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독서묵상)

2015. 10. 31. 오전 6:26:57

글자


 

디도서(독서묵상)


http://cafe.daum.net/FiatLove/mCrC/472 

월요일  제1독서 (티토1,1-9)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로들은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5) 

티토서 1장 5절부터 3장 11절까지가 서간의 본론 부분이다. 1장 5절에서 16절은 사목자로서 수행해야 할 근본 직무로서, 교회 조직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교훈인 원로의 자격 요건에 대한 지침정통 교리를 수호하는데 필요한 교훈인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을 시작하는 본절은 바오로가 티토를 크레타에 남겨둔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바오로가 티토를 크레타에 남겨두었다는 언급을 통해, 바오로가 크레타에 갔을 때 티토를 남기고 다음 선교지로 떠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바오로가 크레타에 들러 교회를 개척한 때1차 로마 투옥에서의 석방 직후였을 것이다. 크레타는 지리적으로 그리스 본토의 남단 지중해 안에 있는 크고 유명한 섬이다. 크레타는 시칠리아, 시르데냐(이 둘은 이탈리아에 있는 섬들), 키프로스 다음가는 지중해에서 네번째로 큰 섬이며,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 섬이 '캅토르'로 기록되어 있으며(신명2,23; 예레47,7; 아모9,7) 오늘날에는 '칸디아'(candia)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일찌기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이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통치 당시에 행정 구역상으로 키레네와 합쳐져 한 지방이 되었다. 이곳 출신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함께한 사람도 있었다.(사도2,11)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본절을 통해 티토는 애초부터 크레타 교회를 돌보도록 세워진 사목자라기보다는 바오로를 대신하여 일정 기간 동안 크레타 교회를 돌보도록 위임된 바오로의 대리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바오로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티토를 크레타에 남겨 두었다. 

그 중 본문은 첫번째 목적이다. '남은'으로 번역된 '레이폰타'(leiponta)원형 '레이포'(leipo)'열등하다', '모자라다'(야고1,4), '없다', '결핍하다'(야고2,15), '부족하다'(티토3,13; 루카18,22)라는 뜻을 갖는데,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불완전한 것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바오로가 말하는 복수형으로 표현한 남은 일들은 여러가지를 들 수 있다. 당시 크레타 교회가 온전한 교회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보다 보완되어야 할 것들로는 거짓 사상에 맞선 진리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과 교육, 그리고 기타 비조직적이고 비행정적인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바오로의 신뢰를 받고 있던 티토는 이러한 일들을 바로잡을 적임자로 여겨져 크레타에 남겨졌을 것이다.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가 티토를 크레타 섬에 남겨둔 두번째 목적이다. 본문에서 '고을마다' 라는 표현을 보아 크레타 안에는 이미 몇몇 지역에 상당수의 교회가 존속하고 있었으며, 티토는 바로 이런 여러 교회들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원로들을 세우는 일을 처리해야 했다. 

'원로들을'로 번역된 '프레스뷔테루스'(presbyterus)'프레스뷔테로스'(presbyteros)복수형 목적격이다. '프레스뷔테로스'는 '나이 많은' 이란 의미의 형용사 '프레스뷔스'(presbys)의 비교급으로서 원래 '연장자', '원로', '장로', '노인'(사도2,17), '조상이나 옛 사람'(히브11,2)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유대인의 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마태16,21; 마르코8,21; 루카9,22; 사도4,5), 혹은 개개의 도시들에서 공적 업무를 처리하고 재판을 집행하는 자(루카7,3), 교회나 집회를 관장하는 자(사도11,30; 1티모5,17; 2요한1장; 3요한1장; 2베드5,1.5)등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다.

여기서 말하는 원로는 오늘날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신부'(사제)의 개념에 가깝다. 당시에는 '목자'를 지칭하는 '포이멘'(poimen)이란 단어가 따로 있었으나(에페4,11), '프레스뷔테로스' 혹은  7절에 언급되는 '감독'(에피스코포스;episkopos;오늘날의 주교)이란 단어가 더 많이 쓰였다.

이 가운데 '원로'(elder)가 구약 시대 한 성읍의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로, 유대적인 배경에서 나온 단어라면,  '감독'(bishop)은 그리스 도시의 행정 책임자를 지칭하는 말로 그리스적인 배경에서 나온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원로'라는 단어가 '연장자'라는 측면에 중점을 둔 단어라면, '감독'은 교회 사목의 측면에 중점을 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원로'를 세우는 일은 티토가 크레테에서 해야 할 임무 중의 하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원로 제도는 이미 초대 교회 시대에도 있었으며, 바오로는 교회가 설립되면 이렇게 원로를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사도14,23 ;20,17) 그러나 오늘날 교회 직무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안수받는 직분인 주교, 사제, 부제 등 봉사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2세기 초에 가서야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 

'원로들은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티토서 1장 6-9절은 원로의 자격 요건에 관한 지침이다. 여기서 제시된 원로의 자격 요건은 티모테오 전서 3장 1-13절에 제시된 것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티모테오 전서에서는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며'(1티모3,3) 라고 했으나, 티토서에서는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티토1,7)라고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티모테오 전서에서는 감독의 자녀들에 대해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켜야 한다'(1티모3,4)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티토서에서는 원로의 자녀들에 대해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티토1,6)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티모테오 전서에서는 감독'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1티모3,2) 라고만 말하고 있지만, 티토서에서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씀대로 행하는 언행일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기록의 차이를 볼 때, 바오로는 두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권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라고 번역된 '아넹클레토스'(anengkletos)부정 접두어 '아'(a)'고소하다' 라는 뜻을 갖는 동사 '엥칼레오'(engkalleo)합성된 형용사로서, '비난할 수 없는', '아무 죄가 없는', '문책받을 것이 없는' (1코린1,8; 콜로1,22; 1티토3,10)이라는 뜻이 있다. 

'인격에 흠이 없고 훌륭한' 이라는 의미인데, 이런 성품이 너무 고차원적인 요구 사항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윤리적 자질이며, 그리스도와의 친교 가운데 드러나는 자연스런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로' 가 갖는 공적인 위치를 감안할 때, 개인적으로 결백하고 흠잡을 데 없는 고매한 성품을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비난받을 만하거나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화요일(티토 2,1-8.11-14)

티토서 본론 부분인 1장 5절에서 3장 1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전반부인 1장 5절~16절에서, 바오로는 교회 조직의 확립과 정통 교리 수호를 위하여 원로를 세우는데 있어, 필요한 요건에 대한 지침과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의 명령을 주었다. 이어지는 후반부인 2장 1절~3장 11절에서는, 교회의 유지와 성장을 위하여 사목자가 행해야 할, 성도 양육을 위한 바른 지도 자세와 사목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다. 

'나이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2)  '나이 많은 남자'로 번역된 '프레스뷔테스'(presbytes)는 대략 60세 정도의 남자로서, 몇 세대가 함게 사는 당시의 가부장 사회에서 한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 격에 있는 남자로 볼 수 있다. 또한 공동체 내에서는 아랫 사람을 훈계하며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는 교회의 어른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바오로는 이러한 교회의 어른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절제, 품위, 신중 및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갖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절제'로 번역된 '네팔리우스'(nephallius; temperate)의 원형 '네팔레오스'(nephalleos)는, 바오로의 사목 서간 가운데 하나인 티모테오 전서 3장 2절에서만 나오는 단어로,'(음식을) 삼가는','(술을) 절제하는','(행위를)절제하는'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인 '네포'(nepo)동사는 '(술이) 깨다','정신차리다' 라는 뜻인데, 이것을 참조할 때 '네팔레오스'(nephalleos)는 술에 취하거나 기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맑은 정신' 지닌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단어 자체가 절제해야 하는 이유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서이다.

둘째로,'기품이 있고'로 번역된 '셈누스'(semnus; grave,worthy of respect)의 원형 '셈노스'(semnos)는  '귀하신','공경할 만한','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한 바람직한 자세를 나타내는 데 쓰이는 단어로(필리4,8; 1티모3,8.11) 티모테오 전서에서는 '품위가 있어야 하고' 번역되어 있다.

하느님께나 신앙심에 대한 '경건'을 말할 때에는 티토서 1장 1절에 사용된 '유세베이아'(yusebeia)를 사용한다. 이런 용례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품위'란 신앙심에 대한 경건이 아니라 예의 범절이나 질서 정연함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자세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나이많은 남자들은 인격적으로도 품행이 방정하며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세째,'신중하며'으로 번역된 형용사'소프로나스'(sophronas; self-controlled)의 원형 '소프론'(sophron)바오로의 사목서간에만 나타나는 단어이다(티토1,8; 2,5; 1티모3,2). 형용사 '소프로나'(sophrona)의 의미는 '마음이 건전한',또는'제 정신의'이다.

어떤 영어 성경은 이것을 '술취하지 않은'이란 의미의 'sober'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소프로나'가 술취하여 정신이 몽롱한 상태와 정반대로 맑은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6장 25절에서는 '정신차린'의 의미로 쓰였고, 루카 복음 8장 35절에서는 '정신이 온전해졌다' 사실에 대한 묘사로 이 단어의 명사형과 동사형이 쓰이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신중하다는 것은 어떤 것에 취하거나 정신이 빠지지 않고, 건전한 정신을 지켜 바른 태도를 가지는 근신의 의미를 말한다. 바오로가 나이많은 남자(2절), 젊은 여자(5절),젊은 남자(6절)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소프론'(sophron)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신중'(근신)은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나이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에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3) 나이많은 여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특히 '남을 험담하지 않는 것' '술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런 일들이 나이많은 여자들에게 문제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남을 험담하다' 번역된 '디아볼루스'(diabollus)의 원형 '디아볼로스'(diabollos)'참소하다','비방하다','험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디아발로'(diaballo)에서 유래한 단어로, '비방하기 쉬운','거짓 고발하는'(1티모3,11; 2티모3,3)이란 뜻을 갖는다.

특히 고유명사 '호 디아볼로스'(ho diabollos)는 마귀들의 왕이나 악의 창시자, 하느님과 메시아의 적대자인 사탄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마태4,10; 마태25,41; 마르코1,12; 루카4,1-13). 바로 거짓으로 참소하는 일은 마귀의 특징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묵시록12,10).

이런 참소하는 일을 주로 노인들에게 경계시키는 것은 나이가 들어 연륜이 쌓일수록 자신만의 안목과 기준이 굳어져, 그것으로 남을 비방하고 헐뜯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특히 말하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에게서 이것은 더욱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다(1티모3,11). 한편,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에서 '노예가 되지 않으며' 번역된 '데둘로메나스'(dedullomenas)'둘로오'(dulloo)완료 수동태 분사형이다.

'둘로오''~의 종이 되다','노예 신분으로 떨어뜨리다'(2베드2,19),'속박아래 있다'(1코린7,15), '추종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비유적으로는 '어떤 사람의 필요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다'(1코린9,19), '다스림에 복종하다'(로마6,18.22)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는 술에 속박되는 것을 말한다.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술이 오히려 그것을 마시는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1티모3,8).

특히 당시의 상황을 보면, 주후 1세기에는 거의 노예와도 같이 오랜 시간동안 남자들에게 속박을 당하고 살던 여자들에게 자유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여자들은 그 이전까지는 주로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술의 노예' 될 정도로 심각하게 술에 취하는 일들이 발생했으며,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령에 취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술의 노예가 된다면(에페5,18),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체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바오로는 이 문제를 단호하게 제재하고 있다.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오로가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 대중들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1티모2,12)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교훈하라는 것이다. 즉 아래의 티토서 2장 4~5절의 내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4절과 5절의 내용(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순결하며,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질고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여)대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모독을 받지' 번역된 '블라스페메타이'(bllasphemetai)'블라스페메오'(bllasphemeo)의 현재 수동태 가정법이다.'블라스페메오''비난하다','욕하다','모독하다','중상하다'(루카22,65; 사도13,45; 18,6; 1티모1,20; 1베드4,4)라는 뜻을 갖는다.

특히 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군'(마르코2,7)이라고 말할 때 쓰인 단어이다. 이처럼 이 단어는 신성한 것, 즉 하느님이나 성령처럼 마땅히 흠숭해야 할 대상에 대해 모독하거나 방해하는 것을 말할 때 쓰인다(마태9,3; 마르코2,7; 3,29; 요한10,36). 본문에서는 수동태로 쓰였는데, 경멸적인 말이나 행위로 인해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인 젊은 여성이 가정 안에서 남편을 존중하지 않고 자녀들을 잘 양육하지 못할 때, 결과적으로 불신자들로부터 하느님의 말씀이 형편없다고 모독받게 된다는 것 시사한다. 바오로는 유대인들이 하느님 뜻대로 행하지 못할 때, 그들이 믿는 하느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본문과 유사하게 말한 적이 있다(로마2,24).

'가정'안에서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며, 또한 그런 행위는 타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비방케 하는 요인이 된다.



  http://cafe.daum.net/FiatLove/mCrC/474

연중 제32주간 수요일제1독서(티토3,1-7)



"사랑하는 그대여,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1)  

사목자로서 신자들의 양육을 위한 지도와 사목의 지침에 대하여 교훈 주고 있는 2장 1~3장 11절의 단락 가운데 본장 1절과 2절은 신자들의 일반 사회 생활을 위한 지도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바오로 서간과 바오로계 공동 서간에는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각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일원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과 윤리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로마13,1~7; 1티모2,1~3; 1베드 2,13~17). 

바오로는 본절에서 하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생활 지침을 제시하면서 우선 위정자들에 대한 바른 윤리는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통치자'로 번역된 '아르카이스'(archais; rulers)의 원형 '아르케'(arche) '시작하다'(루카3,23)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아르코마이'(archomai)에서 유래하여, 원래 시간의 연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기점을 말하는 '시작', 만물의 시작을 말하는 '태초'(마르10,6;13,19; 요한1,1; 2테살2,13)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점차 '개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지도자'(콜로1,18; 묵시1,8; 21,6; 22,13)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바오로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아르케' 대부분 영적 존재인 천사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으나, 여기서는 문맥으로 보아 국가의 위정자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집권자' 마찬가지다. '집권자'로 번역된 '엑수시아이스'(eksusiais; authorities)의 원형 '엑수시아'(eksusia)'선택권'(1코린9,12,18; 2테살3,3,9), '정신적 ,육체적인 힘'(마태9,8; 사도8,19; 묵시9,3), '권위와 권리'(마태9,6; 마르2,10; 루카5,24),'통치권'(마태28,18; 묵시12,10; 17,13) 등을 의미한다.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유사어로 '뒤나미스'(dynamis)도 있는데, '뒤나미스' 체력과 정신력에서 나오는 힘에 강조점이 주어진 주어진 반면, '엑수시아'는 그것이 신적 권위이든 국가적 권위이든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에서 발휘되는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복수형으로 쓰여 국가의 공직자들 의미한다.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러한 세상 통치자들과 공직자들의 권세에 순종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오로는 '복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동의어 '휘파쿠오'(hypakuo) 대신 노예가 주인에 대하여 절대 복종함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인 '휘포탓소'(hypotasso)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 복종하되 종이 그 주인에게 복종하듯이(티토2,9)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덧붙여 '순종'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의 원형'페이타르케오'(peitharcheo)는 본문과 사도 행전 5장 29절,32절에만 쓰인 단어로 하느님께 보종하는 것을 의미할 때도 쓰인다.

이처럼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위정자들의 권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며, 따라서 그 백성은 위정자가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상관없이 모두 그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마태17,24~27; 22,15~22; 로마13,1~7; 1티모2,1~7; 1베드2,13~17). 

특히 바오로는 앞서 '복종하고'로 번역된 '휘포탓세스타이'(hypotassesthai)현재 수동태 부정사 쓰고, 이어 나오는 '순종하며' 번역된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은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쓰고 있다. 여기서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자신에게 이로울 때 뿐만 아니라 불리할 때도 복종과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동태와 능동태가 교차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명령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자는 이에 대해 보다 능동적인 태도로 임해야 함 보여준다. 

당시 사회적인 정황으로 볼 때, 크레타인들은 로마 통치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폭동, 살인 등에 가담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바오로는 이런 자들을 향해 폭력적인 대항 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그들이 신자로서 해야 할 선한 의무를 다하도록 교훈하라고 티토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읽고 주해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까를 줄곧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읽으면, 어떤 독재 권력도, 부패한 권력도, 유물로적 무신론적 공산주의 권력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무조건 신자로서의 해야할 선한  일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여 야도, 각 단체안의 권력도, 항상 선거때마다 바뀌어, 자신과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통치자와 집권자가 될 수 있으니,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흥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 그것도 신을 부정하는 권력도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하느님이 허락하셨다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는 이 문제, 소위 신의 정의(공의)에 관한 신정론(神正論)에 관한 문제 옛날부터 내려온 문제이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명제를 "보다 더 큰 선을 위하여, 보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라고 일축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셔서 우리의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니(예지; 豫知), 우리믿는 자들을 좋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구원과 성화에 이롭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러한 불만스런 환경을 허락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기도하라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뜻안에도, 이 땅의 국민과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좋은 권력도 하늘에서 허락하셔야 된다는 느낌을 가진다. 

특히 성경안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서, 그들이 선민으로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견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계명에 충실했을 때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를 계속 지을 때에는, 주변 외교 열강들의 침입을 받아 나라를 잃고 유배당하고 종살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집트나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는 선민 이스라엘을 정신 차리게 하는 하느님의 매, 사랑과 회개의 채찍이요, 도구라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의 초점이 동북 아시아로 맞추어지는 작금에서, 유일하게 믿음의 선조들이 피뿌려 얻은 신앙때문에,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애국 열사들의 희생때문에,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만이 동북아시아에서 최고로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주위의 나라들을 살펴 보면, 소련은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중국 북한의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우상 숭배를 하는 일본에 의해 둘러싸인 대한 민국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지구 상에서는 그래도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의 공존을 위해 좋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재를 추구하고 사는  나라이며,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동북 아시아에서 현재 가장 윤리적으로 죄를 많이 짓는 나라이며, 수평적으로 그 죄들을 한류따라 그리고 한류처럼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도구 구실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계속 거스르고, 낙태, 살인, 사음과 간음, 성추행 ,성폭력, 가정 파괴, 이혼, 이중생활,청소년 탈선, 마약, 자살, 사행성 오락, 도박, 게임 등으로 이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세포단위인 가정을 파괴하고,반생명적 반인륜적 죽음의 문화, 사탄의 문화를 자꾸 만들어 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대한민국은 온 천지를 온갖 죄악과 불륜과 불의의 마귀의 운동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을 모든 국민, 특히 크리스챤이 지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나 자연 재앙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을 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요, 필요악(necessary evil)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북한이라는 지구 상에 하나뿐인 변태적 공산주의, 독재,세습체제는, 지금도 굶어 죽어가는 800만명의 인민을 살리기 위해, 남쪽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무조건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중 차원에서 도와주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성직자,수도자,평신도)의 회개를 통해, 눈물어린 기도와 희생(성시간)을 통해 무너지는 나라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와 각 정당은 권력을 잡기 위해 국민,국민을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대다수 힘없고,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고, 작고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 죄짓지 않고 사는 소시민들을 국민으로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은 구조적으로 썩어 있기 때문에, 윤리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이 권력은 하느님 채찍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왕들이 부패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렸을때,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가 왕의 영향을 받고, 왕과 더불어 망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성직 수도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여도 야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제일 걱정하는 것은 사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드러난 것만 934조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자기 분수도 모르고,각 정당의 후보들이 복지,복지를 들고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난뱅이도 인권이 있으니,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정당한 혜택은 누려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부채가 아주 많은 나라이고, 국민 모두가 근검 절약할 나라이지, 잘못하면 그리스처럼 국가 부도가 날 나라라는 것을 왜 권력자들은 이야기 하지 않는가! 

마치 우리나라는 신용불량자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최고급 외제차를 렌트해서 끌고 다니며, 명품 옷과 가방을 들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고 있는 격임을 모르고 있는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땅에 실추된 윤리와 도덕성이며, 잃어버린 동방 예의 지국의 명성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될 때, 우리는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 단위인 무너진 가정과 사회를 회복할 수 없으며, 북한 공산주의자들 한테 맞아야 하고, 북한과 같이 망해야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몇 십년 후퇴해야 한다.  

지금 북한이 공개적으로 남한의 선거에 노골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미 남한의 고정 간첩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공작하고 획책하고 숨어서 조정하고 있다. 어느 누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얼음장을 놓는다. 

그러나 북한이 위협한다고 흔들리면, 그건 정부도 국가도 아니다. 성경을 보면, 전쟁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결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깝작되는 것은 마귀들이 자기들의 왕국이 무너질까봐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이다. 중국 마저도 새로 선출된 지도자가 많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개방된 사람이 되었다. 북한이 발악하면, 연평도 같은 일들이 국지적으로 일어날 수 도 있다. 거기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몰락은 비가시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회개와 기도로, 눈에 보이게는 가진 자들과 있는 자들의 경제 제재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람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이념도 사상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후보들 중에 누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친한가! 

평화적 통일은 친북 정책을 남한 사람들이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남한의 회개를 보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를 회개시켜 주셔서 하느님의 선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사상이 잘못되었거나,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친하거나, 남한의 자기 혁신과 회개없이 인간의 힘으로 통일이 가능한 것처럼 선전하는 자들은 절대로 뽑아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평화적 통일과 북한과 중국에 하느님의 나라를 공개적으로 세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 이 중차대한 순간에, 대통령을 잘 못 뽑으면,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온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 누가 뽑히던, 한 세상 살다 가는 것, 잘되든 망하든 같이 가는 건데~~~이렇게 말할 수 도 있겠다.

사도 바오로는 이 지상의 권력 아래 사는 것보다는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루 빨리 살기를 원했고,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어떤 권력 앞에도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론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변화없이 어떻게 이율배반적인 믿음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도 인간들의 욕심과 남용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고,그 끝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복음적 가치관과 사회 정의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가? 그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노력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소관으로 맡길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 영혼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건설하는 일이고, 모든 권력, 체제, 이념을 넘어서 수많은 영혼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그들의 영혼안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은총의 지위,영혼의 성화를 도모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혁명(열심)당원(zellotai; 젤로타이)가 되어 이 땅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2012.11.14.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신약 공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