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장-5장(독서묵상)

2015. 10. 27. 오전 8: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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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장-5장(독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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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제1독서(사도2,36~41)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36) '이스라엘 온 집안'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을 향한, 하느님의 신앙을 가진 신앙 공동체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매우 강조적인 표현이다. 베드로의 설교의 종결부인 본절에서 메시아를 죽인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 온 집안'으로 표현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신앙 공동체라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주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yrios)'주인'이란 뜻으로, 히브리어로는 '아돈'(adon)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용어이기도하다(사도1,6 ) 본문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주 하느님을 향해서 사용하던 의미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재자라는 뜻이다(창세15,8; 9,26). 그리고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토스) '기름을 붓다'라는 뜻의  '크리오'(chrio)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기름부음 받은 자'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mashiah; 마쉬아르)이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37)  '꿰찔리듯 아파하며' 해당하는 '카테뉘게산'(katenigesan)'찌르다', '찔러 관통하다' 의미를 지닌 동사 '카타닛소'(katanisso)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들이 찔려 관통함을 받았다' 뜻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神的)수동태 볼 수 있는데, 이때 하느님의 강력한 역사(役事)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강한 회개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또한 하느님의 회개의 영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대망하였던 메시아를 자신들의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회개의 역사가 일시에 강력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절망감에 사로잡혀 마치 그들의 마음이 창에 찔리듯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것이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8)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자신의 죄로인해 마음의 찔림을 받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삶의 방법을 묻는 청중들에게 베드로가 요구한 첫번째 것은 바로 회개였다. '회개하다'는 의미의 원어 '메타노에오'(metanoeo)'바꾸다'라는 의미의 단어 '메타'(meta)'생각하다'라는 의미의 단어 '노에오'(noeo)의 합성어로서 '바꾸어 생각하다' 또는 '마음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향하여 인격적인 믿음을 갖게 되어 영적 순결과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마음의 변화라 의미를 갖고 있다. 사도행전은 다른 어떤 책들 보다도 이런 의미의 회개를 강조하였다(사도3,19; 5,31; 8,22; 11,18 등등) 

이 시대의 교회는 회개를 통한 교회의 성장이라는 사도행전적인 쇄신의 모델을 잊지 말아야 한다(41~46절) 베드로는 설교를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데 이어서 세례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세례는 죄사함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신앙 고백적 의식이므로, 죄에서 떠나 구원받기 원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이것이 요구된다. 

'용서받으십시오'에 해당하는 '아페신'(apesin)의 원형 '아페시스'(apesis)'해방''용서'(사함)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죄의 용서)은 죄와 그 죄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히 자유롭게 하는 강력한 효과를 갖게 된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이런 사죄(죄의 용서; 죄사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에서 인과 접속사 '그러면'(그러하면)으로  시작하여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어야만,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리하면'으로 번역된 '카이'(kai)인과 접속사가 아니라  등위 접속사로서 '그리고'(and)라는 뜻이다. 따라서 원문대로 하면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그 결과로 성령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며 죄사함을 얻으라'란 명령형과 장차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병렬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사도행전 8장16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가 안수할 때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세례와 성령 받음이 기계적 인과(因果)관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사도행전 10장 44~48절에 의하면 고르넬리오 가족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에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것 역시 회개와 세례 및 죄의 용서가 성령을 받게 하는 원인 및 조건은 아니라는 사실 보여준다. 

이것은 각기 개별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난 뒤 성령을 받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실제로 각각 따로 따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한꺼번에 이루어질 경우도 있다. 어쨌든 여기 사도행전에서 말하는'성령'입문성사로서의 세례와 견진 성사때에 받는 성령이 아니라, 요사이 말하는 '거듭남'의 '성령',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신앙으로 인도하는'성령', 소위 성령 세미나에서 말하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의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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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사도3,1~10) 

"그 무렵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1)  사도행전은 1~2장이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인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설립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면, 사도행전 3~7장까지는 사도 가운데서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강력한 선포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확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도행전 3장에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치유 기적 베드로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서 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이것을 계기로 이루어진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본절에서 시간과 장소, 기적의 주역을 소개함으로써 이 일이 꾸며낸 일이 아닌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오후 세 시는 유대인들의 시간표에서 제9시이다. 유대인들이 구별해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이 제3시, 제6시, 제9시 (현대 시각으로는 오전9시, 정오, 오후3시)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지막 기도 시간인 오후 3시경에 성전에 올라갔던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유대교의 좋은 기도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정한 시간마다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하였다(사도2,5.42.46).

또한 초대 교회 신도들의 기도는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마태6,5) 역동적인 기도였으며 많은 기적과 승리를 가져왔다(사도12,3~17). 이런 차원에서 사도행전은 기도의 승리를 기록한 기도의 행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데'에서 '올라가는데'에 해당하는 '아네바이논' (anebainon)미완료 과거 형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나 계속 이루어지는 동작 및 습관적인 동작을 묘사한다. 말하자면, 베드로 일행이 성전을 방문하여 기도하는 것이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습관이 될 만큼 자주 하였던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당시 성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을 보다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궁금증을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여다 놓았던 것이다.'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 직역하면 그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앉은뱅이 ('콜로스'; cholos)라는 말이다. 저자가 그의 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사도행전 4장 22절에는 당시 그의 나이가 사십여 세가 되었으므로, 40여년간 굳어진 그의 뼈가 펴져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미문; 美門)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높이가 23 미터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금과 은으로 입혀진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에서 (사람들이)'들어서' 해당하는 '에바스타제토' (ebastazeto)'놓았다'에 해당하는 동사 '에티둔'(etithun)은 모두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사람들이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상황을 완료되지 않은 동작으로 현장감있게 보여 주면서, 동시에 앉은뱅이가 '아름다운 문'에 앉게 되는 일이 이때의 당일만이 아니고, 거의 매일 반복적으로(날마다) 행해지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걸하는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갈 수 밖에 없는 직업적인 거지였던 것이다.

신명기 15장 4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구걸하는 자가 다른 장소도 아니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 뿐만 아니라 영적 상황까지도 극도로 빈약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이에 베드로가 '아름다운 문'앞의 그 불구자에게 그가 구걸한 몇 푼의 돈을 주기보다는,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문'에서 구걸하는 불구자를 통해 투영된 당시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영적인 상황을 치유하기 위한 가장 현명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생명력 없는 형식적 껍데기 신앙 생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역동적인 복음의 능력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6~7) 여기서 '은과 금'이라는 표현은 금은으로 장식되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아름다운 문'처럼, 껍데기만 남아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한 유대교를 빗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에서 '~으로' 해당하는 희랍어 전치사 '엔'(en)직역하면 '~안에'(in)라는 뜻이다. 한글의 '~으로'라는 번역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걷기 위한 수단으로 준 것 같은 잘못된 뉘앙스를 준다. 하지만 원문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안에서'라는 표현은 앉은뱅이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 또한 유대 사회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대표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원히 추구해야 할 목적이다(히브12,2; 묵시11,18). 앉은뱅이가 자신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보인 반응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8절) 그가 예수님안에 머묾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건강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본몬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은과 금' 대조를 이룬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교가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을 가리키고 '은과 금' 외형적인 면에만 치우쳐 있는 예루살렘 성전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유대교를 상징한다. 앉은뱅이가 형식에 물든 유대교의 화려한 성전 문 앞에서는 기껏해야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할 수 있는 동전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자신의 병든 육신을 고침받고 참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안에 머무는 귀한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앞에 '나자렛'이란 지명까지 거론하는 것은 지금까지 대부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던 호칭(요한1,46; 18,5.7; 19,19)이 영광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랑할 수 있는 높은 가치가 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앉은뱅이가 강한 새 힘을 얻어 다리의 선천적 장애가 치유된 사건은 의료적 의미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도 갖는다. 

먼저 사회적인 의미이다. 당시는 모두 자신의 손과 발을 사용하여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는 농업과 목축업 중심의 원시 경제 사회였는데, 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분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들은 구걸하는 일 외에는 자신의 생계를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사도10,46~52).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의 다리를 완전히 치유하여 걷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구걸에서 스스로 경제적 행위를 하여 자립하게 하심으로써 사회의 일반 구성원으로 복귀하여 살게 해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김받을 수 밖에 없는 장애인이었던 앉은뱅이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고, 단지 성전을 드나드는 유다인들로부터 몇 푼의 돈과 함께 경멸과 비난의 시선만을 받을 뿐이었다. 당시 유다의 형식적 율법주의자들은 몇 푼의 돈을 앉은뱅이에게 던져주며 상처받고 소외된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교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적을 베풀어 그의 불구의 몸을 고쳐 줌으로써 그가 갖고 있었던 종교적 부정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편 경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의 모습은 영적으로 무기력한 당시의 유다인들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 주는 단편적인 진리가 담긴 불확실한 정보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희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하신 것은 영적 불구자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포함한 복음만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 하느님께 대한 바른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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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제1독서(사도3,11~26)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4~16)

사도행전 3장 11절부터 26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 '아름다운 문'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치유 사건으로 인하여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한 사도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앞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사도2,14~36)에 이어 사도 베드로의 두번째 행하여진 설교이며, 첫번째 설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선포하고, 모여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생명을 기준으로 즉 바라빠는 생명을 죽이는 자로,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으로 대조한다. 사도 베드로가 두 인물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생명을 죽이는 바라빠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영원한 죽음을 취한 어리석은 민족이요, 미련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하다' 표현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거룩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룩하다'('하기온'; hagion)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의롭다'('디카이온'; dikaion)는 단어는 하느님의 공의(公義) 대변한다. '거룩하다'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거룩함 하느님과의 관계 대변한다면, 의로움인간과의 관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분의 성격을 규명하고(사도4,27.30), 의롭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운 성품과 삶을 대변한다(사도7,52; 22,14). 결론적으로, 베드로가 유다인들이 생명의 주이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살인자를 선택한 사실을 상기, 부각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살인자라는 것이다. 

'생명의 영도자' 번역된 희랍어는 '퀴리오스'(kyrios)가 아니고 '아르케고스'(archegos)이다. '아르케고스''어떤 분야의 길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인도자나 선구자'라는 의미이다(히브2,10). 또한 어떤 일의 기원자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생명의 영도자''생명의 근원자' 혹은 '생명의 부여자'라는 뜻이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게 하시고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자란 이름이 적합하며(요한10,10),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한계를 갖는 육체적 생명이 아니고 영원토록 죽지 않는 영적 생명이다(요한17,1.2). 그리고 '여러분은 ~죽였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펙테이나테'(apekteinate)에서 '여러분'사도행전 3장 14절 주어 '휘메이스'(hymeis)와 같다. 

실제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린 법정은 로마의 법정이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직접 시행한 자들은 로마의 군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강조형 주어(인칭대명사)까지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을 유다인으로 지목하여 단죄하는 이유이 죄가 법률적인 죄가 아니고, 신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인'으로 번역된 '마르튀레스'(martyres)피고의 죄를 변호하거나 고발하기 위해 세워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실제로 본 목격자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다른 이들 앞에서 알리기까지 하는 증인이었다. 증인들이 증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한편, 역설적인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바른 증인으로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살인자를 놓아 주게 하고 무죄한 자를 죽이라는 불의한 증언을 한, 잘못된 증인이었던 유다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명칭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의 다리를 낫게 한 주체가 그 사람이 믿은 이름이라는 사도 베드로의 주장은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며 병조차 복종시키는 능력과 권세를 지녔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표현이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란 표현에서도 나오지만, 믿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다.  믿음의 대상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낫게 한 믿음의 주체 사도 베드로로 보는 경우와 앉은뱅이였던 사람으로 보는 두 가지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낫게 하셨다고 병자들을 칭찬하셨던 것에 근거해서 (마태9,22; 마르10,52),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은 앉은뱅이였던 사람 자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19~20) 베드로의 설교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청중들의 회개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회개하고'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사테'의 원형 '메타노에오'(metanoeo)'생각을 바꾸다'(change thought)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자기가 옳다고 여겨왔던 모든 가치관과 생활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19절과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세 가지이다. 

첫째, 죄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해당하는 '엑살레입테나이'(eksaleipthenai)'지우다'(묵시3,5), '씻어 내리다'(묵시7,17)는 뜻을 지닌 '엑살레이포' (eksaleipho)수동태 부정사로서 전치사 '에이스'(eis)와 함께 '죄가 지워짐을 받으려면'(씻기움을 받으려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죄가 지워짐을 받는 것'회개하고 돌이키는 결과로 오는 보상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글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썼다. 그런데 당시의 잉크는 오늘날처럼 산이 섞이지 않은 잉크였기 때문에 한번 쓰여진 글이라도 고치고 싶으면 물묻은 스펀지로 한 번 닦으면 말끔히 지워졌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간에 심지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인 죄를 지었을지라도, 일단 회개하면 그 모든 죄는 기억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이사43,25). 

둘째,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온다. '생기를 찾을' 해당하는 '아납쉭세오스'(anapsikseos) '원기 회복', '유쾌하게 되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refreshment). '때'로 번역된 '카이로이'(kairoi)의 원형 '카이로스'(kairos)는 여기서는 종말론적 날에 국한되지 않는, 하느님이 정하신 시간 가리킨다. '죄사함'회개의 소극적 결과라면, '원기회복'회개가 갖는 적극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자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원기(생기)를 그에게 더하여 주심으로써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고(2코린5,17),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로마6,23). 

세째, 정하신 메시아를 보내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회개한 자들이 받게 되는 세번째 보상이다.  처음 두가지, 즉 죄사함과 원기 회복으로 영적으로 새롭게 됨이 예수님의 강생과 재림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얻는 보상이라면, 세번째 보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때 만유가 회복된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미래의 혜택이다(사도3,21절).

산헤드린 법정에 선 베드로와 요한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제1독서(사도4,1~12)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1~12) 

베드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신 마태오 복음 21장 42절 말씀을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 1서 2장 7절에서도 예수님께 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고 언급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에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집주인)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모퉁이 돌에 자신(집주인)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장 22절 인용이다."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집을 짓는데 긴요한 모퉁이 돌, 즉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사명의 성격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요한2,20~22) 교회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에서 '주어진'으로 번역된 '데도메논' (dedomenon)'주다'(give)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여기서 수동태는 그 주체가 유일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에서 '없습니다'해당하는 '우크 에스틴'(uk estin)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치 않는 진리(truth)사실(fact)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이름을 통한 구원이 없다는 이 사실베드로가 말하기 이전과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오늘날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라는 말이다. 우주의 통치자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소테리아'(soteria)'치유'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치유', 육체적 구원이라는 의미 갖는다(히브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사도3,6~8). 

두번째, 영적인 구원의 의미이다(2코린7,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관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밝힌 셈이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관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다.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현세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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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제1독서(사도4,13~21)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20)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이 정작 두려워했던 것 베드로가 행한 앉은뱅이를 걷게 한 기적이 아니었고, 기적을 일으키게 한 예수님의 이름이었다(사도3,6). 이로써 그들 스스로 기적의 근원이 예수님임을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마르14,1참조).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사도들이 누리고 있는 교도권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권세 대해서는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14) 그러면서도 이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 예수님을 죽인 자신들의 죄를 덮어 두는 한편, 더 이상 예수님의 복음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수석 사제들의 무리들이 날마다 하느님의 제사를 드리던 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간 그들의 가증됨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19)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의원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구약 성경이 이미 예언한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고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루카23,18)  예수를 못박아 죽였다(루카24,12).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제자들에게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위협 앞에서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 '인간의 말'을 대조시킴으로써 인간인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의 말 듣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사도1,8) 따를 것을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의 권위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서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리고 인간보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그들을 통해 날로 확장될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베드로는 긍정문을 사용해서 '말할 것이다' 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뒤나메타'<'dinametha'; '~할 수 있다'(can)>란 동사와 더불어 이중 부정문('우~메'; u~me)을 쓴 것'전하지 않을 수 없다' 라는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의 판결과 지시에 대해 불복종할 경우에 최고 사형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 준 이러한 적극적이고 담대한 태도를 통해 이미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그들의 용기와 헌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들이 이렇게 목숨을 내건 이유는 바로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것'에 해당하는 '하'(ha)는 복합 관계 대명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호스' (hos)의 복수형으로서 사도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나타낸다.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말씀과 행적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지켜 보았고,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과 승천하기 전에 주신 복음 선포에 대한 지상 명령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는 않는지?  예수님의 이름을 감추고 종교적 이익이나 교회의 권위를 확장하는데에 급급하거나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보고 들은 것'을 위해 사도들처럼, 우리 믿음의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체험과 절대적 사랑과 믿음, 내세의 영원한 생명과 복락에 대한 희망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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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4,32~35)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2)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하판타 코이나'(hapanta koina)라는 진술은 사도행전에서 두번 등장한다. 한번은 사도행전 2장 14~40절에 행해진 베드로의 일차 설교 후에 일어났고(사도2,44), 본문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공동(합심)기도(사도4,24~30)를 한 후에 일어났다. 위의 두 사건은 설교(말씀선포)와 기도라는 차이점은 가지고 있지만, 말씀과 기도를 전후로 하여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사도2,4; 4,31). 

자신의 물건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심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한 윤리적인 양심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강요를 통해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는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을 배제한 무모한 제도였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므로 성령의 철저한 역사하심과 친교하심이 없이는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을 공유한다는 제도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라 할 수 있는 지상 교회에서조차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구성원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 때만이 한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경천애인'(애주애인)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더욱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복음 3덕(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는 수도 공동체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대로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고, 실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그 정신, 즉 인간의 이기심이 극복된 아름다운 정신만큼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모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3) '증언하였고'에 해당하는 '아페디둔 토 마르티리온'(apedidun to martirion)에서 '아페디둔'의 원형 '아포디도미'(apodidomi)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갚아버리다', '빚을 갚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마태18,25; 묵시22,12). 즉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그들의 복음(예수의 부활) 전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4~35) 여기서 '팔아서' 해당하는 '폴룬테스'(poluntes)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분사의 현재 능동형이고, '가져다가'에 해당하는 '에페론'(eperon)아직 완결되지 않은 행위를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능동형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초대 교회가 물질과 마음을 서로 나누는 행위가 수석 사제들의 핍박과 위기감 속에서 행해진 기도 뒤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초대 교회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친교하심을 통해 능동적이며, 한시적이나마 상당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진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었음을 강조한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뜻은 돈이 놓여진 위치가 아니라 돈을 관리하고 사용될 곳을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가르쳐 주고 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성찬을 인도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행정과 재정까지도 맡아 보았다.  그러다가 후일 신도들의 수가 늘고 업무가 늘어나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고, 부제를 선출해서 행정과 재정 또는 자선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다(사도6,1~7). 

'필요한 만큼'으로 번역된 '카도티 안 티스 크레이안 에이켄' (kathoti an tis chreian eichen)'어떤 사람이 필요를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뜻이다. 원문으로 볼때 본문은 초대 교회 당시 믿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명문적 규정은 없지만, 꼭 필요한 자에게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필요한 만큼 적절히 분배되었음잘 드러나고 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다툼이나 정분관계에 의한 분배의 정의가 흐트러짐 없이 모든 일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4,23~31)http://cafe.daum.net/FiatLove/mCrC/1378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24) 사도행전 4장 24절부터 30절까지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은 신도들의 반응이 공동(합심)기도로 나타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무엇보다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였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기도드리는 모습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기도는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다.

이것에 해당하는 희랍어 '호모튀마돈'(homothimadon) '함께', '동시에' 등의 뜻을 지닌 '호무'(homu)'열정', '열망' 등의 뜻을 지닌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하나의 열정으로', '일치된 마음으로'라는 뜻을 지닌다. 당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수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한 신도들이 하나의 지향(intention)을 갖고 기도를 드린 것 만큼은 분명하다. 이것은 공동기도를 명령하신 예수님의 권고와도 조화를 이룬다(마태18,19).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eran phonen; 에란 포넨)열정적으로 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 역시 전심 전력으로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과 조화를 이룬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에페29,13~14ㄱ) 이런 기도는 사도행전 4장 3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가시적 응답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말씀 전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29~30) 

사도행전 4장 24~28절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한 과거를 회상하는 기도였다면, 사도행전 4장 29~30절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구체적인 간구의 내용이다. 이 간구의 내용은 모두 세 가지이다. 첫째는, 본문에 나타난 대로 수석 사제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대교 세력의 위협을 간과하지 말고 감시해 달라는 간구이다. 둘째는, 29절 후반절의 내용으로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셋째는,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에서 '보시고'는 희랍어로 '에피데'(ephide)인데, '에페이돈'(epheidon)명령법으로서 기원을 나타낸다. '에페이돈''위에서' 또는 '어떤 것을 향하여'라는 의미가 있는 '에피'(ephi)'보다'란 의미를 지닌 '에이도'(eid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위에서 보다'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다' 의미이다. 따라서 '에피데'그리스도교인을 핍박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주목해서 보시고 그들의 손으로부터 건져 달라는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31) 사도행전 4장 24~30절에 기독된 신도들의 기도가 끝나자 그들이 모인 기도의 장소가 진동하였다. 여기서 '흔들리면서'에 해당하는 '에살류테'(esaliuthe)의 원형 '살류오' (saliuo)는 바람에 의해 갈대와 같은 물체가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하거나(마태11,7) 감옥의 문을 열게 할 만한 큰 지진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사도16,26) 동사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모인 곳이 흔들인 이유는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현상은 신도들의 간절한 공동기도가 하느님께 가납되었다는 가시적 증거이며, 동시에 곧 이어지는 성령의 강한 임재(현존)와 연결이 된다. 땅이 흔들리는 현상거룩하신 하느님의 임재로 인간의 오감을 통해 알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했다(탈출19,19; 이사6,4)

한편, 본절에서 공동으로 기도한 신도들이 '모두' 성령이 충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체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경험한 성령충만은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때 이들이 경험한 성령 체험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에 있었던 일은 성령세례성령충만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 이를 경험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령충만 성령세례로 인하여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더욱 영적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현상이다. 특히 본절의 성령 충만은 말씀을 담대히 전하기 위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로 볼 수 있다.

 

 세계종교 - 57. 그리스도교 (8) 초대 일곱 교회와 신앙 생활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4,32~37)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32)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33)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4~35)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2)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하판타 코이나'(hapanta koina)라는 진술은 사도행전에서 두 번 등장한다. 한번은 사도 행전 2장 14~40절에 행해진 베드로의 일차 설교 후에 나왔고(사도2,44), 본문에서는 공동체가 함께 공동(합심)기도(사도4,24~30)후에 나왔다. 

위의 두 사건은 설교(말씀선포)와 기도라는 차이점은 가지고 있지만, 말씀과 기도를 전후로 하여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사도2,4; 4,31). 자신의 물건을 타인과 공유한다는 것은 타락하여 이기적인 심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한 윤리적인 양심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강요를 통해 섣불리 시도했다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볼 때에 공산주의는 인간의 본능적인 이기심을 배제한 무모한 제도였다. 

인간은 이기적 존재이므로 성령의 철저한 역사하심과 친교하심이 없이는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을 공유(共有)한다는 제도 하느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상 교회에서조차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구성원이 한마음 한뜻이 되었을 때만한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뿐이다.  '경천애인'(애주애인)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더욱 더 잘 실천하기 위해서 복음 3덕(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하는 수도 공동체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든 교회가 그대로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는 없고,실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그 정신, 인간의 이기심이 극복된 아름다운 정신 만큼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모범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33) '증언하였고'에 해당하는 '아페디둔 토 마르티리온'(apedidun to martirion)에서 '아페디둔'의 원형 '아포디도미'(apodidomi)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갚아버리다', '빚을 갚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마태18,25; 묵시22,12). 즉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그들의 복음(예수의 부활)전파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4~35) 여기서 '팔아서' 해당하는 '폴룬테스'(poluntes)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분사의 현재 능동형이고, '가져다가'에 해당하는 '에페론'(eperon)아직 완결되지 않은 행위를 묘사하는 미완료 과거 능동형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초대 교회가 물질과 마음을 서로 나누는 행위가 수석 사제들의 핍박과 위기감 속에서 행해진 기도 뒤에 이루어진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초대 교회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친교하심을 통해 능동적이며 한시적이나마 상당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행해진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었음을 강조한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뜻은 돈이 놓여진 위치가 아니라 돈을 관리하고 사용될 곳을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느냐 가르쳐 주고 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성찬을 인도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행정과 재정까지도 맡아 보았다. 그러다가 후일 신도들의 수가 늘고 업무가 늘어나자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고, 부제를 선출해서 행정과 재정 또는 자선등의 업무를 맡게하였다(사도6,1~7).

'필요한 만큼'으로 번역된 '카도티 안 티스 크레이안 에이켄'(kathoti an tis chreian eichen)'어떤 사람이 필요를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뜻이다. 원문으로 볼때 본문은 초대 교회 당시 믿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명문적 규정은 없지만, 꼭 필요한 자에게 어떠한 차별도 없이 필요한 만큼 적절히 분배되었음잘 드러나고 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다툼이나 정분관계에 의한 분배의 정의가 흐트러짐 없이 모든 일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5,17~26))

그 무렵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17~21) 

본절부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도들에 대한 핍박과 투옥 및 천사들에 의한 구출, 사도들에 대한 대사제의 직접적인 문책, 그리고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중재로 인한 석방 등과 같은 매우 긴박하고도 역동적인 이야기가 5장 끝절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가 결코 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핍박이 복음 전파를 절대 방해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을 적대시한 자가 바로 대사제이며, 사도들이 당하는 박해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조직적인 박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두가이파들을 대사제와 함께 있는 동조자로 소개한다. 이것은 이들이 율법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사제의 역할을 가장 중시하였고, 대사제 측근에 있었던 귀족들이 특히 사두가이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 최고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당시의 정치 집단인 헤롯왕이나 로마인들과 연합하여 온갖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사두가이파들이 대사제를 도와 사도들을 잡아들이는 데 앞장선 것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역동적인 복음의 역사가 많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감으로써 그들 특권층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위협을 받았고, 높아만 가는 인기에 시기가 났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앞장서서 죽인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교리와 상충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 그들이 범한 죄악상이 드러나며, 더 나아가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민란까지 일어나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두가이파들은 누구보다 앞서 사도들을 잡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시기심('젤루'; zelu)이 가득 차(epllesthesan; 에플레스테산)'진실에 입각하거나 바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시기에 의하여 박해가 발생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가득차'에 해당하는 '에플레스테산' 원형 '플레도'(pledo)'충만하다'(사도4,8.31), '채우다'(루카5,7)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써 빈틈을 찾아볼 수 없으며 넘칠 정도로 가득 채우는 상태 말한다. 당시 이들은 끓어오르는 시기심으로 인하여 다른 상황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오직 사도들을 박해할 생각으로만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이성을 잃고 이기심에 따라 분별없이 행동하는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그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 수 있다. 

'공영 감옥'(teresei demosia; 테레세이 데모시아)에서 '데모시오스'(demosios; 공적인)라는 형용사를 첨가하여 굳이 공영 감옥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들이 비록 단단히 잠긴 옥에 갇혀 공적 기관의 삼엄한 감시와 경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의 역사로 나오게 된 것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19) '데리고 나와' 번역된 '엑사가곤'(eksagagon)의 기본형 '엑사고'(eksago)'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인도하다'는 뜻의 '아고'(ago)가 합성된 형태로서 '(밖으로)인도하여 내다'(요한10,3),'끌어내다', '데리고 나가다'(마르8,23)는 뜻이다. 단어의 의미에는 두 가지 함축적인 사실 들어있다. 

첫째로 이 단어는 속박과 고통에서의 '구원'을 가리킨다(요한10,3; 사도7,36). 본문에서는 사도들이 감옥의 속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둘째로 이 단어의 의미속에는 '강제성'의 개념이 들어 있다(마르15,20).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끌어냄을 당하는 것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이 동사가 이러한 두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들의 구출의 목적 다음 절에 나오듯이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시급한 사명이  사도들에게 있음을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옥에 갇혀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던 사도들을 주님의 천사가 어떻게 쉽게 빼낼 수가 있었을까? 본절에서는 필리피 감옥의 경우처럼 감옥터가 움직이고 지진이 나는 기적 (사도16,26)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주님의 천사는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으로 경비병들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사도들을 이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느님은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 어둡게 하기도 하신다는 사실이 (2열왕 6,18) 이를 뒷받침한다. 

사도들을 옥에서 이끌어 낸 주님의 천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사명을 부여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생명'(zoe; 조에)이란, 이 세상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영적 생명 가리킨다(마태18,19; 마르10,30; 요한3,15).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구원의 생명 말한다.

본문의 '이 생명'에서 '이것'을 가리키는 '타우테스'(tautes)는 지금까지 사도들이 계속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되는 생명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말씀' '타 레마타'(ta remata)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씀'가리키는 '토 레마'(to rema)의 복수형으로서 '설교','연설' 의미가 있다. 이것은 조용히 사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 '케뤼그마'(kerygma)를 가리킨다.

이것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되 대담하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이 말씀 앞에 '모두'로 번역된 '판타'(panta)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파되어야함을 분명히 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혹시라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구원의 말씀들을 단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약화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구원의 말씀들이 모든 사람에게 들려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5,27~33)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28)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29)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30) 

사도행전 5장 28절의 '가르침'으로 번역된 '디다케스'(didaches)본절의 전반부에 대사제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 '그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가르친 것을 가리킨다. 대사제의 표현 가운데 엿볼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었음 보여 준다. 

그리고 '퍼뜨리면서'로 번역된 '페플레로카테'(pepllerokate)'가득하다'는 뜻의 동사 '플레로오'(pleroo)의 완료형으로서 앞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대사제의 표현은 사도들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미 예루살렘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지금 사도들을 심문하고 있는 그들에게 큰 위기감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사람'으로 번역된 '안드로푸 투투'(andropu tutu)'이 사람'이란 뜻이다. 희랍어에서 사람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단지 '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는 것이며, 그 사람을 몹시 경멸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사제는 십자가에서 죽은 나자렛 예수를 여전히 저주받은 자로 여기며 경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의도적인 경멸은 내심으로는 예수를 몹시 의식하고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8) 본문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득하게 하여 예수님 죽음의 책임을 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들인 자신들에게 떠넘기려 한다는 대사제의 주장이다.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망설이는 빌라도에게 빠른 판결을 얻어내기 위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스스로 했던 말이기 때문에(마태 27,25)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그들이 져야 한다. 

'씌우려'로 번역된 '에파가게인'(epagagein)의 기본형 '에파고'(epago)'~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에피'(epi)'가져오다' 뜻의 '아고'(ago)합성된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에게 무엇을 가져오다' 의미이다. 이 동사는 죄의 형벌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응보적 행위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 단어이다(2베드 2,5).

본문에서는 물론 자신들에게 예수님의 피의 값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실상 대사제의 말대로 본문에서 이 동사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값을 치르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응보적 행위로 결론지워지고 말았다. A.D.70년 유대 종교의 총 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더 이상 제사가 드려지지 않게 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이 가시화된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29) '말론 에'(malon e; rather than)에서 '말론'은 비교급 부사인데, 본문에서 비교급 불변사 '에'(e)와 함께 사용되어 '~보다 오히려 더욱'이라는 뜻으로 비교의 정도를 더욱 강조한다. 여기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복음 전파 금지 결정이며(사도4,19),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계속적인 '복음 전파'를 가리킨다. 결국 본문의 표현은 산헤드린의 결정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인간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0) 베드로는 하느님을 호칭함에 있어 '우리 조상들의'란 수식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자신들이 조상의 신앙을 이어받은 전통파라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 담겨 있다. 그들이 조상의 신앙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그들 조상이 섬겼던 하느님께서 살리셨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매단 것을 가리킬 때 '십자가'

뜻하는 '스타우로스'(stauros)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나무'를 뜻하는 '크쉴론'(ksilon)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명기 2장 22~23절을 연상시키기 위함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는 신명기의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 나무에 매달린 예수님은 하느님께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자를 '여러분이'(휘메이스; hymeis) '대사제와 산헤드린 최고 회의에 모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 지적하고 있다.

앞절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느님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 데 이어서, 본절에서도 동일하게 하느님의 편에 있는 자와 그를 대적한 자를 명백히 대조시킴으로써,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인 대사제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대적한 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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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5,34~42)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38~39) 

사도행전 5장 33절에서 42절까지는, 사도행전 5장 29~32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몹시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율법교사 가말리엘의 중재석방되는 내용과 사도들의 계속적인 복음 전파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율법 교사' 번역된 '노모디다스칼로스' '율법' 뜻하는 '노모스'(nomos)'선생', '교사'를 뜻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의 합성어이다.

실제 이 용어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율법에 관해 권위있게 해석하고 가르치는 매우 탁월한 율법 박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하느님의 상급'이란 이름의 뜻을 지니고 있는 '가말리엘'은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Hillel)의 손자로서 당시 샴마이(shammai) 학파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힐렐 학파의 수장이었다. 또한 그는 사도 바오로의 스승으로 언급되고 있다(사도22,3). 

사도행전 5장 34~39절에 나오는 대로 그의 중재는 사도들의 목숨을 건져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원래 사도들이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중재안을 낸 것은 두 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첫번째는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그의 성품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는 사도들에게서 특별히 그들을 죽일만큼 율법을 거스른 행위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교리적인 측면인데, 부활을 인정하는 바리사이파인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 의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사두가이파가 부활을 부인하고 있었기에 사도들의 편에 선 것이었다. 

사두가이파 역시 법적 근거없이 사도들을 사형에 처할 경우, 백성들의 반발이 우려되고 가말리엘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서 사도들은 사형이 결정되지 않았다. 결국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바리사이파 사람인 가말리엘을 사용하여 사도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해 내신 것이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38)  이 구절에서 '관여하지 말고'라는 뜻의 '아포스테테'(apostete)'내버려 두십시오'라는 뜻의 '아페테'(apete)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들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아포스테테''떠나다'는 뜻의 동사 '아피스테미'(apistemi)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이며, '아페테''버려두다'는 뜻의 동사 '아피에미'(apiemi)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본문의 이러한 표현상의 강조는 사도행전 5장 39절의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와 연관이 된다. 

사도행전 5장 38절의 두 개의 명령은 사도행전 5장 39절의 '~하지 않도록'이라는 뜻으로서 강한 염려를 가리키는 '메포테'(mepote)로 시작되는 구절에 연결되고 있다. 이처럼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내버려 둘 것을 강조한 이유는 설사 그들을 벌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오히려 일이 잘못되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주장에 비록 동조는 하지않지만,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에 대하여는 분명한 신뢰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歷史)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인간은 철저히 순응해야 한다는 신관(神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39) '메포테' '~하지 않도록'이라는 뜻으로서 사도들을 그냥 보내 주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테오마코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테오마코이' '하느님'을 가리키는 '테오스'(theos)'싸우다'뜻의 '마코마이'(machomai)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하느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난 일을 가로막는 것은 곧 하느님을 대항해 싸우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메포테''심지어 ~라도'(even)라는 뜻의 부사 '카이'(kai)수식을 받는 구조로 사용되어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가말리엘이 최고 의회 의원들에게 말한 내용의 강조점은 혹시라도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그들 스스로 경계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의 엄정성을 신뢰하는 가말리엘의 현명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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