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6장-28장(독서묵상)

2015. 10. 28. 오전 10: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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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장-28장(독서묵상)  

사도 바오로의 2차 선교 여행 지도

부활 제5주일 토요일 제1독서(사도16,1~10)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셨으므로,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지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미시아에 이르러 비티니아로  가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6~7)  바오로가 그 환시를 보고 난 뒤,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방도를 찾았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10)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10절까지는 바오로가 트로아스에서 본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시와 바오로의 선교 여행 진로 변경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바오로는 성령의 강력한 권고와 같은 주도적 개입으로 계속해서 아시아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그 진로를 유럽으로 향했다. 따라서 본 단락은 유럽 복음화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사도행전 16장 5절에서 처럼, '그리하여 그 곳 교회들은 믿음이 굳건해지고 신자들의 수도 늘어갔다'는 놀라운 성과 뒤에는 바오로의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방법론적인 면에서의 지혜가 동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적인 활동에 뒤이은 아시아에서의 선교 활동이 성령에 의해 금지됨으로써 그의 선교 여행은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본문에서는 성령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바오로에게 뜻을 전했는지는 언급되지 않고 그 결과만을 저자가 언급할 뿐이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바오로가 어떤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켰는지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막으셨으므로'로 번역된 '콜뤼텐테스'(kolythentes)의 원형 '콜뤼오'(kolyo)동사가 '반대하다'(사도11,17; 27,43), '금지하다'(1티모4,3),'거절하다'(루카6,29; 사도10,47)라는 매우 강력한 의미로 쓰인 것을 볼 때, 당시 성령께서는 바오로가 깨달을 수 있는 분명한 방법으로 아시아의 선교 활동을 막았음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성령께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선교 활동의 진로를 왜 가로막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었지만, 바오로는 성령의 뜻에 순종하였다. 이처럼 완전하게 성령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바오로에게서 참다운 하느님의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보게 된다. 더불어 이것은 바오로의 선교 여행의 놀라운 성과는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오로가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겨 유럽을 복음화시키게 된 것이 그 자신이나 예루살렘 모교회의 선교 전략과 정책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주관적인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이것은 오늘날 선교사가 선교 지역을 택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가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 지에 대하여 좋은 본본기가 된다. 

바오로는 애초에 제2차 선교 여행 지역을 제1차때 선교했던 곳으로 계획했었는데 (도15,36), 이러한 단락은 인간의 계획이 성령의 강력한 개입으로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16,9)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7) 본절에 나오는 지명 중 '미시아' 소아시아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리고 '비티니아''미시아'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바오로 일행이 미시아에서 비티니아를 가고자 애썼다는 것은 지금까지 계속 서쪽으로 전진했지만, 미시아에 이르러서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동쪽으로 가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시아의 서단에까지 이르자 다시 방향을 돌려 아시아의 다른 지역을 선교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인간적 생각은 예수님의 영에 의해 막혔다. 

우리는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 '성령'께서 바오로의 선교를 이끄시는 주체로 묘사되어 있었는데, 본절인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는 '예수님의 영'으로 바뀌고, 사도행전 16장 10절에서는 '하느님'으로 또 다시 바뀐다는 것을 본다. 이것은 각각의 절에 서로 모순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바오로의 선교 활동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카이 우크 에이아센 아우투스'(kai uk eiasen autus; but not suffered them)'허락하지 않으셨다'라고 번역된 '우크(uk) 에이아센(eiasen)'에서'에이아센' 동사의 원형은 '에아오'(eao)이다. 그런데 이 동사는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음을 나타낼 때나(1코린10,13),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침묵을 명하실 때(루카4,41) 등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용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금지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내포되어 있음유추할 수 있다. 본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한계를 가진 인간의 생각으로 미쳐 헤아릴 수 없지만, 이러한 하느님의 금지 명령에는 분명히 오묘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리디아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16,11~15)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14~15)

 사도행전 16장 11절부터 마지막 절인 40절까지는 바오로 일행의 유럽 선교의 시발지인 필리피에서의 활동을 기록한다. 필리피에서의 선교 활동을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 것은 이곳이 유럽 선교의 시발지일 뿐 아니라 이곳에서의 선교 성공으로 인해 유럽 선교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필리피 교회는 바오로의 선교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이것은 바오로가 다른 교회에서는 거부하였던 재정 지원을 필리피 교회에서는 받은 것으로 보아서(1코린9,3~14), 그들에 대한 바오로의 신뢰를 알 수 있다(필리1,3~5; 4,18). 

필리피에서의 활동과 관련된 기사는 바오로 일행의 필리피 도착,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의 회심(사도16,11~15), 점 귀신들린 하녀에 대한 구마 행위로 인한 바오로와 실라의 투옥 및 필리피 감옥 기적 사건(사도16,16~34), 필리피 관리들의 공식 사과와 오로와 실라의 명예로운 석방(사도16,35~40)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는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인 리디아새롭게 등장한다. '티아티라'고대 리디아(Lydia) 지역에 속한 한 성읍으로서 '티아의 성읍'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헬무스 계곡과 카이쿠스 계곡을 연결하는 소아시아의 국경의 요새 이기도 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염색, 의복등의 제조업의 중심지였고, 특히 자색 염료로 유명했다.  

바오로 일행은 그들이 찾아간 필리피의 기도처에서 옛날 로마 시민의  겉옷이나 왕족의 겉옷으로 사용되던 자색 옷감 장수를 하던 리디아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원래 티아티라 성읍 출신이었으나, 더 큰 도시인 필리피에 와서 거주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녀는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자로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네'(sebomene)는 현재분사인데, 이 단어의 원형'세보마이'(sebomai)는 단순히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공경하는 인륜적 차원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이나 신적 존재를 예배하며 숭배하는 종교적 차원의 의미를 나타낸다. 리디아는 하느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3잘 43절에는 유다교로 개종된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지만, 본문의 리디아는 유다교에 깊은 관심이 있고 율법을 따라 하느님을 섬기기는 하지만, 완전히 개종하지 않은 자로서 코르넬리우스 티리우스 유스투스유사한 신앙(사도10,1.2; 18,17)을 가지고 있던 여인으로 보인다. 그녀는 티아티라 성읍에 살던 때에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티아티라 성읍에는 유다인 정착지가 있었고, 그 유다인들을 통해 리디아는 하느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이 본문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려면, 첫째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며(로마10,17), 둘째로 들은 그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어야 한다. 그런데 들은 말씀을 깨닫고 수용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루카24,45). 

여기서 '열어 주셨다'로 번역된 '디에노익센'(dienoiksen; opened)단순히 '열다'는 의미보다 더 강한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원형 '디아노이고'(dianoigo)'철저히'라는 의미가 있는 '디아'(dia)'열다', '열어 젖히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노이고'(anoigo)의 합성어로서'철저히 열어 젖히다','(닫혀 있는 것을)확짝 열어 젖히다'라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17장 3절에는 '설명하고'로 번역되었으며, 루카 복음 24장 32절에서는 '성경을 풀이해 주다'로, 그리고 루카 복음 24장 31절에는 '눈이 열려'번역되었다. 한편, 사도행전 16장 15절에는 리디아가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 모이코스 아우테스'(ho oikos autes; the members of her household)번역된 '온 집안'은 단순히 건물(house)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home)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정은 그녀의 혈육만을 한정하는게 아니고, 사업가로서 많은 직원들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던 리디아에게 속한 모든 자손들을 다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16,22~34)

"그 무렵 필리피의 군중들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2~24).  

본문의 '군중'(호 오클로스; ho ochlos)은 귀신들렸던 여종의 주인과 한 통속이 되어 사도 바오로의 실라스에 대한 인종차별적 자세와 종교적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이들이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를 대항하여 함께 일어섰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를 죄인 취급하는 비난의 온갖 말들을 쏟아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행정관들'이라고 번역한 '스트라테고이'(strategoi)는 필리피라는 로마 식민지에 임명된 '행정 장관들'(magistrates)를 의미한다. 

그들이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내린 판결은 그 두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는 것이었다. 옷을 벗기고 때리면(마태27,28) 크고 두꺼운 막대기 매로 맞는 아픔이 더해지기 때문에 참으로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매로 치는' 해당하는 '랍디제인'(rabdizein)은 부정사(不定詞)형이며,그 원형 '랍디조'(rabdizo) '막대기','지팡이'를 뜻하는 '랍도스'(rabdos)에서 유래한 것으로 '태장으로 치다'(2코린11,25)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생애에서 이러한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으며, 유다식의 형벌인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2코린11,24.25).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밝혔더라면, 상황이 반전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마치 예수님께서 털깎는 자 앞에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신을 위해 한 마디 변론도 하지 않고 침묵했던 것과 같이 침묵했다. 

사도 바오로가 이 때 자신의 신분에 대해 침묵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분명한 것은 피할수도 있는 고난을 받아들임으로써, 필리피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받게 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23) 실제로 유다의 태형(신명25,3; 2코린11,24)이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때리는 제한이 있는 벌인 반면, 로마의 태형상관의 정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거의 무제한으로 때리는 형벌이었다(2코린11,23). 아마 이때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가혹하게 매질한 것민족적으로 멸시받던 유다인에게 가혹 행위를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동시에 사회 유력 인사였으며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소인들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4) 여기서 가장 깊은 감방은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 감옥을 말한다. 더욱이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워 놓았다. '차꼬'에 해당하는 '크실론'(ksylon; stocks) 죄수들의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다리를 벌리지 않으면 안되게끔 양 발목에 채우는 기구이다.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서 양 다리가 벌려져 묶인 채 마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처럼 취급당했던 것이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5~26) '자정 무렵' 밤 12경을 말한다. 

심한 매를 맞은 후의 고통과 발목에 채워진 차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는 더 이상 잠을 못 이루고 그 시간에 깨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때 취한 행동고통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통과 자기 처지를 생각하며 하느님께 분노했거나 원망했을 수도 있고, 또한 선교사로서의 회의와 좌절감에 빠졌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바오로와 실라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과오로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고통당했으므로, 하느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충분히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환난의 날에 간구할 때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부르며, 그들의 생명의 하느님께 기도했다(시편50,15; 91,15).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고(로마5,3),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며(필리4,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성교회안에서 대신 채우기를(콜로1,24) 주저하지 않았다. '찬미가를 부르며'에 해당하는 '휨눈'(hymnun)미완료 과거 동사로서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의 하느님되심을 찬양하기를 큰 지진이 날 때까지 계속했음을 나타낸다.  

그들의 육체는 지하 깊은 감옥에 갇혔지만, 그들의 영혼은 갇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부자유한 육체와 상관없이 위로부터 주시는 하느님의 영적 자유와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코린토 2서 4장 8절 보면, 이런 영적 권세에 대해 사도 바오로가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한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5) 차꼬에 채워진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소리는 주위의 죄수들에게까지 울려 퍼졌다. 본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번역된 '에페크로온토'(epekroonto)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유일하게 쓰인 동사인데, 이 동사의 원형 '에파크로아오마이'(epakroaomai)소리를 듣는 것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 '아쿠오'(akuo)와 달리, 시낭송이나 노래 및 연주 등을 '기쁘게 듣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특수한 동사이다. 죄수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기도와 찬미 소리를 흥미를 가지고 기쁘게 듣고 있었다.

한편 곧이어 큰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소리를 듣고 있었던 그들은 한밤중에 큰 지진이 나고, 감옥의 기초가 움직이며,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리는 엄청난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 기적이 바로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했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임을 즉각적으로 알아챘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죄수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의 기도와 찬미 자체가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권능을 행하심을 증거하는 믿음의 행위였다는 사실이 증거 셈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찬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불신자들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적 행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놀라운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6) 사도 바오로와 실라스가 환난 중에서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거기에 뒤이어서 갑자기 초자연적인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인 큰 지진이 일어났고(탈출19,18; 1열왕19,11; 이사29,6),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리며 감옥 문들이 다 열렸고,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여기에서 '뒤흔들리고', '열리고', '풀렸다' 해당하는 동사들은 모두 다 수동태 동사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결단코 하느님을 의지하고 자기의 길을 맡기는 자들에게 실망을 주시지 않고, 당신이 직접 나서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시편37,1).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벽화(미켈란젤로의 작품)

부활 제6주간 수요일제1독서(사도17,15.22~18,1)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4~27)

사도 바오로는 먼저 하느님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소개한다. 그리스인들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신과 우주를 똑같은 것으로 보는 종교관 또는 철학관)에 의하면, 만물의 근원은 물, 불, 공기 등이며, 이것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에 의하여 만물이 만들어지고, 신들도 존재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우주와 만물 모두가 단수로 표현된 '신'(호 테오스; ho theos)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선포함으로써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선포는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며, 우주 만물의 존재와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변적인 논쟁을 거듭하였던 그리스 철학자들의 모든 논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24) 원어 '퀴리오스'(kyrios; 주님)주재자(主宰者;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하는 사람)라는 의미와 더불어 '소유' '섬김의 대상'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즉 본문은 '천지의 주인이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하는 주인이라는 표현소유권 뿐만 아니라 통치권도 있음을 나타낸다.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자가 그것의 운명까지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과 우주의 운행에 대하여 무관심하다고 가르쳤던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삶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주와 인간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이시기 때문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나오는대로 '알지 못하는'(아그노스토스; agnostos) 신(神)까지 섬겼다. 그 유래는 B.C.6세기 키레네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전염병으로부터 아테네 사람들을 구한 후에, 이 일에 대해 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혹시 몰라서 감사드리지 못한 신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단(壇)을 쌓아 제사를 드린데서 기원하였다.

신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기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대해서 설명해 나갔다. 사도 바오로는 선교 대상지의 관습과 환경을 무시하지 않고 거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선교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으로 섬기고 있는 그 신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겼으나 유일한 참 신(神)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증거한데 이어서, 이 하느님은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계시지 않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손으로 지은 신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아테네에 있는 신전들의 무용성을 주장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잡다한 우상들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편재성(遍在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25) 사도 바오로는 섬기는 자가 없으면 곧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며, 마치 어떤 것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섬김을 받는 우상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자기 충족성(self-sufficency)을 가지신 분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들은 다른 존재에 의하여 자기 존재와 의미를 가지는 허구적이며 의존적인 존재인데 반해서,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유일한 절대자이심을 밝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6) 본문은 모든 인류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이어져 왔음을 밝힌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족속들과는 다르다는 민족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이에 반대하여 온 인류가 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인류의 하나됨을 언급하면서 그들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 준다. 이러한 관계성 아래서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창조주 되시는 하느님을 바로 알고 섬기는 것이 마땅함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인간관은(로마5,12~21; 갈라3,28) 인간 평등 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 

'일정한 절기' 번역된 '카이루스''카이로스'(kairos)목적격 복수로서 연대기적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chronos)와 달리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사의 때 혹은 기회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카이루스'라고 하는 것은 루카복음 21장 24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때'와 같이 각 민족의 생겨나고 사라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다' 표현과 더불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역사의 주관자되신 하느님의 철저한 개입과 섭리에 따라 되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움직임이나 역사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 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27)  '찾게'로 번역된 '제테인'(zetein)'몰두하여 찾다'(seek)라는 의미의 동사 '제테오'(zeteo)의 현재 부정사이다. '더듬거리다가'로 번역된 '프셀라페세이안'(pselaaheseian)'느끼다', '만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프셀라파오'(pselaphao)의 희구법 과거형이다. 이러한 문법적 요소를 가지고 풀어서 번역한다면, 본문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서 그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면, 그를 찾을 수 있도록'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연대(일정한 절기)를 정하시고 거주지의 경계를 한정시켰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므로, 인간들이 이제 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면 그분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주 너머 어딘가에 따로 떨어져 있어 인간이 결코 찾을 수 없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그리고 역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인간 역사의 영고 성쇠와 계절의 변화 그리고 우리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접할 수 없는 현상들을 보고서, 그런 것들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 나서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연 계시'를 통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 계시'를 통해 접하게 되는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하느님만큼, 구체적인 모습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7) 사람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야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되,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는 주장을 하는 에피큐로스 철학자들의 사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며, 하느님께서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분은 인간과 친교할 수 있는 인격적이며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므로 인간들이 그분을 찾고자 하면 발견하여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18,9~18)


"바오로가 코린토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그에게 이르셨다."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9~11)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의 많은 저항과 반대가 있던 상황에 맞추어 주께서 환시 가운데에서 바오로에게 나타나 용기를 주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잠자코 있지'로 번역된 '시오페네스'(siopenes) '조용하다', '조용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시오파오'(siopao)의 단수 2인칭 과거 명령법 동사이다. 

예수님께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향해 명령을 내리실 때나(마르4,29),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바리사인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도 본 동사가 사용되었다(루카19,39.40).

바리사이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제자들에게 가했던 위협과 같은  종류의 것을 이때 바오로도 코린토에서 유대인들에게 받았던 것 같다. 아마 회당장 크리스토포스와 같은 유력한 유대인이 개종하고(사도18,8), 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유대인들은 당황하여 바오로의 신변에 위협을 가했거나 협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핍박 속에서 바오로는 과거 필리피나 테살로니카 및 베로이아에서처럼 코린토를 떠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처한 바오로에게 환시 속에서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훼방이나 협박을 두려워해서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위기에 처할 때나 위축되어 있을 때마다 나타나셔서 용기를 주셨다(사도23,11; 27,23). 주님께서는 당신의 봉사자들이 당신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항상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ego eimi mota su; I am with thee) 바오로가 유대인들의 협박과 생명에 대한 위협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바오로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생략하여도 의미 전달에는 지장이 없는 '에고'(ego; I)1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있다'라고 번역된 현재형 동사 '에이미'(eimi; am)가 사용되어 지금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주님 당신께서 항상 그와 함께 계실 것이란 내용이 잘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주님의 임재 및 동행에 대한 약속은 오랜 선교여행, 지속적인 말씀 전파, 그리고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말미암아 심령이 위축되고, 지칠대로 지쳐 있는 바오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주셨을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동행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의 '임마누엘'(마태1,23; 이사7,14)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과의 오랜 단절 속에서 어두움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이 임마누엘의 소식이 구원의 지표가 되었듯이, 바오로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미 깊고 어두운 감옥 속을 뚫고 비쳤던 하느님의 빛을 경험한 터였으므로 (사도16,25.26),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빛이 깨뜨리지 못할 어두움과 두려움의 질곡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워 놓고서 무관심속에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시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바오로를  대적하는 자나 핍박하는 자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비록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그의 생명이 보호되며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 백성'으로 번역된 '라오스~모이'(laos moi)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유익을 줄 사람들로서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는 못했지만, 듣기만 하면 믿어 구원받을 자들을 가리킨다. 또한 '라오스'(laos; people)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방인에게도 구별없이 사용되어 지고 있다(사도15,14; 디도2,14; 1 베드2,9).

이것은 이방인이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력히 보여 준다. 이들은 바오로가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이며, 또한 그 이후에도 복음을 영접하게 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적인 선택 의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떠나기 전에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18) 바오로는 시리아를 향하여 떠난 이후, 경유지인 켕크레애에서 머리를 깎았다. 혹자는 이 때 바오로가 제3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여행 준비의 과정으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지만, 이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선교 여행의 준비 차원에서 머리를 깎는 것이었다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코린토에서 깎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며, 본절에도 '바오로는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나지르의 서원'(Nazirite vow)일 것이다(민수6,1~21).

그는 코린토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히 지켜주심을 알았고,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정 기간 자신을 하느님께 구별하는 서원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켕크레애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 그 기간이 다 차서 나지르인 서원 종료 후의 절차에 따라 머리를 깎은 것으로 보인다(민수6,1~21).이러한 사실은 '서원할 일이 있었으므로' 해당하는 '에이켄 가르 유켄'(eichen gar euchen; for he had a vow)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것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는 서원을 가졌다'인데, 여기서 '가졌다'해당하는 '에이켄'(eichen)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서 바오로가 켕크레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서원 상태에 있었음을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바오로가 옛 유대인들의 관습을 좇아 서원한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오로가 자기 자신을 '유대계 그리스도인'(2코린11,22)으로 생각한 것이나,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면서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사도23,6) 이라고 언급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그는 유대의 관습을 남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 가운데에서, 문화적이고 의식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1코린7,17~24; 9,19~23)때문에, 그가 나지르인의 서원을 했다고 해서 다시 유다이즘으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사도 바오로의  3차 선교 여행 지도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18,23~28)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4~26) 

사도행전 18장 24절부터 28절까지는 바오로에 대한 기록이 중단되고, 아폴로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제3차 선교 여행에서 앞으로 바오로가 3년간이나 머물며 사목할 장소인 에페소에서 제2차 선교 여행 이후 바오로가 떠나 있었던 동안에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즉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난 사이 아폴로라는 사람이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와서 예수님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는 에페소 선교의 예비적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아폴로'(apollos)라는 이름은 '파괴하다'는 의미가 있는 '아폴뤼미'(apollymi)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파괴자'란 뜻을 지니고 있다. '달변가'로 번역된 '로기오스'(logios)'말'이란 뜻을 지닌 '로고스'(logos)에서 유래한 단어이므로, 일차적인 의미는 '구변이 좋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고스가 '학문', '도'(道)라는  뜻도 있으므로, '학식있는 (사람)'을 뜻하는'a learned(man)'으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아폴로는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성경'에 해당하는 '그라파이스'(graphais)가 복수형으로 쓰인 것은 구약 성경 두루 능숙하였음을 암시한다. 특히 '정통한'으로 번역된 '뒤나토스'(dynatos)'힘', '능력'을 의미한다는 점으로 볼 때, 그는 성경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감동을 청중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 학문의 도시이며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밀집하여 사는 (사도6,9; 19,24)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충분히 학문적 훈련과 성경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정을 가지고' 해당하는 '제온 토 푸뉴마티' (zeon to pneumati)에서 '제온'(zeon)의 원형 '제오'(zeo)'끓어오르다', '분출하다' 라는 의미이며, 본문에서 '영'(spirit)을 뜻하는 '프뉴마'(pneuma)의 여격 '프뉴마티'와 함께 쓰여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끓어 오르는 열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아폴로의 선교는 그 안에서 폭발하는 성령의 열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또한 '정확히'로 번역된 '아크리보스'(akribos)'정밀하게', '부지런히'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 부사이다.

따라서 본문은 아폴로가 예수님께 관한 것을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정확하게' 또는 '부지런히' 가르쳤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탄생하셨으며, 그가 이 땅에 와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또한 그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 입각해서 매우 정확히, 또는 부지런히 가르쳤음을 뜻한다.

 '요한의 세례' 번역된 '밥티스마 이오안누'(baptis ioannu)는 직접적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베푼 물 세례를 가리키는데(요한1,26), 이를 통해 볼 때 아폴로가 세례자 요한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교훈을 배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아폴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를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폴로가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까지만 살아 활동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관한 그의 지식에 한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아폴로가 물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파견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세례, 즉 성령 세례(성령 충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마태3,11; 요한3,3~5; 16,7~15; 사도2,1~4; 8,14~17). 유대인중 석학이었던 아폴로는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에페소 회당에서 가르치도록 허락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가르치는 그 회당에 프리스킬라와 아퀼라 부부가 참석해 듣고 있었으며, 이들은 아폴로의 가르침 중에 핵심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지만, 유대인 석학 아폴로가 알지 못하는 복음의 핵심을 아폴로에게 자세히 풀어 가르쳤다. 

여기에서 '더 정확히'로 번역된 '아크리베스테론'(akribesteron)는 앞절에서 '정확히'로 번역된 부사 '아크리보스'(akribos)비교급이다. 이것은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어서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었던 아폴로에게 그리스도께 관한 온전한 지식을 매우 정확하고도 주도 면밀하게 가르쳤음을 보여 주기 위해 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제반 학문과 구약 성경을 배운 아폴로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오심 등에 관한 전체적인복음의 내용들을 습득하였을 것이다(사도17,3).  

우리는 아폴로의 설교를 회당에서 들으면서 그의 결점을 대중 앞에서 드러내지 아니하고, 복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다가 가르친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의 겸손한 태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천막을 제조하고 파는 사업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대의 석학이라고  자부하는 아폴로가 겸손히 배우는 자세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제1독서(사도19,1~9)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6~7) 여기서 '안수하자'로 번역된 '에피텐토스'(epithentos) ~케이라스(cheiras)'는  '손을 ~에 얹었다'(laid his hands on; placed his hands on)이라는 뜻이다. 

사실 '안수'를 묘사하는 명사 '에피테시스'(epithesis)가 있으나(사도8,18), '에피텐토스'(epithentos)라는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사도행전 저자 루카가 사도 바오로의 안수 행위를 보다 역동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안수는 단순히 상대방에서 손을 얹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신적 축복을 빌어주며, 타인의 건강과 성령의 임재를 위해 행하는 기도이다(창세48,14; 민수27,18; 마태19,13)

사도 바오로가 안수한 후, 이어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사도19,5) 성령이 임하여 신령한 언어(방언)와 예언의 역사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학자들 마다 해석이 좀 다르다.

어떤 학자는 사도 바오로의 안수가 직접적인 성령의 임재를 가져온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단지 세례 예식의 마지막 순서를 맡은 사도 바오로의 순서가 끝날 때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다고 본다. 아마 세례는 당시 에페소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아퀼라가 집행했고,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마치는 마지막에 손을 얹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행된 세례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지,  사도 바오로의 안수에 의해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사도행전 8장 17절에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사마리아에 가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의 임재가 없는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은 사건이 있다. 사마리아 신도들에게는 세례와 안수 사이에 분명히 시간적 공백이 있었고, 양자는 별개의 사건이었다. 이것을 볼 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사도의 안수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바로 안수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役事)의 방법이요,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의 사건을 사도 바오로의 제3차 선교 여행의 핵심지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교회 이후에,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된 에페소 교회를 위한, 새로운 12제자를 세우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으로 본다. 12사람이 사도 바오로를 도와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이 되었고, 본절의 사건은 그들이 예언의 영을 소유하고 방언의 은사를 가진 에페소의 일꾼들을 만들기 위한 예외적 경우로 본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성령 강림을 안수와 직접 연관시키기 보다는 성령 강림은 성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결과였고, 또한 이때 일어난 방언과 예언은 성령 임재의 가시적 표징이며, 이들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한 특별한 역사로 보는 것이다.

아시아 지방을 향한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될 에페소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는 자리에서 12명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고, 따라서 세례와 안수를 사도 바오로가 모두 집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도행전 19장 5절에 세례받은 사건이 언급되고,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 '그리고'(kai; 카이)하면서 안수받은 사건을 병행하여 묘사한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 17절에서처럼, 세례와 안수를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안수를 성령의 임재와 역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순수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사도 바오로의 안수 직후, 사람들은 신령한 언어 말하고('엘랄룬 (테)글롯사이스'; elalun (te) glossais; they spoke in tongues) 예언 했는데('에프로페튜온'; epropheteuon; prophesied),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의 시제는 모두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다. 따라서 그들이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방언과 예언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령한 언어(방언)'으로 번역된 '글롯사이스'(glossais)의 원형 '글롯사'(glossa)'언어'(language)를 가리킨다.  

코린토 1서에서 방언은 영적으로 깊은 무아경에 빠진 상태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 땅의 언어가 아닌 천상의 말을 가리킨다(1코린14,2.14), 코린토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하느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서 기도의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과 업적을 찬양함으로써 개인의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였다. 

한편, '예언을 하였다'로 번역된 '에프로페튜온'(epropheteuon)의 원형 '프로페튜오'(propheteuo)'신탁' 또는 '감추어진 일들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예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께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대신 말하고, 신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죄를 깨닫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에페소의 열 두 일꾼들에게 이러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교회의 봉사자로 사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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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20,17~27)

"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22~24) 

사도행전 20장 22절부터 27절까지는 에페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오로의 고별 설교의 두번째 부분으로서 사도 바오로 자신이 장차 받게 될 투옥과 환난에 대한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사로잡혀'로 번역된 '데데메노스'(dedemenos)의 원형 '데오'(deo)'묶다', '속박하다'는 뜻으로 육체적인 매임 뿐만 아니라 영적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루카13,16) 본문에서는 수동태 완료 분사로 쓰였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에서 있을 사도 바오로의 환난을 예고하시면서(23절; 사도21,11), 동시에 사도 바오로로 하여금 그 길을 당당하게 가게 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성령의 강력한 이끌림에 따르긴 하였지만, 그 자신도 그 길을 가고자 열망했다는 말이다. 

그의 최고의 목표는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면서까지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4절; 사도21,11). 그의 마음에는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 그리고 스페인까지 가고자하는 원대한 비전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사도 바오로의 미래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투옥과 환난으로 요약된다. '투옥'으로 번역된 '데스마'(desma)의 원형 '데스몬'(desmon)'띠', '끈'이라는 뜻으로 쇠사슬이나 끈으로 속박당한 상태, 결박을 상징한다. 또한 '환난'으로 번역된 '틀립세이스'(thlipseis)의 원형 '틀립시스'(thlipsis)'압박', '궁핍', '곤고'란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고난이나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반드시 받게 될 고난을 가리키는 때 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투옥과 환난은 문자 그대로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나아갈 때, 앞으로 경험하게 될 감옥 생활과 그로 말미암은 극심한 고난가리킨다.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고난받을 것에 대한 성령의 예언적 경고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주요 관심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 즉 복음 증거의 사명을 힘써 완수하는 것이지, 어떻게 고난없이 쉽게 봉사할 것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댓가도 지불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특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 번역되 '메누신'(menusin)의 원형 '메노'(meno)'머무르다', '떠나지 않다', '지속적으로 소멸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여 사도 바오로가 만나게 될 투옥과 환난을 단순히 일회적으로 경험하게 될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사건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고난이 자신에게 임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을 위해 그 길을 거부하지 않았던 사도 바오로의 태도는 마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루카9,51). 하느님의 봉사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고난의 십자가를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고난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교회가 유익하고 많은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사도 바오로와 같은 결단을 기꺼이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본절은 고난과 환난이 자신 앞에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겠다는 사도 바오로의 강한 사명 의식을 집약적으로 나타낸 구절이다. 여기서 '달릴 길' 번역된 '드로몬'(dromon)의 원형 '드로모스'(dromos)'노정'으로 직역되며, '인생의 노정'이나 '직무의 노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서 '달릴 길'사도 바오로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사명자로서의 노정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의 '달릴 길'이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심어 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의 길이며,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과 로마와 스페인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이다.


한편 우리는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표현을 통해 사도 바오로 자신이 받은 사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란 사실에 매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음알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자긍심은  확실한 사명감으로 연결되어 그의 복음 전파의 기초가 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서신에서 항상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사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며 밝히는데, 자신의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임을 나타내는 본절의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표현 역시, 사도 바오로가 서신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는 표현들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안'(diakonian)의 원형 '디아코니아'(diahonia)'직분'(ministry), '사명'이라는 뜻이며, 특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직분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분명한 사명은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즉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정한 복음을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요약해서 표현했다. '은총'에 해당하는 '카리토스'(charitos)의 원형 '카리스'(charis)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게 되는 하느님의 호의를 가리킨다.  

하느님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해 주셨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게된 이러한 죄사함의 은총과 영생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소중한 죄사함의 은총과 영생을 우리에게 거저 주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거룩하고 보배로운 구속 성혈의 공로를 믿고 회개하면, 누구나 누리게 되고 소유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였다는 기쁜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온'(euanggelion)'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말', '소식'을 가리키는 '앙겔리아'(anggelia)의 합성어로서,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이란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칠 수만 있다면'으로 번역된 '호스 텔레이오사이'(hos teleiosai)'마치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뜻을 나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조차도 기꺼이 내놓기로 각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단과 각오는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갈라2,20; 필리1,20; 3,7~9).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사도20,28~38)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3~35) 

사도행전 20장 33절에서 35절까지의 이르는 고별 설교 말미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변호하면서 남에게 주는 삶이 복됨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깨우치고자 한다. 당시 사도 바오로를 비방하던 자들의 비방 중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거둔 구제(자선) 헌금 중 일부를 사도 바오로가 자신을 위해서 유용했다는 것이었다(2코린12,17).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분명히 에페소에서 자신의 직업, 즉 천막 만드는 일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충당했음을 밝혔다(사도18,3; 1코린4,12; 1테살2,9). 사도 바오로는 낮에는 천막만드는 일에 종사하였고, 다른 사람이 쉬는 시간에는 티란노스(두란노; 개신교에서는 이렇게 부름) 학원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쳤던 것이다(사도20,31; 사도19,9.1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복음의 일꾼으로서 경제적 필요를 자신의 양떼들로부터 채움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권리마저 포기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에페튀메사'(ephethimesa)의 원형 '에피튀메오'(ephithimeo)금지된 것을 '갈망하다', '탐내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을 뜻하는 부정(不定; indefinit)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에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 본 적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 '금', '옷'으로 일반적 재물의 종류를 나열하며, 자신이 그 어떤 것 하나도 탐내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주어진 환경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모든 욕심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었다(1티모6,5~10).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비(自費)로 자신의 필요를 채웠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필요도 채웠다는 사실을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 자신이'에 해당하며 주어를 강조할 경우에 사용하는 재귀 대명사 '아우토이'(autoi)를 문장 서두에 쓴 것은 이 말을 듣고 있는 에페소 교회 원로들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두 손으로' 해당하는 '하이 케이레스 아우토이'(hai cheires hautoi)주격으로 사용되어 사도 바오로 자신이 직접 노동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뿐만 아니라 테살로니카나 코린토에서도, 자신 및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육체 노동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1코린4,12). 

여기서 '장만하였다' 번역된 '휘페레테산'(hypheretesan)의 원형 '휘페레테오'(hyphereteo)일차적으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비유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사도13,36; 24,23).

당시 선박의 맨 아래층에서 노를 젓는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하느님의 종으로 여겼음을 잘 보여준다. 즉 사도 바오로는 배 맨 아래층에서 배의 진행을 위해 수고하는 지극히 비천한 노예처럼, 자신도 선교 여행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자신이 스스로 섬기는 자세로 감당했다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비로 복음 전파 활동을 감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일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기쁨으로 봉헌하며 섬겼던 것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자신의 삶을 에페소 원로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다시 한 번 더 자신있게 소개하고 있다. '휘페데익사'(hypdediksa)의 원형 '휘포데익뉘미'(hypodeiknimi)'눈앞에서 직접 보여 주다', '실물 교육을 하다'는 뜻이다.

사도행전 20장 33절과 34절의 사도 바오로의 행동은 에페소 원로들이 지난 3년간 친히 그들의 두 눈으로 목격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원로들에게 물질에 대한 탐욕없이 동료와 교회의 필요를 채우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사도 바오로의 삶은 자신과 함께 일한 동역자들에게 본으로 제시될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느님의 비밀인 복음을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직접 삶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하느님의 봉사자들은 말씀을 입으로만 전할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 바오로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물질관의 원리가 되는 말씀이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을 에페소 원로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이 말씀은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구전되어 오는 예수님의 말씀이거나 사도 바오로가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간직해오다 에페소 원로들에게 들려 준 것으로 본다.

당시 속담 중에 '받을 때에는 손을 내밀고, 줄 때에는 주먹을 쥐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 비슷한 말이 있다. 이것은 받기를 좋아하면서 주기는 싫어하는 탐욕스러운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격언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당시의 속담 대신에 자신이 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으로 에페소 원로들을 권면한 것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36) 사도행전 20장 36절부터 38절까지는 사도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친 뒤에 원로들과 이별하는 장면이다. 루카는 사도 바오로와 에페소 원로들의 이별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첫째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36절), 둘째는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다 울었으며(37절) 마지막으로 배에 까지 바오로를 전송했다(38절). 이러한 이별은 사도 바오로에 대한 원로들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사랑과 염려를 보여준다(38절). 본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고별 설교를 마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내용이 나온다. 

'무릎을 꿇고~기도하였다'에 해당하는 '테이스 타 고나타 아우투~프로세익사토'(theis ta ganata autu~proseyiksato; he knelt down~and prayed)는 당시 일반적인 기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기도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서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새로운 기도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루카22,41)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마지막 기도를 무릎을 꿇고 했으며(사도7,60), 사도 베드로가 죽은 타미타를 살릴 때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사도9,40). 이렇듯 신약성경에서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는 아주 어려운 곤경을 만났을 때 바치는 간절한 기도의 문맥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것은 앞으로 당할 교회의 어려움들의 무게를 생각하고, 그들과 맺을 사랑의 끈을 놓으려 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슬픔을, 간절한 기도로 하느님께 아뢰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몸은 서로 떠나 있지만,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친교를 지속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22,30; 23,6~11)

"그 무렵 천인대장은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바오로를 풀어 주고 나서 명령을 내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를 소집하였다." (22,30)

사도 바오로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을 우대하는 조항이 많았던 로마법에 따르면, 정식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만 비로소 로마 시민을 심문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 정식 고소자가 없었으므로 형사범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인대장은 제일 먼저 사도 바오로의 결박을 풀어 주었으며, 그 후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사도 바오로가 종교적 범죄를 행하였는지 알고자 했다. 

'풀어주고 나서'라고 번역된 '엘뤼센 아우톤'(elysen auton)'속박으로부터 해방하다'라는 뜻을 지닌 '뤼오'(ly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 '엘뤼센'(elysen) 남성 3인칭 대명사 '아우톤'(auton)과 결합되고 있어서, 직역하면 '그를 석방했다'가 된다. 이 본문은 사도 바오로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안 천인대장이 사도 바오로를 자유롭게 풀어 준 사실을 묘사한 것이다. 즉 본절은 단순히 사도 바오로가 문자적인 의미의 결박에서만 풀려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둘러싸고 벌어진 소요가 있었으므로,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던 천인대장으로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규명해야만 했고, 바로 그 문제를 종교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므로 '산헤드린'을 소집했던 것이다. 원문에는 '쉬네드리온'(synedrion)으로 나오는데,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말한다. 

이 최고 의회는 71명의 의원, 즉 율법학자들(서기관들), 원로들, 수석 사제들 가문 중에 탁월한 구성원들, 그리고 이 집단의 의장인 대사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지역을 관할하던 로마인 통치자들은 산헤드린 최고 의회 법정에 소송 사건을 심리할 권한을 부여하고, 또한 사형 판결을 내릴 권한도 주었다. 다만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내린 사형 판결은 그것이 로마의 행정 장관(총독)에 의해 승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다는 제한이 있었다(요한18,31). 

천인대장이 이와같은 권한을 가진 산헤드린 최고 의회까지 소집한 것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사건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사도 바오로를 죽이려고 담합한 집단(사도23,12~16)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내리는 심리 결과가 사도 바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쨌든, 사도 바오로에 대한 천인대장의 이러한 신중한 태도, 즉 진실 규명을 위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를 소집한 것은 사건을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가이들이고 일부는 바리사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바오로는 최고 의회에서 이렇게 외쳤다.'(23,6ㄱ)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는 혐의로(사도21,28) 이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지만, 대사제에 대한 자신의 공격성 발언으로 인해 산헤드린 최고 의회로부터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의원들 간에 존재하고 있는 신학적 이견을 충돌시킴으로써,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사도 바오로의 기민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두가이나 바리사이가 가진 신학전 이견들은 무엇인가? 우선 사두가이들은 당시 수석 사제들과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 등 종교, 정치적 귀족들과 그 추종자들로 구성된 기득권층이었다.

'사두가이'(saddukaion; 사두가이온)란 이름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였던 '차독'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었다(2사무15,24; 1열왕1,34). 그들이 역사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것은 B.C.160년경 하스모니안 왕조때부터이다. 에제키엘 40장 46절 중에 차독 가문에게 성전 관리를 위임한 것에 착안하여 일부 수석 사제들이 차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기득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다른 성경 및 전승 문서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주신 후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으므로, 오직 인간의 자유 의지만 있을 뿐, 하느님의 섭리는 없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천사나 사탄등의 영계는 물론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등 내세도 부정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하느님의 위격과 내세는 인정하지 않았고, 오로지 현실 생활만을 인생의 전부로 보았기 때문에 극도의 현실 추구로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즉 그들은 신성한 성전 제도까지 상품 거래 행위로 전락시켰으며, 백성을 기만하고 수탈하면서 자신들의 이권만 추구하였으므로 백성의 혐오를 받았다. 

한편 '바리사이'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구별하다' 뜻하는 히브리어 '파라쉬'(parashi)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 또는 '구별된 자'란 뜻을 지닌다. 그들은 하시딤(Hassidim; 경건한 자들)이라고 불려지던 B.C.4세기 경의 종교 개혁 주장자들의 후예들이었다. 특히 하시딤이 주동한 마카베오 혁명 이후, 하시딤파 중에 더욱 더 조직화된 분파가 B.C.170년경에 바리사이파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세를 유대교 창시자로, 에즈라를 유대교의 중흥자로 존중했으며, 모세 율법은 물론 모세 율법을 해석한 자신들의 전승(Tradition)도 동일한 권위가 있다고 믿었다. 또한 수석 사제들이 유대교를 장악하는 데 반대하여 일부 의식과 율법을 자유롭게 해석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인간의 부활과 내세 그리고 천사와 마귀같은 영적세계를 인정함으로써, 사두가이파와 큰 차이를 보였다.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닌 양자간의 이런 명백한 교리 차이는 늘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위기 타개책으로 이것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그에게 이르셨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23,11) 산헤드린 최고 의회 회원들에게 큰 고초를 치른 날이 다 가고, 이제 밤이 찾아 왔음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밤'이라고 번역된 '뉙티'(nykti; night)는 문자적으로는 시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요한6,17; 20,1), 또한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된다(마태4,16; 루카1,79). 

사실 사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그곳에서 발생될 여러가지 일들로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사도20,22~23; 21,13; 로마15,31).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살해의 위협까지도 느꼈다(사도22,22.30). 더군다나 예전에 자신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서도 심한 고초를 당했다. 만일 일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그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지독하게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을 루카는 객관적 묘사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도 지니는 '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오로를 홀로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놀랍게도 바로 그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주님께서 바오로 앞에 서시어' 사도 바오로의 인생에 어두운 그늘이 엄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로자로 나타나셨다. 

여기서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시기도 한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인생의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여 있는 사도 바오로에게  친히 나타나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 대한 주님의 지극한 관심은 '앞에 서시어' 번역된 '에피스타스'(epistas)가 잘 보여준다.

'에피스타스'(epistas)는 어떤 것과 매우 가까움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멈추어 서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바로 곁에 서 있다'라는 뜻을 지닌 '에피스테미'(ephistemi)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과거에도 그에게 나타나신 바 있는 사도 바오로의 주인이신 예수님(사도16,9; 18,9; 22,17)께서 그가 가장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을 때에 다시 나타나셔서 바로 그의 곁에 서 계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사도 바오로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사태를 바라보며 적지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당혹스런 순간에 주께서는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로마 선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용기를 내어라' 번역된 '타르세이'(tharsei)'용기가 있다', '내적으로 기운차다', '담대하다'란 뜻을 지닌 '타르세오'(tharseo)현재 명령법이다. 요한 복음 16장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별담화에서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선포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담대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이것은 그 어떤 위협이나 난관도, 이제 곧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부여하실 사명, 즉 로마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특히 주님께서는 현재 명령법을 사용하여 어떤 일이 닥쳐올지라도 계속 담대해야 할 것을 사도 바오로에게 권고하고 계신다. 한편, 주께서는 이때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시어 담대하라고 명하시며, 새로운 로마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해야 한다' 번역된 '데이'(dei)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희랍어에서 '데이'는 일반적으로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필연성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도 이제 사도 바오로가 로마로 가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사도 바오로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부여해 주신 필연적인 사명임을 사도 바오로에게 새롭게 각인시켜 주시 위해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유다인들에 의해 총독에게 고발당한  바오로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제1독서(사도25,13ㄴ~21)

"그 무렵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13~14)~~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19) 

사도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자 총독 페스투스는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놀랐을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덜게 되어 상당히 홀가분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상급 법정에 제출할 '고소의 형식' 사건의 개요를 담은 보고서(사도23,26~30)를 작성해야만 했다(사도25,26~27).

그런데 페스투스는 유다인들과 사도 바오로 사이에 있었던 고소와 변론을 통해서는 로마 황제에게 상소할 재료(사도25,26)를 전혀 확보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무능한 관리로 로마 황제에게 낙인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 사건을 제대로 심리할 서류나 사람을 필요로 했는데, 그때 마침 등장한 이가 바로 유다 종교 문제에 정통한 아그리파스 임금 (Herod AgrippaⅡ)과 그의 누이 베르니케였다.

페스투스는 유다인들이 고소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는데, 첫째는 자기들의 종교 문제요, 둘째는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문제의 고소 사건은 이미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서 언급된 갈리오 총독의 재판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와 같이 로마 법정의 심리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한편 '종교'라고 번역된 '데이시다이모니아스'(deisidaimonias)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첫째 긍정적 의미로 '신에 대한 경외심', 둘째 부정적 의미로 '미신'(superstition), 그리고 셋째 객관적 의미로서의 '종교'이다. 대체적으로 당대의 로마의 관리들은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특히 식민지의 종교에 대해서는 멸시하였다.  

아마도 총독 페스투스도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극히 세속적 성취욕만을 가진 로마 관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그리파스 임금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 '성전 후견인' 권세를 부여받은 자로서 유다 종교에 정통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이 신봉하는 유다교를 미신으로 단정짓고  '미신'이라는  비하조의 의미로 종교를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그리파스 임금을 의식하여 중립적인 의미에서 혹은 모호하고 조심스러운 뉘앙스로 '유다인의 종교'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는 이전까지 주요한 고소거리 가운데 하나였던 성전 모독죄(사도25,8; 24,6)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라 하는 이의 부활'이란 주제가 거론되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으므로  교리상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경우였는데, 이것은 사도 바오로를 고소한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포함한 유다교 지도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며,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신들이 오히려 난감한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부활했든지간에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는 그 사실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록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과 동일한 수법(루카23,4.14)으로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비하시켜 사도 바오로를 죽이고자 했지만, 총독 페스투스는 이 문제가 단순히 유다 내의 종교적 사안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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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사도28,16~20.30~31)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28,20)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들의 오해를 받아 쇠사슬에 매인 죄수가 된 것은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던 것을 전파하였기 때문이요, 또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유다인 유력자들을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청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그 이스라엘의 희망'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다.

'희망'이라고 번역된 '엘피도스'(elpidos)라는 용어의 개념은 사도 바오로가 유대아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중에 여러 번 사용한 적이 있는데(사도23,6; 24,15; 26,6.7), 그것은 곧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약 성경 약속들의 성취'를 의미한다(사도26,6.7)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나자렛 예수님께 그 희망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는 유다인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있는 유다인들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 희망'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에 유다인들에게 고소당해 죄수의 몸이 된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 있는 유다인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점들을 해명하고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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