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소서(독서묵상)

2015. 10. 29. 오전 7: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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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서(독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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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에페1,11-14)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13) 

사도 바오로가 소 아시아 교회, 그 중에서도 특히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은 사실을 말하는 것은, 그들 중 할례의 인장을 받아야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그러나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상황이 실제 그러했는지를 확인되지 않는다. 

구약의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이 과거 할례라는 인장으로 아브라함의 자녀의 증표를 삼았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신약의 선민인 교회 공동체는 약속된 성령의 인장하느님의 자녀의 증표로 삼게 되었다. 이와같이 성령께서는 구속받은 죄인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확증하는 일을 하신다. 

또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확증된 성도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고(에페2,18),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거처)으로 지어져 가게 하시며(에페2,22), 내적 인간을 굳세어지게 하시고(에페3,16),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신다.(에페4,3.14) 

이런 일들을 하실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약속되었다. 하느님께서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이사32,5 ; 요엘 3,1),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신 바 있다.(요한14,16.17 ; 사도1,4.5) 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 약속을 실현되었다. 

한편, '인장을 받았습니다' 에 해당하는 '에스프라기스테테'(esphiragisthete ; you were marked in him with a seal, the promised Holy Spirit ;  you were sealed with the promised Holy Spirit)원형 '스프라기조'(sphragizo)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고대 근동 사회의 관습으로 볼 때, 이 단어는 먼저 정치적인 면에서는 왕의 도장의 효력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서류에 찍힌 왕의 도장은 그 문서의 진정성과 권위를 증명했던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개신의 소유권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는 의미를 갖는다. 본문에서도 '에스프라기스테테' 라는 단어는 위와 같이 어떤 사실에 대한 확증이라는 의미 사용되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증표이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증거하시고(요한14,26 ; 15,26) 우리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진리로 알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셔서 우리를 하느님의 것으로 인장을 찍으신(2코린1,22) 성령만이 오직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14) '보증'에 해당하는 '아르라본'(arrabon ; the earnest ;  a deposit guaranteening)'보증금' 이라는 의미로서, 구매자가 인도받는 상품의 값을 반드시 지불하겠다는 표시로 미리 주는 대금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한 '저당물' 또는 '담보' 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고대 페니키아와 그리스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던 상업 용어였다. 이것은 물건을 사는 사람이 물건 값의 환납을 확증하는 표시로 대신 맡겨놓은 물건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확증하시는 표시로서 성령을 주셨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구속사업을 성취하셨으며, 성령님께서는  이 구속 사업의 공로와 효과를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하시고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성화와 구원의 완성을 보장하신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개인의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구원받은 성도안에  거처하시는 성령 하느님께서 떠나가지 아니하시는 한 보장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소유로서' 로 번역된 '페리포이에세오스'(perip oieseos)'보존' 또는 '소유(물)' 이라는 의미인데,여기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소유가 된 성도들 지칭한다. 

또한 '속량' 에 해당하는 '아폴뤼트로신'(apolytrosin ; redemption)몸값의 지불로 얻어진 해방을 가리키는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후에 즉각적으로 얻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법적인 해방(에페1,7)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시 완성되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즉 완전한 구원을 지칭한다. 따라서 본문은 성령님께서 성도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영원히 해방되어 천상의 완전한 자유에 이를 때까지 성도에게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본문에 결과 혹은 지향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eis ; until , unto , to)사용되었다는 점이 이 사실을 더욱더 확고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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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1,15-23)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17-18)

앞의 17절에서 성도 그리고 교회위에 부어진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 일찍이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고(호세4,6), 하느님은 그 백성들에게 하느님 알기를 요청하였다.(호세6,6) 이러한 지식은 단지 사색하고 성경을 읽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하느님께 대한 객관적 지식이 곧 하느님을 안다는 바른 지식이 될 수 없다.

17절에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알게' 로 번역된 '에피그노세이'(epignosei)의 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그 자체로 이미 '알다' 라는 의미가 있는 '기노스코'(ginosko)에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에피'(epi)가 붙어 '철저하고 정확히 안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 을 의미한다.

특히 이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앎은 단지 성경을 읽거나 인간적 탐구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예레31,33.34)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결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로까지 나아가게끔 만든다.(예레36,26.27)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앎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제 18절과 19절에서는,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① 부르심의 희망② 그분 상속의 영광의 풍성과  ③ 믿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그분 능력의 지극히 크심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kardias)는 일차적으로 신체 기관 중 하나인 '심장'(heart)를 지칭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원문에서는 '카르디아스'가 아닌 '디아노이아스'(dianoias)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으로서의 마음' 을 의미한다.

특히 요한1서 5장 20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해력 뜻하는 '지각'(understanding)으로 번역되어 있어 그 의미의 이해를 돕는다. 성령께서 바로, 전에 알지 못하던 영적 부분에 대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이라는 사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통찰력을 통해 18절, 19절에 묘사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깨달음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1)'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 바오로는 먼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의 부르심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간구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을 부르신 데에는,그리고 이방인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로 불러 들이신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증표로 주신 성령으로 인해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갖는 이 희망은 온전하며 부끄럽지 않다.(로마 5,5.6) 그리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 희망은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하느님께서우리를 티없고 흠없는 거룩한 교회로 세우실 것에 대한 희망이다.(에페5,27) 

2)'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바오로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두번째 것은 하느님의 상속(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상속(기업)이란 말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상속(기업)' 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소유하시는 상속(기업)' 인지는 애매하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을 '소유하시는 상속'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신명4,20 ; 2사무21,3 ; 시편33,12)

신약에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이다.(에페1,11) 이런 관점에서는 본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우리의 상속(기업)' 아니고, 하느님의 '상속(기업)이 되는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한편, 하느님의 상속을 '베푸시는 상속'으로 보는 경우에는 바오로가 기록한 콜로새서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콜로새서 1장 12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풍성한 상속(기업)을 받은 자들이다.

원문으로 볼 때, 이 두가지 견해가 다 가능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견해가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인 성도들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상속(기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세번째 것은 하느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크심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 독생성자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라면, 우리를 위한 능력의 가장 큰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부활로 이어진다. 즉 자신의 영으로 죽은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느님께서 또한 자신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로마 8,11) 우리를 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곧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18절과 19절에 '그분의' 에 해당하는 '아우투'(autu)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인칭대명사로서 강조를 위해 사용된 것이고, 이것은 부르심의 희망도, 상속의 영광도, 능력의 지극히 크심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알게 되기를' 에서 '알게'에 해당하는 '에이데나이'(eidenai)의 원형 '오이다'(oida)본래 '보다' 또는 '봄으로써 인식하다' 라는 뜻인데,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으로서의 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18절과 19절에 세 가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체험적으로 얻게 되는 영적 지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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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월요일(에페 2,1-10)

"그 안에서 여러분은 한때 이 세상의 풍조에 따라,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곧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 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2)  

본절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기 전에는 모두 이 세상의 풍조 및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를 따라 사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풍조'에 해당하는 '아이오나'(aiona)는 문자적으로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시대'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래서 원문의 '톤 아이오나 투 코스무'(ton aiona tu kosmu) '이 세상의 행로'(the course of this world) 혹은 '이 세상의 길'(the ways of this world)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오나'의 원형 '아이온'(aion)은 시간적 의미가 포함된 단어로서 '이 세상(시대)' 가리킨다.(1코린 2,6; 갈라1,4) 반면 본절에서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무' 원형 '코스모스'(kosmos)는 공간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문의 '아이오나'는 시간적 배경을 강조하고, '코스무'는 공간적 배경을 강조할 뿐, 두 단어는 모두 하느님의 다스림을 벗어난 인간들이 형성한 이 세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는 말은 타락한 인간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단절된 상태, 즉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갈라티아서 5장 19-21절 드러내주는 불륜, 우상 숭배, 분쟁, 분파 등 온갖 죄악을 행하였다. 또한 조직적으로는 하느님 나라와 대조되는 세속의 통용되는 가치관에 따라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적 탈취등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공중'에 해당하는 '아에로스'(aeros)는 문자적으로 땅과 하늘 사이의 공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히브리인들의 하는 개념인 삼층천의 개념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본절의 공중은 하느님께 대항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계시는 삼층의 하늘로부터 쫓겨난 사탄이 사람들이 사는 땅에 연속되는 1층의 하늘 아니라 2층의 하늘에서 자신의 권세를 행사하기 위해 거하는 공간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신화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본문의 문맥에서는 공간적인 장소의 의미보다는 영적인 지배력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의식 세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에서 '지배자' 번역된 '아르콘타'(archonta)'통치자'(ruler,prince)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의식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자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신자의 의식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은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2코린11,14)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둘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단절시키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한다.(2코린4,3.4) 

'지금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안에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순종하지 않는 자들'(불순종의 아들들)이란 어구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고통받는 모든 이'(잠언31,5),'불의한 자들'(2사무7,10)이란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 아들'이란 표현은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상황의 강력한 지배를 받는 사람의 형편을 의인화하여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순종은 복음과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앙의 상태 가리킨다.(히브4,6) 결국 본문의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앙으로 일관하는 자들에게 권한을 행사하는 사탄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한편 '작용하는'에 해당하는 '에네르군토스'(energuntos)본문에서는 사탄의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지만, 에페소서 1장 20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능력 행사를 나타내는 단어가 사탄에게도 사용되었다는 것은 사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이를 통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영향력 아래 있든지 아니면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루카22,3; 요한 13,2; 사도 5,4)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또 다른 선이나 진리 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지배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것인지, 사탄의 지배를 받아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화요일(에페2,12~22)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14) (For he himself is our peace.)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를 흘려 이방인과 하느님 사이를 가까워지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평화이시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한글 새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왜냐하면'이란 뜻을 지닌 '가르'(gar)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원문 '아우토스 가르 에스틴 헤 에이레네 헤몬'(autos gar estin he eirene hemon)'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번역되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평화(에이레네; eirene; peace) 그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평화롭게 할 수 있고, 우리 안에 평화 자체로 머무르실 수 있다. 

'평화'(마태10,13; 루카24,36; 로마10,15)를 뜻하는 '에이레네'는 히브리리어 '샬롬'(shallom)마찬가지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화해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느님과의 평화를 우선적으로 의미한다(로마5,1). 나아가서는 이러한 평화가 우리 자신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평화를 가능케 한다. 

갈라티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인 평화는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며,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존재론적 안정이기도 하다. 

한편 바오로는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에페소서 2장 13절의 말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토 하이마티 투 크리스투'(to haimati tu christu; the blood of Christ) 다음에 본절을 시작하면서, 곧 바로 인칭 대명사 '아우토스'를 사용하였다. 희랍어에서 주격 인칭 대명사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본절에서는 강조를 위하여 사용했으므로, 단순히 '그'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그 자신이'(he himself) 혹은 '바로 그가'라고 강조하여 번역해 주어야 한다.  

가톨릭 한글 새 성경은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고 바로 '그리스도는'이라고 번역했다.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만'이 우리의 평화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드릴 때에 '양의 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죄로 인해 멀어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거리를 회복하던 대사제의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인 동시에 대속의 제물로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셔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었던 하느님과 죄인들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없이하셨다(히브9,12).

따라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가 되며 평화를 얻으려는 모든 시도는 평화 밖에서 평화를 얻으려는 일로서,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마태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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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에페3,2-12)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시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해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5-6)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바오로 자신이 알게 된 비밀을 현재 신약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는 성령으로 계시해 주셨지만, 과거 구약 시대에는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통해 그 비밀을 듣게 된 에페소 교인들은 구약 시대 사람들보다 더 복이 있는 것이다. 

'계시되었습니다' 에 해당하는 '아페칼맆테'(apekallyphthe)'계시하다','나타내 보이다' 라는 의미를 지닌 '아포칼립토'(apokallypto)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성령'이 의미상의 주어임을 나타내주고, 부정 과거형은 과거의 특별한 행동이나 사건들에 대한 언급을 한 경우에 사용되므로, 본문은 '이제 성령에 의해 나타내어질 것 같이'(as i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Spirit to 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상의 목적어 즉 계시된 대상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 신비가' 로 번역된 관계 대명사 '호'(ho ; which)로서,'그리스도의 비밀'(4절)을 가리킨다. 새 성경이 6절에서 '곧' 이라고 또 다시 애매하게 번역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이 비밀' 말한다. 

그리스도의 비밀은(4절)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어졌는데(5절), 그 내용은 이전에 약속의 계약에 대하여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계약의 백성이 되었다 것이다.(6절) 

한편 '사도들'과 병행하여 연급된 '예언자들'에 해당하는 '프로페타이스'(prophetais)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아닌, 신약 시대에 복음을 가지고 활동한 예언자들을 지칭한다. 안티오키아 교회에 예언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사도13,1), 유다, 실라스등의 예언자(사도15,32)와 하가보스 예언자(사도21,10)등이 신약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들 중 대표적 인물이다. 

'사람들에게' 로 번역된 '토이스 휘오이스 톤 안트로폰'(tois hyois ton anthropon)의 표현은 바오로 서간에서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복음에서 한 번, 그리고 구약에서도 단 한 번 사용되었다.

새 성경은 마르코 복음 3장 28절에서 본문과 동일한 원어가 사용되었는데도,'사람' 이라고만 번역했고, 70인역(LXX)의 창세기 11장 5절에서도 '삐넴 하아담(haadam binem)에 대한 번역으로 '효이 휘오이 톤 안트로폰'(hoi hyoi ton anthropon)이 사용되었는데, '사람들' 이라고만 번역해서 원어의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 위의 두 경우도 모두 본래적 원어의 의미를 살려 '사람의 아들들에게'로 번역해야 한다.

한편 본문을 포함한 이 세 경우가 모두 복음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사람들이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그리고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창세기 6장 2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의 대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위의 용례들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하느님'에 대적하는 자로서의 조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 즉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제 6절을 보면, 6절은 지금까지 말해 온 그리스도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본절에서 바오로는 '함께','동일한' 이란 의미를 갖는 전치사 '쉰'(sin)접두어로 사용된 명사 세 개를 연달아 사용하여, 이방인들이(다른 민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머묾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통해 얻게 된 자격 세 가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공동 상속자와 한 몸의 지체와 약속의 공동 수혜자' 이다.

여기서 사용된 접두사 '쉰'(sin)구원받은 이방인들이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과거 유대인들 혹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보장되었던 축복에 조금도 차별없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고대 근동에서는 상속자만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과거에 이방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상속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들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얻게 되었고(에페1,11 ; 로마1,7) 그분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창세12,3 ;사도3,25) 또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일부분이 되었다.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서로 원수되었던 관계가 허물어지고(에페2,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한 몸을 이룬 것이다.(에페4,4) 

다른 나라 사람들(다른 민족)이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인종이든 모두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지체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등급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1코린12,12.13)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비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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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3,14~21)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6~17)

에페소서 3장 14절과 15절이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선 자세로 기도하였다(창세18,22; 1열왕8,22; 마태6,5; 마르11,25).하지만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할 경우에는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한다(에즈9,5; 루카22,41).

마찬가지로 15절'무릎을 꿇습니다'로 번역한 '캄프토 타 고나타 무'(kampto ta gonata mu; I bow my knees; I kneel)에서 '캄프토'(kampto)'구푸리다', '굽히다'는 의미이며,'고나타'(gonata) '무릎'이라는 뜻이다. 

15절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아버지를 향하여 내 무릎을 꿇고 있다' (kampto ta gonata mu pros ton patera; I kneel before the Father)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에페소 교회를 위한 기도가 매우 간절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3장 16절에서 19절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중재 기도는 에페소서 1장 17~23절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다만 1장 17~23절의 기도는 성도 각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본 단락의 기도는 성도 전체,  곧 교회에 초점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굳세어지게 하시고'(강건하게)에 해당하는 '크라타이오테나이'(krataiothenai)원형 '크라타이오오'(krataioo)13절의 '낙심하다'에 해당하는 '엥카케인'(engkakein)과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다.

'엥카케인''용기를 잃게 하다'(discourage)라는 뜻이라면, '크라타이오오'(krataioo) '힘을 얻게 하다'(strengthen)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크라타이오오'(krataioo)는 신약 성경에서 단 네 번밖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루카 복음 1장 80절과 2장 40절에서는 어린 아이의 성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고, 코린토 1서 16장 13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 '믿음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하고 권면하는 데 사용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절에서 쓰인 이 용어도 근육의 힘을 배양하는 육체적인 굳셈이 아니라 내적 인간(속 사람; inner being)사랑과(17절,18절) 성령의 충만(19절, 20절)으로 채우는 영의 굳셈을 나타낸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라고 하면서(2코린4,16)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졌었다. 

이처럼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기도하는, 영적으로 굳세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에페소 교인들의 '내적 인간'(속 사람)이다. '내적 인간'인간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고,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자리이며, 전 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이다. 

이제 '~하게 해주시고'에 해당하는 '카토이케사이'(katoikesai)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에 해당하는 14절에서 21절까지에는 모두 네개의 부정사가 나온다. 16절의 '굳세어지게 하시고', 17절의 '사시게', 18절의 '깨닫는', 19절의 '알게'가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부정사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두 개의 '히나'(hina; so that ~ may; ~하도록)절에 의해 각각 두개 씩 수식을 받고 있다(16,17절과 18,19절).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네 개의 부정사는 사도 바오로의 기도의 핵심을 파악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먼저 내적 인간(속사람)이 굳세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사시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정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하게 해 주시고'로 번역된 '카토이케사이'(katoikesai)원형 '카토이케오'(katoikeo)'정착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이 동사는 나그네로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다가 떠난다는 의미의 '파로이케오' (paroikeo)와 달리 한 장소에 정착하여 계속 거주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그 현존과 임재의 처소인 성전 안에 계신다고 할 때, '카토이케오'(katoikeo)가 쓰였다는 것은(마태23,21) 새 시대에 하느님의 성전이 된 성도들에게(1코린3,16.17)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거주'는 회개를 위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표현이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사람 안의 구체적인 공간을 '마음'(카르디아; kardia; heart)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항상 그분과 동행할 때,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고 살 수 있다(요한16,33).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는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의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초가 굳어지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두 동사는 모두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은 생물학적 비유와 건축학적 비유가 결합된 묘사인데, 콜로사이서 2장 7절의 '그분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라는 진술과 유사한다.

먼저 '에르리조메노이'(errizomenoi)의 원형 '리조오'(rizoo)식물의 뿌리를 뜻하는 '리자'(riza)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뿌리박게 하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확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테테멜리오메노이'(tethemelliomenoi)의 원형 '테메릴리오오'(themelioo)는 건축할 때에 '기초를 놓다'라는 의미이다(마태7,26; 히브1,10).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는 식물 및 건축물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이중적 표현은 에페소 성도들이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18~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에서 사도 바오로는 당시 이단으로 교회에 침투하고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으로 하느님께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유일한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과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의 정도가 무한함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화된 사랑이다(로마5,8).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최고의 저주와 형벌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수용할 만큼 넉넉하게 '넓고'(platos; 플라토스; breadth),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계속될 만큼 영원히 '길고'(mekos; 메코스; length; 에페4,5),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지극히 '높으며'(hypsos; 휩소스; height), 가장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깊다'(bathos; 바토스; depth; 에페2,1~3)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그리스도의 이처럼 풍성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마8,39). 넓고 길고 높고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대의 주석가들은 본문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로는 하늘을 향하고 아래로는 깊은 땅을 향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큰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우의적이고 풍유적인(allegorical)면이 없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미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충만'이라는 단어 '플레로마'(pleroma; fullness)는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상태이기도 하다(콜로2,10). 

전치사 '에이스'(eis)'~으로'(with)라는 수단의 의미로 번역했으나 목적어를 수반하는 본문에서 '에이스'(eis)지향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에 이르기까지'(up to)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충만으로 채운다'(be filled with)는 번역보다는 '하느님의 충만에까지 채운다'(up to all the fullness of God)라는  번역이 원문의 뉘앙스를 더 살려준다고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을 가지고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이르게 될 영광을 구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1요한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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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에페4,1-6)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1-3)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사람이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 가운데(창세1,1)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로마8,30)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구원 과정은 개인의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받은 부르심' 이라고 번역된 '에클레테테'(eklethete)가 수동형이란 사실과 더불어'교회'라는 뜻의 '엑클레시아'(ekklesia)어근이 같다는 점에서 이 사실이 드러난다. 즉 본문에서 바오로가 언급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따라서 에페소서 4장 2-3절에 기록된 겸손, 온유, 오래 참음과 같은 거룩한 성품을 갖는 것이나, 4장 11-12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나 예언자, 복음 선포자, 혹은 교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에페4,12) 

한편,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갖는다는 말인데, 구체적 내용이 2절과 3절에 있다. 특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거룩함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리고 분열에서 일치에로의 부르심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 각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2절과 3절의 말씀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2절 상반부는 '~을 가지고'(with)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meta)가 2회나 쓰였다. 직역하면, '모든 겸손과 온유를 가지고, 오래 참음(인내심)을 가지고' 가 되고 이것은 이어 나오는 '서로 참아 주는 것'(서로 용납하는 것)의 전제 조건이다. 교회 안에서 한 성도가 다른 성도를 사랑으로 참아 주기 위해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심이라는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는 성품은 겸손이다. 겸손은 온유나 인내심보다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새 성경은 '다하고' 로 번역했지만, '모든'이라는 뜻의 관사 '파세스'(pases)의 수식을 직접 받는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와 가장 기초적인 덕을 이루는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을 낮춤' 이 겸손의 진정한 의미이다.이것은 '겸손'에 해당하는 '타페이노프로쉬네스'(tapeinophrosynes ; humilitas)'낮아짐'(lowliness)이란 의미를 갖는데서도 알 수 있다. 

가장 큰 겸손의 도 보이신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겸손의 극치를 보이셨다.(필리2,7.8)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날마다 자신의 옛 본성과 자아를 부정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마태16,2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세우신다.(야고4,6) 

특히 이렇게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성도 각자가 소유하고 있을 때 교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채워줌으로써,교회 공동체 전체가 분리되지 않고 일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프라우테토스'(prautetos) 역시 성경에서 성도들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사랑의 특성이면서(1코린13,4)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이고(갈라5,22.23) '폭력'의 반대로서 구원받은 자들이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성품으로 묘사되고 있다.(콜로3,12 ; 1티모6,11) 

특히 이 온유는 약함으로 인한 온순함을 의미하지 않고, 강함을 절제함으로써 나타나는 부드러움(meekness ; gentleness)을 의미한다. 온유는 거대한 화물선이 부두에 정박해서 짐을 내릴 수 있도록, 배의 측면과 부두의 선착면 사이에 끼워진 고무 타이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동일한 본체로서, 전능한 분이시면서도 온유하셔서 무력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온유하셔서 죄인들을 참으시면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온유로서 우리를 대하셨기에, 구원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을 향해 같은 온유함으로,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강한 심장을 가지고, 외적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으로 대해야 한다.

'인내심'(오래 참음 ; long-suffering)도 '온유'와 함께 코린토 전서 13장 '사랑의 송가' 에 나오는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스'(makrothymias)의 원형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멀다'(루카15,13), '길다'(마르코12,40) 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마크로스'(makros)'진노'(묵시록14,8), '화'(분)(루카4,28) 이란 의미의 명사 '튀모스'(thymos)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분노로부터 먼 감정' '분노를 자제할 수 있는 감정' 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 중요한 단어이다. 로마서 2장 4절은 구원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그 큰 인내'(길이 참으심)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들이 삶 속에서 죄를 많이 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과정 중에서 탈락하지 않고 계속 하느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길이 참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다른 지체들을 향해 또한 자기 자신을 향해 오래 참아야 함이 당연하다.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사랑'에 해당하는 '아가페'(agape)는 자신의 이기적 감정을 충족시키는 욕망적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의 유익을 이루는 이타적 사랑으로서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 사랑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 안에서 지체된 자들을 마땅히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참아주고'(용납하고)에 해당하는 '아네코메노이'(anechomenoi)의 원형 '아네코마 '(anechomai)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대함을 나타내는 동사이다.(마태17,17 ;사도18,14 ;2코린11,1) 본문에서는 명령 분사 현재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곧 명령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지체가 많다.

특히 에페소 교회는 순수한 이방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자 등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으로 서로 참아 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교회는 결코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명령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분사 '아네코메노이'를 사용해서 서로를 참아줄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평화의 끈으로' 바오로가 에페소서 4장 1-6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 즉 교회 공동체의 일치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은 평화의 끈(매는 줄)이다. '평화'라는 끈을 가지고 일치를 힘써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스(eirenes)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lom)의 번역어이다. 샬롬의 용례는 신변의 안전(창세26,31), 물질적 평화(2사무7,1; 2열왕5,22)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의 평화(탈출31,17)도 포함된다. 또한 개인의 안전과 평화만이(2사무3,23) 아니고, 국가나 공동체의 평화도 포함한다.(2사무17,3)따라서 평화란 성도 개인의 차원에만 머룰러서는 안되고, 교회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누려야 한다. 

바오로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평화를 '끈'(매는 줄)으로 비유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쉰데스모'(syndesmo)의 원형 '쉰데스모스'(syndesmos)'~와 함께'(with)란 뜻의 전치사 '쉰'(syn)과 명사 '데스몬'(desmon)의 합성어로서, 둘 이상의 노예나 죄수를 차꼬나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을 말한다. 

'데스몬'이라는 단어는 '결박하다'(마태12,29), '묶다'(마태13,30)라는 의미의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결박(투옥)(사도20,23)으로 번역되며, '올가미', '차꼬'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명사이다. 이러한 합성어 '쉰데스모스'는 특히 콜로사이서 2장 19절에서 교회를 몸에 비유하는 문맥에서 '관절과 인대'(힘줄)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결국 '평화'라는 '끈'성도와 성도 사이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공동체로 혹은 하나의 몸처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서로 이질적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끈인 것이다.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교회안의 성도가 서로 평화롭기 위해 애를 쓴다면,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애쓰십시오' 로 번역된 '스푸다존테스'(spudazontes) '애를 쓰다' , '노력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스프다조'(spudazo)의 명령 분사 현재형이다.

여기서 지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은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기간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서로 무관하고 이질적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일치가 끝까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체된 각자의 지속적인 노력 중요하다. 

한편, '하나'(한)라는 단어는 에페소서 4장 3-6절에 도합 일곱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속성에서 일치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3-6절의 내용을 세례 입문자에게 들려주는 신경(credo)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는 저절로 되거나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을 품을 때에(필리2,2)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값진 열매이다.

 



월요일  제1독서 (에페4,1-7.11-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7)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1-6절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과 교회 일치의 근거 및 당위성에 대해 제시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전환의 접속사 '데'(de; but)가 사용된 에페소서 4장 7절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총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의 독특성을 말하며, 나아가 그들의 다양한 봉사의 직분으로써 하나된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에게 분량에 따라 은총을 주셨음을 밝힌다. 여기서 '은총'으로 번역된 '헤 카리스'(he charis; grace)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죄의 용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도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가리킨다. 이 봉사의 직분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므로 '은사'(charisma)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부르시는데, 각 지체의 개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지체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각 은사를 통해(1코린7,7 ;고유한 은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된 교회를 위해 효과적으로 봉사하게 하셨다(로마1,11). 

에페소서 4장 7절을 새 성경은 능동태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수동태이다. 직역하면 '그러나 이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졌다'(But to each one of us grace was given)이다. 

여기서 '은총'('헤 카리스'; he charis; grace)주어로 사용된 것은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주어졌다'('에도테'; edothe)라는 수동태로 쓰여진 것은 은사 분배자이신 그리스도의 시혜성(施惠性)을 드러낸다. 또한 이 시제는 부정 과거 시제인데, 이것은 은사의 분배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 편에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테스 도레아스'; tes doreas; of the gift) 양에 따라' 이것은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분량에 따라 주어졌음을 말한다.

여기서 '양에 따라'에 해당하는 '카타 토 메트론'(kata to metron)'알맞게 측정된 것에 따라서'(according to the measure)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측정하시고, 그에 적합한 봉사의 직분을 주신다는 것이다(Christ apportioned it).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이진 은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만을 높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불평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도 안된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로마8,29)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은사를 자랑하거나 불만삼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로써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교회와 지체를 위해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에페4,12). 

 "그분께서는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11) 에페소서 4장 7-10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 저마다 분량대로 은총을 베푸셨음을 말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에페소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혜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 각 지체에게 부여된 각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공통의 목적을 갖는다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에페소서 4장 11절에는 초대 교회 당시 있었던 대표적인 직분들을 나열한다. 먼저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루스'(apostolus)는 원형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복수형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사명을 주어 자신의 대리자로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파견된 자'(使者)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칭하였으며(루카6,13)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셨다(마태10,1-8).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마태10,5; 갈라1,1). 둘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이를 증거할 사명을 맡은 사람(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증인) 이어야 한다(사도1,21.22). 셋째,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요한14,26).

이러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먼저 부르신 열 두 제자 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좋은 의미로서의 사도는 이들로 제한되고 국한된다.

그런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목매어 자살한 뒤에, 열한 사도는 그를 대신하여 마티아를 제비뽑아 빈 자리를 보충했다(사도1,15.16). 그리고 그 후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사도의 대열에 들어섰고(사도14,4; 갈라1,15-17) 주님의 동생이라고 여겨지는 야고보도 사도로 불리워졌다(갈라1,19).

다음으로 '예언자', '프로페타스'(prophetas)의 원형 '프로페테스'(prophetes)'~앞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로'(pro)'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미리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예언자 하느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개별적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사도'라는 용어와 자주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에페2,20; 3,5; 묵시18,20) 예언자의 역할은 사도의 그것과 유사했으며, 또한 두 직분은 초대 교회를 세우는 양대 기둥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도의 메시지가 일반적이고 교리적이었다면, 예언자의 메시지는 실질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인도하는 일에서 주도권을 가진 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신약의 예언자는 사도들의 사목을 도와 교회내에서 '덕을 세우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였다(1코린14,3). 신약 시대의 유명한 예언자로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다와 실라스(사도15,32) 등이 있었고, 이러한 예언자의 역할은 A.D. 2세기 경까지 이어졌다.  

또한 '복음 선포자'는 선교사처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스타스'(euanggellistas)의 원형 '유앙겔리스테스'(euanggellites)'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유앙겔리조'(euanggellizo)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단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 21장 8절에는 필립포스에게, 그리고 티모테오 후서 4장 5절에는 티모테오에게 사용되었다. 한편, 사도(apostles), 예언자(prophetes), 복음 선포자(euanggelistes)는 원문에서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계속해서 교회 내의 다양한 봉사의 직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스'(poimenas; pastors)의 원형 '포이멘'(poimen)본래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양치는 목자', '가축지기'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요한10,11).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포임네'(poimne)'양떼'를 의미한다는 것(루카2,8; 1코린9,7)이 '포이멘'이 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임을 잘 나타낸다.

그 다음 '목자'를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교사'를 가리키는 '디다스칼루스'(didaskalus; teachers)앞에 관사 '투스'(tus)가 없다는 점에서, '목자'와 '교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견해를 따르면 '목자'는 곧 '가르치는 자'(교사)라는 것이다. 코린토 전서 12장 28절에서 사도와 예언자 다음에 교사만 언급하는 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목자'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경우에는 '목자'를  감독과 원로로 나뉘어서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교사'를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가르쳐 영적으로 인도하는 직분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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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에페4,7~16)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7)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11)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12)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13)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6절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과 교회 일치의 근거 및 당위성에 대해 제시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전환의 접속사 '데'(de; but)가 사용된 본절 이후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받은 교회 구성원들의 독특성과 그들이 다양한 봉사의 직분을 가지고 하나된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에게 분량에 따라 은총을 나누어 주셨음을 밝힌다. 여기서 '은총', 즉 '헤 카리스'(he charis; grace)는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의미의 죄의 용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봉사의 직분을 가리킨다. 봉사의 직분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므로 '은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부르시는데, 각 지체의 개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지체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각 은사를 통해(1코린7,7)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된 교회를 효과적으로 섬기게 하셨다(로마1,11). 

여기서 7절의 원문을 보면, 한글 새 성경은 능동태로 번역했으나 원문상으로는 수동태로 되어있고, 직역하면 '그러나 그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졌다'(But to each one of us grace was given)이다. 여기서 '은총'이 주어로 사용된 것은 은총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수동태로 쓰여진 것은 은사 분배자이신 그리스도의 시혜성을 잘 드러낸다. 

둘째로 본문의 시제가 부정(不定) 과거 시제인데, 이것은 은사의 분배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 편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본문은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혜(doreas; 도레아스; gift; 선물)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분량에 다라 주어졌음을 말한다. 여기서 '양에 따라'에 해당하는 '카타 토 메트론'(kata to metron)'알맞게 측정된 것에 따라서'(according to the measure) 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 각자에게 가장 알맞는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측정하시고,그에 적합한 봉사의 직분을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만을 높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도 안된다.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로마8,29) 나에게 가장 알맞는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 은사를 자랑삼거나 불만삼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로써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교회와 지체를 섬기는 것이다(에페4,12).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11) 이 구절에 대해서는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1코린12,12-14.27-31ㄱ)의 코린토 1서 12장 28절 주해 보면 좋겠다. 다만 빠진 부분만 보충하면, 여기서 '복음 선포자'는 선교사처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스타스'(euanggelistas)의 원형 '유앙겔리스테스'(euanggelites)'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유앙겔리조'(euanggeliz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번역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단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 21장 8절에서는 필리포스에 대해서 사용되어 '복음 선포자' 로 번역되었고, 티모테오 후서 4장 5절에도 티모테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스'(poimenas)의 원형 '포이멘'(piomen)본래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축지기', '양치는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요한10,11).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포임네'(poimne)'양떼'를 의미한다는 것은(루카2,8; 1코린9,7) '포이멘'(poimen)이 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임을 잘 나타낸다. 한편, 목자를 바로 이어 등장하는 교사와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와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먼저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 '교사'를 가리키는 '디다스칼루스'(didaskalus) 앞에 관사 '투스'(tus)가 없다는 점을 그 근거로 둔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목자'는 곧 '가르치는 자'(교사)라는 것이다. 코린토 1서 12장 28절에서 '사도''예언자' 다음에 '교사'만 언급되는 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목자'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경우에는 먼저 '목자''감독''원로'로 나뉘어지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교사'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가르쳐 영적으로 인도하는 직분으로 본다.

실제로 '목자'라는 용어는 필리피서 1장 1절이나 티모테오 1서 3장 2절에서는  '감독'이라는 용어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고, 사도행전 14장 23절이나 티모데오 1서 4장 14절에서는 '원로'(단)라는 용어와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위의 두 견해 중에서 문법적으로 보면, 목자가 곧 가르치는 교사라는 견해가 타당하다. 가르치는 일은 사목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목자와 교사는 서로 결합하여 한 가지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12) 먼저 본절에서 전치사가 세 개 쓰였는데, 성도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라는 구절 앞에 사용된 전치사는 '프로스'(pros)인 반면에,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한다는 구절 앞에 사용된 전치사는 '에이스'(eis)이다. 

전치사 '에이스'(eis; for)최종 목적의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볼 때, 본절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to prepare God's people; for the perfecting of the saints) 목적이직무를 수행하는 일(봉사의 일; the work of the ministry; the work of service)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일차적으로 '이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성장시키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에페소서 4장 11절에 거론되고 있는 직분자들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준비시키기 위해 직분(직책)을 부여받았으며, 그 직분의 수행의 결과로 준비된 성도들은 봉사의 일을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사이서 1장 28절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적을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라고 말하며, 본절과 동일한 사상을 보였다. 원문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기 위함'에 해당하는 전치사구 앞에 쉼표(,)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때,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궁극적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데에 있음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 '준비'에 해당하는 '카타르티스몬'(katartismon)은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사용된 단어로서 '온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힘과 조화를 이루어 발전하게 한다' 또는 '원래 있던 제 자리로 되돌리다'라는 의미이다.  후자는 의학 용어로 사용된 경우로서 '탈골된 뼈를 제 자리로 맞추어 넣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나,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사람이 피조물로서 또한 성도로서 제 위치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되는 일임을 보여준다. 한편,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스'(diakonias)로마서 12장 7절에서는 '봉사'로 번역되었는데, 원어로는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동일한 단어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로마서 12장 7절에의 경우에는 은사로서의 봉사를 말하고 본문의 경우는 교회안의 성도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봉사를 말한다. 이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할 때,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경우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섬기는 일을 기본적인 의무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킨다(세운다)는 말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했던 에페소서 2장 21절, 22절의 표현과 관련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를 이루는 각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 성전으로 만들어 가게된다. 

그런데 이 일이 가능하려면, 성도 각자가 온전하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절의 요지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으면, 각 사람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교회라는 건물이 결코 온전히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3) 이 구절은 9월 21일 금요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페4,1~7; 11~13)에서 이미 주해하였으니 참고바란다.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에페5,21-33)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주인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1-24)

에페소서 4장 17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으로서 각 성도의 새 생활에 대한 실제적 권면을 주고 있는 바오로는, 이제 5장 21-33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호 순종 명령대표적 예로서 부부사이의 상호 순종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21) 여기서 '순종하십시오' 에 해당하는 '휘포탓소메노이'(hypotassomenoi)의 원형 '휘포탓소'(hypotasso)'~아래에' 를 뜻하는 '휘포'(hypo)'배치하다' 를 뜻하는 '탓소'(tass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배치하다', '하위에 두다' 라는 의미이다. 

이 동사는 본문에서 명령 분사 수동태로 쓰였으나, 이 수동태는 자동사의 의미를 나타낸다. 즉 상대방에세 순종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권위에 눌려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어 섬긴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특히 소년 시절 예수님께서 그 육신의 부모를 '그들에게 순종하여 지냈다' 라는 진술에서도 쓰인 바 있다.(루카 2,51) 성도는 마치 예수님께서 그 부모를 자발적으로 공경함으로써 순종했듯이, 지체된 자들은 머리에게 자기 자신을 순종해야 한다. 

바오로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라고 한 말씀이나 본문에서 서로 순종하라고 한 말은 동일한 의미이다. 사랑의 최대 덕목은 섬김이고, 그것은 바로 종의 무조건적인 섬김이다. 게다가 그 섬김은 사랑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순종과 사랑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에페5,22-6,9) 

한편 그리스도를 경외함과 성도간에 서로 종처럼 순종하는 일은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한 루카 복음 10장 27절의 말씀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종처럼 섬기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경외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2)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상호 순종을 명령한 21절에 이어 본절 이하에서는 그 대표적 예로서 부부 사이의 상호 순종 권면을 주고 있다. 22절 원문에는 '순종하듯 ~ 순종해야 한다' 는 동사가 없다. 21절의 '서로 순종하십시오' 에서 동사 '순종하다' 에 해당하는 '휘포탓소메노이'(hypotassomenoi)가 본문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 아래 하나의 예로 제시되는 본문의 경우에는, 굳이 동일한 동사를 반복해서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자는 사람의 수를 셀 경우에 제외될 정도로  남자와 동일한 인격체로 취급받지 못했다.(민수1,25 ; 마태14,21) 또한 본문 당시의 그리스 세계에서도 여자는 남자가 갖는 여러 가지 권리들을 누리지 못했다. 바오로 역시 본질적인 의미는 다르지만, 본문에서 여자를 향해 자신들의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다른 사실은 순종의 모델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24절)이라는 데에 있다. 바오로는 남편을 그리스도로, 여자를 교회로 비유한다.(23,24절) 결국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매우 큰 유사점이 있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각자의 역할을 배울 수 있으며,반대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23)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비밀은 인간 사이의 부부 사이를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 에 해당하는 '아네르 에스틴 케팔레 테스 귀나이코스'(aner estin kephalle tes gynaikos ; the husband is the head of the wife)에서 동사 '에스틴'(estin)'~이다' 라는 뜻의 현재 직설법으로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만물과 교회의 머리되심에 대해서는 바오로가 본서의 서두에서부터 강조해 온 것으로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도에 대한 주권을 보여준다.(에페1,22) 또한 그리스도는 성도가 자라가야 할 성장 모델로서의 머리이시기도 하다.(에페4,13)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정 안에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남편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닮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남편의 영적 수준이 아내의 수준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훌륭한 아내라면 자신보다 낮은 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무시하거나 자신이 남편의 머리가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잠언31,10-12) 왜냐하면, 훌륭하고 현숙한 여인의 기준은 주님을 경외함에 있고(잠언31,30),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그분이 자신에게 주신 남편을 존경하고, 그의 권위를 세워주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1코린11,3)

이제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통해서이기(콜로1,18)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바오로는 본절을 통해 교회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순종의 정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이에 나오는 24절의 '모든 일에서' 라는 말은 '순종의 범위' 를 보여준다.(1코린11,5)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25) 아내가 남편에게,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22-24절의 내용은 극심한 남녀 차별의 내용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바오로는 결코 비인격적 남녀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이러한 사실은 부부 사이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한 순종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 역시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절부터 30절에 이르는 여섯 절에 걸쳐 남편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듯이 아내를 철저하게 사랑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는 철저히 강조되고 요구했으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한 사회에서 바오로는 남편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한다. 자신의 몸을 내어줄 정도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사랑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아가파오'(agapao)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이성인 상대방에 대한 깊은 성적 욕망을 나타내는 '에라오'(erao)라는 동사와 가정 및 친구에 대한 인간적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leo)라는 동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남편들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듯이,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해야할 것을 명령하면서 하느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6) 그리스도는 교회를 씻어 거룩하게 하시려고, 또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 '씻어'에 해당하는 '루트로'(lutro ; with washing)는 문자적으로는 '목욕'을 뜻하는 단어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물로 씻어' 라는 표현을 몸을 씻는 육체의 행위로 보기보다는 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영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물로 씻는 바로 이 행위는 세례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구약 성경의 에제키엘서 16장 9절에서도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는 구절에서, 물로 씻는 행위를 속죄를 위한 세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온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 (1베드3,21)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물로 씻는 행위를 말씀을 깨끗하게 하는 행위와 관련짓고 있다는 것이다. 본절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희랍어로 '로고스'(logos)가 아닌 '레마'(rema)이다. 이 둘을 비교하자면, '로고스' 말씀 자체 또는 말씀을 비유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반면에, '레마'는 입 밖으로 나온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히 세례를 베풀 때에 행해진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쓰인 표현이다. 이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누구)에게 세례를 준다' 세례 예식의 기도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세례 때 행하는 강론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남편은 가정의 머리, 아내는 가정의 심장' 이라 하셨다. 머리는 지성의 주체로서 권위를 말하고, 심장은 애정의 주체로서 모성애를 말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가족 구성원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가족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권위를 말한다. 그럴 때 남편은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또한 심장에서 혈관을 통해 온몸의 피가 하루에 지구의 두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만큼 아내는 남편과 자녀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공급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남성이 남성다움을 구현하는 것은 가장, 남편, 아버지로서 세 가지 역할을 다 잘할 때이다. 가정 안에서 여성이 여성다움을 구현하는 것은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 세 가지 역할 다 잘할 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처럼 마지막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다 쏟기까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는 희생과 헌신이 있는데, 왜 가정이 망가지고 해체가 되겠는가? 

특히 이 시대 갈 곳없는 아버지들을 보면서, 아내는 밥상에서 자식보다 남편의 밥을 먼저 퍼주고, 남편이 출근할 때 자녀들로 하여금 아버지께 인사를 시키고, 한달동안 고생하여 번 월급이 통장안으로 들어왔을 때, 식탁이 달라지는 조그마한 사랑의 반응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과 아버지의 권위를 살려주는 것이 가정의 심장으로서 아내가 성모님처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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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에페6,1~9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1~3) 

에페소서 6장 1~4절에서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 부부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구성원인  자녀와 부모사이의 상호 순종을 권면하며, 에페소서 6장 5~9절에서는 상전과 종 사이의 상호 순종을 권면하고 있다. 이러한 일관성을 지니는 에페소서 5장 22절~6장 9절에서의 권면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라고 에페소서 5장 21절에서 밝힌 바 있는 대명제와 연결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바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께 대한 경외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녀와 부모 사이의 상호 순종을 권면하고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본문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자녀가 부모를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 순종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주님 안에서'(엔 퀴리오; en kyrio; in the Lord)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 구절의 의미는 먼저 부모를 순종하라는 계명을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 가운데는 인간은 하느님을 순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당신의 대리인으로 주신 부모를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분들을 부모로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자신을 낳고 길러 주시는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가족간의 질서를 주신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하느님께서 가정의 권위를 부모에게 맡겼으니,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한편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라는 본문이 신앙을 갖지 않은  부모에 대한 순종을 경시하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부모를 두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이 교훈하는 부모에게 자녀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부모의  회두를 위해 더욱 섬기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사이서 3장 20절에서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명하면서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항에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명령과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14,26)라는 주님의 말씀 및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루카18,29.30)라는 주님의 말씀이 상호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루카 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주님의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이 부모에 대한 순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부모 공경 관련 계명은 탈출기 20장 12절 신명기 5장 16절에 있는 계명으로서 십계명중에서 제4계명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약속이 딸린 첫 계명'이란 표현에서 '약속'(에팡겔리아; epanggelia; promise)은 구약의 기록들에 나오는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는 내용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약속의 내용을 다음 절에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는 내용으로 바꾸어 표현하였지만, 그 근본 의미는 동일하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구약의 축복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부모 공경에 대한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강조하였다.  

여기서 '공경하여라'에 해당하는 '티마'(tima; hono(u)r)의 원형'티마오'(timao)'(어떤 일에)가치를 두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는 내적 가치를 포함하는 의미이다.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지고(至高)의 가치를 갖는 것은 부모를 공경함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편, '약속이 딸린 첫 계명'이란 표현은 부모 공경의 계명이 십계명 가운데 네번째 계명이라는 사실과 상충되는 듯이 보인다. 십계명 가운데 1~3계명은 하느님과 관련한 계명이고, 4~10계명은 사람과 관련한 계명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부모 공경의 계명은 사람과 관련한 계명들 중에서는 가장 첫번째의 계명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원문의 '첫'에 해당하는 '프로테'(prote; first)에는 순서적으로 '첫째'라는 뜻도 있지만, 우선 순위에 있어서 '먼저' 또는 중요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이란 의미도 갖는다. 이 의미에 따르면, 약속이 딸린 첫 계명이란 표현 부모 공경의 계명이 십계명 가운데 첫번째 계명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부모에 대하여 자녀들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의미가 된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분문은 신명기 5장 16절을 인용한 것인데,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이라는 내용이 생략되었다. 그런데 이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 땅에서 많은 복을 받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어려움을 겪다가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약속이 개개인에 대한 약속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약속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장수한다는 것이다. 한오래 산다는 상급에 대한 표현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는 형벌의 반대 상황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그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제멋대로 사는 불효자들은 돌로 쳐죽이는 극형에 처해졌다(신명기21,18~23).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사람만이 온전한 수명을 누리며 살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이라는 표현을 생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에페소 교인들이 신명기의 말씀을 그 옛날 가나안이라는 시간적,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요소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사도 바오로 당시의 모든 그리스 세계의 땅 뿐 아니라 후대 독자들이 살아가는 모든 세계를 아우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땅' 장수가 지상에서의 삶에 국한된 복임을 말해준다.

한편 부모를 공경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축복을 묘사하는 동사들의 시제가 다름을 알아야 한다 .먼저 '네가 잘 되고'에 해당하는 '유 소이 게네타이'(eu soi genetai; it may go well with you)부정(不定) 과거 시제이고, '오래 살 것이다' 에 해당하는 '에세 마크로크로니오스'(ese makrochronios; you may enjoy long life)미래 시제이다.

부정 과거는 격언적 부정 과거(Gnomic Indefinite Past)로서 '잘 되고'라는 축복은 이것이 이미 일어난 일이나 다름없는 아주 확고한 진리임을 강조한다. 또한 미래 시제로 표현된 '오래 살 것이다'라는 축복은 장수의 복이 확실하게 일어날 축복임을 보여준다. 즉 서로 다른 시제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모두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에페4,32-5,8)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4,32) ~~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5,1)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것은 에페소서 4장 31절에 나열된 성도가 마땅히 버려야 할 부정적인 것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로서 새롭게 된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요소들이다.

먼저 '너그럽고'에 해당하는 '크레스토이'(chrestoi; kind)는 31절에서 언급된 행위들 (원한, 격분, 분노, 폭언, 중상, 악의)과 정반대되는 마음과 태도를 종합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닮아가려고 할 경우에만 체득되는 하느님 자비하심의 성품과 관계되는 것이다(에페2,7; 로마2,4). 

혹자는 이 단어의 어원을 그리스인들이 자기 이웃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길 정도의 마음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다음 '자비롭게 대하고'에 해당하는 '유스플랑크노이'(eusplangchnoi)원형 '유스플랑크노스'(eusplangchnos)는 문자적으로 '강한 내장을 가지고 있는'(having strong bowels)이다.

고대 근동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감정이 사람의 내장 가운데 존재한다고 여겼다. 본절의 '자비롭게 대하고'(compassionate; tender hearted)라는 표현도 이런 사상과 관련되어 마음의 중심, 내장 안에서부터 상대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을 갖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 ~  용서하신 것처럼' 각각 '용서하신 것처럼','용서하십시오'로 번역된 '에카리사토'(echarisato)'카리조메노이'(charizomenoi)는 모두 '카리조마이'(charizomai)를 원형으로 한다. '카리조마이''은총'을 뜻하는 '카리스'(charis; '무상으로', '공짜로'라는 뜻)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은총을 베푸다'라는 뜻이다(1코린2,12; 선물; 필리1,29; '특권').  그런데 여기에서 은총을 베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용서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로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용서의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갚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희생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용서의 은총을 모른체 하는 태도이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않느냐?" (마태18,33)

한편, 여기서도 '하십시오'로 번역된 '기네스테'(ginesthe)현재 명령형으로서 이 역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5,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 각자의 새 생활에 대한 권면을 기록하고 있는 에페소서 4장 17절~6장 20절의 단락 가운데서 5장 1절~14절은 특히 이란 이미지를 사용하여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권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을 여는 본절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될 것을 직접적으로 권면한다. 이러한 서론적 권면에 이어지는 에페소서 5장 2절 이하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4장 31절, 32절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본절 서두에 나온 '그러므로'로 번역된 '운'(un) '따라서','그렇다면'이란 뜻을 지니는 추론을 나타내는 접속사란 사실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즉 사도 바오로는 성도는 마땅히 하느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4장 31절, 32절에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새 성경에서 본절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분은 ~ 되십시오' 에 해당하는 '기네스테'(ginesthe)가 원문에서는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본절의 맨 앞에 나와 강조되면서 동시에 바로 다음 절에 가장 먼저 나오는 '여러분도 ~ 살아가십시오'(페리파테이테; peripateite)라는 단어와 절묘한 대구를 이룬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현재 명령형으로 하느님을 본받는 것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랑의 행위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사오 바오로는 각각의 절의 선두에 나오는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됨''삶'(행함)을 강조하고, 또한 강조하는 순서를 통해 '삶'(행함) 이전에 '됨'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본받는 사람'에 해당하는 '미메타이'(mimetai)의 원형 '미메테스'(mimetes)는 다른 사람의 특성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미모스'(mim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모방자'(imitators)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성도는 영적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그대로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각을 가진 성도가 삶 속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상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왜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며 그것이 가장 큰 이상인가? 그것은 먼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은(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사랑받는 자녀답게''사랑받는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게' 라는 뉘앙스를 나타낸다.  여기서 자녀라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이며(창세1,26; 5,1) 특히 성도는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인격의 원형이 되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1코린15,22.45). 또한 그분을 닮는다는 것 에페소서 4장 24절'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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