)관계, 즉 친교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분과의 관계 의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가 된 성도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성도들의 주인이시다(1코린12,27; 콜로1,18; 에페1,22.23).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의 명령 아래 두지 않으면 안된다(갈라2,20). 누구든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한다(마태16,24).
또한 우리는 함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기에 언제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몸의 한 부분이 이상이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그것은 몸 전체에 영향을 주어 다른 지체들도 그 고통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는 서로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생각을 버리고 각자가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기는 하지만,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속의 개체이며, 교회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2장 5절에서 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임을 밝혔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라는 것은 즉 그 기능과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로마서 12장 6-8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며, 동시에 각 지체에게 부여된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한다.
로마서 12장 6절의 '저마다 ~서로 다른'으로 번역된 '디아포라'(diapora)는 '다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페로'(diapero)에서 나온 형용사로서 '다른','여러 가지의'등을 의미한다. 이 형용사는 우리 성도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은사의 다양성을 나타낸다.
이 은사들은 각자의 열심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은사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에 아무도 그 은사를 가지고 교만이나 허영, 특권 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charisma)의 뜻은 '거저 받은 선물', '부여된 은총', '특은'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 그리스도인들 안에서,한 은혜가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점차 교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봉사와 섬김을 위한 특별하고도 영적인 의미가 부여된 말로 발전되었다.
로마서 12장 6절에 나오는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타'(charismata; charisma의 복수; gifts)는 우리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 기대치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1코린12,11), 그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의지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성령께서 구원이 보장된 성도들에게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영적 선물인 것이다.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예언'으로 번역된 '프로페테이안'(propeteian)의 원형 '프로페테이아'(propeteia)는 주로 신약에서 '예언 활동', '예언의 말씀'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예언하는 은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언하는 은사'란 성령이 감도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믿음에 맞게' 예언하라고 권한다. '믿음에 맞게'라고 번역된 '카타 텐 아날로기안 테스 페르테오스'(kata ten anallogian tes pisteos; according to the proportion of faith)에서 '맞게', '분수'로 번역된 '아날로기안'(anallogian; proportion)는 '유사한', '닮은' 등을 뜻하는 '아날로고스'(anallogos)에서 나온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나오는데, 보통 '바른 관계', '균형', '조화', '어울림'등을 뜻하며, 때로는 수학적 의미로 사용되어 완전히 하나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부여한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각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정도는 믿음의 성장에 준하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성숙도 만큼만 보여 주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받지도 않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예언을 한다는 명목하에 과장을 한다거나 부풀리는 것, 그리고 각색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하느님을 기만하고 거짓말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7) 여기서 '봉사면'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안'(diakonian)의 원형 '디아코니아'(diakonia; ministry,serving)는 '섬기는 일', '준비하는 일', '구조', '원조', '기증', '부제직'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사도행전과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① 식탁에서의 봉사(루카10,40; 사도6,1), ② 사랑의 봉사(1코린16,15), ③ 헌금 모금을 통한 봉사(사도11,29; 2코린8,4; 9,1.22), ④ 말씀의 선포와 전교(사도20,24; 2티모4,11), 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봉사(에페4,12),⑥ 천사의 봉사(히브1,14), ⑦ 사도로서의 직무(로마11,13; 사도1,17) 등이다.
이처럼 이 단어는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부제 직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섬기는 일을 비교적 상위에 둔 것은 의미있는 일로 보인다. 이러한 섬김의 직책이나 섬김의 모범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6장 1-6절, 요한복음 13장 1-17절, 마르코 복음 10장 43-45절을 참조하면 된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가르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디다스콘'(ho didask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가르치는 자'이다. 즉 이것은 '가르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디다스코'(didask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희랍어에서 현재 분사형은 계속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 단어는 교회 안에서의 '교사' 즉 '디다스칼로스'(didaskallos)의 직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잘 해설해 주는 것이며, 세상 속에서 영적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것이다(사도13,1; 2티모4,1-5; 1티모5,17참조).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8) '권면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파라칼론'(ho parakall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권면하는 자', '계속해서 격려하는 자'가 된다. 이것은 '곁으로 부르다', '소환하다', '호소하다', '권면하다', '위로하다' 등의 뜻을 가진 '파라칼레오'(parakall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이것은 신앙이 약한 자를 격려하여 힘을 북돋워주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자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입법자나 재판관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권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단죄하여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낙담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쓰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 목표가 없는 사람들, 허무한 것에 굴복한 사람들, 기쁨이나 평화를 알지 못하거나 잃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을 잘 수행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관용을 가져야 한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8)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번역된 는 '호 메타디두스'(ho metadidus) '한 부분을 주다', '나눠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메타디도미'(metadidomi)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계속해서 한 부분을 주는 자'인데, '구제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제'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한 부분을 주는 것,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것이 필요한 사람들과 조건없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순수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순수한 마음으로'라고 번역된 '하플로테티'(haplloteti)의 원형 '하플로테스'(hapllotes)는 일반적으로 순진, 순박, 고결, 순수성, 일편단심, 관용, 관대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 통상 '순수성', '일편단심'의 의미로 사용되지만(2코린11,3; 에페6,5; 콜로3,22), 여기서와 코린토 후서 8장 2절, 9장 11절, 13절에서는 '관용'이나 '관대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나누어주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아까워하는 마음, 인색한 마음에 이끌린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잘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사도2,44.45; 4,32.34.35).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8) '지도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프로이스타메노스'(ho proistamenos)는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와 '서다'(마태2,9), '세우다'(마태4,5)라는 뜻이 있는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앞장서다', '지향하다'등을 뜻하는 '프로이스테미'(proistemi)의 현재 분사 중간태에 관사가 붙은 형태이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에게서만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할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열성', '열심', '진실', '부지런함', '열정'으로 번역되는 '스푸데'(spude)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부지런함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 마음이 진실되며 열정적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 누구든지 인생과 신앙의 안내자가 되어 다스리거나 다른 이들의 길을 안내하도록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열심이 있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8)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엘레온'(ho eleon)은 '불쌍히 여기다','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진 '엘레에오'(elle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엘레에오'는 '동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에 가득한 온유함이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즐거움으로'으로 번역된 '힐라로테티'(hillaroteti)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풀고자 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뽐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는 자발적 태도여야 하며, 친절을 베풀 때에도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도 있으며,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심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만의 고유한 은사가 있음을 명심하고, 이것을 발견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힘써야 하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13,8-10)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8)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1-7절에서 하느님의 자녀라 할지라도,성도는 세상에서는 한 국가에 속한 국민이므로 세상 권위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을 권면했다.
이제 이어지는 로마서 13장 8-10절에서는 세상에서의 이웃에 대한 성도의 자세가 사랑에 근거해야 함을 교훈한다. 로마서 13장 8절의 상반절은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해결하지 않고 남겨 두어서는 안됨을 권면한다.
사도 바오로는 앞의 6절과 7절에서 공공 부채라고 할 수 있는 세금 문제를 다루었고, 이어서 개인 부채에 관해 언급한다. '빚을 지지'로 번역된 '오페일레테'(opeillete)는 '빚지다', '의무가 있다'를 뜻하는 '오페일로'(opeillo)의 현재 시제 명령이다.
고대 희랍어 문헌에서 이 동사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목적어를 수반하여 '빚지다'와 부정사를 수반하여 '은혜를 입다'가 그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넓게 보면 금전적 채무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국가의 법에 대한 도덕적 의무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원문에는 '아무에게도'로 번역된 '메데니'(medeni)가 문두에 나와 강조되어 있다. 이것은 성도인 우리가 형제든지 이웃이든지 빚을 지는 것이 좋지 못함을 강조한다.
공공 부채인 세금이 연체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고 재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빚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무엇이든지 빚진 것은 빨리 갚아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웃에게 진 빚은 빨리 갚지 않으면 불화와 긴장의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일은 사탄에게 훼방할 수 있는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13장 8절은 재정적 의미의 빚을 자제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보다 큰 강조점이 도덕적 채무의 허용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사도 바오로는 도덕적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다른 면에 있어서는 채무 관계가 없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은 도덕적 측면에서는 서로 베풀고 베풂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그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강조적 표현을 하고 있다. 즉 사도 바오로는 빚을 지지 말도록 권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만은 예외를 두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번역된 '토 알렐루스 아가판'(to allellus agapan)에서 '아가판'(agapan)은 '사랑하다'를 뜻하는 '아가파오'(agapao)의 부정사이며, 중성 관사 '토'(to)와 함께 쓰였다.
일찌기 Origenes는 '사랑의 빚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남아 있고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가 매일 주고 받는 영원한 것' 이라고 했다.
우리 중에 이 사랑의 채무를 완전히 변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계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현재 부정사 '아가판'(agapan)을 통해 이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요한13,34-35).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3장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보여준다.
여기 '남을'로 번역된 '톤 헤테론'(ton heteron)은 나와 구별되는 이웃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며(1코린10,24),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아가톤'(ho agaton)은 '사랑하다'를 뜻하는 '아가파오'(agapa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므로, 진행 중의 동작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 시제가 있어서는 안되고, 현재 시제가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그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과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들 역시 율법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나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완전하게 결합시켜 줄 수 있는 재료는 사랑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가 한결같이 서로를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조건없이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